[인터뷰] 사진전 <장에 가자> 정영신·조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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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가자'라는 주제로 전국 5일장의 모습을 담아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는 주 문호, 정영신 사진가는 26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맨손으로 칡을 캐서 진도장에서 내다파는 파는 정도단 할머니의 손은 수많은 장터의 풍경을 대표할 수 있는 사진이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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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장에서 칡을 파는 정도단(84)씨의 손마디는 늘 퉁퉁 부어있다. 검게 그을린 손등, 유독 하얗게 빛나는 손끝 한 마디, 정돈되지 않은 손톱은 하루의 고단한 노동이 묻어난다.


세월의 질곡을 보여주는 노인의 손을 담은 정영신(58) 작가는 "할머니는 남들처럼 삽과 곡괭이 대신 늘 맨손으로 칡을 캔다"고 말했다. 정씨는 칡 말고도 가시리와 전복도 판다. 젖어있는 걸 팔다보니 늘 불어 있게 마련인 손끝, 유독 하얗게 보이는 이유다.

"저는 이 손 하나가 장터를 다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할머니는 손으로 칡을 직접 캐면서 자기가 살아 있다고 느꼈을 거예요. 할머니가 '정선장에 있는 칡은 다 내 손에서 나왔다'고 말했거든요. 당신 물건이 다른 사람 좌판에 올라가 있는 게 뿌듯했던 거죠."

정영신 작가는 전국 552곳의 장터를 순례했다. 1984년 소설가 등단을 준비하던 정 작가는 "인간의 내면을 보기 위해 장터로 갔고 장터의 인문학적 의미를 깨닫고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30년 간 장터에 갔다. 10년 전 부부의 연을 맺은 조문호(68) 작가도 2006년부터 장터 순례에 합류했다. 그는 '전농동 588번지', '87 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등 사진집을 출간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이들 부부의 '30년 기록'이 사진전 <장에 가자>로 탄생했다. 소설가 박인식은 "이 사진들은 천천히, 늙은 장꾼의 걸음걸이로 바라봐야 한다"고 권했다. 지난 26일, 사진전이 열리는 인사동 아라 아트센터에서 정영신·조문호 두 작가를 만났다.

"장터에서 '사람' 이야기를 빼면 섭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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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 영천장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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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장롱 속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곱게 단장하고서 장에 왔어요. 휴대폰도 없었으니깐 장에 가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지금으로 치면 장터가 복합문화공간이었죠. 구경하는 재미도 컸어요. 약장수들이 틀어놓는 노래에 맞춰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도 하고."


부부에게 장날은 '동네 잔칫날'이었다. 정영신 작가는 "장날은 농사꾼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던 날"이라고 회상했다.

부부가 담은 장날의 많은 풍경 중 눈에 띄는 것은 장터 사람들이다. 작가 노트에서 정 작가는 "물건이 곧 사람 얼굴이라 거짓말도 못하는 곳이 장터"라고 했다. 장터에서 오가는 물건들 대부분은 시골 일상 또는 노동의 결과물들이다. 각자 자신의 삶이 배어있는 물건들, 그렇기에 더욱 거짓말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정 작가는 시골 노인들은 지붕이 있고 바닥에 시멘트가 깔린 현대식 아케이드 대신 흙바닥의 난장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양지 바른 곳을 찾아 봇짐을 내려놓고서 옆 할매와 수다를 떨며 사람 구경에 나서는 것이다. 조문호 작가는 '사람이 고팠던' 한 노인의 사연을 전했다.

"한 노인이 농산물을 파는데 누가 그 남은걸 다 사가려고 하니 '안 된다'고 말합디다. 다 팔리면 집에 가야하니 싫다는 거예요. 조금씩 팔면서 종일 장터에서 놀겠다는 거지. 이렇게 장터는 상행위를 하는 곳만이 아니라, 그냥 사람 구경하는 놀이터예요."

따뜻한 연정과 암울한 적막감이 공존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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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 사진가가 전시회장을 찾은 지인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이날 전시회장을 찾은 지인은 구례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마음에 든다며 작품을 선뜻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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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왼쪽부터 돌아보면 첫 작품은 정영신 작가의 '희망을 엮는 집어등'으로 시작해 조문호 작가의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으로 끝난다.

조문호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정영신의 사진에서는 따뜻한 연정이 피어오르고 내가 찍은 사진에서는 암울한 적막감이 감돈다"고 했다. 물건 파는 노인의 생동감 있는 얼굴과 짐을 짊어진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이 대비된다.

정 작가는 여전히 그 장터라는 존재에 희망을 품는 반면 조 작가는 '장터는 사라진다'는 현실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에 대해 조 작가는 "가치관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시골장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정 작가는 "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땅에 농민들이 존재하는 한 장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장날이면 노인들이 '누가 버스에서 내릴까'를 기대하며 정류장에서 기다려요. 할머니들이 모여서 놀다가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 순간 어떤 망설임 없이 돈을 꺼내서 모으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이런 삶이 어찌 사라지겠어요."

쇠락한 장터에서 노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삶의 현장을 지켜낸다. 정 작가가 말하는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을 찾던 노인들이 지팡이 대신 몸을 지탱하기 위해 빈 유모차를 밀고서 나타난다"는 풍경만 달라졌다.

부부는 장터에 나온 물건 하나, 파장 후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찍는다. 정 작가는 "나중에 귀중한 문화사적 사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장터 노인과 인사동 사람들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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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회를 통해 장날의 쓸쓸한 변두리 풍경을 담은 조문호 작가는 "지금의 시골장은 장사꾼들도 잘 오지 않는다. 읍내 하나쯤은 살아남겠으나 대부분은 사라질 것으로 본다"며 줄줄이 사라져가는 5일장의 모습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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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이 정영신 작가의 정신적 고향이라면 조문호 작가에게는 인사동이 있다. 인사동 사람들은 과거 조 작가의 "정신적 허기를 메워줬던 사람들"이다. 고 천상병, 고 민병산 선생 등 그때 그 사람들은 없지만 "당시 향수를 잊지 못해 인사동 실비집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했다. 2010년 출간한 사진집 <인사동 사람들>이 그 결과물이다.

인사동 사람들은 5일장 노인들과 닮았다. "약속 없이 장터에 왔다가 건넛마을 사돈과 친구를 만난다"는 조 작가의 말처럼, 부부에게 인사동은 "몇 안 되는 술집을 한 바퀴 돌면 친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들과 만나면 조 작가는 취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누른다고 한다. "분명 취했는데도 사진은 멀쩡하게 나온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 조 작가는 "나보다 카메라가 막걸리를 더 많이 마셨다"며 농을 쳤다.

5일장 사람들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 중 '과거'에 가깝다. "지금의 인사동은 돈 없으면 꼼짝 못 하는 공간이 됐다"는 조 작가의 말처럼 인사동은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화장품·기념품 가게가 생겨났다. 터줏대감이던 예술인과 화랑은 골목으로 밀려났다. 그는 "거리에서는 중국산 잡동사니만 팔릴 뿐 갤러리는 텅텅 비었다"고 한다. 그는 낯선 인사동의 모습을 토로하고 "술을 마시면서도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글을 자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문호 작가는 "인사동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문화가 남아있는 공간이다"고 말한다. 강남이니 평창동이니 경제 중심지는 계속해서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지만 인사동만큼은 문화를 쥐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는 "여전히 많은 예술인들이 애착을 가지고 인사동으로 온다"고 말한다. 이는 정영신 작가의 "노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장터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가치관과 통한다.

<장에 가자> 전시장 입구 중앙에는 목을 빼고 뭔가를 기다리는 노인들의 사진이 있다. 목도리와 마스크로 무장한 이들은 저마다 장바구니와 비닐봉지를 쥐고 있다. 자세히 보면 영천장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영신 작가는 "이 사진을 본 소설가 박인식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5일장과 인사동에 숨결을 불어넣는 메시아가 올 수 있을까. 정영신·조문호 작가의 답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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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 정영신 작가가 전국을 일주할때 함께 한 자신의 자동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강원도 삼척 근덕장에서 제주도 모슬포장까지 모두 522개의 5일장을 돌며 기록했지만, 5일장이 열리고 있는 한 사진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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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 사진가가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장에 가자' 사진전을 찾은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조문호, 정영신 사진가는 매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전시회장을 찾은 관람객에게 무료로 인물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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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 박다영기자]

우리시장 기 살리기 운동으로 펼쳐진 정영신, 조문호의 ‘장에 가자’ 사진전이 일주일째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심우성, 강 민, 김동수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전민조, 김보섭,

구중관, 김명성, 노광래, 공윤희, 박인식, 장경호, 이행자, 고 헌, 이규상씨 등 많은 분들이 재 방문해 축하해 주셨다.

 

전시장에 취재 나온 SBS 보도국 김영아차장을 비롯해 만화가 박기정, 사진가 김생수, 시인 서정춘, 서양화가 최대식, 도예가 한봉림, 사진가 김영호, 세계일보 기자 편완식, 치과원장 이세기, 사진가 강재욱, 사회학자 이광수, 불화가 장 춘, 김기찬씨 미망인 최경자씨, 소설가 김승환, 아프리카 미술관장 정해광, 한국화가 황외성, 시인 김가배, 아리랑명품관 대표 유재만씨, 사진가 이경수, 송주원, 박중하씨, 미학자 미 재, 황의록교수 등 많은 분을 만나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멀리서 오신 전정환 정선 군수님을 비롯해,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린다.

 

이 전시는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2월17일까지 계속되니, 우리시장을 사랑하는 인증샷 기념촬영도 남겨두자.

 

 

전시장에 마련한 포토존에서 기념촬영한 정영신씨

 

 

 

 

 

 

 

 

 

 

 

 

 

 

 

 

 

 

 

 

 

 

 

 

 

 

 

 

 

 

 

 

 

 

 

 

 

 

 

 

 

 

 

 



우리 시장을 되살리려는 작은 운동에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5층에서  오는 2월 17일까지 열리는 우리시장 기 살리기 운동에, 

뜻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사진 찍는 사람 : 정영신, 조문호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김광수씨

 

서양화가 정영자씨

 

사업가 박형준씨

 

시인 이행자씨

 

사업가 김진규씨

 

초등학생 김유원양

 

사업가 조은겸씨

 

사진가 변홍섭씨

 

시장 컨설팅전문가 하명정씨와 자녀들

 

귀농인 지동진씨

 

음악인 김민철씨

 

도시대기환경 연구원 김영국박사

 

 

 

사업가 김중호,심지윤 부부와 딸 김유원양

 

회사원 유진오씨와 사업가 편근희씨

 

가정주부 조지향씨

 

고등학생 김희중군

 

회사원 정주영씨

 

간호원 김소연양

 

 

 

사진가 고 헌씨

 

사업가 송성민씨

 

정주영씨 가족

 

내과원장 한기수씨와 한정인씨

 

'진주청국장' 주인 조영희씨

 

팝페라 가수 주은씨

 

치과원장 이세기씨와 소설가 박인식씨

 

인사동지킴이 공윤희씨

 

종로경찰서 권영태경위

 

사업가 조햇님씨

 

사업가 곽성훈씨와 아들

 

 

 

사업가 이기남씨

 

사진가 김보섭씨와 아내 김혜영씨

 

'아원공방'대표 노인정씨

 

시인 김가배씨

 

'SBS' 보도국 김영아 차장

 

시인 조해인씨

 

문화기획자 김기춘씨

 

'오마이뉴스' 기자 박다영씨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유성호씨

 

여행작가 남기환씨

 

유은정, 유재은, 유희옥, 유진숙, 정호원씨

가정주부 조윤경씨

시인 박시교씨

 

 

 


[편완식이 만난 사람] 인사동 사진가 조문호


"모든 걸 버려도 사진은 못버려… 미쳐야 사는 재미가 있지"

 

 

서울 인사동 밤거리는 여전히 술과 예술, 낭만이 버무려지는 공간이다. 30년 넘게 그 언저리를 서성이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온 인사동 사진가 조문호(68)에게 늦은 밤 술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은 더없는 사냥감이다. 그럴려면 같이 취하고 동화돼야 한다. 그의 카메라가 늘상 막걸리로 얼룩져 있는 이유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풀어젖힌 모습에서 인간을 끄집어 내기 위해 그는 결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한바탕 탈춤을 벌인 후 탈을 벗어던진 찰나다. 이를 위해 그의 카메라는 늘상 정조준 상태다.

이따금 그가 전시공간 문앞이나 막걸리 집에서 만취상태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땐 짓궂게 그를 흔들어 깨우게 된다. 늘상 놀란 보초병처럼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듯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다. 카메라를 연인처럼 꼭 껴안고 잠든 모습은 인형을 품에 안고 자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종로경찰서에도 자주 끌려갔지. 사진을 찍다 보면 종종 지나는 행인들과 시비가 붙기도 해. 사우나에서 찍다가 경찰관이 들이닥치기도 했었어. 사진작업에 숱한 고난이 따르지만 나는 그 짓을 포기하지 못해.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산다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면 오늘의 작업이 보석처럼 빛날 것을 믿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역사 아닌가.”

2010년 발간된 그의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천상병 시인이 죽치고 있었던 ‘귀천’을 비롯하여 벗들과 어울려 마음껏 취할 수 있었던 주막 ‘실비집’이다. 그곳에서 천상병 시인을 비롯하여 민병산 선생, 박이엽 선생, 채현국 선생, 최규일 선생 등 많은 분들을 만난 정신적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그는 인사동에 드나들며 우연히 많은 벗들도 만나게 된다. 부산에서 상경했던 서양화가 최울가와 박광호, 노동자 시인 김신용, 지금은 고인이 된 서양화가 이존수와 사진가 김영수까지 말벗이 돼 주었다. 사진기자 김종구, 서양화가 이청운· 강용대, 시인 최영해· 최정자, 소설가 배평모, 도예가 김용문 등과 어울려 밤새 술 마시며 인생과 예술을 논할 수도 있었다.

 

 

1984년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좌로부터 시인 김신용, 조문호, 소설가 배평모.

 

 

 

 

그에게 인사동은 고향 같은 존재다. 사람이 살다 지치거나, 외롭고 피폐해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고향 아닌가. 그곳엔 정겨운 골목들이 있고, 마음이 통하는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사동에는 사진협회가 보금자리를 튼 예총회관도 있었고, 사진하는 친구들만 모이던 ‘꽃나라’ 흑백연구소도 있었다.

“사진은 내겐 숙명 같은 것이여. 모든 걸 버려도 사진은 버릴 수가 없었어. 사진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아. 사진 기록물은 남았으나 내 스스로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어.”

그는 청년시절 연극영화학도를 꿈꿨다. 무작정 상경해 책 외판원까지 하며 뜻을 관철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국 무산된다. 국문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농협에 입사하게 된다. 부산농협과 김해농협을 거쳐 고향인 창녕농협에서 근무했다.

“마음에도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지겨워 문 닫은 정미소를 개조해 무료 음악실을 열었어. 부산 친구들이 주말에 찾아 왔지. 퇴근 후 음악실에서 보내는 것이 당시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지.”

그는 얼마 후 농협에 사표를 내고 부산으로 간다. 부친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하늘목장’이란 음악실을 운영하며 자유로운 삶을 구가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부친이 사람 만들겠다고 결혼을 서둘렀다.


지난해 인사동 양반집 앞에 함께한 ‘사진가모임’. 좌로부터 육명심, 유병용, 이기명, 이완교, 이명동, 조문호, 한정식, 구자호.

 

 

 

 

 

“내가 속을 섞여 병을 얻으신 것 같은 죄책감에 마지막 효도하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됐어.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어. 음악실 아래에 신방을 차렸으나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에 빠져 있으니 여자가 좋아하겠나.”

종국에 그는 음악실을 부산 남포동으로 옮기게 된다. ‘한마당’이란 국악전문 학사주점으로 탈바꿈시켰다. 동아대 학생들이 주 고객으로 형성된 ‘한마당’은 손님들로 미어 터졌다.

“어느 날 단골 손님 중의 한 분인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으로부터 ‘휴먼’이란 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받게 됐어.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호소력에 반하게 됐지. 내가 사진으로 인생행로를 정하게 된 순간이었지.”

그는 장사는 종업원에게 맡기고, 허구한 날 카메라를 메고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주점 손님들이 줄게 되고 3년 만에 가게를 정리하게 된다. 부산 서면에 돈을 빌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란 주점을 다시 차렸지만 손님이 없어 1년쯤 버티다가 파산한다. 주점 이름처럼 서울로 야반도주하면서 부산과 이별을 했다. 거지꼴로 상경을 했지만 사진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부풀었다.

그의 아내는 생활고로 그의 곁을 떠났다.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던 날 아내는 짐을 쌌다. 그때, 다섯 살이던 아들이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 서서 울던 모습은 영영 잊을 수 없는 일로 그의 가슴에 대못이 됐다.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 다큐사진을 찍는다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아이러니야.”

그는 ‘한국환경사진가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으면서 ‘우포늪’ 탐사기록에 이어 ‘동강’ 탐사기록에 참여했다. 아예 강원도 정선에 둥지를 틀고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이혼 후에 지금은 장터 사진가 정영신과 살고 있다. 자유구가를 위한 도피와 이혼이 반복되는 고난의 삶이었다. 그는 요즘 아내와 전국 장터를 떠돌고 있다.


 

 

 

 

그는 요즘도 시간이 허락하면 인사동에 얼굴을 내민다. 사실 그도 인사동 기인 중에 한 사람이다. 천상병 시인이 그랬고 중광 스님도 그랬다. 낭만과 자유,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너무 강했던 이들이다.

“기인이라고 기이한 행동만 일삼는 비사회적인 사람은 아니야. 일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늘 일상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지.’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항상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외로움을 덜 타려는 별난 행동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기인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인이란 말 뒤에는 미쳤다는 뜻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비록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미친 사람 사이의 그 경계를 지킬 수 없을지라도 미치고 또 미치고자 한다. 그래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않는가.” 그의 말이 가슴을 깊게 파고 든다.

세계일보 /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사진마을] ‘전국 5일장 순례기’ 펴낸 정영신씨


 

30년간 장터 522곳 훑고 다녀


 

희망을 엮는 집어등 2010 영천장. 정영신

 

“와 이리 헐노” “아따메 징허요”
사진과 함께 현장감 넘치는 글
남편 조문호씨와 사진전도

 

“많이 변해도 추억 여전히 남아
부산 오시게장·예산장 볼만해”


30년 동안 전국의 522개 장터를 빠짐없이 훑고 다닌 정영신(58)씨의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표지)가 나왔다. ‘전국 5일장 순례기’는 2012년에 정씨가 펴낸 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기 강화 풍물장의 “안녕하시까? 여기 세 그릇 주시겨” “오셨시까?”부터 경남 의령장의 “와 이리 헐노? 이 고추 때깔 좀 바라. 올메나 곱노”와 순천 아랫장의 “아따메 징허요, 여그 앉을 자리 없어라”를 거쳐 제주 모슬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좋쑤과. 일 킬로에 얼마우꽈”에 이르면 시장 냄새가 팍팍 난다. 책에 든 사진도 모두 정씨가 직접 찍었으므로 방방곡곡의 현장감이 100% 전해진다.

책이 나온 날에 맞춰 부부 다큐멘터리 사진가 정영신씨와 조문호(69)씨가 함께 만든 사진전 ‘장에 가자’가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정영신씨는 사진가 이전에 소설가이며 조문호씨는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인사동사람들’ 등 열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최근에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시인 천상병 추모 사진집>을 낸 베테랑 사진가다. 두 사진가를 20일 눈빛출판사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파트4단지 장터를 걷고 있는 정영신(오른쪽)·조문호씨 부부. 곽윤섭 선임기자

 

 

-5일장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언제인가? 사진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쓰다 보니 사람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는데 소설의 소재도 찾을 겸 장터를 찍기 시작했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조금만 가면 장이었고 차 타고 조금만 가면 함평장이어서 장날에는 엄마 따라 장에 가곤 해서 익숙했다. 그 후로 힘들고 뭐가 잘 안되면 장터를 찾곤 했다. 1984년에 시작했고, 조세희 선생이 쓴 <침묵의 뿌리>를 보고 ‘사진이 이런 거구나’라고 첨 생각했다. 서울 낙원동에 있는 ‘한국사진학원’에서 인화하는 것까지 배웠다.”

-30년간 장터는 어떻게 변했는가?

“가장 큰 변화는, 장옥이 다 바뀌었다. 규격화한다면서 시멘트로 발라버려서 다 망쳤다. 겨울엔 (시멘트가) 썰렁해서 사람들이 안 들어간다. 옛날엔 장이란 게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최고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 같은 곳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시골 구석구석 들어온 이후론 변했다. 기업화된 장돌뱅이가 많아져서 장에 나온 물건이 평준화되어 이 장이나 저 장이나 비슷비슷해졌다. 요즘 시골장엔 할머니들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유모차나 카트를 밀고 다니시는 것도 장터 풍경의 변화다. 80년대에 처음 찍을 때는 장보따리 이고 다녔는데 점차 가방으로 바뀌다가 이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갓을 쓰시고 장에 나오시는 멋쟁이 할아버지들도 찾아볼 수 없다.”

-장터는 어떤 곳인가?


장터 상인의 밑천 2013 순천아랫장. 정영신

 


“요즘 장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들이 콩 한두 되 가져와서 가용해서 쓸려고 나왔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로 바구니를 툭 건드리면서 ‘이거 중국산이죠? 할머니’ 이러면서 지나간단다. 아니라고 해도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시장 할머니들이 자긍심이 강한 사람들인데 너무 속상해하신다. 그래서 차라리 물건끼리 바꿔가는 게 낫고 그렇게들 많이 하더라. 아는 사람하고 ‘너나 좋은 거 먹어라. 필요한 게 뭐냐?’ 이렇게 하는 게 속이 편하단다. 콩 한 되 가져와서 아는 신발 집에서 발에 맞는 구두 한 켤레 가져가는. 어떻게 보면 옛날 장터가 딱 그랬다. 오히려 좋은 현상인 것 같다. 장이란 게 꼭 판다기보다는 하루 생활이다. 구경도 하고 얘기도 하고 친구 만나 동네 소식도 듣고.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인데….”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기억나는 사람도 참 많겠다.

“지난해 5월에 팽목항에서 십여분 거리인 진도 십일시장(임회장)에 갔다. 한 상인이 ‘시방 진도가 초상집이여. 영감이 잡아오는 생선 팔아 가용도 쓰고 병원 댕기고 하는디, 요샌 뭍에도 못 나가, 장이 쪼까 휑-하지라. 젊은 여자들은 모다 팽목항으로 봉사 갔어. 첨엔 장 바닥에 퍼져앉아 아까운 새끼들 어짜쓰까 함서 막 울고 그랬제. 어찌것는가 이렇게 꼼지락거리면서 이겨내야제. 슬픔이 이 늙은이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참에 배웠당께’라고 하시더라. 가슴에 와닿았다. 2013년에 북평장에서 만난 한국에 온 지 5년 된 베트남 출신 또티호완(30)씨는 한국말도 잘했다. 직접 밭에서 키운 오이, 가지, 고추 등을 팔았는데 오이를 사가는 할머니에게 두 개나 얹어주는 우리나라 덤문화까지 알고 있어 정겨워 보였다. 영동장엔 한 열 번 갔는데 곰방대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자주 갔다. 한 장만 빼먹으면 ‘왜 안 왔니…’ 하셨다.”



 

정영신의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에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가득 들어 있어 독자가 장에 직접 가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글과 사진이 술술 읽힌다.

-21세기의 5일장에 예전의 느낌이 살아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5일장 작업을 계속할 것인가?

“꼭 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장에 가면 영동 할매가 나를 기다리고 사람이 아니라면 나물이 나를 방긋방긋 기다린다. 이달에, 어디에 가면 뭐가 나와 있을 것이고 나를 부른다. 나는 아직도 어딜 가든 옛날 장터의 모습을 본다. 머리와 옷과 가방의 스타일은 급속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장이란 공간에선 어느 한구석에 반드시 그 지역이 보이는 곳이 있다. 우리 장의 정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찍을 것이고 여유가 생기면 서울의 전통시장을 찍을까 한다.”

5일장을 찍고 싶어하는 초보자들을 위해 장터 추천을 부탁했더니 부부가 경쟁하듯 줄줄 불렀다.

“부산 노포역 맞은편 언덕에 오시게장(2, 7일장)이 규모 있게 펼쳐져서 볼만하다. 파라솔이 계절마다 다르다. 여름에는 햇볕 때문에 서 있다가 겨울에는 바람 들어오는 허리를 가려야 하니 누워 있다. 포항 송라장, 경주 건천장, 성주장도 좋았지. 12월 구례장엔 산수유가 나오고 청양장에 구기자가…. 제일 활기찬 장은 추운 겨울날 새벽이다. 추우니 활기가 차다. 여름은 햇볕도 강하지만 사람들도 늘어져서….”

2월17일일까지 열리는 전시장엔 간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정영신, 조문호 사진가가 매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관람객 모두에게 인물사진을 찍어주고 이메일로 전송해주는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작가 장서희 씨 나우갤러리서 작품 22점 전시
‘개미마을 블루스’ 전시 1월 27일까지

△< 개.미.마.을.블.루.스.>30x42cm, Cyanotype, 2014>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홍제동 개미마을이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장서희 사진작가의 손길을 통해 청사진(Blue Print) 예술 작품으로 재현된 전시회 「개미마을 블루스」는 고전 아날로그 방식으로 노후해 가는 개미마을의 모습과 정취를 담아냈다.

오는 21일부터 27일까지  갤러리 나우(종로구 인사동길 39)에서 열리게 될 「개미마을 블루스」에서는 22점의 작품들의 개미마을의 현재와 `과거 시간들을 고전인화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장서희 작가의 사진제작 방법은 고전 사진 아날로그 프린트 형식 중 하나인 시아노 타입(cyanotype)이다. 이 독특한 사진 프린트 기법은, 1842년 영국 천문학자 「존 허셀」경이 자신의 연구노트를 복사할 목적으로 발명했다.

시아노타입은 구연산 철암모늄과 적혈염의 혼합액을 종이나 천에 바른 다음 햇빛이나 자외선으로 감광시켜 청색으로 발색시키는 작업이다.  즉 이 기술은 현재 복사기 이전 단계인 청사진 복사 원리에서 비롯됐다.
사진 속 개미마을은 주민의 고단한 생生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러나 사진의 프리즘을 관통하며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빛이 생동감을 더해 준다.

한국의 큰 도시 달동네의 기원은 비슷하다. 홍제동의 개미마을도 6.25 전쟁 때 형성된 마을이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 주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개미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곳 개미마을은 대부분 무허가 건물로 210여 가구에 주민 420여 명이 살고 있고, 주로 다른 지역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주해 온 주민이 많다.
개미마을은 인왕산 골짜기에 있고,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나의 진입로가 형성됐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중앙로 양쪽 산비탈에 작고 허름한 단층집이 들어서 있다.

마을 입구에는 약도가 설치돼 있다. 상호부터 친근감이 오는 「버드나무가게」, 「동래슈퍼」와 공동 작업장, 약수터가 표기돼 있어 마을의 전체 모습을 재미있게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잊혀 가고 있는 개미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되새겨 볼 키워드를 찾게 된다.
전시회를 준비한 장서희 작가는 『개미마을의 기억에 새 바람을 불어 넣고, 개미마을이 나아갈 긍정적인 미래를 전망해 보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서대문사람들]ⓒ sdmnews
seodaemun@korea.com

 

 


5일장 사진전 여는 조문호·정영신 부부

 

 

전국 5일장 사진전인 ‘장에 가자’를 여는 부부 다큐 사진작가 정영신(왼쪽) 조문호씨가 19일 서울 아라아트 센터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8년간 전통시장 522곳 돌며 촬영 "대형마트에 밀린 시골장… 안타까워"

 

 

“시골 장터로 향하는 발길, 한번 가 보니 끊기 어렵더라고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조문호(68), 정영신(57)씨 부부는 19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세대들에게는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소개하고 기존 세대들에는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21일부터 내달 17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아라아트 센터에서 ‘장에 가자’라는 주제로 전국 5일장 사진전을 연다. 전통시장 사랑하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사진전에는 1987년부터 최근까지 28년 동안 전국의 전통시장 522곳을 돌며 만들어낸 작품 90여 점을 선보인다.

 

정 작가는 “사람과 장터를 이을 연결 고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며 “정겨운 옛 풍경 외에도 인물의 표정과 복장에서 묻어나는 희로애락을 살펴보면 더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설가이기도 한 정 작가가 신춘문예에 실패를 거듭하던 87년 ‘사람 내면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골장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예전 5일장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는 ‘삶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사람을 알기 위해 장터를 찾았죠.”

 

이후 전국의 5일장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정, 쓸쓸한 변두리 풍경까지 모조리 사진기에 담았다. 남편 조 작가는 2006년부터 동참했다.

 

지난해 가을 경남 합천 초계장에서의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리어커에 태워 오셨는데, 물건을 풀어 놓고도 옆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이면서 물건을 팔았다. 몸이 불편한데도 집에 돌볼 사람이 없는 할아버지를 태우고 수십리 길을 걸어 온 것이었다. 이외에도 “100살까지 장사할 테니 4년 뒤에 사진 찍으러 꼭 오라”던 제주장에서 만난 96세 할머니, 추운 날씨에 장꾼 전용 3,500원짜리 연탄 화덕을 선뜻 내 주던 예산장의 인심 좋은 아주머니도 사진기에 소중히 담았다.

 

전북의 장터에서 한 할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은 아직도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거 폴아(팔아) 갖고 밥 묵고 살믄 존일이제. 욕심이 너무 많으문 나도 힘들고, 남 눈에도 숭해 보인당께.”

 

정 작가는 “장터에는 꼬깃꼬깃한 검은 비닐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게 없어요. 밥 한 숟갈의 소중함이 있는 그대로 묻어나는 곳이죠. 그 모습을 보며 인생 공부는 덤으로 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대형 할인마트에 밀려 속속 사라지는 시골장들을 보노라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앞으로 5일 장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네 삶이 살아있는 서울 시내 전통시장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을 생각이다. 이달 말에는 ‘전국 5일장 순례기’가 출간된다. 조 작가도 80년대 청량리 일대 사창가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내달 출간할 예정이다.

 

 

 

상인들과 주민들로 분주한 1987년 전남 담양장의 모습.

 

92년 겨울 새벽 입김을 내뿜으며 등짐을 지고 전북 순창장으로 향하는 상인들

 

 

88년 충북 영동장에서 독장수가 자리를 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한국일보] 글ㆍ사진 강주형기자 cubie@hk.co.kr

 


[김석종의 만인보]

 

인사동 전각 전문갤러리 앞에 앉은 육명심선생 / 조문호사진



망망한 티베트 고원지대를 서성대는 노년의 한 사진가를 떠올린다. 그는 아득한 세월 저편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짧은 명줄 길우려고 절로 보냈다. 스무살만 넘기자고 했는데 영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제는 집안에 대가 끊길 판이었다. 어렵게 설득해서 장가를 들였단다. 하지만 두 달도 안돼 집을 나가버렸다(말하자면 어머니는 씨받이였던 셈이다). 요 밑에 쪽지 하나 남겼더란다. 밝을 명(明)자 마음 심(心)자. 명심이 일곱살 때 어머니가 그랬다. “네 아비가 그예 서방정토로 가셨구나.” 아들은 황혼녘이면 아버지가 가셨다는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가 인생의 황혼녘인 일흔살이 되어 서쪽나라 티베트를 찾아간 거였다. 사진작가 육명심(84)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서방정토의 중심인 ‘수미산’으로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라스가 있는 곳. 티베트의 깊은 영성이 단박에 그를 사로잡았다. 고산병에 쩔쩔매면서도 히말라야 언저리에 있는 티베트 고원과 ‘오래된 미래’의 인도땅 라다크, 부탄을 10여년 떠돌았다. (세 곳 모두 티베트불교 문화권이다). 그가 이번에 티베트 순례의 여정을 담아 펴낸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글씨미디어)을 보니 ‘거장’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티베트 산악과 광야, 궁핍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들의 삶, 순례자들의 경건한 영혼, 길가의 돌무더기와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피어나는 흙냄새와 룽타(티베트 서낭당 깃발)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 딱 붙잡아낸 경지다. 마치 점묘화같이 아련한 흑백 사진 속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 어떤 영원의 길이 나있는 느낌이다. 흔히 보는 화려한 오색 빛깔 민속이나 산악풍경을 담은 티베트 사진과는 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는 1년 전 티베트 전 지역을 동서로 횡단한 뒤로 길었던 영혼의 여행을 접었다. 이 순정한 땅마저 속절없이 망가뜨리는 개발의 광풍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다.

그건 이 땅에서도 익히 봐온 모습이다. 1960년대 이래 ‘인상’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으로 사라져가는 기층과 토속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 한국 사진역사에 뚜렷하게 획을 그었다. “민중이 깎은 장승이 바로 백민(기층민), 우리 토박이들의 얼굴이더라고. 무를 장에다 박아 놓으면 장아찌가 되듯이 천지조화와 풍토가 곰삭아 우러난 게 장승의 매력이지. 너무 쉽게 내다버린 우리 얼굴이고 정신성이랄까.”


 

육명심이라면 단연 ‘예술가의 초상’을 꼽기도 한다. 10여년 동안 찍은 당대 최고 예술가 70명의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의 사진은 그 자체가 보석이다. 대표적인 게 미당 서정주인데,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양손을 소매에 끼고 ‘햇빛 속의 갈맷빛 등성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에서 ‘팔할은 바람이 키운’ 미당 삶의 내면과 시세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거다. 어찌보면 뒷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것 같은 모습의 이 사진을 미당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사람의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평하는 대로 그야말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인상의 박두진 시인, 앞섶을 풀어헤치고 파안대소하는 고은 시인, 반나체로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레 스님 중광, 동백림 간첩단사건의 고문 기억이 각인된 듯한 천상병 시인 등의 사진은 당대의 명장면으로 지금껏 회자된다. “그들의 거실을 지나 안방 깊숙이 들어간 사진이다. 당대의 소중한 정신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순전히 독학의 늦깎이로 사진을 하게 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성장기 내내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까지 절에 뺏길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꺾었다. 끝까지 독신을 고집하다가 서른세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혼수품으로 카메라를 가져왔다는 거다. 신혼여행지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조작법을 배워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지 반년 만에 첫 전국 촬영대회에 나갔다. 처음에는 남들이 찍는 것만 지켜봤다. “잘 관찰해서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그게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육명심의 카드’다. “예술이란 도매금에 넘어가지 않는 것, 통념의 쳇바퀴에서 최대한 멀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육명심과 그의 후배 사진가 황헌만의 경북 문경 장승 촬영길에 동행했다. 그랬는데 대사진가 육명심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거였다. “하하. 이것도 필요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걸어두는 사진도 있는 법이지.” 그는 1박2일 동안 정말 한 장의 사진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선승’이란 말도 듣는다. 더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가 1982년 당대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 사진을 찍겠다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에 쳐들어갔다. 사진은커녕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 스님이 웬일인지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씨익 웃더란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여기서 그의 대답이 예상밖이다. “안되겠습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성철 스님의 눈두덩이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예. 나중에 다시 와서 찍겠습니다.” 그 후 다른 사진작가가 먼저 성철 스님의 사진을 찍은 걸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 정말 천하무구의 사진 한 방을 남겼지.”

그가 대학에서 28년 동안 변함없이 가르친 사진론이 있다. “잘 찍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찍어라.” 1998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모든 직책을 싹 그만뒀다.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 10층에 작은 작업실을 내고 들어앉았다. “정년이야말로 마지막 주어진 찬스거든.” 이번에 가보니 사무실이 그대로 하나의 선방이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 참선용 좌복이 놓였다. 그는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1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40분간 포행(산책)을 한다. 오전에 2시간을 더 수행한다. 산중의 스님들과 똑같이 15년을 꼬박 지켜온 일과다. 벌써 다음 작업에도 돌입했다. 이번엔 우리 삶에 오래된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는 일상의 불교를 찍겠단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되겠지. 보다 성숙하고 심화되고 나다운 삶을 찾아내려고 해. 삶과 사진이 하나의 도(道)가 되는 것, 그 생사일여(生寫一如)의 작업이 될 거야.”

 

 

[경향신문]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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