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만지산 집이 불난 이후로 쉴 곳이 없어 막막했으나,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 소유의 아산시 인주면에 둥지 틀기로 했다.

 

그 땅은 20여 년 전 김선우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이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4천평 규모의 땅이란다.

그러나 건축규제에 묶여 지연되다 한 참후에야 규제가 풀렸으나,

열기가 식어 대안학교 설립 자체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진작업실을 만들기 위한 집터로 개간해 두었다

그중 김선우 소유의 땅 2천여 평에 한옥 한 채를 지어 텃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오래 전 현장을 둘러본 후, 그 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낼 작정을 한 것이다.

 

지금은 교통이 불편하지만, 서울 연신내에서 출발하는 GTX가

아산 인주면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아 수도권이나 다름없다는데,

열차뿐 아니라 고속도로까지 그 곳을 경유해 아산 인주면이 교통요충지가 된 것이다.

아산역이 생기게 될 인주면 인근에 부동산 업소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것이 잘 말해준다.

그러나 김선우 땅은 한 평도 매각하지 않고, 환경 친화적인공간으로 가꾸어 나갈 생각이란다.

세월이 한참 지나면 이 곳만이 자연경관을 헤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김창복씨 집터로 기초공사를 해두었다.

마침, 지난 15일부터 예산장터에서 삼국축제가 열린다는 정동지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섰다.

예산 가는 길에 집터 현장을 둘러보러 아산 인주면부터 들린 것이다.

한 달 전에도 들린 적이 있으나, 그때보다 공사가  많은 진척을 보였다.

내가 머물 집터는 물론 김창복씨 집터까지 평지로 개간해 놓았고, 한 쪽에는 연못까지 파 놓았다.

주변 조경을 위해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옮겨 심는 등 일을 많이 했더라.

 

연못을 만들기 위한 공사현장

김선우의 복안은 기존의 한옥은 전시장으로 개조하고,

나를 비롯한 김창복씨가 머물 주택 두 동과 손님 받을 카페 등

대략의 공사를 올 겨울까지 마무리 할 계획이란다.

내년 봄에 입주가 가능할 것 같은데, 가을쯤에는 신세진 분을 초대할 예정이다.

 

예산장터와 추사고택을 돌아본 후, 저녁 무렵 다시 김선우를 만나기로 했다.

 

국화를 감상하며 국밥과 국수를 즐기는 '예산삼국축제'는

예산장터 일원에서 10월 14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예산 장마당에는 국화로 장식한 다양한 조형물이 만들어졌고,

그 옆 공연장에는 미스터트롯 가수 정동원이 출연한다는 광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지역축제는 유명가수 출연이 관객동원의 성패를 좌우했다.

 

국화 향기 그윽한 가을 정취 속에 흥겨움과 정겨움이 넘치는

‘예산장터 삼국축제'는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지친 군민들에게 큰 위안을 줄것 같았다.

그러나 장터축제가 열리는 장소성의 의미 외는 장터 축제다운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10년 전에 촬영한 예산장터의 국수공장들

예산장터의 특징 중에 하나였던 옛날 국수공장들은 모두 철거되고 없었다.

‘예산장터 삼국축제’라는 명칭에 국수까지 집어넣었지만,

정작 예산 장터 문화의 원형은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공연장이나,

긴 줄을 선 국밥집과는 대조적으로 국수가게는 한산했다.

 

큰 공장에서 만들어 오는 국수야 어디엔들 없겠는가?

 

예산장에서 3대째 국수를 만든 김성근 씨는 어디 갔을까? / 2011년 1월 촬영

옛날식으로 대꼬챙이에 국수를 받아 주렁주렁 말리는 장면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좋은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그 흔한 엿장수 한 사람 보이지 않고, 장터마다 늘린 뻥튀기조차 없었다.

볼거리로 관광객을 즐겁게 하려면 전국 장돌뱅이들을 불러 모아 흥겨운 장마당을 연출하거나,

옛날의 보부상 등 잊혀져 가는 소재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거금 들여 유명가수 불러 오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장터축제가 아닐 까 생각된다.

 

장옥 위에 올라가서 행사장과 장터 구석 구석을 지켜보았는데,

장날이었으나 장 보러 온 손님이 없어 난장은 파리만 날렸다.

이름만 장터축제지 음악과 춤이 난무하는 공연 축제나 다름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 고택에 들려

진한 묵향이 베인 고건축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기도 했다.

 

추사고택은 조선후기 학자며 서화가인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따님 화순옹주와 혼인하며 지어졌다고 한다.

건축 당시는 53칸 규모의 대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만 남아있다.

 

손님을 접대하며 문학적 유회를 즐기던 사랑채를 지나면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춘 안채가 나온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있고,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라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였다.

 

특이한 것은 안채 부엌은 난방전용이고 요리용 부엌은 따로 두었는데,

이는 화순옹주가 살던 왕실 주택 구조여서 그렇다고 한다.

 

한옥 특유의 따뜻하고 정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기둥 곳곳에 걸린 주련이 추사 정신을 일깨우며 그 의미를 더했다.

 

높은 가을 하늘과 붉게 물든 단풍도 아름답지만,

주렁주렁 달린 감이나 모과는 고택의 여유로움을 더했다.

 

윗쪽에는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 있다.

김정희의 벗인 권돈인은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썼고,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이 추사 초상화를 그렸단다.

 

고택 후문으로 나오니,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 있었다.

추사 고댁 인근에 있다는 '용궁리 백송'도 찾아보았다.

이 백송은 올해로 2백 살을 갓 넘긴 소나무로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도로 따라 약 6백 미터 지점에 있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알 수 있는 백송은 생각보다 가냘팠다.

원래 땅에서 50센티미터 위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자랐으나

그 중 큰 줄기와 서쪽으로 뻗은 줄기가 오래 전에 부러졌다고 한다.

 

지금은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 빈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추사가 중국에서 가져 와 애지중지 키운 것은 한 선비가 살아온 내력이나 다름없다.

백송 나무에서 오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오는 길에 김선우에게 전화했더니, 삽교천 회센터에서 만나잖다.

선우에 이어 김창복씨도 삽교천에 도착했는데, 선우가 단골집에서 해산물을 너무 많이 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회로 배를 채우기는 난 생 처음이었다.

 

술 한 잔하고 내일 가라지만, 여관보다 집이 편할 것 같아 술은 사양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하고나니 노래방에 가잖다.

갑작스런 불운으로 어머니 장례를 치룬 선우씨가 

그 슬픈 마음을 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얼마 전, 술 취한 트럭기사가 슈퍼마켓에 난입하여, 밤늦게 물건 사러 간 선우씨 어머니를 들이받은 것이다.

사고를 내고 도주한 운전자는 인근 도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라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날벼락이 하필이면 착한 선우한데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장례를 치루고 난 뒤 알아 문상도 못 갔지만,

하늘이 무너진 슬픔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늦었지만, 선우씨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빈다.

 

몇 년 만에 노래방이란 곳도 들렸는데,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간 적은 처음이었다.

대개 술김에 고래고래 소리 질렀으나, 술도 없이 못하는 노래가 어찌 나오겠는가?

기관지가 나빠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라 노래하기가 힘들었다.

대개 술이 취해 불러 잘 몰랐으나, 이제 노래는 끝났다는 비참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김창복씨는 ‘휘나리’, 김선우씨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다들 애창곡으로 100점을 줄줄이 받아가며 가수의 면모를 과시했으나,

없는 놈 제삿날 돌아오듯 순서는 빨리도 닥쳐왔다.

 

김상국의 ‘불나비’등 케케묵은 노래만 골라 부르기는 했으나,

노래를 부른 건지 가사를 읽은 건지, 기억 하기도 싫다.

아무튼, 선우씨 덕분에 잘 먹고 잘 놀았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해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선우씨! 고마워요. 언젠가는 신세 갚을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은 정선 만지산 불난 집터 측량하는 날이었다.

아산의 김선우씨가 일주일 전부터 신청해 둔 측량이라, 모처럼 정동지와 함께 정선 간 것이다,

 

오전10시에 출발했는데, 차를 교체한 후 첫 장거리 운행이었다.

‘투싼’은 승차감도 좋았지만, 확 터인 시야라 지난 번 ‘크루즈’보다 훨씬 편했다.

양평을 경유하여 네 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측량시간이 오후2시라 한 시간 정도 남았더라.

 

불난 집터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창수네 집부터 올라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밭에서 옻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부지런함은 여전한데, 일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정 식구들이 몰려와 몇 날 며칠 동안 술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큰아들 창수가 속 썩인 일까지 구절구절 풀어댔다.

 

지난 해에는 고추농사는 짓지 않고 고사리 농사에만 공을 들여 팔백만원이나 벌었고,

다른 집에서 일 해주고 받은 품삯도 오백만원이 넘었는데, 

자식이 사고를 쳐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큰 아들 창수가 갑자기 정신 장애를 일으켜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보상해 준 돈만도 만만찮은데, 카드로 주문한 책이 산더미처럼 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가면 모두 구입한 것 같은데, 책 값만 몇 백만원이 된다고 했다.

대부분 필요 없는 책이라 새 책을 폐품으로 파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단다.

“자슥 놈이 웬수야! 웬수~”라는 창수 엄마의 하소연에 한이 맺혔다.

 

농막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아산에서 출발한 김선우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집터 측량하러 왔다는 말에 창수엄마도 따라 나섰는데,

측량기사도 네 분이나 왔지만, 김선우씨는 김창복씨와 함께 왔더라.

 

아산의 김창복씨는 농지에 관한 행정이나 농막 관례에 해박한 전문가로

지난 해 불 난 직후에도 모시고 와 도움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차 속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자기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측량 기사들은 측량하느라 왔다 갔다 했지만,

선우씨 일행을 비롯한 동네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지만, 불 낸 옆집에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측량 결과가 나왔는데, 20년 전 측량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집터에서 동쪽으로 2미터 정도 밀려 난 것 외에도

북쪽에서도 2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창수네 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지켜보던 창수엄마의 낯빛이 편치 않아보였다.

 

그 땅은 창수가 아무 일을 못해 둘째 아들 용순이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용순이 집터로 정한 땅이라며 난처해했다.

오죽하면, 다시 측량하게 되면 위쪽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아산 김창복씨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남쪽지점과 북쪽 지점에 눈금을 대 보고는

옆집에서 지은 농막이 집과 집사이의 5미터 틈을 두지 않았고,

한 쪽 지붕 끝이 이쪽 땅을 침범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농막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땅에 돌 턱을 쌓은 것도 잘 못이란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농막 규모도 여섯평을 한참 초과했고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대형 저장고까지 세동이나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빈터에 건축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더라.

우리 집터는 오래전부터 옆집의 주차장이고 자재 보관소였다.

문제점을 따지고 싶었으나, 사람이 나오지 않아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난지 1년이 지났건만 보험회사는 물론, 불 낸 사람도 전화 한 통 없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처럼, 상대를 열 받게 해 스스로 나가길 바랄까? 

솔직이 사람이 보기 싫으니, 정선 만지산에 대한 애착도 사라졌다.

 

군청에 가서 알아보자는 손님 말씀도 있었지만, 읍내 나가 밥부터 먹어야 했다.

군청과 읍사무소에 들렸다가 시장 곤드레 밥으로 허기를 메웠다.

차 한 잔 나누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선에서 못 살것 같았다.

홧병으로 목숨을 재촉할 것아 다른 곳에 집터 알아보라고

모든 일을 정동지와 김선우씨에게 넘겨버렸다.

 

사실은 6년 전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위자료조로 정선 집을 준다고 했으니 정동지 집이다.

집터 압류가 풀리지 않아 명의 이전을 못하고 서약서만 남겼으니,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과 함께 사용할 에술창고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어디든 적당한 부지를 찾아보라는 부탁은 했다.

매사가 분명치 못하니 김선우씨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데,

그 많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선 만지산은 25년 동안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박했던 동강 원주민들이 더러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산골까지 파고든 물질문명으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선과의 인연을 끝내려니, 한 마디로 시원섭섭하다.

“잘 있거라. 정선아! .”

 

사진, 글 / 조문호

 

 

25년 동안 기록한 작업들을 돌아 보며 정리해 둔다

 

-축제-

동강변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2000, 9 / 구 귤암분교

제1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7, 10 / 만지산 사진굿당

제2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8, 9 / 만지산 사진굿당

 

-전시-

동강환경사진전, 1999. 10 / 서울, 충무로 갤러리

‘동강백성들’사진전, 2001, 11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 지하철 전시장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 2004, 12 / 서울, ‘덕원갤러리’

찾아가는 예술여행 ‘두메산골 사람들’전 2005 / 정선, 평창, 영월 산골마을 분교 10곳

‘신명’ 설치 사진전, 2005, 9 / 만지산 사진굿당

강원다큐멘터리 특별전, 2005, 7 / ‘동강사진박물관’

‘산을 지우다’ 사진전, 2008, 9 / 서울, ‘통인옥션갤러리’

‘산골 사람들’ 사진전, 2018, 5 / 정선, G갤러리

 

 

-출판-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발간 / 2000, 9 /도서출판 명상

‘동강’환경사진집(한국환경사진가회) 2000, / 도서출판 포토뉴스

‘두메산골사람들’ 사진집 발간 / 2004, 12 / 눈빛출판사

 

 

일이 겹쳐 바쁜 하루를 보낸 것은 괜찮으나, 복에 없는 차를 바꾸게 되었다.

지난 8일은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린 정영신의 ‘장날’전도 철수해야 하고,

예약해둔 자동차 검사를 받는 등 할 일이 많은데, 마지막 일이 순탄치 않았다.

전시철수야 일사불란하게 마무리했으나, 자동차검사에 불합격한 것이다.

그것도 간단한 정비로 끝날 게 아니라, 폐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중고차를 구해야 하는데, 죽기 전에 폐차 장의사 신세는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그 날은 준비할게 많아 일찍부터 서둘렀다.

녹번동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요쿠르트 아줌마가 왔다.

인사 건 낼 틈도 없이 돌아서는데, 설날 지난지도 며칠 되지 않아 선물 받아 둔 과자라도 준 것이다.

뜻밖의 선물에 반색 하지만, 선물이란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게 더 기분 좋다.

 

이 분은 매주 한 번씩 요구르트를 세 개씩 갖다 주는데, 난 3년째 받아 먹는다.

독거노인에게 요구르트를 전해주는 일은 10년이나 된 지자체의 복지사업이다.

늘어나는 노인들의 고독사를 막기 위한 방편이지만, 좀 더 세심한 관심이 요구된다.

현재 동자동에 주는 분이 80여명이라는데,

몸이 불편하거나 외부와 소통이 많지 않은 분들은 대부분 빠졌기 때문이다.

 

녹번동에 차 가지러 가기 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니,

양말도 없는 노숙인의 맨발이 눈에 밟혔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노숙인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린다.

 

정동지를 차에 태워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부터 철수하러 갔다.

사진을 포장하여 차에 옮겨 실었는데, 비좁은 공간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80일간 수고해 주신 '돈의문박물관마을' 큐레이트 전영주씨에게

조그만 소품 한 점 선물하며 마지막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했다.

 

그나저나 그 많은 액자를 들여놓을 곳이 마땅찮았다.

지난 년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의 전시를 치렀으니 보통 짐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정선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집이 불탔으니 가져갈 수 없었다.

비좁은 녹번동 집 방 하나가 창고로 변한지 오래되었는데,

그 사정을 아는 아산의 김선우씨가 보관해 주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준비하는 공유공간 '마인' ‘백암길185 미술관’에 보관한다지만,

그 곳 또한 문을 열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판이다.

 

그 날 김선우씨가 사진을 실어가기로 했으나 일이 생겨 예정보다 늦어 진 것이다.

자동차검사 예약시간이 임박해, 짐을 내려놓고 '성산자동차검사소'부터 갔다.

예전에는 예약 없이 검사받으러 다녔으나 절차가 많이 바뀌었더라.

며칠 전 검사받으러 왔다가 허탕치고 예약 해 둔 것이다.

순서가 돌아와 검사가 진행되었는데,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검사에 통과하려면 정비비용만 80여 만원이 소요되는데,

엔진에 문제가 많아 고쳐도 오래타지 못한단다.

 

문제의 디젤 ‘크루즈’는 제 작년 여름 300만원에 구입했는데,

일 년 육 개월 동안 33,000km 타고 폐차하기에 이른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힘이 딸려 오르막에서 시동이 꺼지는 등 애를 많이 먹였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녹번동으로 끌고 가야 했다.

 

마침 아산의 김선우씨가 도착해 있었다.

자동차 사정을 듣고는 폐차가 답이라며 아산에서 쓸 만한 중고차를 알아 보겠단다,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고 방에 쌓아둔 액자를 옮겨 싣고 아산으로 내려갔다.

그 다음 날 선우씨가 만사를 제쳐두고 중고차 보러 다닌 것 같았다.

수시로 쓸 만한 차의 정보를 보내주었는데, 그 중 가격이 싸고 쓸 만한 차가 현대 투싼이었다.

 

다음 날 오후1시 무렵, 아산에서 선우씨를 만났다.

구입한 '투싼'은 178,500km 운행한 차인데 190만원이란다.

그 날 차량 명의변경과 폐차를 한꺼번에 처리할 준비해 두었는데,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동차보험이전에서부터 차량압류해제 등 모든 걸 전화로 해결하는데, 일을 똑 소리 나게 처리했다.

 

새로 구입한 현대 ‘투싼’을 점검하기 위해 잘 아는 정비소에 데리고 갔다.

아산에서 ‘월드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는 송계석씨를 찾아 간 것이다.

시운전을 해 보며 부속들을 꼼꼼히 점검해 주는데,

엔진이나 다른 곳은 이상이 없으나 하체 부식이 심하다고 했다.

비포장 도로나 도로 턱을 조심해 운행하면 삼 년 쯤은 무난히 탈 수 있겠단다.

자동차기능이나 주의해야 점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좌우지간 선우씨는 마당발이기도 하지만, 인간관계가 진득했다.

 

새로 구입한 투싼은 차체의 중량감도 있지만, 자동이라 운전하기가 편했다.

인사동에서 오후 다섯시에 열리는 박재동 화백 시사만평전, ‘한판 붙자!’에 갈 생각이었지만,

일이 지체된 되다 차까지 밀려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머리 아픈 일들을 마무리해 날아갈 듯 발길은 가벼웠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버려 둔 정선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농사철이 오기 전에 다시 측량하여 콘테이너 박스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공사에 전화해 측량할 날자 까지 잡아놓고 같이 자자는 전화가 왔다.

허구한 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는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은 복이 어디 가겠냐마는 올해도 좋은 일 많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을 향한 미얀마 군부의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접한 소식에 의하면 사가잉 까니 지역의 숲 속에서 시신 15구가 나왔다고 한다.

옷이 벗겨진 시신들은 눈이 가려져 서로 묶여 있었고,

목과 얼굴에는 칼로 벤 상처의 고문한 흔적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코로나 감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데,

품귀현상을 빚는 산소를 구하려다 총에 맞아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있었다.

쿠데타 이후 오늘까지 906명이 살해됐고 5천239명이 구금됐다.

미얀마의 평화는 암울하지만, 미얀마 국민들의 염원은 기필코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문제는 주류 민족인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의 갈등도 한 몫 하지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군부의 살상을 묵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부 세력이 폭력으로 정권을 강탈한 것은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와 너무 빼 닮았다.

전두환 군부가 저지른 양민학살도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때리는 서방보다 말리는 며느리가 더 밉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미얀마 민주화를 응원하며 함께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김선우씨가 아산 미술행동전을 추진하기 위해 사방팔방 쫒아 다니며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미얀마 일에 네가 왜 그리 설치냐?”는 말이란다.

그 말이 부끄럽지도 않았을까?

 

불의에 분노하지 않고, 부정에 눈감는 것은 자기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 분한 것은 살인마 전두환은 아직도 뻔뻔스럽게 살아있다는 점이다.

한 푼도 없다며 오리발 내는 놈이 골프나 즐기며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인마에게 빨대 꽂아 단물을 빨아 먹거나 동조한 놈들이

대선 판을 기웃거리니 미칠 노릇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 중에서도 나은 자을 뽑아야 희망이라도 갖지 않겠는가?

 

전시 소식을 알리는 리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이 엄정한 시기에

목숨 내놓고 전시를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려니 순서가 바뀐 것이다.

 

생명평화 미술행동’이 추진하는 ‘미얀마 민주시민을 위한 미술행동전’은

광주‘메이홀’을 시작으로,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안성맞춤아트홀'로,

안성에서 신안 ‘저녁노을미술관’으로 이어져 왔다.

 

아산 '갤러리 산책'에서 이어지는 이번 순회전이 끝나면

천안과 부산전시도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아산 순회전은 7월13일부터 25일까지 신정호관광지에 있는 ‘갤러리 산책’에서 열린다.

홍성담, 주홍, 박건, 박재동, 김진하, 김환영, 정정엽, 레오다브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한,

회화, 판화, 만화, 설치미술, 서각 등 총 70여점이 전시된다.

 

이번 아산전시는 ‘청년공동체 공감문화 플랫폼’에서 주관했는데,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김선우씨의 애살에 의해 성사되었다.

 

전시를 주최하는 측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거기다 추진할 돈도 없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한 것이다.

그는 작은 거인이 아니라 작은 여장부다.

집요한 추진과 철저한 내사로 최고의 가치를 이끌어내는 승부사다.

 

사적인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정선 작업실에 불이나 모든 것을 태웠다.

아산에서 정선까지 찾아 와 함께 애석해 했다. 

 

모든 것이 타버려 그 흔적마저 치워지고 없었다.

보험사에 제출할 증거자료 조차 없어 체념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나도 몰래 다시 정선으로 찾아 간 것이다.

 

버리기 위해 포대에 담아둔 쓰레기 더미를 트럭에 실어  모두 옮겨 간 것이다.

며칠 동안 샅샅이 뒤져 타다 남은 필름 흔적이나 사진조각 등 많은 물증을 찾아냈다.

누가 시키지 않는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어떻게 혼신을 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듯,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13일 정영신씨와 전시 개막식보다 한 시간 일찍 찾아갔다.

전시도록을 제작하기 위해 전시 작품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가서보니, 전시 디피에서부터 동영상 제작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더라.

상황이 상황인지라 손님이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이었는데,

오는 시간을 달리 정했는지 적절하게 분산되어 찾아왔다.

 

이날 개막식에는 홍성담씨를 비롯하여 박건, 이소담씨 등

서울, 광주, 목포, 안산, 인천 등지에서 전시 작가들이 찾아왔고

아산지역의 작가들도 다수 참여했다.

 

오세현 아산시장을 비롯하여 황재만 시의회의장, 아산시 관계자와 시민단체

그리고 아산시민들이 참여하여 미얀마 민주화를 응원하며 전시를 관람했다.

 

제주에 가있는 박재동씨는 동영상을 보내와 인사를 대신했다.

Peter, Paul & Mary의 '500 Milles'과 박 화백이 가장 좋아한다는

몽골초원의 노래 ‘천당’이란 두곡을 보내왔는데,

어두운 바닷가에서 머리카락 휘날리며 부르는 동영상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민중가수 문진오씨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응원메시지로 보내와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명평화미술행동’에서 벌인 ‘2021미얀마는 1980광주다’에 이어

미얀마 투쟁 현장을 찍은 스틸사진을 모아 만든 동영상도 보여주었는데,

그 현장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피를 끓게 만들었다.

 

밤 세워 자료사진을 찾아 동영상을 만들었다는 양햇살 양의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청년가수 오은배씨는 ‘미얀마의 봄’을 불렀고,

아산민예총 회원들의 ‘미얀마 민주화 연대를 위한 낭독문’과 시낭송도 이어졌다.

 

사물놀이 팀은 풍악을 울렸는데, 얼마나 우레 같았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평생 사물놀이 장단에 눈물 흘려 본적이 있었던가?

그건 미얀마 국민들의 아픔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한 김선우씨의 노력에 따른 감동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도운 ‘청년공동체 공감문화 플랫폼’의 맴버인

김온군과 양햇살양 그리고 오은배가수를 차례대로 소개했는데,

이제 열 살에 불과한 어린이도 한 명 끼어 있었다.

깜짝 놀란 것은 그 어린이가 김선우씨 아들이라는 것이다.

 

여지 것 올드 미쓰로 알았기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뒤늦게 듣기로는 유치원은 물론 초등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서 가르친다는데,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믿기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어린 아들까지 이 일을 돕게 만들었을까?

 

개막식이 끝난 후 없는 돈에 손님 접대한다며 갈비집으로 안내했는데,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산시민들이 미얀마 민주시민들의 저항과 불복종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아 부은 김선유씨와 그 팀들의 노력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2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린다.

월요일은 휴관임을 참고하시어, 많은 시민들의 관람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성명서]

 

미얀마2021은 광주1980이다!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군부독재세력에 의해 피로 물들고 있다.

이것은 곧 아시아 민주주의의 위기다.

대검 살상과 집단발포, 그리고 저격병을 이용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들의 머리와 가슴을 정조준 살해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군부독재가 갖는 악마성을 잘 알고 있다.

타락과 부패는 물론, 인권을 짓밟는 악마의 세력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40여년 전 1980년 5월광주에서 저지른 한국의 군부독재 학살행위를

2021년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학살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

'2021년 미얀마는 1980년 광주다' 오월광주가 승리했듯이

오늘 미얀마의 민중들도 기어코 승리할 것이다.

우리 미술행동은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승리할 때 까지 함께 할 것이다.

 

'미얀마의 살인마 군부독재 물러나라!'

'아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미얀마의 군사정권을 박멸하자!'

 

생명평화 미술행동

 

참여작가

 

곽영화, 고근호, 권성연, 김자영, 김수빈, 김준현, 김진하, 김화순, 김환영, 나윤상,

남궁윤, 다 솔, 레오다브, 박 건, 박경효, 박미화, 박성우, 박태규, 박재동, 서수경,

서진선, 서림하, 성효숙, 이선일, 이소담, 이현정, 이효복, 이홍원, 임의진, 조덕희,

주라영, 주완수, 주 홍, 전정호, 전혜옥, 정정엽, 천현노, 헥스터, 홍성민, 홍성담,

홍세현, Pyaesone aung,

 

사진, 글 / 조문호

 

 

전국을 헤집고 다니는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씨도 모르는 장이 있었다. 전국장터 목록에도 빠진 아산 둔포장을 김선우씨로부터 알아낸 것이다.

 

 

 

지난 12일 동자동에서 열렸던 정의당 공공개발 현장간담회 끝나기 무섭게 정동지와 함께 아산 둔포로 내려갔다.

 

 

 

네비 안내 따라 정오 무렵 둔포 장에 도착했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작은 장이 아닌가 싶었다. 고정 상가라고는 식당뿐이고, 잘동뱅이 열 한 팀이 자리 잡은 조그만 장인데. 손님이라고는 30여분 동안 일곱 명 밖에 보지 못했다. 품목도 야채모종이나 과일, 옷 등 몇 가지뿐이라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마지막 풍경 같았다.

 

 

 

장터는 보잘 것 없으나 먹을 복은 있는지 식당은 근사했다.

아산 ‘공유공간 마인’의 김선우씨를 만나 보리밥집에 들어갔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푸짐했다.

 

 

 

시골에서 9천 원짜리 비빔밥이면 비싼 편이지만, 수육까지 나왔다.

 

 

 

맛있게 얻어먹고 김선유씨 안내에 따라 ‘백암길185 미술관’ 터가 있다는 염치면 백암리로 갔다.

 

 

 

 

현충사 둘레길이라는 현장에 도착해 보니, 한적한 길가에 자리잡은 시골 집 이었다; 가난한 목수와 딸이 살다 떠난 집이라는데, 곳곳에 부녀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작은 문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가동된다는 냉장고만 버틴, 천장 낮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벌써 날씨가 더위지기 시작해 마당에 퍼져 앉았는데, 김선우씨가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가져왔다. 

 

 

김선우사진 스크랩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하는 ‘백암길185 미술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 할지 기대된다. 현충사 둘레 길 모퉁이에 자리 잡은 ‘백암길185 미술관이 또 다른 아산의 문화아지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아산의 문화 공유공간 ‘마인’으로 전시 보러 가는 날이었다.

 정영신씨와 오래 전 약속한 일인데, 가는 길에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웠다.

 

그런데, 구로에서 그를 만나고 부터 차 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앉자마자 시작된 구라는 도착할 때까지 잠간도 쉬지 않았다.

아는 게 많고, 하는 일이 강의라 달변가인 줄이야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재벌 집안의 더러운 내막에서부터 모르는 게 없었다.

이야기에 빠져 고속도로에서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조선 최고의 구라로 꼽을 만 했다.

여지 것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선생을 조선의 3대 구라로 꼽았는데,

얼마 전 백기완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는가?

그 빈자리에 추천해도 전혀 손색없는 조선 최고의 구라였다.

 

듣다보니, 금세 아산에 도착했는데,

김선우씨를 비롯하여 김온 군과 양햇살 양이 반겨주었다.

전시장은 오밀 조밀 정겹게 꾸며 놓았더라.

 

쉬거나 일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책장에는 ‘눈빛’의 예술산책 서고를 옮겨 놓은 듯 반가운 책이 많았다.

 

오히려 벽에 걸린 모듬전 스타일의 내 사진이 챙피했다.

물론 내가 정한 사진이 아니라 정해 준 사진을 만들어 보냈지만,

다양한 사진이라 잡화상 같았는데, 공감할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에게 조언하던 최석태씨 지적도 따랐다.

이런 사진보다 정영신의 아산장 같은 사진이

지역민에게 더 친숙하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었다.

그 외에도 문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단다.

숨겨 둔 캐잌과 오래된 함지와 재봉틀을 가져왔다.

 

축하받아야 할 자리는 아니지만, 졸지에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영신씨에게는 함지와 재봉틀을 주는 등, 송구스럽기만 했다.

 

아산 온천동 상가 1층에 있는 ‘마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인데,

여지 것 여러 차례 공간을 빌려 주었는데, 반응이 좋았단다.

시일과 시간만 예약해 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같이 일하거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사진집이나 좋은 책들을 골라 볼 수 있고 커피도 내려 마실 수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도 있어 모든 걸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구입할 책은 무인시스템으로 결제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업무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 끼리 생일잔치 하기도 좋았다.

 

개방전 마지막 날이라 전시 보러 온 김종우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오찬으로 육회비빔밥도 얻어먹었는데, 돈만 있다면 내가 사고 싶었다.

 돈도 없고 쓸 곳도 없지만, 돈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어찌 지역문화를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에게 밥 한 끼 사주지 못할망정, 주머니를 털게 한단 말인가?

 

그 곳에서 기획, 추진하는 일이 또 있다고 했다.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동네잡지도 만든단다.

공중파나 주류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이야기,

인문적 사유와 삶의 철학이 담긴 이야기로 꾸민다고 한다.

머지않아 ‘마인’에서 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 점쳐졌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최석태씨도 할 일이 있지만,

아산으로 이사 간 신학철 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산으로 이사 간지 일 년이 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핑계 삼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걱정이었다.

더구나 낯선 동내에 지은 큰 작업실이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최석태씨의 안내로 꼬불꼬불 시골 길로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집이 공장 같다지만, 내가 볼 땐 박물관 같았다.

신학철 선생은 지난 번 백기완선생 장례식장에서 뵌 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부터 전해주었다.

옆에서 수족처럼 도와주는 분이라고 소개했는데,

‘동학혁명실천시민행동’ 대표로 계신 이요상씨였다.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

십 여년 아내 간병으로 혼자 끓여 먹는 것이 생활화되긴 했지만,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드실 수 있었겠는가? 이제 한 시름 놓게 되었다.

 

작업실에는 신학철선생 작품 DB작업 하러‘나무아트’ 김진하관장도 있었다.

그런데, 작업 중인 작품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전체적인 메시지가 강열했다.

 

그동안 팔려 나간 작품을 찍어둔 조그만 사진도 펼쳐 놓았고,

옛날 교편 잡던 시절의 제자 작품도 보여주었다.

작업 진척이 늦어 전시를 일 년 연기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서고와 작업실 곳곳을 보여 주었는데, 이전 아파트와는 비교도 못 할 작업장이었다.

이젠 천장이 높아 대작 그리는데 전혀 지장이 없겠더라.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사방이 전원 이었다.

위쪽에는 낮은 산능선이 병풍처럼 둘러 싸 있었는데,

집 가까이 밭은 신학철 선생께서 일구는 텃밭이라 했다.

이웃사람들이 거들어 할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농사는 농사다.

 

이요상선생게서 서울 갈 약속이 있다기에 먼저 일어났지만,

남은 여생이나마 행복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끝나는 날, 제대로 된 집들이 한 번 해야지...

부디 훌륭한 대작이 태어날 산실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청년들의 꿈을 키우는 아산의 ‘공유공간 마인’이 문을 열었습니다.

청년자립공동체를 꿈꾸는 소통과 희망의 공간입니다.

개관전으로 부족한 나의 ‘사람’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문화에 대한 열정을 칭찬해주시고,

많은 성원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공유 공간 ‘마인’은 말 그대로 문화를 나누는 곳이다.

 아산시 온천동 상가에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 곳에서 기획, 추진하는 일은 깜짝 놀랄 일이었다.

뭉친 젊은이들의 생각도 올곧지만 의욕도 대단했다.

머지않아 지역문화를 꽃피우며

지역과 지역을 잇는 문화 메신저로서 큰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왜 문화 예술이 서울에 집중되어야 하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문화 예술은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단다.

팀장인 김선우씨만 50대지, 나머지 세 사람은 20대였다.

정영신씨 말에 의하면 김선우씨 주 특기가 들이대는 것이란다.

아직까지 수익이 없어 다들 무임금으로 일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력이 절실했다.

 

난, 공유공간 ‘마인’ 팀과 만나기는커녕 전화도 한 적 없었다.

정영신씨와 협의한 일이라 내용도 모른채, 시키는 대로만 했다.

꼬장꼬장한 영감쟁이라 쓰리쿠션을 친 모양인데,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으려면 정동지 말에 어떻게 토 달수 있겠나?

 

어느 누가 자기 전시한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있겠냐마는 나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마 직접 제안 받았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전시할 형편도 되지 않지만, 문제는 어느 한 가지에 집중된 내용이 아니라,

마치 유작전 같은 백화점식 전시라는 것이다.

내 사진은 잘 못된 것을 개선하기 위해 알리는데 목적을 둔 사진들이라

이 것 저 것 떠벌리는 전시는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기획팀들이 어디서 찾아 냈는지, 보낸 이미지가 대략 30여장 되었다

 이미지 목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원고도 제법 섞여 있었다.

스캔 받지 않은 것도 더러 있었는데, 필름은 손 댈 여력이 없었다.

다시 보내 온 이미지마저 수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몇 명이 달라붙어 내 자료를 샅샅이 뒤진 것 같았다.

 사진집은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 까지 뒤져, 모든 것을 알았다.

여러 명이 찾아낸 이미지를 펼쳐놓고 협의하여 선택한 사진이라 했다.

관객의 입장에서 선택하였으니, 어쩌면 더 객관적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사진을 모두 찾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일을 추진하는 그런 열성에 어찌 감복하지 않겠는가?

 

나야 시키는 대로 이미지를 찾아주는데 그쳤지만,

정동지가 프린트하면 내가 잘라야 하고,

액자 맡기러 가면 따라가야 하니 같이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비용 줄이려고 삼각지 액자집에 맡겼다.

사업 전모는 뒤늦게 알았지만, 협력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사진 사이즈가 크지 않아 아담한 전시가 되겠지만,

타지역으로 이어가며 계속 다른 전시로 확대시키는 릴레이 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협동조합도 추진하고 있단다.

이번에는 지자체에서 작품제작비 정도 지원했다지만,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사업이 틀림없었다.

 

타 지역도 마찬가지다.

큰 미술관이 아닌, 사람들이 쉽게 드나드는 곳에 공간을 만들어

작은 예산으로 지역민과 예술이 친숙해져,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드디어 공유공간 ‘마인’팀과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지난 27일, 맡겨 둔 액자 찾아 가는 길에 경의선 책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김선우 팀장 따라 온 김 온 군과 양햇살 양도 믿음직했다.

일찍 장가갔으면 딸과 손자 뻘 되는 어여쁜 청춘이었다.

다들 싱글 벙글 웃어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지껄여 실수는 안 했는지 모르겠다.

기념사진도 찍고 커피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었다.

다섯 명이라 두 팀으로 나누어, 땀을 흘려가며 육계장을 먹었다.

 

오랜만에 경의선 책거리에 있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에도 들렸다.

'마인' 전시공간에 작가의 책은 물론 좋은 사진집도 함께 전시, 판매한단다.

사진집 목록에 따라 책 구입을 한다지만, 책 구경 하러 간 것이다.

 

'예술산책'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제법 많았다.

전시장 입구에는 새로 나온 사진집도 진열되어 있었다.

김보섭씨의 ‘자유공원’사진집이 눈에 띄었다.

‘그 곳에서 정영신의 ‘장에가자’ 전시가 진행 중이라, 장터 책도 골고루 구입하더라.

 

이제 ‘공유공간 마인’이 하는 사압에 불 지필 일만 남았다.

“자! 돌리고 돌리자, 코로나 이놈을 문화예술로 녹여버리자“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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