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경북 울진 흥부장

“꼽꼽하게 말린 간재미 사무봐라! 디게 맛있데이~”


바다와 경계 짓는 장터 담벼락엔
바닷가 풍경 그려져 있고
장대 위에는 손질한 생선들이…
과거 우시장·어물전으로 유명
죽변항 개설된후 쇠퇴 시작
난로 주변 장꾼들 밥 나눠 먹는 모습
사람 사는 정은 여전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이 노래는 경북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 춘양장까지 130리 길인 십이령 고개를 넘어가면서 선질꾼(지게꾼)들이 부른 노래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보부상이 뜸해지자 그 역할을 대신한 행상이 바로 선질꾼이다. 선질꾼은 울진 흥부장에서 미역·소금·어물 등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사다가 등에 지고 굽이굽이 먼 고갯길을 걸어 봉화 춘양장까지 가, 거기서 내륙의 산물인 곡식이나 의류·잡화 등과 교환했다고 한다.

 십이령은 경북 울진군 북면 부구리 흥부장에서 하당리를 지나고 두천리 말래마을을 거쳐 크고 작은 열두 고개를 넘어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춘양장으로 가는 ‘미역과 소금의 길’이다. 민초들의 애환이 오롯이 담겨 있는 이 길에서 선질꾼들은 들꽃을 꺾어 혼인도 하고, 주막에서는 아이도 낳았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다른 교통로가 생기면서 발길이 끊어졌던 것을, 2010년 7월부터 울진군에서 트레킹 코스로 개통한 것이다.

 초창기의 흥부장은 3일과 8일이 드는 날에 섰으나 1997년 부구리로 이전하면서 1·6일 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경북 최북단에 위치한 흥부장은 수협 맞은편에 들어서는데, 뒤편으로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풍경과 함께 원자력발전소가 내려다보인다.

 흥부장을 찾은 날, 바람막이로 서서 바다와 경계를 짓는 장터 담벼락에는 바닷가 풍경이 그려져 있고, 장대 위에는 손질한 생선들이 걸려 햇빛과 노닐고 있었다. 담벼락에 그려진 바다 그림에서는 고기떼들이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몰려올 것만 같고, 한가한 어촌 풍경의 그림에서는 고기잡이 간 남편을 기다리며 끓인 된장국 냄새가 그윽하게 풍기는 밥상이 보이는 것 같다.

 해가 어스름하게 고개를 내밀자 장 풍경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 모습을 드러낸다. 모자와 목도리로 둘둘 감아 눈만 내놓은 할머니가 마스크를 벗더니 “고포미역 먹어봤능교? 우리 동네 바닷가에서 나온 긴데, 옛날에는 임금한테도 바쳤다카데예” 한다. 나곡6리 고포마을에서 미역을 갖고 나온 박순심 할머니(73)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고포미역은 수심이 얕은 암초에서 자연적으로 성장한 미역을 채취한 것으로, 울진의 특산물로 자리 잡았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손으로 간재미를 정리하던 김연옥 할머니(75)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변에서 아침 6시부터 나와 간재미를 정리하고 있다는 김씨 할머니에게 손 시려운데 장갑이라도 끼고 하시라고 말을 붙이자 할머니가 씩씩하게 대답한다.

 “내사 늙어 그런지 추운 걸 잘 모르고 산다 아이가. 사시사철 이 간재미만 파는데, 꼽꼽하게 말라 디게 맛있데이! 니도 한번 사무봐라.”

 검은 비닐봉지로 둘둘 말아놓은 발로 뒤뚱거리며 걷는 김씨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곡예사 같다.

 겨울철 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위를 이겨낸다. 큰 깡통 안에 촛불 두어 개 켜놓고 의자로 사용하기도 하고, 갈탄을 지핀 화롯불 위에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장터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장작불을 지피거나 난로가 있는 곳에는 주변 장꾼들이 모여들게 마련인데, 서로 밥을 지어 나누어 먹는 넉넉한 풍경에서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 한다.

 우시장과 어물전이 유명해 울진에서 가장 컸던 흥부장은 죽변항이 개설되고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옛 보부상들의 자취나 흔적이 느껴지는 길 위에서 여전히 장은 열리고 있다.

 흥부장 외에 울진에 서는 장은 생토미발아쌀·고포미역·송이·대게·오징어·은멸치 등이 나오는 울진장(2·7일), 죽변항이 있는 죽변장(3·8일), 후포항과 대게축제로 유명한 후포장(3·8일), 왕피천하늘조청·매화장수쌀엿·야콘즙·산골솔잎이 나오는 매화장(4·9일), 망양갯바위로 유명한 기성장(1·6일)이 있다. 
 




ⓒ 농민신문 & nongmin.com,











 

 

 

 

 

농촌과 도시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유성장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5일장이자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장이다. 그리고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춰,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유성이다. 유성장 주위에는 온천장과 계룡산 등의 관광지가 있는데다 교통마저 편리해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유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온천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온천으로 많은 신혼부부들의 신혼여행 코스이기도 했다. 많은 유성온천에 대한 이야기 중 백제 때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전장에서 다쳐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약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을 때,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뜨거운 물이 흐르는 곳에서 몸을 비비고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엄마는 약 대신 그 물을 떠다가 아들에게 발라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상한 아들 몸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아물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뜨거운 물이 나오는 유성’의 온천 효능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유성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박순임(86세) 할머니 말로는 원래 유성장이 5일과 10일에서는 장이었는데, 장날마다 비가 내려 4일과 9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유성장을 찾아간 날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박씨 할머니는 토종탱자와 모과를 펼쳐놓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렇게 움직거려야 덜 추워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허지유, 보기 좋게 진열해 놓아야 더 잘 팔려유.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하지만 못생겨도 차 맹글어 먹으면 감기에 이보다 좋은 약이 없다우.

     

  • ” 비가 내려 따뜻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길가 난전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모과를 촬영했더니 “할망구나 모과나 못난 것들만 찍는다.”며 옛이야기까지 들려주신다. “옛날에는 소시장도 있었다우.

    정월 보름날에는 줄다리기를 했고, 7, 8월 달에는 풍물패들이 난장에서 질펀하게 놀았지유~ 세월이 참 많은 걸 변하게 허는구먼유~ 지금도 옛날 그때 장터가 그리워유~.” 그 옛날 짚신을 신고, 등 짐을 지고, 밤새 걸어 장을 찾던 장꾼들이 사라진 대신 지금은 트럭에 갖가지 물건들을 싣고 다니며, 장 서는 곳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의 시대가 됐다. 기동력이 좋으니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정보만 있으면 전국 어디든 찾아 나선다.

  •  

  • 청정지역 무주에서 왔다는 박해수(54세) 씨는 농사지은 호박을 싣고 와 트럭 위에서 탑을 쌓듯 정성을 들인다. 무너지면 다시 올리기를 반복해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하다. 수직으로 서 있는 호박을 보던 할아버지가 “그 호박 한번 잘 생겼네, 젤 큰 놈은 얼마나 한 대유?”, “말만 잘하면 꽁짜로도 줘요.” 박 씨의 거침없는 말솜씨에 사람들이 꼬여든다. “차가 있으니 먼 데 있는 장도 다녀유~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안 가는 곳이 없지유. 아무리 인심이 삭막하다 해두 아직 옛날 인심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도 많구먼유~.”

  •  

  • 하루도 쉬지 않고 장터를 찾아다닌다는 박 씨의 너스레와 함께 난로 위에 얹어놓은 고구마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지나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있기에, 고구마 한 쪽이라도 나눌 수 있는 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유성장은 1916년 10월에 개설되어, 대전 유성구 장대동 일대에서 열린다. 대전은 물론 인근 지역인 옥천, 공주, 연기, 조치원, 금산, 논산, 무주에서까지 장을 보러온다. 장 규모가 크다 보니 장옥주변 공터와 골목까지 장이 들어선다. 장대동사무소 뒤편에는 가축장이 열리고, 그 안쪽으로 어류, 채소류, 의류, 식기류 좌판이 쭉 늘어서 있다. 유성의 특산물로는 구즉마을의 묵, 학하리 고구마, 세동 상추, 유성배가 유명하다.

     

  • 처음에는 곡식이 많이 거래되었으나 지금은 고추와 마늘이 더 잘 팔린다고 한다. 또한 유성장에서 맛볼 수 있는 먹거리로는 보리밥과 팥죽, 잔치국수가 있다. 선비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유성(儒城)’은 우리나라의 중심지다. 1973년 5월부터 대덕연구단지가 자리를 잡으면서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곳에 모인 지성들이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과 첨단과학 도시 유성의 글로벌화’란 기치를 내걸고, KAIST와 함께한 국제화거리를 유성의 명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국제화거리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문화 장소를 말한다.

  •  

  •  ‘과학도시’ 유성은 천혜의 온천을 내세워 해마다 ‘유성온천문화축제’도 연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온 유성온천은 1907년 유성에 정착하게 된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성온천을 찾는 절반 이상의 손님이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후 대전역이 생기고,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각지의 우리나라 사람들도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  

     

     

     

     

    장터에는 비가 오는 날씨 탓인지 손님들이 적었다. 장꾼들만 난로 옆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장날만 되면 교통이 너무 번잡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복합터미널쇼핑몰까지 생긴다고 혀서, 모두들 걱정이 많아유~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장날이면 구암역 주변과 유성농협, 유성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도로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여기에 복합쇼핑몰이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시골장터에 오면 특색 있는 물건들은 무엇이든 다 구입할 수 있어야 된다는 등, 장사 안 된다고 아무거나 갖다 팔면 못쓴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자 장씨(52세)가 한마디 거든다. “장사꾼끼리도 서로 상부상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뱁인디, 좀 팔린다 하면 너도나도 갖고 나오니께 문제지, 눈에 돈만 보이고 상도덕이 없어지고 있구먼유~” 유성장옥 안에서는 지난 8월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의 하나로 ‘참 조은기름’ 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생산하고 있다.
    유성장에서 거래되는 참깨와 들깨들을 모아 압착하는 방법으로 기름을 짜서 시세보다 싸게 판다고 한다. 유성시장 안의 백세두부집에서 파는 어르신들이 짠 참기름과 들기름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할머니들의 손맛이 더해져 고소한 냄새를 장터에 풍기며 시장의 건강한 먹거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  

    •  

    • 비옷을 입고 대파와 호박순을 팔고 있는 오명근(87세) 할아버지는 공주에서 오셨다. 직접 대파농사를 지어 싸게 팔고 있지만 사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 씨 할아버지는 할멈하고 같이 장사한 지가 50년이 되어간다고 한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할망구 잔소리 듣기 싫어 떨어져 장사해유. 이쁜 여자 손님에게 덤을 줘도 잔소리 안 하니 좋구먼유~ 자~ 대파 드려유~ 복 받으려고 싸게 파니 한 단씩 사가유~.” 

    • 멀리 떨어져 장사하고 있는 신현분(81세) 할머니는 장날마다 딸과 외손녀를 만나 온천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고 자랑한다. 3대가 장날마다 만나 온 지도 5년째란다. 한때 유성장에서 곡물 장사를 했다는 신 씨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게 변해도 장바닥만은 그대로 있구먼유~.” 할머니 눈에는 옛날 장사하던 모습이나 물건은 물론 인심마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  

    • 장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하찮은 이야기에도 같이 웃고 같이 걱정해주는 정겨운 이웃이 많아 좋다. 장터에는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생활 이야기와 삶의 자취까지 함께 진열되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옷을 바꿔 입는 자연을 마중하듯 사람들은 장터로 모인다.

       

     


     

     

     

     

     


     

     

    (25)전남 구례 산동장



    지리산 자락에 1956년 7월 개설
    12월초~1월 산수유 거래로 성시


    옛날 양철지붕 그대로…
    신발집·곡물전·철물점 등 모두 한곳
    생선가게만 두군데 있어

     


    한 해의 시작과 끝이 가장 긴 나무가 산수유다. 이른 봄과 늦가을, 마치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전남 구례 산동마을에 가면 알 수 있다. 봄에는 산수유꽃 노란 물결, 가을에는 산수유 열매 붉은 물결이 흘러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이 만든 황홀경에 흠뻑 취하게 만든다. 어떤 이는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고 했다.

     산 크고 물 크고 들도 넓은 지리산 자락의 구례 산동면. 이곳 원촌리 삼거리에서는 2일과 7일이 드는 날이면 산동장이 선다. 산동장은 1956년 7월에 개설됐다. 구례장에 비하면 한쪽 귀퉁이밖에 안 되는 조그만 장이지만 산수유 수매가 시작되면 산동면 58개 마을에서 새벽부터 산수유를 갖고 나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산동장은 이 지역에서는 ‘파싹장’이라고도 한다. ‘파싹(잠시 잠깐)’ 열렸다가 오전 10시가 넘으면 장이 파하기에 붙은 이름이다. 산동장은 12월 초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산수유 거래로 성시를 이룬다.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산수유 품질을 자랑하는 산동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로, 전국 산수유의 74%를 생산한다. 그래서 이즈음 장에 나온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또한 “어째, 산수유 많이 땄는가?”로 시작해 “많이 따소”로 끝난다.

     “나가 산수유 때문에 시집갔당께. 쬐깐해서부터 산수유씨를 입으로 깠어. 몸에 좋은 산수유씨를 입으로 발라내는 산동 처녀와 입 맞추고 살면 보약이 따로 없다며 순천에서 찾아왔었당께. 말도 마소. 어릴 때부터 핵교만 파하믄 책보 던져놓고 산수유 까는 것이 일이였어. 봐봐. 기계 나오기 전에는 입으로 씨를 발라냈으니 내 앞니가 많이 닳아부렀제. 아따, 요것 맛봐. 달달하고 시고 떫제라. 그랑께 약이 되제.”

     산수유를 갖고 장에 나온 장옥계 할머니(80)가 산수유 몇알을 입에 넣어주고는 아까 받은 목돈을 헤아리며 웃는다. 할머니의 발그레한 얼굴이 산수유보다 붉다.

     서너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 보낼 수 있어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로 불렀다는 김덕선 할머니(76)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가 산세가 좋아서 그런지, 여그서 쪼금만 벗어나도 산동 산수유 같은 육질이 없다고들 해싸. 이 때깔 좀 봐봐. 곱지라? 내가 시집갈 때 볼랐던 연지색이랑께. 김장할 새도 없이 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고생바가지여. 씨 발라서 씻어야제, 쪄서 말려야제, 일이 겁나 많애. 그래도 큰돈 만진께 고상한 보람이 있제이.”

     지금은 달랑 산수유 한 자루를 갖고 나온 김씨 할머니. 시세가 궁금해서 나와봤단다. 천년 전 중국 산둥성(산동성)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올 때 산수유씨를 가져와 여기에 심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산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산동 계척마을에는 천년 된 산수유나무가 있다. 산수유는 몸에 좋은 성분이 많아 신선이 먹는 열매로 알려져 있다.

     산수유가 나오는 철이면 장터도 덩달아 활기를 띤다. 옛날 양철 지붕을 그대로 쓰고 있는 몇 채 안 되는 장옥 안에는 생선가게만 두 군데가 있을 뿐 신발집·주방잡화점·옷집·곡물전·채소전·건어물전 등이 모두 하나씩밖에 없다. 철물점도 단 한곳인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산동장은 산수유가 끝나야 장이 돼. 산수유 딸라고 사람들이 다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섣달이 넘어가야 슬슬 장에들 나오제.”

     임실철물집을 하고 있는 최영일씨(74)의 이야기다. 이 철물점에서 산수유씨 분리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게는 경운기 가득 산수유를 싣고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줄곧 산수유농사만 지었다는 오완식씨(65)는 어머니 배에서부터 산수유를 먹어서인지 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산수유 105㎏을 싣고 나와 큰돈을 받았다면서도 얼굴이 밝지 않다. 사연을 물었더니 산수유를 몰래 따가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도둑들 손을 타 시방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요. 내 몸뚱이보다 더 정성 들여 키웠는데 그러면 안 되제라. 남의 것인디.”

     구례에는 산동장 외에 구례읍 봉동리에서 3일과 8일에 서는 구례장이 있다. 구례장은 섬진강 은어를 비롯해 지리산 자락의 기름진 땅에서 나오는 자연송이와 토종꿀, 표고, 능혈버섯(능이버섯)이 유명하다.

     
    (24)경남 진주 반성장
     
     
    임진왜란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일반성면 등 5개면 중심 상권
    3대째 50년 동안 내려오는
    ‘진주반성 전통한과’ 유명세
    진주는 민속놀이 소싸움 발원지
    전용경기장서 토요일마다 열려
     
     

     

    “할매, 올해는 감 많이 열렸습니꺼? 내사 마 장에 내다 팔 게 없슴니더.”
     “지난 장에 안 보이드만 오늘은 뭐 갖고 가노?”

     잘 익은 <대봉>감 한자루를 손수레에 실은 강씨 할머니(75)와 팥 몇되 담긴 보자기를 손에 든 박순남씨(58)가 장터 가는 길에 나누는 이야기다. 박씨의 보자기에서는 바람과 햇볕을 실은 자연의 소리가 가만가만 흘러나온다. 강씨 할머니는 50여년 전 감을 이고 장에 가다 산기가 느껴져 집으로 달려와 아이를 낳았다며, 붉은 감만 보면 딸 생각이 난단다. 감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여 담아내는 할머니의 정이 사람들 사이로 붉게 익어간다.

     “벌써 제사장 보러 왔나?”

     경남 창원시 진전면 대정마을에 사는 조씨 할머니(76)가 장 끝머리에서 생선 파는 김얼리 할머니(83)를 찾아왔다가 들은 인사다. 김씨 할머니는 48년째 장사를 하다 보니 장에 나오는 사람 제삿날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

     “제사상에 올릴 생선들이 모두 내 손에서 나갔으니 내 죽으마 괄세는 안 할 기다. 그자?”

     겨울철 생선 노점에는 장작불이 피어올라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다. 지나가는 사람 한두명만 모여도 잊어버린 시간을 꺼내듯 옛 장터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반성장은 임진왜란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져 비탈길에 장이 섰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과 여러 보부상이 모여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했던 일이며, 반성유치원 자리가 옛날 비탈장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넘실거리며 장작 타는 소리를 깨운다.

     오늘날 반성장은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3일과 8일이 든 날에 열린다. 일반성·이반성·사봉·지수·진성면 등 5개 면의 중심 상권인 반성장은 따끈한 국밥이며 인근 주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비롯해 수산물·건어물·식료품·의류·잡화 등 없는 것이 없다.

     3대째 50년 동안 내려오고 있는 ‘진주반성 전통한과’는 쌀을 삭힌 조청을 이용해 전통 비법으로 만들어 반성장의 특산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해마다 10월이면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격전을 벌인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넋을 기리기 위해 등을 밝히던 것이 축제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군사적인 목적이나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등불을 띄웠다고 한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오째 알겄노? 기냥 웃고 살다 가는 기라.”

     김월례 할머니(88)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북새통인 방앗간을 건너와 울려 퍼진다. ‘웃고 살다 가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인지 그동안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다는 할머니는, 오늘도 웃기 위해 나왔다며 소주 파티로 할머니들을 불러 모은다.

     “소싸움 하는 데 가이께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왔데. 그런 데나 가지, 장에 뭐 볼 거 있다고 사진을 찍어 쌌노.”

     대정에서 참기름 짜러 나왔다는 강꽃순 할머니(83)가 아는 척을 한다. 소싸움 이야기 좀 해달라는 소리에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왜놈들 밑에 살 때, 그때 분풀이로 소한테 싸움을 시킨 기라. 남강 백사장을 모래 문지(먼지)로 하얗게 뒤덮고 있으면 왜놈들이 겁이 나 나루를 못 건넜다 안 카나.”

     “말도 마소. 우리 영감쟁이는 소 출전시킬라고 인삼에다 배암까지 달여 믹였는데, 집에만 있던 소가 암내를 맡고 고마 암소를 올라타뿐 기라. 화가 난 영감쟁이가 퇴장된 소를 바로 도살장으로 보내부렸다 안 카나.”

     조선의 민속놀이인 소싸움은 진주가 발원지로, 지금은 전통소싸움경기장에서 토요일마다 상설 경기가 열리고 있다.

     일본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혼이 살아 있는 것인가. 무질서하게 보이는 장터지만 옛 어르신들의 기백을 장터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스마트폰 문자로 대화하는 시대이지만 아직은 얼굴을 마주보며 사람 사는 정을 나눌 수 있기에 오늘도 반성장에는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반성장 외에 진주에서 열리는 장은 봉곡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난장이 열려 많은 농산물이 쏟아져 나오는 진주장(2·7일), 딸기와 호박이 나오는 금곡장(1·6일), 파프리카가 특산물인 대곡장(1·6일), 단감·배·홍고추로 유명한 문산장(4·9일), 미천밤과 상황버섯, 배즙이 나오는 미천장(5·10일)이 있다.  

     

     

     

     

     

    “앗따! 월하네는 잠도 안자고 나왔능갑네, 어짜쓰까 영감이 할매들 잠 안 자고 나와뿐게 일찍 서두르라고 해샀드만, 많이 기둘려야 짜것는디….” 임피에서 나온 이씨(76세) 할머니가 줄지어 선 푸대 앞에 들깨자루를 내려놓는다. 이른 아침부터 방앗간에는 기름을 짜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오는 순서대로 놓아둔 자루가 바뀔세라, 지키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 표정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  

  •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임피 인물 자랑 좀 해 달랬더니 “내 이름이 뭔지 알어 이끝례여, 하도 자식을 낳싼게 끝례라고 지었다는구먼. 울 동네서 내가 인물이여 노래 잘 허지, 김치 맛나게 담그지, 자식 잘 키웠제. 이만허면 인물 났제이.” 이씨 할머니 입담에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벗겨지듯 할머니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지나가는 사람 발만 멍하니 쳐다보던 할머니들의 말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한다. “요새 걷는 것이 유행인지 우리 동네 근처에 구불 길이 생겨갔고 사람들이 솔찬히 왔사드만. 주말에는 절에서 점심도 공짜로 준다고 헙디다.”

  •  

  • 군산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도시다. 군산에서 즐기자는 슬로건인 ‘구불 길 군산도보여행’은 일곱 개의 스토리 구불 길이 있다. 비단 강 길을 시작으로 구불7길이 새만금 길이다. 시간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남긴 전설이나 역사의 흔적, 그리고 편안한 자연을 품에 안을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테마로 마련된 ‘2013 군산세계철새축제’가 겨울에 열린다.

  •  

     

    •  

      군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오일장이 대야장(전북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이다. 끝자리 1일과 6일이 들어간 날에 서는데, 전라선이 지나는 요충지라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부터 군산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수산물까지 없는 게 없다. 큰길 따라 양쪽으로 줄지어 장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00평이 넘는 장옥을 지었으나 상인과 장돌뱅이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장이 옮겨지게 되었고, 기존의 장옥은 폐쇄되었다고 한다.

    •  

    • 교통이 좋아 군산, 김제, 익산, 전주 상인들뿐만 아니라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정읍, 고창, 충남 서천에서도 온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모여드니 사람들도 모이는 것이다. 장날이면 곡물, 생선, 젓갈, 채소류 등과 각 지역 특산품들이 나오지만 대야장의 명물은 무엇보다 묘목이다. 큰 도로가에 대봉감이 줄렁줄렁 달린 감나무가 수직으로 서 있어 가까이 가보았다. 감나무 잎이 싱싱해 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농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장날만 나온다는 김씨(67세)는 나무는 가을에 심어야 봄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땅이 얼기 전에 심어줘야 한단다.

     

    •  

      21세기를 약속받은 땅이 군산이라고 한다. 시간이 일을 만들어내듯 지금도 새만금간척사업은 진행 중이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미곡수출항으로 크게 성장했다. 군산시를 에워싸고 있는 옥구읍 이름을 풀어보면 물 댈 옥(沃)자에 개천 구(溝)자다. 개천에 물을 댄다는 뜻이다. 이제 개천에 물을 대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은 고군산군도와 비안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를 잇는 33km의 바다방조제를 쌓아 서울 여의도의 140배 규모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단위 간척사업이다. 

    •  

    • 100년 전인 1904년 대야면 지경리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지경장이 대야장으로 이름만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야면에서 장 구경나온 장기봉(73세) 씨는 대야에서 나오는 쌀이 국내 최대 규모의 농산물 품평회에서 장관상을 받은 ‘큰 들의 꿈’이라며 쌀 자랑에 열을 올린다. “나락은 잡종 없이 혈통을 잇어간께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안 헙디여, 사람도 똑같은 것 보믄 쌀이 사람을 맹근당께. 글고 벼꽃은 봤는지 모르겄네, 요것이 오전 10시에서 12 사이에 딱 한 번 펴는디 당체 부지런 떨어야 볼 수 있당께.” 요즘은 오히려 잡곡이 부자들의 음식이 되어가지만 쌀은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다. 

    •  

    • 한의원 앞에서 할머니들이 펼쳐놓은 난장에는 산과 들, 밭에서 가을걷이를 끝낸 작물들이 사람들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검정 쌀이 되박에 얌전히 담겨져 있고, 무 여덟 개가 북처럼 다소곳이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녹두 위에 올려진 참기름병이 지휘만 하면 자연의 음악이 연주될 것만 같은 풍경이다. 나포에서 온 박순자(75세) 할머니가 “선유도 구경 왔는갑네, 군산 온 게 볼거리가 많지라우.”
      군산하면 선유도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선유도(仙遊島)는 이름 그대로 풀어도 ‘신선이 노니는 섬’이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신선도 머물다 간다고 했을까.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는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는데, 자연이 창조한 천혜의 해상공원이다.

    •  

    •  

      길게 늘어서 있는 장터에는 밀고 다니는 수레꾼 장돌뱅이가 많았다. 손수레 위에는 여인네들이 김장철에 사용할 수 있는 갖가지 재료들이 실려 있다. 청각과 남새우, 김장 봉투와 고무장갑, 고무줄 같은 잡화까지 손수레 가득 싣고 나와 여인네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닌다. 청각과 남새우를 파는 장옥례(67세) 씨는 바구니 안에서 톡톡 튀는 남새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  

    • “할매요,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남새우사다 아욱국 끓여 잡사 봐, 소고깃국보다 맛나.” 죽산리에서 나온 김다분(85세) 할머니가 “시계 고치는데 2만 원이나 써 뿌려 오늘은 못 사것구먼, 도란장에도 오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신용이었는데 지금은 외상으로 달라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생선가게에서 잠시 쉬는 김씨 할머니께 대야장의 옛날이야기를 부탁했다. “참말 옛날이 좋았제이, 소 새끼가 지 엄니 졸졸 따라 가기도 허고, 국밥집에서 밥 먹다가 사돈도 맺고, 동지 지나 문 길가에 자리 깔고 토정비결 봐주는 사람 옆에 붙어서 귀를 세우고 듣고 그랬제. 그 뭐시냐 동백기름 맨드르하게 볼르고 양복 입고 폼재며 어슬렁거리던 사람들도 있었당께.”

    •  

    • 생선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이씨(67세) 좌판에서 봉지 열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할머니가 참견한다. “소시장 있을 때는 여그 장이 볼만했어라, 사람이 많이 모인께 벼라별 사람들이 다 왔어, 소 판 돈으로 투전판 벌이다가 돈 잃고 술주정 부리고, 소 헐하게 폴았다고 한잔, 잘 폴았다고 한잔, 국밥집에는 이쁜 새악시도 있었당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삶의 터전이었던 장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  

    • 대화장 끝머리에는 집에서 만들어온 도토리묵을 맛보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드는 박씨(75세)가 도토리묵 자랑에 열을 올린다. 임피에서 온 문말자(88세) 할머니는 마늘과 콩을 팔고 있다. “집에 있기 갑갑혀서 콩 쪼까 갖고 왔는디 당체 시세를 모르겄어, 마늘은 얼마에 폴아야 쓰까? 오늘 사람구경 많이 했승께 남는 장사했제.” 수줍게 웃으며 아쉬운 듯 말을 이어간다. “서로 필요한 것끼리 바꿀 때가 좋았어라,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를 안 진께 모다 바꾸고 그랬어, 임피아짐 오늘은 뭣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 생각나서 한 번씩 나오믄 중국산이냐, 농사진 것이냐 물어봤싸, 사람 말을 안 믿고 자꾸 물어싸….”

     

    • 요즘 장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다. 각 장터에는 팔 물건이 있을 때만 나오는 지역 원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손수 농사진 것만 갖고 나오기 때문에 경운기와 오토바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간도매상이 물건을 빼앗아 흥정에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싸게 사려는 도매상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농민들은 몇천 원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른 봄부터 땅을 일구어 씨앗에서 곡식이 나올 때까지,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한 톨의 농산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룬다. 흙과 함께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 시골장터다.

     

     

     

     


     

     

     

    임실 갈담장

     

    “모처럼 파마하는 날”…장터내 미용실 ‘떠들썩’

     섬진강 상류지역 중
    밤·약초 주산지인 강진면에 위치
    2·7일 드는 날 열려
    가을걷이 끝난 농산물 좌판
    호두·은행·표고 등 널려

     

    “시방도 이쁘단 소리가 좋은 것 보믄 늙어도 여자랑께. 아짐! 벌써 참기름 짜 갖고 오요.”  차영자 할머니(72)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육젓 사러 왔는디 다 폴아부렀다고 허요.”  음력 6월에 잡히는 새우가 알이 차고 살이 튼실해 이 새우로 만든 육젓이 김치에 들어가야 개운한 맛이 난다, 전라도 김치는 청각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는 등 김치 이야기 하나로도 미용실 안이 떠들썩하다. 30년째 미용실을 지키고 있는 차씨 할머니는 고구마 캤다고 가져오고, 호박 땄다고 가져오고, 김장했다고 가져오는 할머니들의 인정에 모두들 한식구처럼 지낸다며 자랑이다. 할머니들은 파마하느라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장을 보거나 물건을 팔기도 해 미용실은 장날이면 덩달아 바빠진다.

     “아따, 요즘은 교회서 호떡도 나눠주네이. 자네도 먹었는가?”   조순임 할머니(81)가 호떡을 갖고 미용실로 들어오다가 “오메! 젊은 손님도 왔능갑네. 여자는 미용실에 와야 이뻐지제. 파마하러 왔소?” 하고 말을 건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건네는 질펀한 사투리가 고향을 느끼게 한다.

     이곳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갈담장터. 나가 보니 근처 교회에서 장에 나온 사람들을 위해 장터가 서는 버스터미널 앞에서 호떡과 대추차를 종이컵에 담아 나눠주고 있었다. 덕분에 시장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종이컵을 손에 든 채 시장을 본다.

     장옥 너머 산에서 날아온 가을 햇살을 받으며 고들빼기 한단 펼쳐놓고 앉아 있는 채말순 할머니(79)의 순수한 웃음이 은행잎과 함께 땅 위에 떨어진다. 노란 은행잎을 건너다보던 할머니가 이야기한다.   “살 제 남원, 죽어 임실이란 말이 있어라우. 산과 산이 병풍 두른 것맨치로 여그 풍경이 좋응께 죽으면 모다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해쌌제.”

     삶과 죽음을 가까운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채씨 할머니가 사는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은 섬진강 지류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섬진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갈담장에는 밤·호두·은행·표고와 각종 약초가 나오는데, 특히 약초와 밤은 강진면이 주산지라고 한다.

     오일장은 역시 지역경제의 모세혈관이자 문화센터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안부를 묻는가 하면, 할머니들은 가을걷이 끝에 모아온 농산물을 펼쳐놓은 좌판을 어슬렁거리며 눈 도둑 하기에 여념들이 없다.

     “아따! 돈이 없어 못 사제, 없는 것이 없당께. 하래네(돼지감자) 다듬어 갖고 왔는디 이삐지라?”

     강진면 옥정리에서 돼지감자를 갖고 나온 곽순임 할머니(81)의 말이다. 당뇨에 좋고 체지방도 분해한다고 알려진 돼지감자를 이곳 사람들은 뻥튀기처럼 튀겨 물 끓여 먹는 데 쓰려고 사 간다고 한다. 옥처럼 맑고 찬 샘이 있다는 옥정리는 조선 중기에 이곳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머지않아 맑은 호수가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이 적중한 곳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 옥정호 확장 공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치즈의 발상지이며 호남좌도 필봉농악으로 유명한 임실(任實)은 ‘씨앗이 튼실하게 영그는 동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 치즈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우유를 숙성시켜 만드는 치즈는 우리나라의 된장이나 청국장과 비슷하다. 각 가정의 장맛이 다르듯 서양의 치즈 맛도 발효하기에 따라 색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임실이 고향인 김용택 시인은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장터에 가면 자연이 키워준 농작물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땅과 흙과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살아 있는 시’를 몸으로 쓰는 농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아닐까.

     갈담장은 2일과 7일이 드는 날에 선다. 면(面)의 이름을 따면 강진장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갈담장이라고 부른다. 갈담장 외에 임실에서 열리는 장은 임실장(1·6일), 오수장(5·10일), 관촌장(5·10일), 신평장(3·8일)이 있다. 주로 나오는 것은 생활 필수품과 쌀·고추·채소류. 가을에는 감, 봄이면 산나물이 많이 나온다. 특산물은 운암면의 붕어, 청웅면의 ‘남양수시’ 감, 성수면의 송이, 삼계면의 콩잎 등이다.  

     

     

    정영신 글.사진 / 눈빛 / 2012년 8월

     

     

     

     

     

     

     

     

     

     

     


    살아온 날을 사진으로 되짚다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38] 정영신, 《한국의 장터》(눈빛,2012)

     


    - 책이름 : 한국의 장터
    - 사진·글 : 정영신
    - 펴낸곳 : 눈빛 (2012.8.1.)
    - 책값 : 29000원

     


    (1) 시골 저잣거리


    저녁 여덟 시가 살짝 넘은 구월 한복판, 시골은 바야흐로 깜깜합니다. 어느 집에서고 말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몇몇 집은 이무렵에도 텔레비전 켜 놓은 불빛이 바깥으로 살짝살짝 퍼집니다.


    모처럼 두 아이가 일찌감치 잠들어 우리 집도 조용합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나도 지쳐 아이들 곁에서 드러눕고 싶지만, 내 마음은 아이들이 잠든 틈에 무언가 글을 끄적이거나 책을 읽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하고는 함께 보기 어려운 영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보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술 한잔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밤길을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에 다녀오기로 합니다. 자전거 앞등과 뒷등을 환하게 밝힙니다. 사람 발자국도 자동차 바퀴자국도 없는 고요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자전거로 달리니, 자전거가 바람 가르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아니, 들판에서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가 훨씬 크게 울려퍼집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로 자전거가 지나가는데, 어느 풀벌레도 자전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풀벌레가 자전거를 따사로이 품습니다. 그래 반갑구나 씩씩하게 달리렴, 하는 듯한 노랫소리입니다. 나는 밤길 시골길 논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면서 밤노래를 듣습니다.


    면소재지 가게에 닿습니다. 보리술 한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삽니다. 면소재지 가게 앞에 면내 고등학교 아이들 너덧이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서 가게 앞에 앉은 채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시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갑니다. 면내 고등학교 교실에 불이 밝습니다. 그렇구나, 구월 한복판이지, 이곳 아이들도 입시나 취업을 맞딱드렸겠구나, 이 가운데 몇몇 아이들이 교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가게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이 아이들은 무슨 꿈을 이야기할까, 교실에서 밝힌 불빛을 받으며 늦게까지 수험공부를 하는 시골 아이들은 무슨 꿈을 생각할까.


    군내버스 한 대 마주 달려옵니다. 이 늦은 때에도 버스가 있네, 하고 생각하다가, 읍내에서 저녁 여덟 시 반에 면내를 거쳐 지죽마을 바닷가까지 가는 막버스라고 떠올립니다. 읍내 고등학교를 다닐 지죽마을 아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테지요.


    아이들은 알까? 아이들은 느낄까? 자전거를 달리며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며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는 줄 아이들은 알거나 느낄까 궁금합니다. 이 아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난 보람을 얼마나 누리는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태어나지 못해 여느 도시처럼 온갖 물질문명과 문화시설을 못 누리는 삶을 안타까이 여길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뒤부터는 도시로 가서 다시는 시골로 안 돌아오겠다고 다짐할는지 궁금합니다.


    .. 한 할머니는 이름도 성도 없는 무지렁이라며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 (90쪽)

     

     

     

     


    면내에서든 읍내에서든 학교옷 입은 아이들을 봅니다.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수험공부에 바쁩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흥군에는 대학교가 없으니 고흥군에 남아 젊은 나날을 보내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이웃 도시 순천이나 광양이나 여수에 가든, 또는 전남 광주에 가든, 아니면 대전으로 가든, 또는 부산으로 가든, 아니면 서울까지 가든, 되도록 커다란 도시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도시이든 고흥 시골마을을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에는 고등학교 한 곳 있습니다. 이곳에는 아직 백 명 넘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이곳 아이들이 해마다 졸업식을 하고 보면, 고3이던 아이들은 거의 모두 썰물처럼 고흥 바깥으로 나갑니다. 대학교를 가든 일자리를 얻든 더 큰 도시로 나가요. 이제부터 시골내기 아닌 도시내기가 돼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고3을 마치고 도시로 가기 앞서를 헤아리면, 아직 고흥에 남아 시골내기로 지낼 적조차 참말 시골내기인지 도시내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골내기라면 ‘먹고 입고 자는 곳이 시골’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하고 놀고 살아가는 나날이 시골’이 되어야 걸맞아요. 흙을 만지고, 흙을 누리며, 흙을 아끼는 삶일 때에 비로소 시골내기입니다. 주민등록 주소지가 시골이라서 시골내기이지 않아요.


    한가을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새봄이 찾아들어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모두 저희 학교에서 중간시험이든 기말시험이든 치르느라 바쁩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로 바쁘고, 어른들은, 이 가운데 늙은 어른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들판에서 흙을 만지느라 바쁩니다.


    면소재지 장날이든 읍내 장날이든, 장마당을 이루는 사람은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요, 장마당에서 무언가 장만하는 사람 또한 으레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장이 서든 말든, 아이들은 초등학생이건 고등학생이건 학교에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합니다. 일요일이나 토요일에 장날이 끼더라도, 아이들은 가까운 도시로 놀러가지, 면소재지 장터나 읍내 장터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자가용을 몰아 커다란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이웃 순천으로 물건을 사러 가지, 읍내 장터나 면내 장터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몸은 시골에서 살지만, 삶은 시골내기가 아닙니다. 시골에 주민등록 주소를 두지만, 삶은 도시를 바라보는 흐름이기에, 이 흐름에 맞추어 ‘젊은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처음 태어날 적부터 ‘주소지만 시골일 뿐 삶은 도시내기’로 지냅니다. 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적에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꿈을 꾸는 모습은 너무 마땅합니다. 이 아이들은 비록 시골에서 산다 하지만, 마음이 온통 도시내기예요. 이 아이들은 ‘주민등록 주소지’까지 도시가 되고 싶어요. 시골마을 들일이나 바닷일은 해 본 적이 없고, 시골마을 앞메나 뒷메를 오른 적이 없으며, 시골마을 이웃 할매나 할배랑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 적이 없어요. 아이들은 시골내기로 보이지만, 손전화나 컴퓨터로 도시 아이들하고 사귀어요. 겉차림은 시골학교 아이들이지만, 속알맹이는 도시학교 수험생일 뿐이에요.


    우리 집 두 아이를 데리고 면내 우체국이나 가게를 들를 때이든, 이 아이들과 읍내 저잣거리를 돌아다닐 때이든, 어디에서고 아이들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조차 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보육원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차근차근 보냅니다.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들어가 영어를 배웁니다. 보육시설 시간이 끝나면 방과후학교나 방과후학원 같은 데에 갑니다. 시골마을이라서 시골아이답게 마음껏 뛰놀며 클 터전이 아닙니다. 시골마을에서 아이를 낳는 분들 스스로 아이하고 하루 내내 함께 들판에서 일하고 놀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한결같이 도시바라기로 클밖에 없습니다.

     

     

     

     

     

     

     

     

     

     

     

     

     


    (2)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


    소설을 쓰는 정영신 님이 내놓은 사진책 《한국의 장터》(눈빛,2012)를 읽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과 1990년대 첫무렵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깃들고, 이때부터 스무 해를 건너뛰어 2010∼2012년 사이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어우러집니다.


    사진책을 넘기며 자꾸 궁금합니다. 정영신 님 사진에서 1990∼2010년은 무엇일까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니, 정영신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지만, 이에 앞서 ‘당신 집에서는 여느 어머니’이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정영신 님이 아이를 낳아 돌보았는지 아닌지까지는 책날개 해적이에 안 적혔기에 모릅니다. 다만, 사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하고, 가시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뭇 달라요.


    .. 장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삶을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어느 날은 할머니가 찢어진 고무신을 갖고 나와 때워 달라고 했는데, 고치는 값이나 새로 사는 값이나 같다고 했다가 혼쭐이 났단다. 할머니는 몇 백 원이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고향을 찾아가듯이 오일장을 찾았다면 고향과 같은 색깔을 만날 것이다 .. (24, 66, 387쪽)


    나는 사내이지만 집일을 도맡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옆지기와 내가 함께 마주하고 서로 돌보며 살아갑니다. 이제껏 집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얼마나 빨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똥오줌을 날마다 만지고, 아이들 밥을 날마다 차리며,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를 불러 주고, 아이들이랑 복닥복닥 씨름을 합니다.


    나는 내 삶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라 하지만, 정작 집일을 즐겁게 맡는 사내는 몹시 드뭅니다. 부부가 맞벌이라 할 적에도 집일은 으레 가시내가 한다고 하는 한국이에요. 명절이 되어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차릴 적에 언제나 가시내만 부엌에 들어가는 한국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가시내가 소설을 쓰고 사진을 찍기란 참 빠듯합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사내는 꽤 있을 텐데,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며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나란히 하는 사내는 얼마나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는, 집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돌보며 ‘겨를이 넉넉해’야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잘 할 만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는 사내로 살아오며 돌아보면, 집일을 늘 하고 아이를 언제나 돌보는 사이, 내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이 차츰 거듭나요. 나는 ‘기록’을 하려고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문화를 꽃피우려는 글을 쓰지 않아요. 나는 예술을 빛내려는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내 ‘삶’을 좋아하기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싶으며 아끼고 싶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집에서 으레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을 글로 써요. 마땅한 노릇이에요. 나는 집에서 살아가니까요. 곧, 정영신 님이 이 나라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쓸 수 있었다 한다면, 정영신 님한테는 장터 이야기가 ‘기록’이 아닌 ‘삶’이었으리라 느껴요. 정영신 님이 ‘사진기를 손에 쥐’기 앞서 누린 삶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정영신 님이 ‘연필을 손에 쥐’기 앞서 보낸 삶을 톺아보는 글입니다.

     

     

     

     

     

     

     


    .. 차들이 다니지 않았던 오래전 어린 시절의 장터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은 현대식 의복도 아닌 허름한 옷차림에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와, 공터에 보따리를 풀어 놓았을 것이다 … 도계에서 왔다는 박씨(67) 아주머니는 마땅히 살 것도 없지만, 사람이 보고 싶으면 장에 나온다고 한다 … 할머니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농산물을 갖고 나와 장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 (60, 83, 408쪽)


    사진책 《한국의 장터》를 읽으며 1990∼2010년 사이 사진이 거의 비었네, 하고 느끼다가는, 앞으로 2020년이 되거나 2030년이 된다면, 2010∼2012년 사이에 바지런히 찍은 사진이 많이 실렸기 때문에, 오늘(2012년)을 돌아보는 뒷날(2020년대나 2030년대) 사람들한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구나 싶어요.


    오늘 쓰는 글은 어제를 돌아보며 모레에 누리는 글이에요. 오늘 찍는 사진은 어제를 되짚으며 모레에 누리는 사진이에요.


    디지털사진은 찍은 그 자리에서 사진을 살펴볼 수 있다지요. 그러나, 사진기 화면으로 사진을 살필 뿐, ‘사진 누리기’는 하지 않아요. 사진을 누리는 일이란,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요. 사진을 찍고 한참 지나고서야 비로소 사진을 누려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오늘 삶을 가장 빛내기에 사진도 찍고 글도 쓰며 그림을 그리지만, 오늘 삶을 가장 빛내며 일군 사진·글·그림은 모레와 글피를 맞이하며 살아갈 기운이 새로 솟도록 이끌어요.


    즐겁게 어제를 돌아봐요. 즐겁게 지난해를 생각해요. 즐겁게 그러께를 되짚어요. 즐겁게 지난 옛일을 아스라이 떠올려요.

     

     

     

     

     

     

     


    .. 장사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어 자유롭다. 보자기 위에 콩대 몇 개 갖고 나와 팔고 있는 할머니들도 여든이 넘는 사람들뿐이다 … 한편 도화장은 농촌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시골장의 모습 그대로다.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 경운기를 끌고 나오고, 장 보는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다 … 제주할망들은 또 다른 우리 엄마들을 이야기한다. 물질을 하고, 밭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는 장터에 나와 온갖 것을 팔아 가정경제를 살리고 자식을 교육시킨다. 이 땅의 엄마들이 있기에 산업이 발전해 가고 경제가 살아나고 농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 (149, 238, 459쪽)


    좋아하는 삶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치면서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예쁘장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칠 때에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군가는 ‘참 좋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누군가는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어느 사진을 즐기든 이녁 마음입니다. 어느 사진이 더 돋보이지 않고, 어느 사진이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즐거운 하루’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기며 ‘멋스럽거나 예쁜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마다 아이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니까, 더 값지거나 더 비싼 장비를 갖추어서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하겠지요.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기에, 언제라도 손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 분도 있겠지요. 내 아이들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늘 가슴에 살포시 담아 언제라도 가만히 떠올리며 이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곱게 그리는 분도 있겠지요.

     

     

     

     


    .. 농촌 사람들은 땅이 주는 질서를 지키고 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물과 햇빛과 공기와 더불어 키우고, 가을이면 거둬들인다 … 여인들에게 있어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수많은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땅이라는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 읍내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을 국수집에 데려가 곱빼기 국수를 먹이고 차를 태워 보내면서도 여인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장날이다 .. (315, 345, 373쪽)


    예전에 사진기가 없을 무렵, 어버이는 누구나 아이들 모습을 가슴으로 담았습니다. 따로 사진기로 사진을 안 찍었어도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마음속에 아로새겨서, 언제라도 그립게 떠올렸습니다.


    한국땅 장마당을 지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 ‘당신이 장사하는 모습’을 스스로 사진으로 찍어 건사한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도 당신 장사하는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도 안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작가들만 장마당을 돌며 당신들을 사진으로 더러 찍었겠지요.


    그런데, 장마당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예순 해 앞서 일을 환하게 떠올려요. 쉰 해 앞서, 마흔 해 앞서, 서른 해 앞서, 당신들이 지키는 장마당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림으로 알뜰히 떠올립니다. 따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쓰지 않았고, 따로 사진작품이라는 예술이나 문화를 빚지 않았으나, 당신들은 이야기를 일구었어요. 이야기를 일구는 나날을 사랑으로 누렸어요.


    장마당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이들은 바로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며 사진을 얻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글을 얻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아이들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사진을 얻어요. 아름답다는 멧자락을 올라 사진을 찍을 때에도 ‘멧자락 이야기’를 가슴으로 시나브로 느끼며 사진을 얻어요.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으로 되살립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꽃으로 다시 피웁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빛으로 다시 그립니다.

     

     

     

     


    .. 장이 이미 폐쇄되었는데도 난장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반평생을 장터에서 살았는데 장은 없어져도 장바닥은 남아 있다며, 사람이 있는 한 장에 나온다는 여든다섯 살 된 할머니도 있었다 .. (477쪽)


    이 나라 장터를 두루 돌아다녀도 두툼한 사진책 한 권 나옵니다. 여든다섯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거나 사진으로 빚어도 사진책 한 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남들을 살필 것 없이 나 스스로 내 하루를 차근차근 짚을 적에도 내 발자국을 사진책 한 권으로 엮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살아온 날은 웃음일 수 있고, 눈물일 수 있습니다. 살아온 날은 즐거움일 수 있으며,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원함이요 때로는 고단함입니다. 어느 때에는 망설임이요 어느 때에는 씩씩함입니다. 모든 모습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이어지면서 삶이 이루어집니다. 삶이 이루어질 때에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5.9.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