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 588, 그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70~80년대 전통 풍경과 문화유산을 탐구했던 주명덕, 강운구, 김수남의 작업과 달리 당대의 사회적 풍경 속으로 파고 들어간 그의 사진들은 80년대 한국다큐사진의 또다른 성취로 평가된다.

 

홍등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
스쳐가는 남성, 택시·세탁소 등
80년대 풍경 세밀하게 담아

 

회색 입자들이 가득 퍼진 사진 속에 1980년대 ‘청량리 588’의 풍경이 넘실거리고 있다. ‘아가씨들’이 기다리던 588 쪽방들은 무거운 커텐이 둘러처진 무덥고 답답한 공간이었지만, ‘일’을 치르고 나면 얼음장처럼 퀭한 공간으로 돌변했다. 남녀의 체온이 뒤섞이던 그 쪽방으로 사내들은 맥주를 들이킨 뒤 숨가쁘게 달려갔다. 2층 행랑에 들창문, 쪽문이 줄줄이 붙은 홍등가 벽돌건물들과 그 앞 회색빛 거리를 배경으로 천천히 가는 스텔라 택시와 청년,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잡아끄는 여인네들, 실랑이가 각본처럼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 기억의 무대 곁엔 어김없이 음료수, 인삼차 등이 쓰여진 찻집과 미용실, 포장마차 따위가 붙어있었다. 홍등가 건물, 차양 아래 고드름이 매달린 겨울이면 얇은 옷차림을 한 ‘언니’들이 미닫이 문 안에서 연탄불을 쬐면서 남자들을 끌어당겼다

 

80년대 중반 서울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 역 사창가 여성들과 동고동락했던 조문호 (68)사진가는 자신이 지켜본 30여년전 청량리 풍경을 하나하나 렌즈에 새겨넣었다. 필름에 찍힌 채 30년 이상 처박혔던 588의 공간 풍경을 작가가 최근 사진집 <청량리 588>(눈빛)을 출간하며 되살려냈다. 지난해 시작한 ‘눈빛사진가선’의 11번째 결실이다. 작업 일부는 85년 동아미술제에 선보였지만, 책에 실린 사진들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136쪽에 들어찬 사진들은 1984~1988년 청량리 사창가를 세밀화처럼 그려낸 기록이고, 겉과 속이 달랐던 5공화국의 사회적 풍경이기도 하다. ‘정의사회 구현’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거창한 구호 뒤로 온갖 성산업을 부추키며 국민을 우민화하려던 음울했던 시대의 분위기가 서려있다.

 


“윤락녀를 기록한 게 아니라
그 시공간 속 사람을 기록한 것”
25일부터 인사동서 전시회도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곳 인간군상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좇는다. 강퍅한 2층 벽돌 슬라브 쪽방 건물들 속에서 과로와 슬픔에 찌든 사창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과 주름진 알몸, 앳된 초보 성노동자의 단아한 얼굴 등이 휙 문앞을 스쳐가는 남자들의 실루엣과 얽힌다. 접객실에서 여인들은 다 헤진 의자에 앉아 남자들의 주문을 기다린다. 그들의 옆 벽면에 있는 밀대 걸레와 연탄보일러 탱크 등은 구질구질하지만 엄숙한 소품과도 같다. 조 작가는 재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2012년 이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청량리에 30여년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날서지 않은 사람살이 장면들로 보여준다. 평론가 이광수씨는 사진집에 실은 글에서 “작가는 ‘윤락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택시도 지나가고, 세탁소도 보이고, 촌에서 올라온 노인이 길을 묻고 있다. 영락없는 우리가 살던 그 동네다…<청량리 588>은 사라져가는 작은 이들의 세상을 기록한다 …소외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는 사실…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눌변, 그것이 조문호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다. ”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조 작가는 지난달 부인 정영신(57)씨와 전국 장터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차렸다. 지금도 인사동과 전국 장터들을 오가며 군상들을 담는다. 젊을 적부터 음악다방, 주점 등을 하며 자유인으로 살았고 대가 최민식의 작품에 이끌려 다큐사진에만 탐닉했다. 가산을 거덜내는 댓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투시하는 도리를 배웠다. 항상 바닥을 생각하는 그 겸손한 시선 덕분에 80년대 풍속생활사의 가장 인상적인 기록이라 할 <청량리 588>이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작가는 사진집 사진들을 추려 25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판도 벌인다. 19살 이상만 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눈빛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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