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3일은 정선 만지산 불난 집터 측량하는 날이었다.

아산의 김선우씨가 일주일 전부터 신청해 둔 측량이라, 모처럼 정동지와 함께 정선 간 것이다,

 

오전10시에 출발했는데, 차를 교체한 후 첫 장거리 운행이었다.

‘투싼’은 승차감도 좋았지만, 확 터인 시야라 지난 번 ‘크루즈’보다 훨씬 편했다.

양평을 경유하여 네 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측량시간이 오후2시라 한 시간 정도 남았더라.

 

불난 집터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창수네 집부터 올라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밭에서 옻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부지런함은 여전한데, 일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정 식구들이 몰려와 몇 날 며칠 동안 술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큰아들 창수가 속 썩인 일까지 구절구절 풀어댔다.

 

지난 해에는 고추농사는 짓지 않고 고사리 농사에만 공을 들여 팔백만원이나 벌었고,

다른 집에서 일 해주고 받은 품삯도 오백만원이 넘었는데, 

자식이 사고를 쳐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큰 아들 창수가 갑자기 정신 장애를 일으켜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보상해 준 돈만도 만만찮은데, 카드로 주문한 책이 산더미처럼 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가면 모두 구입한 것 같은데, 책 값만 몇 백만원이 된다고 했다.

대부분 필요 없는 책이라 새 책을 폐품으로 파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단다.

“자슥 놈이 웬수야! 웬수~”라는 창수 엄마의 하소연에 한이 맺혔다.

 

농막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아산에서 출발한 김선우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집터 측량하러 왔다는 말에 창수엄마도 따라 나섰는데,

측량기사도 네 분이나 왔지만, 김선우씨는 김창복씨와 함께 왔더라.

 

아산의 김창복씨는 농지에 관한 행정이나 농막 관례에 해박한 전문가로

지난 해 불 난 직후에도 모시고 와 도움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차 속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자기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측량 기사들은 측량하느라 왔다 갔다 했지만,

선우씨 일행을 비롯한 동네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지만, 불 낸 옆집에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측량 결과가 나왔는데, 20년 전 측량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집터에서 동쪽으로 2미터 정도 밀려 난 것 외에도

북쪽에서도 2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창수네 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지켜보던 창수엄마의 낯빛이 편치 않아보였다.

 

그 땅은 창수가 아무 일을 못해 둘째 아들 용순이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용순이 집터로 정한 땅이라며 난처해했다.

오죽하면, 다시 측량하게 되면 위쪽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아산 김창복씨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남쪽지점과 북쪽 지점에 눈금을 대 보고는

옆집에서 지은 농막이 집과 집사이의 5미터 틈을 두지 않았고,

한 쪽 지붕 끝이 이쪽 땅을 침범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농막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땅에 돌 턱을 쌓은 것도 잘 못이란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농막 규모도 여섯평을 한참 초과했고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대형 저장고까지 세동이나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빈터에 건축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더라.

우리 집터는 오래전부터 옆집의 주차장이고 자재 보관소였다.

문제점을 따지고 싶었으나, 사람이 나오지 않아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난지 1년이 지났건만 보험회사는 물론, 불 낸 사람도 전화 한 통 없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처럼, 상대를 열 받게 해 스스로 나가길 바랄까? 

솔직이 사람이 보기 싫으니, 정선 만지산에 대한 애착도 사라졌다.

 

군청에 가서 알아보자는 손님 말씀도 있었지만, 읍내 나가 밥부터 먹어야 했다.

군청과 읍사무소에 들렸다가 시장 곤드레 밥으로 허기를 메웠다.

차 한 잔 나누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선에서 못 살것 같았다.

홧병으로 목숨을 재촉할 것아 다른 곳에 집터 알아보라고

모든 일을 정동지와 김선우씨에게 넘겨버렸다.

 

사실은 6년 전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위자료조로 정선 집을 준다고 했으니 정동지 집이다.

집터 압류가 풀리지 않아 명의 이전을 못하고 서약서만 남겼으니,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과 함께 사용할 에술창고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어디든 적당한 부지를 찾아보라는 부탁은 했다.

매사가 분명치 못하니 김선우씨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데,

그 많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선 만지산은 25년 동안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박했던 동강 원주민들이 더러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산골까지 파고든 물질문명으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선과의 인연을 끝내려니, 한 마디로 시원섭섭하다.

“잘 있거라. 정선아! .”

 

사진, 글 / 조문호

 

 

25년 동안 기록한 작업들을 돌아 보며 정리해 둔다

 

-축제-

동강변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2000, 9 / 구 귤암분교

제1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7, 10 / 만지산 사진굿당

제2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8, 9 / 만지산 사진굿당

 

-전시-

동강환경사진전, 1999. 10 / 서울, 충무로 갤러리

‘동강백성들’사진전, 2001, 11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 지하철 전시장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 2004, 12 / 서울, ‘덕원갤러리’

찾아가는 예술여행 ‘두메산골 사람들’전 2005 / 정선, 평창, 영월 산골마을 분교 10곳

‘신명’ 설치 사진전, 2005, 9 / 만지산 사진굿당

강원다큐멘터리 특별전, 2005, 7 / ‘동강사진박물관’

‘산을 지우다’ 사진전, 2008, 9 / 서울, ‘통인옥션갤러리’

‘산골 사람들’ 사진전, 2018, 5 / 정선, G갤러리

 

 

-출판-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발간 / 2000, 9 /도서출판 명상

‘동강’환경사진집(한국환경사진가회) 2000, / 도서출판 포토뉴스

‘두메산골사람들’ 사진집 발간 / 2004, 12 / 눈빛출판사

 

 

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요즘 나를 열 받게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것과 검찰에 이어 법관 놈들 하는 짓거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불난 정선집이다.

정치판이나 법관들이야 고개 돌리면 그만이지만, 정선 집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불낸 옆집에서 땅을 다시 측량해 우리 집 있던 자리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 문제도 자세히 알아봐야 겠지만, 어머니 산소 문제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정선까지 가기 힘들어 어머니를 서울근교의 납골당에 모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개월간 산소에 가보지 못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추석 전에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정선읍사무소에 묘지 개장신고서 등의 서류를 준비하러

지난 금요일 새벽 무렵 정선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양평쯤에서 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넣다보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다.

현금도 없는데다 핸드폰 속에 결제할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야 주유소에서 빌리면 되겠으나 아무 번호도 기억나지 않아 연락할 수가 없었다.

숫자 기억이 어두워 내 전화번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의 치매수준이다.

아무리 정영신씨 전화를 기억하려 안달했으나 뒷자리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수첩을 뒤적여보니 마침 아들 햇님이 전화가 적혀있어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되 뇌이며 정선으로 떠났다.

 

먼저 읍내에 들려 읍사무소 서류부터 준비해 두고, 농기구가 불타 벌초할 낫부터 하나 샀다.

일을 마무리하고 만지산 집에 가보니 화가 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 집 불탄 자리 반쯤에 걸쳐 옆집에서 집을 짓고 있었다.

그 문제는 옆집과 다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 때 측량한 지적공사와 싸워야 할 문제였다.

 

밭은 물론이고 산소는 잡초가 무성해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불난 와중에 심어두었던 옥수수는 잡초 속에 묻혀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돌보지도 않고 수확을 바란 내가 도둑놈 심보였다.

밭은 내 팽개치고 산소 벌초부터 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미안합니더! 내가 제대로 못 모셔 다른 곳에 모시기로 했습니더.

“다 알고 있다. 죽은 내가 감 나라 콩 나라 할 수야 없지만, 사겨 놓은 이곳 친구들과의 이별이 섭섭하구나.” 

유달리 친구들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께서 만지산 귀신들과 많이 사귄 것 같았다.

 

아뿔사! 낫질을 잘 못해 그만 한 칼 먹어버렸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야! 이놈아 술안주 담아 온 비닐로 손가락부터 감아라. 어디다 정신 팔고 낫질을 그따우로 하노”

“정신이 하나도 없소. 제발 잔소리 좀 하지마소”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 끝내고 일어서려다 잔디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급히 잡은 나무가 개 복숭아 가지였는데, 개 복숭아 한 알이 정신 차리라는 듯 머리에 뚝 떨어졌다.

 

“우메! 일에 정신 팔려 개 복숭아 열린 것도 못 보았네”

차에 있는 망태하나 챙겨 와 효소 담으려고 손에 닿는 것만 따 담았다.

어머니가 준 마지막 선물로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선을 떠나왔다.

 

차 안에서 걱정에 걱정을 머리에 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화재 보상문제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껴안고 살아야하는가?

이웃과 마음 상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다독였으나 마음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세월이 약이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알린 바와 같이 정선 작업실이 전소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화가 박 건씨가 알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공개적인 구걸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른 조그만 보답이라도 될까 싶어 부족하나마 저의 사진 한 점씩 보내드리려고 견본 사진 5점을 제시하며 사진번호와 보낼 주소를 보내달라고 전화번호를 알려드렸습니다.

아쉽게도 알린지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나 주소와 사진번호를 보내 주신 분은 네 분밖에 없네요.

혹시 그 안내를 보지 못했거나 뒷수습으로 경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천천히 연락하려 보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더러는 알리기가 편치 않거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사진 보내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어 한꺼번에 작업하기 위해 기다리다 주소를 알려 주신 분까지 보내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네 분 사진만 먼저 프린트해 보내드렸습니다.

 

나머지는 오는 10일까지 기다렸다 일괄 프린트(규격 42cmx 29,7cm)하여 액자에 넣어 보내 드릴 작정이오니, 사진번호와 주소를 정영신씨 핸드폰(010-2955-8926)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견본사진 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가능하오니 알려주십시오.

만약 10일까지 연락 없는 분들은 그 뜻을 존중하여 개인전을 소개하거나 행사사진을 촬영 해 드리는 등 다른 방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번 온정의 손길은 두고두고 보답하겠습니다.

정선에 예술창고를 만들어 함께 공유하려는 계획도 아직까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시일이 지체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험사로부터 제대로 보상받아 기대에 부응하는 공유공간을 만들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밝혀 일일이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행여 온정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성함 중 한자를 생략하였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후원해 주신 분 명단과 전해드릴 사진 견본이오니 참고하셔서 연락 주세요.

-후원금 보내 주신 분 명단- (밑줄 친 분은 사진을 발송하였습니다)

화가 : 이*엽 5만원, 이*민 10만원, 나*희 20만원, 정*엽 10만원, 김*홍 10만원, 류*복 10만원, 강*구 100만원, 두*영 5만원, 정*수 10만원, 안*홍 100만원, 박*동 20만원, 김*구 10만원, 박*태 10만원, 이*구 5만원, 이*정 3만원, 천*석 5만원, 김*열 10만원, 한*진 10만원, 김*하 20만원, 이*열 10만원, 조*옥 10만원, 박*원10만원, 이*철 20만원, 주* 20만원, 최*영 50만원, 사진가 : 최*균 30만원, 박*호 20만원, 노*향20만원, 전*훈50만원, 이*수 10만원, 변*철 10만원, 박*만 200만원, 박*환 5만원, 양*영 20만원, 홍*원 10만원, 최*석 20만원, 김*호 10만원, 김*진 10만원, 마*욱 10만원, 최*화 10만원, 이*갑 10만원, 김*길 10만원, 김*섭 50만원 문학인 : 조*영 30만원, 서*란 20만원, 장*숙 5만원, 김*지 20만원, 이*흠 10만원, 김*성 10만원, 조*인 10만 음악인 : 김*현 10만원, 전*철 10만원 마임, 무예가 : 유*규 10만원, 하*웅 10만원, 사회 활동가 : 박*윤 10만원, 김*부 5만원, 홍*길 10만원 ‘공유공간 마인’ : 김*우 10만원, 김*온 10만원, 양*살 10만원, *민화 5만원, 천*명 10만원, 정선 귤암리 : 노인회 20만원, 해선스님 20만원, 잘 모르는 분 : *범현 10만원, 윤*숙 10만원, *미경 10만원, 힘내세요 3만원, 김강* 5만원,

합계 1291만원

사진1번 만지산1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요약해 정리해 본다

이번 화재로 40여년 동안 일해 온 자료는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을 얻었다.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씨는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었다. 정선 화재현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트럭으로 실고 가 물증 찾는 일에 혼신을 쏟아왔고,  그와 함께 서울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 와 자문해 주며 사회의 모순된 구조 개선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 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 오랜 시간동안 사건에 대한 전모를 들으며 무료로 자문해 주신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님, 일면식도 없는 분에서부터 지인에 이르기까지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신 60여명의 후원자를 비롯하여 걱정해 주신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후의 따스한 햇살처럼 큰 위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도움 준분들에게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하는 지자체에서는 나몰라라 했다. 도처에 토목공사 때 사용하는 컨테이너박스가 널렸는데, 갑자기 집을 잃은 군민이 거처할 임시숙소 하나 빌려주지 못하는가? 고작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 온 담요와 비상식량 뿐이었다. 이런 놈의 동내를 위해 몇십 년 동안 마음을 쏟아 부은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 다시는 주민 복지라는 말만 꺼내면 똥바가지를 덮어 쒸울 것이다.

그리고 화재현장인 정선 집에 대한 앞으로의 대처 방안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 불이 붙었던 옆집도 분명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같이 살고 싶은 이웃이 아니란 것은 오래전 알았다.

그 집은 미국에서 온 노성수씨가 구입해 살았는데, 2015년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술이 취해 방문의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갑작스런 변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을 낸 윤씨다.

 

사진2번 만지산2

이사 온 뒤로 윤씨의 남편처럼 행세한 한 남자는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 마당에 빨간 막대를 꽂아두는 등 처음부터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 두고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 편이 쉬려 정선에 갔으나, 이젠 만나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이상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가까이 하지 말라는 동네 사람들의 충고도 뒤따랐다, 그녀가 이사 온지 2년쯤 후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의 양서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옆집의 그녀가 찾아와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사이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드기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야 가끔 가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집을 더나들던  사내들의 뒷소문도 무성했다. 언젠가부터 정선 북실리에 사는 년하의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의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한씨는 토목공사 하는 분이라 전기에서부터 레미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수엄마 이야기에 의하면 한 때는 본처가 경찰을 데리고 현장에 찾아와 한씨가 도망쳐 올라와 숨겨 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3번 만지산3

모두 남의 사생활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주변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여러 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었고, 그물망으로 방목하는 수많은 닭들의 소음도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친환경을 내세워 수시로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 한 장을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도로 포장하는 사람 오면 움푹 파진 도로 입구 좀 때워 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다는데, 온 마당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마당을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니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어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주었는데, 아마 인부들이 공사장에서 빼돌려 싼 값으로 깔아준 것 같았다. 자연환경이 좋아 사는 나로서는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처럼 눈에 거슬리는 흉물에 불과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한 때 이웃 최종대씨와 지하수 분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하수로 갑 질하는 최종대씨의 잘 못이라 공개적으로 최씨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으나 긴 세월 이어 온 정이라 윤씨보다 최씨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 때부터 서울만 왔다 가면 전기 차단기가 내려져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다 상해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 일이 반복되어 아예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최씨와의 왕래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의 짓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사진4번 두메산골 사람들

그 날 불난 날도 서울에서 손님이 네 사람 찾아와 마당에서 불을 피워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주민들 말과는 달리 누전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듣기로는 얼마 전 윤씨가 불 난 집 터 옆의 조씨네 밭을 사서 농막까지 옮겨 두었는데, 그 위에 있는 밭을 공동 투자하여 사들이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보험 든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해 화재현장의 물증확보에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 왔는데, 뒤늦게 보험 든 게 있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미 보름이나 지나 다시 찾아갔을 때는 모든 게 파헤쳐지고 치워버려 물증확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놓아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었다.

또 하나 윤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처음에는 방안의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어 모두 탔다고 말한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을 찾았다고도 했으나, 두 번째 들렸을 때는 돈은 타지 않았다며 말을 뒤집었다.

 

사진5 서울역지하도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도록 원인을 제공한 그녀를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램이다. 그녀만 보면 울화가 치미니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 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 무덤도 무덤이지만, 동자동 일이 끝나면 이제 어디 가서 쉬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좋아 하도록 판 깔아 주기는 더 더욱 싫었다.

그래서 윤씨와 합의하기 위한 제안으로 지금의 집터를 양보하고 새로 구입해 둔 위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거절했다. 

지난 1일 정오 무렵 서초동에 있는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를 찾아갔다. 아들 햇님이 안내로 정영신씨를 동반해 갔는데, 그곳에는 아산에서 이 일을 돕고 있는 김선우씨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도 참석하여 그동안의 일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준비할 앞으로의 대책도 세웠다. 일단은 손해사정사의 보상 금액이 결정되는 것을 보며 소송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도움주신 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예술창고를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 혜선스님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단다.

엊그제 정선화재 현장에 찾아 온 선우씨가 일을 흐리멍텅하게 처리하는 나를 보며 한 말 중에 할 말을 잃게 했던 말은 무슨 일이던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우선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여지 것 줄 창 주장해 왔던 일도 원칙이 아니던가?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 까지도 원칙을 어기는 잘못된 일은 공개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분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잘못한 일에 남과 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잘못된 일은 두루 뭉실 넘어가니 세상이 이 지경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돈 즉, 스스로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 좋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난 17일 아침, 정영신씨와 정선 만지산 화재 현장으로 떠났다. 당장 기거할 컨테이너 박스라도 구해야 했지만, 다음 날 보험사 직원과 손해사정사가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화재 현장에 갔을 때는 윤인숙씨가 보험 던 게 없다고 했는데,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본인은 탈 수 없지만, 피해자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손해보험이 있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꼼꼼히 증거 자료를 찾아 두어야 하는데, 이미 일부의 폐기물은 버려졌고, 남은 것도 포크레인으로 헤집어 찾기가 어려워 진 터라 걱정되었다.

 

 

 

화재 난 다음날 현장에 갔을 때도 불 탄 현장에 포크레인이 와 있었는데, 어떻게 화재원인도 규명하지 않고 현장을 헤집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보험금을 받아내려면 어떤 자료를 어떻게 소명해야 하는지를 몰라 아들 햇님이에게 손해사정사 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해 둔 것이다.

 

 

 

정선으로 가다 양평 쯤에서 ‘성심건업’이라는 이동주택 제작소가 있어 한 번 들려 보았다.

농막에서부터 크고 작은 다양한 견본주택을 만들어 놓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건축허가 없이 갖다 놓으려면 6평짜리 농막밖에 없지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주택형 농막은 최하가 2천만원 대였다. 심지어 일억이 넘는 이동주택도 있었다. 완전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주변인들이 보내 준 성금이 천만원이나 들어 와 그 돈으로 농막이 아니라 ‘예술창고’라는 집을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예술창고’를 제대로 지으려면 손해보상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불난 방안에 명품가방이나 돈 나가는 물건이 많았다고 진술하라며 부추겼지만, 집에 없는 명품을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명품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필름 원판이라며 자위했으나, 손해사정사 말도 손해배상 규정에 필름은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전시하고 남은 작품도 집안 창고에 수 없이 많았는데, 그 사진 판매금액을 책정해 배상을 청구하란다. 사진은 원판만 있다면 다시 제작할 수 있지만,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만들 수가 없는데, 이런 개떡 같은 보상법이 어디 있는가?

 

 

 

배상한도가 일억이라는데, 그런 식으로 산출하려면 아무리 계산해도 얼마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손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지경인데, 이제 보험사를 상대로 싸워야 할 문제가 남았다.

 

 

 

일단 정선 집보다 읍내부터 들렸다. 올해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했지만, 빈 땅에 노력이 덜 가는 옥수수라도 심으려면 모종도 사야하고 농기구도 구입해야 되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마침 정선장이었다. 나물이 많이 나는 요즘 철에는 정선장에 엄청 많은 인파가 몰렸으나 코로나 때문인지 장터가 썰렁했는데, 이제 정선장도 봄날은 간 것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왔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정선아우라지’식당에 들어가 곤드레밥을 시켰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올 해는 작년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만지산 집에 도착하니 산 위로 구름이 몰려다녔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카메라앵글 속에 불난 화재 현장이 나오니 또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가까이 가보니 철재는 모두 수거해 갔고, 나머지 폐기물도 일부 치우고 없었다. 타다 남은 책들만 폐기물 자루에 담겨 길가에 첩첩이 쌓여 있었다.

 

 

 

옥수수 심을 땅에 잡초를 뽑고 있는데,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가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정선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단다. 제2의 공유공간 만드는 일에서 부터 할 일이 태산 같은 사람이 만사를 제쳐두고 그 먼 길을 온다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좀 있으니 잘 아는 농막 짓는 분을 모시고 찾아왔는데, 화재현장을 둘러보며 타다 남은 잔재들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귤암리 노인회장 이었던 서덕웅씨도 오셨다. 얼마 전 최종열씨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며, 내일 아침 노인회 회의에서 작은 성의나마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김선유씨가 모셔 온 건축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집 짓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밭을 택지로 용도변경부터 해야 하고 설계도면 등 인허가 과정이 까다롭다고 했다. 정화조 설치에서부터 준비해야 할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집 지을 장소와 임시 기거할 농막 위치까지 알려주었는데, 당장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서둘 일은 아니라고 했다. 우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우선이지만, 보상받을 예산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창수 엄마로 부터 올라 오라는 연락을 받아 정동지 더러 손님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해 두었는지, 가자말자 빨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 오고 흐린 날 파종을 마무리해두어야 잘 자랄 것 같아 먼저 식사하라고 말했는데, 선우씨가 데리러 오기 까지 했다. 좌우지간,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더러운 습관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식사 후에 윤인숙씨와 합의하기 위한 요구조건이나 앞으로의 복안을 설명하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아산까지 가야 할 선우씨 일행은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술이 한 잔 들어 간 창수엄마 이선녀씨 노랫소리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노래자랑에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인데, 서덕웅씨가 정선 아리랑도 한 번 부르라고 부추겼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한 바탕 놀고 나니 서덕웅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정영신씨의 일이 시작되었다.

요즘 그녀가 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 어머니 인터뷰 대상을 장터에서만 찾기에 사연이 많은 만지산 이선녀씨가 어떠냐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맞다“고 맞장구 쳤다. 이 번 기회에 인터뷰를 하려고 장비까지 챙겨 온 것이다.

 

 

 

예전에 이선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만지산에서 있었던 시집살이였다면 이번에는 시집오게 된 내력과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애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먼저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술만 마시면 신체적 장애가 생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이제 술도 그만 마시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그만 살라는 말일까? 아무튼 다리에 힘줄 땡기는 통증까지 찾아와 곤욕을 치르다 잠들었는데, 인터뷰는 잘 끝냈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날은 오전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창수가 아침 먹으라며 깨웠다. 덕분에 일찍부터 일 할 수 있어 좋긴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구름이 여전히 장관을 이루었다.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귤암리 노인회장 최종열씨가 찾아 와 성금이라며 이십만원을 전해 주었다. 나는 주민등록이 서울 동자동으로 되어있어 이곳 주민이 아닌지라 줄려면 귤암리에 주민등록을 옮겨놓은 정영신씨에게 주어야 할 돈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전해주겠지만, 성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마침, 윤인숙씨가 해선스님께서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바로 찾아 갔는데, 절 쪽에서 보는 우리 집 전경도 근사했다. 스님께서는 불 난 밤에 이 곳 절에서 지켜보며 핸드폰으로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었다고 했다. 불난 현장을 보지 못해 궁금했는데, 스님 덕에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진 / 혜선스님

 

십여 년 전에 보여 드린 적 있는 ‘한국불교미술대전’ 전집 이야기도 꺼내시며, 그 때 갖고 싶었지만 한 질 뿐인 책이라 차마 사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는데, 차라리 샀더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책은 이십 여 년 전, 이년에 걸쳐 사진을 찍어 원고를 제공했으나 출판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천만 원이 넘는 원고료를 받지 못한 책이 아니던가? 도록도 마지막 남은 책이었지만, 이제 필름까지 타 버렸으니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진 / 혜선스님

 

보살님이 내 온 차를 마시며 내 의중을 물어 오셨다. 짐작컨대 옆집 윤인숙씨가 쓰리쿠션을 친 것 같았다. 그래서 윤인숙씨 에게 이야기하듯 소상하게 말을 전했다. 두 집이 본래 한집이었던 집을 잘라 판 것이 문제였다며, 여간 불편하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개가 오가며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어왔고, 그물망을 쳐 방목하는 수많은 닭소리 조차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문제라고 말했다. 화재 난 그날도 네 사람이 찾아와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매번 그냥 오는 손님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이는 영업의 일환이었다. 얼마전 불 난 집 터 옆에 있는 밭을 사서 농막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의 집터는 양보하고 그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우선 불편에 앞서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복안도 설명했다. 내가 펴낸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집과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바탕으로 동강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동강사람들’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소유한 400여 평으로는 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옆집의 가축 방목이나 영업행위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집 지을 여력이 없어 땅과 자료만 정선군에 넘겨주면 건축은 정선군에서 추진하는 기획안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의 요구면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일하러 내려 왔더니,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뒤 이어 아들이 선임해 준 손해사정사 김민수씨도 도착했다. 김민수씨는 물증을 찾기 위해 불난 현장을 헤집기 시작했는데, 나와 정동지 모두 동원되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흔적들이 소실된 후라 별로 찾아내지 못했다.

 

 

 

김민수씨가 찾은 중요한 것은 120필름 열다섯 장이 붙어 있는 비닐 파일이었다. 내가 찾은 것으로는 화가 강찬모씨 그림으로 추정되는 캔버스 천을 비롯하여 일세기가 지난 뷰카메라 필름케이스 가림막으로 보이는 알미늄 철판만 주웠을 뿐 필름용 카메라와 암실장비 등의 부품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외는 85년‘동아미술제’ 대상받은 상장 잔재와 불타다 남은 나무액자 조각뿐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주워 보관하고 있는 90년도에 전시했던 11X14인치 규격의 ‘전농동588’ 사전첩 일부는 소중한 물증인 셈이다. 이웃 주민이 기념으로 챙겨 간 ‘87민주항쟁’ 사진첩 일부도 다시 받아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찾아내기가 힘들어 찾은 자료만 촬영해 두고 맡겨놓았다.

 

 

 

일 억 정도 보상받으려면 3억 정도의 자료가 나와야 한다며 보상 받게 될 금액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소견을 상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윤인숙씨 더러 불난 집터를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의향이 없냐고 물어 본 모양인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잘라 말했다고 한다. 소실된 집기나 비품 명세를 적을 용지를 전해주며 다시 연락하겠다며 김민수씨도 떠나버렸다.

 

 

 

우리도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해자나 마찬가지인 윤인숙씨가 피해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보험사에 떠넘기며 일체의 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위에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충고를 끈임 없이 했지만, 이웃의 정리를 생각해 마다하지 않았던가?

 

 

 

운전 중에 아산의 김선우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이유를 조목 조목 이야기하며 다시 설득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가 선임되어야 소실된 자료의 중요함을 변호해 보험사로부터 적정한 보험금을 받아 낼 수도 있지만, 배 째라는 윤인숙씨의 재산추적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영신씨는 나더러 의견을 물어 왔지만, 법적으로 갈 생각은 없기도 하지만, 피해 입은 땅이 정영신씨 땅이니 당신이 판단하라고 미루었다.

 

 

 

사실상, 화재현장에는 그동안 정영신씨가 전시해 온 장터 작품도 모두 보관해 두는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그 집 땅 역시 정영신씨 소유나 마찬가지다. 5년 전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며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돈이 없어 위자료 조로 넘겨 준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 양해각서만 작성해 두고 아직까지 명의 이전을 못해 준 것은 신용카드대금 천 백오십 만원을 연체하여 채권추심사인 ‘미래신용’에 땅이 압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 조정을 신청해 정해진 납입금을 여섯 차례 납부했으니, 머지않아 압류만 풀리면 등기 이전해 주어야 할 땅인지라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밤늦게야 도착해 잠들었는데, 이틀 날 다시 김선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나도 들으라고 전화소리가 들리도록 외장 스피커를 켜두어, 전화내용을 상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말에 더 이상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휴일인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정선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버리려고 쌓아 둔 타다 남은 포대기들을 실고 와 뒤져보기 위해 트럭을 대절했다는 것이다.

 

 

 

‘공유공간 마인’에 내 전시를 유치했다는 연유로 저토록 자신의 일처럼 지극정성으로 돕는데, 어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걸 김선유씨에게 위임한다며 두 손 들고 말았다. 밤늦게는 포대를 다 실고 돌아왔다는 전화를 걸며 트럭 대절비나 부대비용은 나중에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끝장을 보고 마는 대단한 여장부였다.

 

 

 

김선유씨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다 끝난 인생 말년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마음 상하지 않고 일이 잘 마무리되어 약속대로 정선 만지산에 멋진 ‘예술창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드린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비 오는 날 저녁 무렵 김명성씨와 김상현씨가 동자동에 찾아왔다.

성냥공장 불난 위로주를 한 잔 사려는 자리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자주 만날 수가 없었으니, 엄청 반가웠다. 동자동에는 손님 모실만한 마땅한 밥집이 없었는데, 마침 후암동 ‘속초식당’이 생각났다. 얼마 전 ‘KP갤러리’ 전시 개막식에 갔다가 들린 뒤풀이 집이었다. 대구탕을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생생했다.그 날은 시원한 지리 안주로 소주 한 잔 때렸는데, 기가 막혔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 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집은 김상현씨와 김명성씨도 다 인연이 많았던 집이다. 김상현씨는 음악하는 후배들과 어울려 여러 차례 만지산을 적시기도 했지만, 김명성씨는 만지산의 유일한 후원자였다.

 

 

 

20여년 전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을 시작으로 축제 때마다 후원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벌이도 없는 주제에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은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만지산 땅 문서를 가져가 돈을 얻어왔다. 내가 산 가격으로 넘겨 줄 계약서를 쓰고 500만원을 받았는데, 중도금도 잔금도 주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땅을 사기 위해 준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땅만 가져갔다면, 모든 걸 다 태우는 이 지경은 안 되었을 텐데 말이다.

 

 

 

술 마시며 만지산을 생각하니 또 다시 마음이 아파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비가 추적추적 내려 담배 연기에 시름을 날렸다. 세 사람이 소주 두병 시켜 반 병 남겼으니, 다들 엄청 약게 마신 것이다. 아쉽지만 일찍 헤어져 4층 쪽방까지 올라오느라 헉헉댔다. 그 정도로 빌빌거리는 걸 보니 봄날은 간 것 같다.

 

 

 

그 이튿날은 녹번동에서 개겼는데, 저녁시간이 되니 또 술 소식이 왔다.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씨와 최석태씨가 가까운 횟집으로 온다는 것이다. 가보니 비싼 회를 잔뜩 시켜 놓았는데, 맛도 모르는 촌놈이 혼자 다 먹었다. 그 곳에서도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어질어질 했다. 정영신씨 집으로 술자리를 옮겼으나, 뒷자리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만지산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화가 박건씨의 후원 요청으로 들어 온 돈이 무려 12,910,000원이나 되기 때문이다. 빈 집에 소 들어 온 격이지만, 심적 부담에 편하게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도움 준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창고’ 1호 만들 생각으로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단 오산에서 마무리 작업 중인 환경 친화적인 예술감독 안애경씨의 자문부터 얻기로 했다. 첫 번째 예술창고에 혼신을 쏟아야 하는 것은 제1창고 완공의 결과에 따라 제2, 제3의 예술창고가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를 뛰어넘는 공간으로 만들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공간은 69명의 예술가가 후원한 공유 공간이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번 주 목요일에는 오산에서 작업하고 있는 안애경씨를 만나기로 했고, 금요일부터 정선 현장에서 온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작정했다. 지자체 협조를 얻어야 할 일도 많고 주변 분들의 양해도 필요했다. 언제 쯤 예술창고 1호가 개봉될지 모르지만, 한 번 기대하십시오. 그 때 신명 난 만지산 잔치 한 번 열어 모시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정선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어 집은 물론 모든 걸 태웠습니다.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되겠지만 40여 년 기록해 온 필름과 소중한 자료까지 모두 사라져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한 동안 방구석에 처 박혀 자다 깨다만 반복하며 의욕을 잃었지만, 세월이 약이라 듯 시간이 지나가니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 정선 집이 불탄 것도 잊고 일할 것을 생각하다 뒤늦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힘이 빠지기도 했으나, 하늘의 뜻이라며 스스로 위안했습니다.

 

 

 

그런데, 페북에 올린 화재 내용을 화가 박 건씨가 보고는 페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더 난처한 것은 지난 번 ‘나무아트’ 전시 때 알게 된 정영신씨 계좌번호까지 공개하여 여러 사람이 돈을 보내 왔습니다. 호의를 무시하고 돌려 드릴 수도 없고, 그냥 둘 수도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공개적으로 구걸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주변 분들의 고마운 뜻을 받아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후원금으로 임시 숙소 겸 일할 수 있는 농기구라도 보관할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 부터 한 채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도와주신 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집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대로 환경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도움 주신분과 함께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을 협의하여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하겠습니다.

 

 

 

후원금을 보내 주신 분들을 밝혀 일일이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행여 온정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성함 중 한자를 생략하였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화가는 가운데 이름자를 생략했고, 사진가는 성을 생략했고, 마지막 이름 자를 생략한 분은 문인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후원금 보내 주신 분 명단-

 

이*엽 5만원, 이*민 10만원, 나*희 20만원, 정*엽 10만원, 김*홍 10만원, 류*복, 10만원, 강*구 100만원, 

두*영 5만원, 정*수 10만원, 안*홍 100만원, 박*동20만원, 김*구 10만원, 박*태10만원, 이*구5만원, 이*정3만원,

 천*석5만원, 김*열10만원, 한*진10만원, 김*하 20만원, 이*열10만원, 이*철 20만원, 주* 20만원, 최*영 50만원

 

*정균 30만원, *진호 20만원, *은향20만원, *제훈50만원, *광수10만원, *순철10만원, 

*용만200만원, *영환5만원, *시영20만원, *채원10만원, *명석20만원, *문호10만원, 

*남진10만원, *동욱 10만원, *연화10만원, *재갑10만원, *수길10만원, *보섭50만원

 

조준*30만원, 서정*20만원, 장봉*5만원, 김명*20만원, 김명*10만원, 조해* 10만원, 이대* 10만원, 

김영*5만원, 하태*10만원. 유진*10만원, 김선*10만원, 김* 10만원, 양햇*10만원, 민화*5만원, 

 조경*10만원, 박지* 10만원, 범현* 10만원, 윤은* 10만원, 미경* 10만원, 박영*10만원, 

 힘내세요 3만원, 김강* 5만원, 천이*10만원, 귤암리 노인회 20원, 해선스님20만원, 김상*10만원,

전활*10만원, 홍영*10만원

 

합계 1,291만원

 

 

고맙고 고맙습니다. 이 삭막한 세상에 받은 온정이라 너무 마음이 따뜻합니다.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조문호 올림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보 잘 것 없지만, 저의 사진 한 점(규격 42cmx 29,7cm)씩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기념의 뜻으로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래 견본 사진 다섯 장 중 선택한 번호와 보내 드릴 주소를 아래 핸드폰에 찍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010-7662-6144 조문호)

 

 

1번 / 만지산1
2번 / 만지산2

3번 / 만지산3

 

4번 / 두메산골 사람들2
5번 / 서울역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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