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지난 달 ‘골목 안 풍경’을 기록한 다큐사진가 김기찬 선생의 유품 일체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다시 한 번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사진과 필름, 카메라 등 십만 여점이 박물관에 소장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 편으로 가난한 후배 사진가들의 한 가닥 희망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저런 소중한 작업도 아무런 보상 없이 기증 형식으로 소장하는데,

어찌 생계를 팽개쳐가며 하던 작업에 몰두하고 싶겠는가?

 

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마지막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 그 좁은 구멍조차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돈과 거리가 먼 사진이라지만,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 빼 먹는 치사한 언론사도 많다.

개인적 유명세를 노려 언론사에 원고료 없이 주는 버릇이 고착화되어

이제는 대형 언론사마저 공짜로 얻어 쓰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작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 공영방송인 케이비에스에서 쪽방 촌을 취재하며

내가 찍어둔 빈민들의 스틸사진을 쓰고 싶다고 부탁해 왔다.

어떤 사진들이 필요한지 몰라 적합한 사진 100여장을 골라 보내며

사용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하라 했더니 그 이후로 감감소식이었다.

돈이 없다든지, 사진이 좆같거나 편집방향이 바뀌었다 던지, 연락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

얼마나 다큐멘터리사진가를 업신여겼으면 젊은 피디 까지 그러겠는가?

그런 형편이니 군소 언론사야 말해 뭐 하겠는가?

 

열흘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약속으로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새 해 문안 겸 들렸는데, 선생께서 건강 상태가 별로 호전되지 않아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계셨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선생의 마지막 사진집이 될 ‘가을에서 겨울로’의 원고를 출판사 넘겨

꽃피는 봄날이 오면 사진집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날 신년 오찬은 서초동 ‘초원 복집’에서 있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며, 김기찬선생의 유품기증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전 강단에서 하셨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다.

절대 다른 사진가를 위해 원고료 없이 그냥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처음 듣는 기증소식이라 관심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구입이던 기증이던 가타부타할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았다.

유고작가는 그렇다 치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진가마저

눈치나 살피며 그냥 주지 못해 안달하는 자가 있다는 현실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왜 나라에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적극적으로 소장하지 않을까?

이제 국민들에게 구걸할 만큼 가난한 나라는 아니잖은가?

마치 작가가 세상을 떠나 기증하기만 바라는 것 같다.

유 무명을 떠나 가치 있는 사료들은 적극 발굴하여 응분의 보상을 해야한다.

 

‘역사박물관’에서 일부 알려진 작가 위주로 수집하며 소장 전을 열지만,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어려워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팔리지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의 기록적 가치는 다르다.

이미 수많은 무명사진가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소멸되고 말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이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빈곤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시인과 사진가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뎌내지 못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문학과 현장을 누벼야 하는 다큐멘터리사진과는

경제적 비용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과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이권에만 눈이 뒤집혀 사진가들의 권익 따윈 관심도 없어 포기한지 수십 년이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사진계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사진가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조차 침묵하니 ,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면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정신 바짝 차리자.

배고픈 것은 참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고 김기찬 선생의 생전 모습. 오른쪽 아래와 왼쪽 뒷편에 아이들도 있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다 노숙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많다.

대개의 가난이 부모에 의해 대물림 된다는 말이다.

더러는 사업실패나 이혼으로 집나온 사람도 있으나,

절반 이상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지식은 물론 배운 기술조차 없어 막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였다.

그러니 어찌 가정을 꾸릴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제대로 먹지 못하니 일을 감당하지 못해 거지로 나 앉게 되었는데,

이젠 골병들어 생긴 병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무슨 천형의 죄로 짐승보다 못하게 살며 거리에서 죽음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평등하지 못한 세상을 원망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잘 못 만난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가?

 

지난 년 말 강명자씨로 부터 어려운 사람에게 전해 달라며 백만원을 보내왔다.

그냥 주는 것보다 당당하게 받으라고 인터뷰 사례비로 5만원씩 나누어 드렸는데,

말이 인터뷰지 이름과 인적사항이나 물어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소문이 퍼져 노숙자들이 몰리는 곤욕을 치룬적도 있었다.

 

지난 18일은 마지막 남은 사례비 봉투 4개를 챙겨들고 서울역광장에 나갔다.

눈 오는 날 사례비를 주지 못한 김계열씨 부터 찾아 나섰다.

지하도로 들어가니, 방태원(53)씨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술병과 종이컵을 몇 개나 놓고 있어, ‘한 잔 얻어 마시자’며 옆에 앉았다.

 

그런데, 그 소주병은 술이 아니라 물병이었다.

술을 오랜 세월 많이 마셔 몸이 다 망가졌다고 한다.

더 이상 마시면 죽는다는 선고에 술 대신 물을 마신다는 것이다.

술을 자제한지 한 달가량 되었다는데 이젠 담배를 입에 달고 산단다.

 

지하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 대 권하기도 했다.

역무원에게 쫓겨난다며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쫒아내면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밖에 있다 너무 추워 잠시 들어왔다고 한다.

 

방태원씨는 영천에서 태어나 노숙의 길로 들어 선지가 30년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우체국에서 일한 적도 있지만,

술을 너무 좋아해 일을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단다.

 

술을 끊으니 춥고 배고픈 것은 견디겠으나 외로워서 못살겠단다. 

여지 것 술이 취해 잠들었는데, 이젠 잠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고 다독였으나 마음이 아팠다.

 

서울역 광장에서 정읍이 고향이라는 김용만(57세)씨도 만났다.

평생을 노가다로 어렵게 어렵게 살아왔으나,

이젠 당뇨와 고혈압 등 온 몸이 종합병원이란다.

 

일을 못해 거리에서 빌어먹은 지는 3년밖에 되지 않았단다.

처음엔 노숙이 힘들었으나 이제 몸에 익었다며 비시시 웃는다.

추워도 이렇게 앉아 있으면 가끔 눈먼 돈도 생긴다며 자랑 질이다.

 

안 쓰고 알뜰이 모아 고향 정읍에 한 번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어머니 무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지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단다.

여지 것 가난을 물려 준 부모를 원망하고 살았으나, 늦게나마 술 한 잔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 옆에서 졸고 있는 이재득(52세)씨는 구룡포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 상경했다고 한다.

노가다로 일하며 딸까지 두었는데, 돈 못 번다고 쫓겨났단다.

그리움도 미움도 다 잊어버리고 떠돈 세월이 어언 이십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천안에서 2년 지내다 서울역으로 옮긴지는 20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베개 옆에는 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법구경 한 권이 있었다.

궁금증이 발동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형! 당신은 돈을 어떻게 생각 하는기요?"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니, “경계해야 될 요물이지요”라고 되받았다.

그리고는 세상이치를 하나하나 풀어가는데, 끝이 없었다.

 

결론은 돈 때문에 정신이 황폐화한다며, 욕심 부리면 안 된단다.

처음으로 부랑의 세월을 슬퍼하지 않는 도사를 만난 것이다.

그는 탁발 스님처럼 거리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사례비라며 돈 봉투를 주었더니, 지나가는 노숙자를 불렀다.

몇 가지 사올 것을 적어주며 남는 돈은 자기 필요한 것 사라고 했다.

부랑의 세월을 떠돌아도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한 사람 남은 김계열씨를 찾았는데,

그 날은 배급받은 깨끗한 외투를 입고 있어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눈 오는 날 멋 낸다고 가방에 숨겨둔 낡은 외투를 입고 나와

식당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지 않았던가?

옷으로 사람 차별하는 더러운 세상이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12일 만난 김계열씨

 

작년에 환갑이었던 김계열(61세)씨는 전라도 화순이 고향이란다.

한 때는 창신동과 동대문에서 재단사로 일하며, 하청업을 하기도 했으나

경마에 빠져 가산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혼하고 가족과 소식 끊은 지는 15년 되었다고 한다.

 

지난 12일 만난 김계열씨

 

지금도 일거리가 생기면 노가다로 나가지만, 가뭄에 콩나기란다.

이젠 술과 벗 삼아 지내는데, 몸 생각하여 매일 마시지는 않는단다.

깨끗한 옷에다 안 취하니 얼마나 좋냐?며 칭찬했더니, 모르는 소리란다.

“이런 옷 입고 있으면 어느 놈이 돈을 줄 것이며,

마지막 낙인 술까지 못 먹는다면 살 필요가 뭐냐?“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 한 사람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다.

독지가 강명자씨의 자선은 빈털털이 부랑자에게 작은 힘이 되어주었지만,

덕분에 가슴 아픈 이야기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고 받은 모든 분들이 복 받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Stranger Fruit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존 헨리展 / Jon Henry / photography 

 

2021_0113 ▶ 2021_0208 / 일,공휴일 휴관

 

 

존 헨리_Untitled 19, Magnificent Mile, ILs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존 헨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kpgallery.co.ko

 

 

미국 내 존재하는 인종주의와 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부당한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아픔과 슬픔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Jon Henry의 "Stranger Fruit ;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전시가 2021년 1월 13일부터 2월 8일까지 후암동에 위치한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Gallery)에서 개최된다. 미국의 흑인 여가수 Billy Holliday가 미국의 인종주의와 흑인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기위해 1939년 발표한 곡 'Strange Fruit' 제목을 차용한 Jon Henry의 사진들은 Aperture Foundation, Smack Mellon, BRIC 등 수 많은 주요 갤러리에서 소개되었으며 현대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아놀드 뉴먼상, 엔포코펠로우상, 렌즈컬쳐 신인 아티스트상, Kodak이 후원하는 Film Photo Prize 을 수상하였다.

 

 

존 헨리_Untitled 10, Flushing, NYsm

 

존 헨리_Untitled 50, West Orange, NJsm

 

 

Brooklyn에서 활동하며 최근 미국 사진계에서 주목 받는 사진가 Jon Henry는 더 이상 포플러 나무에 흑인의 몸이 매달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존재하며 흑인 가정의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K.P Gallery 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 빈번히 일어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갈등이 개인에게 어떠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성찰하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부제처럼 그 누군가의 불행이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존 헨리_Untitled 5, Parkchester, NYsm

 

 

사람들 사이에는 인종, 성별, 세대, 사회적 위치, 신분 등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차이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거리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거리감을 넘어 차이가 우열을 가리거나 적대감, 편견으로 발전되기 시작하면 차별이 시작된다. 사전적 의미의 차별이란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어떤 사람이나 그가 속한 집단을 편견과 선입관에 근거하여 불이익을 주고 그들의 사회적 참여를 가로막는 관행이나 제도"를 말한다. 나와 다르면 틀리다, 잘못되었다고 규정해 혐오와 차별 그리고 배제의 틀을 씌운다.

 

 

존 헨리_Untitled 2, Co-Op City, NY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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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종차별이다. 인종(race)은 피부색에 근거해 타자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가치를 정하는 과학적 근거를 갖기 어려운 개념이며 서양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구분이다. 이러한 민족, 사상, 국적, 장애 등의 구분에 의해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사상 최악의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차별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9년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경찰의 무릎에 8분간 목이 짓눌리다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미국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국의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속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흑인 인권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사회적 논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존 헨리_Untitled 33, Jersey City, NJsm

 

 

이번 K.P의 전시 Stranger Fruit을 작업한 Jon Henry는 미국 내 흑인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진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 내고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그의 Stranger Fruit는 특히 피해자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 Jon Henry는 예수가 희생당한 후 성모의 슬픔과 비통을 표현한 피에타에 착안하여 작업을 한다. 작가는 사건이 끝나고, 보도와 판결이 끝난 후, 가족들과 피해자의 엄마는 지금 심리적으로 어떠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에 대해 관객들의 공감을 호소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가족들의 마음과 엄마의 슬픔은 되새길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고 생각할수록 심장은 아픈 기억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적막한 밤이 되면 문득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드릴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늘 회한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하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이며 아물지 않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존 헨리_Untitled 48, Inglewood, CAsm

 

 

인종차별, 인권문제, 이것은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조지 플로이드는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우리 역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낙인찍고 배제하고, 편 가르고, 인종,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 등 각종 차이에 따른 차별을 계속 자행하고 있다. K.P Gallery는 이번 전시를 통해 사회적 편견과 차별, 부당한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닌 나와 다른 사람,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에 대한 차별과 갈등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책임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흑인의 인권문제는 차별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며 Black Lives Matter',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다. All Lives Matter' ■ 오혜련

 

 

존 헨리_Untitled 44, Crenshaw Blvd, CAsm

 

 

Strange Fruit은 미국 사회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흑인들에게 바치는 작업이다. 스마트 폰과 공개 영상에 담긴 그들의 모습을 보라. 불필요하고 과도한 폭력에 의해 흑인들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다음은 누구인가? 나일까? 내 형제들일까? 아니면 내 친구들? 어떻게 우리가 이 폭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분노와 데모에 밀려 어머니들의 고통은 희석된다. 법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어머니들은 아들의 죽음을 견뎌야만 한다. 재판이 끝나고, 데모대가 집으로 돌아가고, 뉴스 카메라가 꺼져도, 어머니는 그 자리에 남아 신음을 내뱉으며 살아남는다. ● 나는 어머니와 그들의 아들을, 그들이 사는 곳에서, 고통을 견뎌야만 하는 현실을 재현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에 담긴 흑인 어머니들은 비록 아들을 잃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현실과, 그 현실이 자신의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잃고 홀로 남은 어머니들의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재현하였다. ● 이 시리즈의 제목은 Billy Holiday의 노래 'Strange Fruit'에서 차용하였다. 더 이상 포플러 나무에 흑인의 몸이 매달리지는 않지만, 흑인 가정의 열매들은, 우리의 열매들은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 존 헨리

 

존 헨리_Untitled 42, Central LA, CAsm

 

 

Strange Fruit was created in response to senseless murders of black men across the nation by police violence. Even with smart phones and dash cams recording the actions, more lives get cut short due to unnecessary and excessive violence. ● Who is next? Me? my brother? My friends? How do we protect these men? ● Lost in the furor of media coverage, lawsuits and protests is the plight of the mother. Who, regardless of the legal outcome, must carry on without her child. ● I set out to photograph mothers with their sons in their environment, reenacting what it must feel like to endure this pain. The mothers in the photographs have not lost their sons, but understand the reality, that this could happen to their family. The mother is also photographed in isolation, reflecting on the absence. When the trials are over, the protesters have gone home and the news cameras gone, it is the mother left to mourn, to survive. ■ JON HENRY

 

 

Vol.20210113a | 존 헨리展 / Jon Henry / photography

 

부랑자도 똑 같은 사람이다.

그들도 눈 오면 나중에 잘 걱정은 둘째 문제고 다들 좋아한다.

 

지난 12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말하고 싶다’전 설치하는 날이었다.

출품작을 챙겨들고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출품 사진만 관장께 전해주고 강아지처럼 쪼르륵 내려갔다.

눈 치울 일이나 미끄러운 것은 나중 문제고, 왜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날씨가 포근해 내리는 쪽쪽 녹아 내렸으나,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갑자기 노숙자들이 생각나 서울역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눈이 녹아 질퍽한 자리에 종이 깔고 술 마시는 패거리도 있고,

어슬렁거리는 등 평소의 풍경과 별 다를 바 없으나

다들 쌍판데기에 웃음이 만연했다.

 

당장 술 마실 자리조차 불편하고, 얼어붙어 잘 걱정이랑 나중 문제였다.

서울역에 온지 10년차라는 김계열은 온갖 똥 폼 다 잡고 광장을 활보하고 다녔다.

오늘 인터뷰 대상을 계열이로 낙점했다.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하자며 꼬셨는데,

눈 내리는 질퍽한 자리에 앉아 마시기가 거시기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물주 나타난 것을 눈치 챘는지 곽학봉이가 따라 붙었고,

지난 번 인터뷰 사례금 받았던 최완구도 왔지만,

눈 오는 날 술 한잔하려는 걸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치킨뱅이'라는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계열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입구에서 노숙자라며 들어가는 것을 제지한 것이다.

주인공이 빠져서도 안 되지만, 사람 차별하는 데 부아가 치밀었다.

주문 하라지만 다시는 안 온다며 나와 버렸다.

싸가지 없는 집에서 마시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요즘 노숙자들이 구호물품으로 방한복을 얻어 걸친 데다

마스크까지 써 누가 노숙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계열이는 눈 오는 날 폼 잡는다고

가방 속에 숨겨 둔 허럼한 롱코트로 갈아입은 모양이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선 코트를 벗어 들고 갔으나, 계열이만 못 들어가게 막았다.

얻어먹으려면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한다는 옛말이 딱 맞았다.

 

차라리 평소대로 가게에서 소주 사와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길거리 서서 소주 마시니, 다리가 아팠다.

우리 동네 아는 식당에서 한 잔 더 하려고 지하도를 건너 왔는데,

계열이와 완구는 어디로 새버리고 학봉이만 따라왔다.

 

중국집에 들어가 잡채하나 시켜놓고 소주 두병 깠는데,

생각치도 못한 학봉이가 인터뷰 상대로 바뀌어, 나는 그를 묻고

그는 나를 묻는 쌍방 인터뷰가 되어 이야기가 길어졌다.

 

환갑을 한해 남긴 학봉이는 마누라와 이혼하고 떠돈 지가 오 년째란다.

지금은 주거급여를 받아 동자동 여인숙에서 지낸다기에,

왜 쪽방에 안 살고 오만원이나 더 들어가는 여인숙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쪽방은 아침에 화장실 가려고 줄서는 게 지겨워서란다.

 

한양대를 중퇴하여 미8군에서 통역을 하며 가정을 꾸려갔는데,

아내가 바람 피웠다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판사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신뢰할 수 없어서란다.

아내는 이혼하고 외국으로 이민 가 버렸는데,

이젠 그 미움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 같았다.

 

중국집 창 너머는 백설이 휘날렸다.

밖에 나가 학봉이 기념사진도 찍고, 미끄럽지만 동자동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다시 중국집으로 돌아오니 학봉이가 훌쩍이고 있었다.

눈 내리는 걸 보니 옛날 생각난다는 것이다.

 

전화 좀 빌려 달라더니, 어딘가 전화를 걸어 눈물이 바가지다.

 

하나 남은 친구인 것 같은데, 운다고 떠난 임이 올소냐?

요즘 유행어처럼 “있을 때 잘해”란 말을 사내들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이젠 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의 답은 동자동 쪽방에 들어 온지도 그와 같이 5년째다.

쪽방에 들어 온 후부터 돈 걱정 없이 내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고 했다.

 

사진 찍어 뭐 할 것이냐기에 우리 살아 온 책 만들 것이라 했다.

출판사에 원고 넘겨 몇 개월 후에 책 나올 것이라며 떠 벌렸다.

언제까지 동자동에 살 것이냐고 묻기에 다들 떠날 때 까지라 했다.

 

책 나오면 술 한 잔하기에, 서울역광장에서 잔치 벌일 작정도 했다.

광장에서 현수막 전시 했으면 아주 좋겠으나 허락해 줄리 없고,

‘서울역 역사관’에 기획안 넣어 당사자들이 볼 수 있는 전시를 열고 싶다.

 

이젠 술이 올라 쪽방에 올라가야 했다. 4층까지 올라가려면 힘들어서다.

학봉이는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기에 주머니 털어주고 먼저 일어섰다.

미끄러운 눈길이라 발에 신경을 많이 써 그런지, 발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하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부랑자는 타고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늦은 오후, 정영신씨와 함께 박찬호씨 ‘신당’전시 보러 ‘금보성아트센터’에 갔다.

무당들의 기가 전시장을 가득메운 전시장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금보성 관장을 만났다.

차 마시러 올라 간 2층에는 유동명씨의 ‘사유의 이면’전이 열리고 있었다.

 모처럼 차 한 잔 마시며, 금관장 이야기를 듣는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유동명씨는 잘 모르는 작가였으나, 작업이 독특했다.

화폭에 닥종이를 반복적으로 한 땀 한 땀 덧대어가며 화면을 이루어 놓았는데,

짙은 회색 결이 물 빠진 바닷가 갯벌을 연상시켰다.

다양한 색조의 닥종이에 의한 콜라주 기법으로 단색조의 우아한 표면을 만들어 놓았더라.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매일 만나는 군산 바닷가의 잔상을 화폭에 담았다고 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갯벌의 느낌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이 아니라 작품수집가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집념에 의한 노력은 어느 화가 못지않은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미련하리만큼 반복적으로 해 온 끈질긴 노력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금보성관장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하여 알리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금보성관장도 쉬지 않는 열성화가이기에 많은 작품을 탄생시켜왔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다작의 작가를 특히 좋아해 도와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2월1일부터는 태백의 광부 사진가 전재훈 초대전을 연다고 했다.

나야 전재훈씨를 잘 알지만, 태백 탄광에 박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는데,

전시 보러 온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 가며 찍는 사진과 지하 4,000미터 막장에서 일하며 찍은 사진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땀이 범벅되는 일을 하지 않고 어찌 광부의 고통을 알겠는냐며 동했다고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작가의식에 탄복해 손을 건넸다고 한다,

태백에서야 여러 차례 광부 전시를 하고 사진집도 펴낸 바 있지만,

서울에서는 한 번도 전시를 갖지 않았기에 알리고 싶었단다.

 

‘금보성아트센터’는 4월 보궐선거 투표장으로 사용된 후 철거한다고 했다.

다시 건축하여 재 개관하려면 일 년 넘게 기다려야 한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다.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자는 말에 따라 나섰는데,

근사한 식당에서 자기는 육식을 안 하면서 갈비를 시켜 거지 몸보신 시켜주네.

 

좋은 전시 보고, 좋은 소식 듣고, 칙사 대접까지 받았으니,

이 어찌 도랑치고 게 잡은 일이 아니겠는가?

오래 전에 전시 한 번 하라는 도움제안도 들어주지 못했는데, 너무 송구스러웠다.

부디 새해에는 좋은 일 많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포토마가 주관한 제1회 FNK PHOTOGRAPHY AWARD 다큐부문 수상자전인

박찬호의 ‘神堂’이 오는 1월17일까지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린다.

 

박찬호는 10년 동안 인간의 죽음에 집착하여 그 현장을 찾아다닌 사진가다.

이번에 보여주는 ‘신당’은 이년 전에 발표한 ‘귀歸’에 이은 후속작업이다.

오래전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며 비롯되었다는 ‘귀歸’와

이번에 보여준 ‘신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후세계에 빠져 들게 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과연 저승이란 신화의 세상이 있는 걸까?

 

지리산 성모(마고성상), 모든 무당의 어머니

 

신을 모신 신당이란 무엇인가?

즉 산자와 죽은 자의 한을 풀어 주고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켜 주며,

신과 인간이 만나 어우러져 한 판 굿을 엮어내는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 신당이다.

그 신당을 지키는 ‘신관’들이 심방, 당골, 무당의 이름으로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사를 지내는데,

무속은 신위에 신이 없고 신아래 신이 없다.

 

충남 황도붕기도당, 고 김금화 만신

 

사진가 박찬호의 귀신 작업은 아무나 접근하기 어렵다.

타계한 김수남씨 외에 무속사진을 찍는 여류작가가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수남씨야 술 때문에 떠났겠지만, 그 여인은 원인 모를 죽음이었다.

그 당시 귀신 씌여 죽었다는 말이 떠돌 정도라 접근하는 사진가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찬호씨가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진도뽕할머니사당 악사 김오현

 

2년 전 ‘류가헌’에서 열리 ‘歸’사진전에서 작가를 만났는데, 마치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한마디로 귀신과 동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끼가 없다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말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도 무당의 끼, 아니 신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강원 다목리여신당 만신 이해경

 

십 여 년 동안 종가집 제의는 물론 마을제, 당제, 다비식 등 귀신 나오는 곳은 빠지지 않고 찾아 다녔다.

이번 ‘신당’전에는 서울 남산국사당터를 비롯하여 보광동 ’흥무대왕 김유신사당‘, ’한강밤섬부군당‘, 한남동 ‘큰한강부군당, 봉화산 ’봉화산도당, 용문동 ‘남이장군사당’, 인왕산 ‘인왕산선바위’, 여의도 ‘방학좆이부군당’, 광명 ’ 구름산당숲‘, 안산 ’잿머리성황당‘, 군자봉 ‘시흥군자봉성황제’ 수원 ‘벌말도당굿’, 강화도 ‘외포리곶창굿’, 수원 ‘거북신당’, 강원도 화천 ‘화천다목리산신당‘, ‘양양 서문리 양지말 성황사’, ‘대관령국사성황당’ 부산 아미동 ‘아미골까치산당산’, 구포 ‘대리당산’, 해운대 ‘죽성리성황당’, 서대신동 ’봉래산산제당‘, 영도 ‘조도당산’. 초량 ‘초량당산’, 기장 ‘죽성리성황당’, 통영 ‘마을굿’, ‘설운장군사당’, ‘남해안별신굿’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부인당’, 충남 태안 ’황도붕기도당, 내포지역의 ‘내포앉은굿’, 서산 ‘창리영신제’, 부여 ‘은산별신제’, 서산 ‘율목리서낭당’, 부안 ‘위도원당’ 부안 ‘수성당’, 진도 ‘뽕할머니사당’, 군산 ‘호남넋건지기굿’, 고흥혼맞이굿, ’신안 씻김굿‘, ‘황해도대동굿’, 제주 김녕 ‘성세기 본향당', 한림읍 ‘비양도 본향당, 조천읍 ‘와흘본향당’, ‘와산리불도당’, 성산 ‘신풍리본향당’, ‘신천리본향당‘, ‘수산리본향당’ 구좌읍 ‘동복리본향당‘, ’송당본향당,

표선면 ‘구렁팟당’, ‘ 당케세명주할망당’ 등 제주를 비롯한 전국방방곡곡 신당을 쫓아다닌 것이다.

 

귀신이 씌여도 단단히 씌인 것이다.

사진에 드러난 신당의 음습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초상에서 느껴지는 무당의 가 압도했다.

 

제주 동복리 본향당 심방 강대원

 

혼신일체가 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동안 해외 전시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시에서 보여주었듯이, 무속사진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작년에는 '뉴욕타임스‘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둘러싼 제의를 촬영하다’라는 제목으로

박찬호 전시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런 유명세는 이제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충남 은산별신당 만신 이일구

 

그의 작업이 더욱 중요한 것은 무속인 개인의 초상이기 전에 시대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그 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기록해 두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찬호씨의 작업노트 말미를 보니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는 굿 현장에서 신을 부르는 악기의 장단과 박자에 따라 몸이 흔들림을 느낀다. 눈을 감는다.

접신의 순간과 정신 세계로의 몰입에 몸과 마음을 그대로 의탁한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셔터를 누른다. 그것이 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터무니 없이 좁은 의식의 틀로는 그들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신당 작업을 했다.”

 

그런데,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난,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와 불교에서 세례명과 법명을 받을 정도로

여러 종교에 빠졌으나, 지금은 무신론자다.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법문이나 성경에 기반한 삶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속은 신에 앞서 우리민족의 정신이라고 생각 한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에서부터 바다에는 용왕, 산에는 산신,

임신과 출산을 관장하는 삼신할머니에서부터 조상신 등 많은 신들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 민초들의 삶에 위안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수많은 신화의 장소를 없애버렸다.

일본 놈 물 먹은 박정희 까지 ‘미신타파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국 각지에 있는 서낭당이나 신당을 없애버린 것이다.

박찬호가 찍은 사진 속의 공간들은 마지막 살아남은 우리나라 신화의 공간이며,

신과 소통하는 신관들 모습이다.

 

서울남산 국사당터 만신 최신영

 

사진집을 보면 대개 서낭당이나 신당에서 찍었는데,

유독 서울야경을 배경으로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궁금증을 작가가 풀어주었는데, 서울을 수호하는 ‘남산 국사당터’가 본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수호신당으로 국사당을 남산에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지금의 인왕산 기슭 선바위로 옮겼다는 것이다.

조선인의 성역인 남산국사당을 내 몰고 남산을 일본인의 성역으로 만들겠다는 속내가 있었다고 한다.

만신 최선영씨가 그곳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며, ‘남산국사당터’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 하효길씨는 “현대미술의 유형적인 문법으로 기록한

그의 사진은 오히려 무형적 조형성을 더 지니고 있다.

사진에서 건물과 공간속의 인물은 그 뒤쪽의 내용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신의 세계로 시대의 삶으로 현세와 내세를 느끼게 하는 종교적 신비랄까.

박찬호는 우리 굿 속에서 부단히 삶과 죽음의 신비를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그리고 그는 사진 속에 이 신비를 담으려고 한다.”고 서문에 적었다.

 

그런데, ‘신당’사진집(가격 5만원) 표지에 부적이 붙어 있었다.

사진에서 느끼는 신성함과 더불어 모든 재앙을 물리치는 복 같은 듬직한 기분이었다.

도서출판 나미브에서 만들었는데, 한정판이라 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더라.

 

오는 16일 토요일 오후2시, 전시장에서 "신당" 토크쇼가 있다고 한다.

작가를 비롯하여 민속학자 조성제씨가 패널로 나와 무속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단다.

코로나19로 많은 분을 모실 수가 없다니, 관심있는 분은 참가여부를 문의해 보기 바란다.

 

(문의 : 박찬호 010 4127 0041)

 

사진, 글 / 조문호

 

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全羅右道 群山鎭 地圖)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京浦)에 큰 하천이 있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장이 크게 섰다. 전라, 충청도에서 걷어들인 모든 물화가 여기에 쌓여지고 이것들을 배편으로 서울에 옮겨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백제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고려, 특히 조선시대에는 그 물량이 다양했다고 한다. (아래 줄임)" -'설애(京浦)' 안내문에서


경포리(설애·서래)는 요즘의 군산시 중동 지역을 일컫는다. 수문(水門) 턱밑까지 고깃배와 장삿배가 드나들었고, 오일장(五日場)이 열렸다. 1917년 제작된 지도에서도 경포리 마을이 중동 중심으로 조성돼 있음이 확인된다. '경포교' 역시 이곳 수문을 지칭했으나 경포천 직강화 공사로 보(봇물)가 매립되고 수문이 군산경찰서 부근에 설치되면서 이름도 따라갔다.

 

  1950~1960년대 서래포구(경포)
ⓒ 조종안

  경포천 수문과 흡사한 구암천 수문
   

옛날 신문에 따르면 경포리 수문은 1915년경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물 부족 사태를 겪어오던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이 바닷물 유입을 막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배수갑문'을 설치한 것. 당시 수리조합들은 용수가 부족하여 일본인 지주들이 추진하는 농사 개량 사업도 예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전한다.

호남 7정 중 하나였던 군산 진남정(鎭南亭)도 서래산을 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역 유림과 유지들 발의로 1921년 경포천 주변에 신축했다가 하천 범람으로 1928년 월명공원 아래로 이전한 것. 당시 진남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전통 목조건물이었으나 2006년 지금의 자리(개정면 최호 장군 유적지 내)에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래장터, 장시 기능 위축 후에도 사랑받아

 

  서래산에서 바라본 ‘경포천 수문’ 자리.(2011년 찍음)
ⓒ 조종안

 


위 사진에서 길 왼쪽 목공소 건물 자리는 고깃배와 장삿배가 주야로 드나들던 포구였고, 오른쪽에는 농업용수를 가둬두던 보(洑)가 있었다. 금성산 산록에서 발원한 경포천이 석교뜰을 지나 아흔아홉다리(송경교)와 댓교(꺼먹다리)를 거쳐 이곳 보에서 쉬었다가 수문을 통해 금강으로 유입됐던 것. 보는 겨울에는 아이들의 얼음썰매장, 여름에는 아낙들의 빨래터가 됐다.

도로 시작점은 경포천 수문이 있던 자리다. 농업용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배수갑문으로 경포교, 물문다리, 서래다리(설애다리), 경포다리 등으로 불렸다. 비록 폭은 좁았으나 군산에서 웅포, 임피, 강경, 논산, 공주, 천안, 서울 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대형 트럭과 시외버스가 오갔던 중요한 지방도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개설된 전군도로가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로 알려진다. 이 도로(구암 3·1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서양선교사가 구암리 주민들 불편 해소에 써달라고 보내온 600달러로 다리('구암교'로 추정)를 설치했다는 기록과 1909년 사진에 서래장터-구암리 구간 도로가 가는 선으로 나타나는 것 등이 추정을 가능케 한다.

서래장터(경포)는 경장시(경장시장) 기능이 위축된 후에도 장시와 포구 기능을 병행하며 보부상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치가 경장시보다 금강 본류와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던 점도 장꾼과 소비자가 자주 이용했던 이유일 터다. 소설 <탁류>(1939)에서 정 주사가 '안스래(경포천 서쪽)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는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난장(亂場)이 서기도 하였다. 풍물패(농악단)와 사당패 공연도 들어왔다. 그중 난장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두 달씩 이어졌단다. 난장과 풍물패는 광복 후 1960년대까지 서래장터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특히 난장 때는 건달패·야바위꾼·장타령꾼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온갖 야바위 게임과 각설이 공연으로 사행심을 부추겼다.

중동 당산제, 일제의 감시에도 300여 년 지켜

 

  경포천변에서 풍물한마당 펼치는 중동 경로당 풍물패
ⓒ 조종안

 

 
서래산(돌산) 중턱에는 3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당집도 있었다. '서래장터'를 지켜준다고 믿는 주민들이 당집과 당지기 집을 지었던 것. 주민들은 일제의 무속(巫俗) 감시와 단속에도 정월 열나흘에 당제를 지내왔다. 광복 후 채석작업으로 보존이 어렵게 되자 1970년대 중반 마을 노인들이 '당우(堂宇)'를 중동 경로당으로 옮겨 보존해오고 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스래(서래)여. 그전이는 여그로 강(경포천)이 지나갔어. 배들이 쩌그 물문다리 아래까지 들왔다 나갔다 혔응게. 그때는 쩌그 독산(서래산)에 있던 당집으로 동네 친구들하고 같이 많이 놀러 댕겼지..."
 
중동이 고향이라는 한씨 할머니(84)의 추억담이다. 결혼하고 시집에 살았던 몇 년을 제외하고 중동에서만 살고 있다는 할머니는 "어렸을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당집 주변에서 놀았는디 철들면서 출입을 금했다"며 "그때는 배부리는 사람(선주)이 많이 살았고, 당산제 지내는 대보름날은 풍물 잔치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으로 우리의 토속신앙이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 지역도 각 섬을 비롯해 하제포구, 중앙로(노서산), 신흥동(절골) 등 여러 마을에서 당제를 지냈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고, 중동 당제만 유일하게 남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오전 재현행사가 열린다. 주민들은 오후 만조시간에 맞춰 풍물패를 앞세우고 경포천변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선조들 항일정신 깃든 지명 '구암 3·1로'

구한말 지방의 상업은 주로 장시(장터·장마당)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장시는 개인과 생산자가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공간이었다. 어지러운 시국 상황 등 각종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때로는 농어민들이 모여 불만을 토로하는 여론 형성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장날에 맞춰 거사를 기획하는 등 장터는 정치적 기능도 겸하였다.

 

  군산 서래장터 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 조종안

 

 
서래장터는 한강 이남 최초로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군산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래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계획했던 것. 장날(3월 6일)에 맞춰 궐기하기로 했으나 전날 주모자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하루 앞당겨 시위에 들어가 '3·5만세운동', '서래장터 만세운동(설애장터 만세운동)' 등으로 불린다.

만세 시위는 영명중학교 학생과 구암병원, 구암교회 등이 주축이 됐다. 멜볼딘여학교를 비롯해 천주교, 불교인, 보통학교 학생까지 합세했으며 구암동산을 출발한 시위대가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군산 인구는 1만361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으로 일인 도시화 되어 있었다.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됐다. 3월 한 달에만 군산경찰서 방화사건(12일), 군산보통학교 학생들 집단 자퇴서 제출 사건(14일), 군산보통학교 방화사건(23일), 시민, 학생들 횃불 시위(30일), 군산법원 재판정 앞 만세시위(31일) 등이 일어났다. 연인원 3만여 명(총 28회)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등의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일본헌병과 무장 경찰의 총칼 앞에 한국인의 20% 정도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셈이다. 서래장터 만세운동은 남부지방의 각 도시와 마을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명(옛 서래장터~구암리 영명중학교 구간)도 '구암 3·1로'다. 지명에도 선조들의 항일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스크랩] 오마이뉴스 / 조종안기자

2012, 화령장에서

 

장 따라 다니며 만났던 시골 부부들의 정겨운 사진에서

새삼 부부 금실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금실이란 것이 저울로 달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살다보면 미운 정 고운 정 쌓여 곰 익은 것이 금실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장에 오는 부부들이 승용차나 트럭을 타고 오기도 하지만,

얼마 전 만해도 경운기가 대부분이고, 오트바이나 삼륜차 등 종류도 가지가지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소가 끄는 달구지가 더 많았지요.

장에 같이 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 해가며 친구도 되고 애인도 되며 정을 쌓아갑니다.

나 역시 전국 장터 찾아다니며 쌓은 금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3 금산장

 

'금슬(琴瑟)'은 거문고 금자와 비파 슬 자로 거문고와 비파지만, 부부간의 사랑을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거문고와 비파처럼 잘 어울린다는 말이겠지요, 아름답지만 덤덤한 화음처럼...

그러나 금슬보다 금실이란 말을 많이 써, 사전에도 부부간의 사랑을 '금실'이라 해놓았습니다.

자주 쓰면 그 말이 표준말이 되기도 하지요.

 

나도 글 쓸 때 문법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글이란 내가 편하게 말 할 수 있고 상대가 쉽게 알아채면 그만이니까요.

법이나 문법이나 일률적으로 규정지어놓은 것을 싫어하는 건, 규정지울 수 없는 게 너무 많거든요.

누가 한말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과거는 고체이고, 현재는 액체이고, 미래는 기체다”란 말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말이나 법이나 모든 것들이 굳어버린 과거를 붙들고 고민하기보다,

현실에 맞는 것들이 바람직하다는 말이겠지요.

 

왜 갑자기 부부금실 이야기가 길어졌느냐 하면 스스로의 금실 무게를 달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은 금실보다 계산에 의해 사는 내외도 많으니,

금실이란 말도 금으로 만든 실처럼 귀하게만 느껴집니다.

 

1995 고창장

 

헌법도 얼마나 잘 못 된 게 많습니까?

난, 아내와 이혼하고 지금은 동지로서 만납니다.

부부 언약보다. 동지로서의 맹서를 충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 또한 말장난에 불과하겠지만, 법이 만들어 낸 모순입니다.

 

돈 안 되는 다큐사진가로 몇 십 년 살다보니 살기 힘들었거든요.

벌이가 없으니사진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었겠습니까?

기초생활수급자만 되면 사는 게 문제없을 텐데, 아내가 젊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도 다큐 사진하는 거지인데, 이런 좆 같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난, 대마초도 마찬가지지만 잘 못된 법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동지서약서 쓰고, 사진하는 동지로 만납니다.

이제 이혼한지 5년차로군요.

이혼하여 쪽방 촌에 들어오고부터 사는 게 훨씬 나아졌습니다.

동지 일을 자기 일처럼 한다는 동지서약서 보면 눈물 날 정도로 웃깁니다.

 

2014년 밀양장

 

인생은 한 편의 장편 드라마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장터 갈 땐 내가 기사가 되어주고,

쪽방 컴퓨터 고장 나면 동지가 기사 되는 그런 식으로 만나는데,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코로나 시국인데, 누굴 만나겠습니까?

코로나 전에는 주말에만 함께 지냈으나, 지금은 일주일에 닷새 정도 함께 지냅니다.

비좁은 정영신씨 집에 같이 있는 동안은 하루 스무 네 시간을 반경 10미터 내외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니, 밀착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동지의 금실도 부부 금실 못지않다는 것을 감히 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4년 전, 광화문광장에서 동지를 만나 사진가 이정환씨 카메라에 잡혔네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순정의 드라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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