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장

피란민들이 옷·떡 팔던 장터…새단장해도 난장 여전

한국 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형성
명물로 자리잡은 감나무 가로수
탑처럼 쌓아놓은 포도상자 ‘눈길’


 

 

 

여화자 할머니(75)는 강과 산이 많아 농사가 잘된다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에 산다.

시골 늙은이의 세상살이가 고단할 것 같아도 농사를 짓다 보면 밭에서 커가는 작물 보는 재미가 있단다.

 “농사꾼은 여름이 좋지유. 텃밭에 나가면 오이와 가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쥬,

고추밭에는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쥬. 땡볕에 야물게 익어가는 호박은 내 엉덩이만 혀유.

비 한번 와봐유. 고것들이 쑥쑥 자라 날 보고 있어 꼭 자식 키우는 것 같아유.”

 호박잎과 오이, 고구마순 등을 보자기 위에 펼쳐놓고 부채로 더위를 쫒는 여씨 할머니는 사람들도 보고 싶고

이웃 동네 소식도 듣고 싶을 때 텃밭에 있는 것들을 갖고 장에 나온다고 한다.

 영동장(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은 한국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옷과 떡을 팔았던 ‘영동 피난민시장’이 그것이다.

지금 영동장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새 단장을 했지만 아직도 골목골목 난장이 펼쳐져 있다.

 영동장을 처음 만났던 20여년 전의 흔적을 새롭게 변한 장터 속에서 숨은 그림 찾듯 더듬어본다.

무거운 분뇨통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던 할아버지 모습이나, 곰방대를 물고 작은 몸을 번개처럼 움직이며

반평생 채소를 팔아온 할머니 모습은 이제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고 영동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감나무 가로수다.

이 감나무들은 1970년대부터 영동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매년 가을 ‘궁중 음악의 대가’ 박연을 기리는 영동난계국악축제(올해는 10월3~7일에 열린다)가 끝난 후

영동군에서 수확일을 정해주면 누구나 이 감나무에서 감을 딸 수 있다고 한다.

 영동의 오지마을인 상촌면 임산리에서 왔다는 양씨 아주머니(68)는 길가에 늙은 오이를 펼쳐놓았다.

 “우리 동네가 깊은 산골이어도 장날만 되면 시끌벅적해유. 장에 가자며 부르는 소리에 개들도 따라나선대니께유.

깊고 깊은 골에서 기른 오이 한번 잡숴봐유. 더위가 달아날 것이구먼유.”

 양씨 아주머니는 팔뚝만 한 늙은 오이를 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준다.

오이 한쪽을 받아든 박씨 아주머니(70)가 발이 삐어 병원에 나왔다며 인사를 건넨다.

양씨 아주머니가 대뜸 “옛날에는 삔 곳에 고구마 갈아서 붙였지유” 한다.

 요즘처럼 병원에 쉽게 다닐 수 없었을 때는 단방약을 써서 치료를 했다며 사람들이 하나둘 옛날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이 고장 사람들은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나면 왼쪽 엄지손톱에 바늘로 열십자를 긋고,

왼쪽 눈에 다래끼가 생기면 반대로 오른손 엄지손톱에 그었다.

또 벌에 쏘이면 된장을 바르고, 닭고기 먹고 체하면 수숫대를 삶아 먹었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 할머니들이 쓰고 있는 처방법이란다.

 영동은 자연환경이 청정한 데다 일조량이 풍부해 과일 맛과 향이 좋기로 유명하다.

포도 상자를 탑처럼 쌓아놓은 이씨(48)는 “노지 포도가 나오기 시작하면 영동포도축제가 열리는데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차별화된 축제”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포도초콜릿 만들기와 포도 밟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외국인들까지 찾아온다는 것.

 상촌면에서 온 전씨 할머니(81)는 아들이 땅콩을 좋아해 땅콩농사를 짓는다며 햇땅콩 한되를 갖고 나왔다.

전씨 할머니는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가 만나는 삼도봉이 있는 동네에 사는데, 온 동네가 호두나무와 감나무 천지라고 한다.

 머잖아 감 익는 색깔까지 할머니를 따라 나올 이곳 장터의 가을 풍경이 벌써부터 보고 싶어진다.

 영동은 국악ㆍ과일ㆍ자연의 이미지를 일곱가지 무지개 빛깔로 형상화해 ‘레인보우 영동’이라 이름 붙였다.

아름다운 무지개의 고장 영동에서 열리는 영동장(4ㆍ9일)은 인삼ㆍ담배ㆍ호두ㆍ포도ㆍ사과ㆍ감으로 유명하며, 곶감과 표고는 특산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사과ㆍ감ㆍ복숭아ㆍ포도가 많이 나오는 용산장(5ㆍ10일). 포도ㆍ호두가 많고 담배와 표고가 유명한 황간장(2ㆍ7일),

호두가 많이 생산되는 임산장(1ㆍ6일)이 있다.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이 시는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먼 전라도 천리 길로 들어서는 곳이 바로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 가는 길이다. 사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록도는 100여 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숱한 고통을 이겨내며 짓뭉개진 몸과 가슴으로 이룩한 외딴 섬 소록도에도, 2009년 3월부터 희망의 다리가 놓여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소록도 ‘갱생원’. 약이 좋다는 입소문 때문에 약이 잘 팔린다는 소 씨(85세) 할머니는 "섬이나 육지나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제."라며 말끝을 흐린 채 먼 하늘만 바라본다.

     

  • "새벽밥 먹고 요것을 갖고 갈거나 말거나 고민을 솔짠이 했당께. 요렇게 폴릴 것 같았으면 쪼까 더 갖고 나올 것인디, 색이 참말로 이쁘제. 요것도 요령 있게 삶아야 색이 이뿌고, 연해야 무치면 제 맛이 나제이." 금산에서 고구마 순을 갖고 나와 파는 김 씨(76세) 할머니의 말이다. "금산에도 큰 마트가 생겨갖고 필요한 것은 다 있제. 장까지 나온 것은 사람들 얘기도 듣고, 바람 쐴라고 그라제."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들네 집은 잘 갔다 왔소?"라며 한 할머니가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김 씨는 아들이 싫어해 아들 모르게 장사한다고 한다. "효자여! 내가 일헐깨비 걱정해쏴. 한 장 볼라면 이삼일은 꼬박 맹글어야 갖고 나오제. 내가 번 돈은 맘대로 써. 맛난 것도 사 묵고, 빙원에도 가지만. 자식들이 준 돈은 고상해서 번 돈 인줄 안게 모태 놨다가 손주들 오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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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다도해를 품은 고흥은 백제시대부터 이어진 해상 교역로의 거점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우주개발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디딤돌 ‘나로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면서 국내 최대 ‘항공우주도시’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경이 되면 ‘고흥우주항공축제’가 열린다. 또한 고흥의 자랑은 멋과 맛을 대표하는 ‘8품(品), 9미(味), 10경(景)’이 있다. 8품(品)은 해풍을 맞고 알차게 자란 해미(海味), 유자, 석류, 마늘, 참 다래, 꼬막, 미역, 한우다. 9미(味)는 참 장어와 낙지, 삼치, 전어, 서대, 생굴, 매생이, 유자향주, 양념 발라 구운 붕장어이고, 10경(景)은 옛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에 감탄하여 제를 올리고 이름 지었다는 팔영산, 소록도, 고흥만, 나로도의 해상경관, 비자나무숲, 승천의 꿈을 안은 영남 용바위, 금산 해안경관, 마복산 기암절경, 아침을 여는 해돋이의 명소 남열리 일출과 사라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중산 일몰이다.

 

  • "여그선 수입한 건 눈 씻고 봐도 없어. 내가 파는 바지락도 여서 캔 신선한 것이여." 여자만과 득량만에서 잡히는 피조개며 새조개, 꼬막, 바지락이 남도장을 주름잡는다며 입담 좋은 박 씨(75세) 할머니가 갯벌자랑에 열을 올린다.
    "온 나라가 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여그만 쏙 빼놓는가 싶어 쪼까 서러웠는디 요새 와서 개발 안한 덕을 솔짠이 본당께, 그래서 여그 갯벌은 살아있제." 육지에서 계절마다 나오는 푸성귀가 다르듯이, 바다에도 철마다 다른 해조류가 나온다는 박 씨 할머니다.

     

  •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르고 물길 좋은 곳에서 자라는 유자는 1980년경 고흥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대학나무이자 효자나무였던 셈이다. 육지에서 유자가 나오면 외나로도는 삼치가 제철이라는 권안덕(67세) 씨가 풍양양조장에서 만든 유자향주 맛이 일품이라며 자랑한다. "고흥 유자로 맹근 향주가 세계명품이라고 헙디다. 여그서 나는 쌀과 유자청이 들어간 한약재로 3년 동안 발효시킨 전통준디, 맛이 징허게 조아라우. 고흥 와야 맛 보제 서울서는 안 폰다고 하드만…." 유자향주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성공개최 다짐대회 오찬에서 공식건배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삶은 옥수수를 팔던 권 씨는 "녹동까지 왔승께 옥수수맛은 봐야제." 라며 옥수수 같이 하얀 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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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넘어 녹동항으로 가면 바닷가로 생선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녹동항에서 잡힌 생선만 취급한다는 손춘애(55세) 씨가 갯장어를 다듬고 있어 "생선 다루는 솜씨가 예술이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소라를 닮아 보인다. 여름이 제철인 갯장어는 잘 물어대는 습성 때문에 ‘하모’로도 불린단다. 어찌나 성질이 사나운지 뭍에 올려놓았는데도 달려드는 바람에 손 씨는 병원신세까지 진일도 있다고 한다. 자연산 갯장어는 야행성이라 낮에는 바위틈이나 진흙 속에 있다가 밤이 되어야 먹이를 잡기 위해 나온다. 일본 강점기 때는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갯장어를 모두 일본으로 빼돌렸을 만큼 일본인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샤브샤브로 먹는 갯장어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손씨는 "아무리 속상혀도 바다만 보면 속이 풀린 게 여그를 못 떠나요. 처음에는 부끄러워 말이 목구녁에서 쏙 들어가 불더니 지금은 내 것 사라는 소리가 착착 나온 당께. 장터에 나 같은 여자 없어봐 김빠진 맥주제." 주위에 모여 있던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바다로 흘러넘친다. 

  • 생선 색이 변하는 여름철의 뜨거운 날씨에는 문 닫은 집들이 많았다. "아직 마수도 못했지만 여그 보이는 바다가 내 친구여…"라는 장 씨(77세) 할머니의 말속에 헛헛함이 배여있다. 서대를 비롯한 양태, 장어가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수직으로 엎드려있다. "하루하루 나오는 것이 밑지는 일인디 습관처럼 나와 있당께. 한 개라도 폴아야 쓴디 손님은 안 오고 날 파리만 몰리네." 말린 생선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던 장 씨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날파리만 쫓는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이 훨씬 좋다는 할머니는 옷 장사, 고무신 장사, 비단 장사, 양잿물 장사 등 양은다라에 이고 다니며 안 해 본 게 없다고 한다. 그러다 녹동 사는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늙은 할매 소원이 뭐겠어 새끼들 잘 되는 거 말고…." 마수도 못한 할머니 얼굴이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바다 빛처럼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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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 녹동장(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은 1947년에 개설된 정기시장이지만 오일장인 3일과 8일이 되면 거금도에서 갖고 나오는 해산물과 농가에서 가져 온 농산물로 장터가 풍성해 진다. 옥수수를 비롯해 깻잎, 고구마순, 호박잎, 풋고추, 가지, 오이, 호박 등 푸성귀 밭이 장터로 옮겨 온듯 널려 있다. 도로변에서 난장을 펼쳐놓은 몇몇 할머니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어 같이 퍼질러 앉았다. "여름인게 이렇게 앉아서 폴고 그라제 겨울에는 장에 나올 시간 없서, 유자농장에 가 일하면 얼매나 뜻뜻하고 좋은디…." 내 발로 걸어서 장에 다닐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할머니들의 느리디 느린 삶이 오늘따라 유달리 값져 보인다.

       

    • 고흥 녹동장 외의 인근 장으로는 참다래, 석류, 유자, 고구마, 마늘, 벌꿀을 비롯해 생선을 즉석에서 구워파는 고흥장(4, 9일), 참다래, 미역, 마늘, 김이 많이 나오고, 충무사와 거북바위가 있는 도화장(3, 8일), 동강민속체험관이 있고 한우, 방울토마토, 오이, 참다래가 많은 동강장(1, 6일), 나로우주센터가 있고 유자, 삼치, 바지락이 많이 나오는 봉래장(2, 7일), 유자, 꼬막, 마늘, 쌀로 유명한 과역장(5, 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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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17)전북 고창장

                                  “황토밭서 해풍 맞고 질군게 수박이 맛나제”

                                                                 위풍당당 고창수박 시선 한몸에
                                                                 효소 담그는 각종 들풀들 풍성
                                                                 상설시장이나 3·8일에 오일장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이라면 여름철에 원두막에 올라앉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쪼개 먹던 수박 맛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밤잠을 설치며 원두막을 지키던 동네 어르신 몰래 살금살금 기어가선 잘 익은 수박을 찾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며 서리해 먹던 시절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의 고창장 입구에선 금딱지를 자랑스럽게 붙인 고창수박이 사람들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대산면에서는 6~7월쯤 당도가 높고 색깔이 선명한 수박이 출하된다. 수박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재배하지만 우리나라 수박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고창장은 상설시장이지만 3일과 8일이 든 날이면 더욱 많은 사람이 몰린다.

     팥칼국수도 먹을 겸 장도 구경할 겸 나왔다가 잠시 쉬고 있던 최씨 할머니(93)로부터 고창수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가 시뻘건 황토 땅이 많은 건 알제? 황토밭에서 질구는(키우는) 데다 해풍이 불어싼게 맛이 나제.” 최씨 할머니가 연신 땀방울을 닦으며 수박 자랑을 하자 고무줄을 길옆에 길게 펼쳐놓은 노점상 김씨(53)가 끼어든다. “오메, 할매요. 어째 수박 이야기만 허요. 요강이 뒤집어진다는 복분자 자랑도 좀 헛시오. 어째 할매도 쪼까 거시기헌갑네.” 말해놓고 멋쩍어 웃는 김씨 얼굴에도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고창은 밭이 많아 보리·수박·메밀·고구마·양파·땅콩 등을 주로 심었는데 요즘은 복분자밭이 늘어나고 있다.

     소나기 한줄기가 왔다 갔는데도 여전히 바람 한점 없이 푹푹 찌는 날씨다. 땀을 뚝뚝 흘리며 고구마순을 다듬고 있는 김진순씨(61)는 들판에 난 풀을 뜯어와 벌여놓았다. 김씨 아주머니가 갖고 나온 비단풀과 외꽃·나팔꽃·수세미·쇠비름 등은 주로 효소를 담그려는 사람들이 사 간다고 한다.

     “요즘은 땅에 나는 것이 모두 약초라고 헙디다. 이 쇠비름은 오행초라고도 허는디 다섯가지 병이 낫는다고 허요. 옛날에는 뜯어다 돼지 먹였던 풀인디 요새 사람들은 너무 많이 알아 탈이여.”

     오행초(五行草)라는 이름은 쇠비름이 우주 만물의 기운을 그대로 품었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쇠비름을 오래 먹으면 장수한다 하여 장명채(長命菜)라고도 한단다. 요즘은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잡초건 독초건 너도나도 장에 갖고 나온다. 한편으로는 정확한 처방도 모르고 검증되지도 않은 풀들이 약초라는 이름으로 장터에 유행처럼 퍼져 걱정스럽기도 하다.

     600여년 동안 고창군민과 함께해온 모양성(고창읍성)에선 군민의 날이 있는 가을이면 ‘고창모양성제’가 열린다. ‘한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을 간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여인네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따라 도는 풍습이 남아 있다.

     어느 장터에서나 역마살이 끼어 전국을 떠돌아다닌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선천적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박씨 할아버지(86)는 계절에 맞는 물건을 골라 갖고 다닌다. 여름이라 부채를 팔러 나왔다는데, 운동 삼아 다니는 것이라 차비만 벌면 된다고 한다. 온종일 장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어 막걸리 한잔 나누며 옛날이야기 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박씨 할아버지다.

     대장간에서 낫을 고르던 이씨 아저씨(68)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며 넋두리를 한다. “글줄이나 배운 놈들은 다 빠져나가고 우리 같은 반송장만 남아서 농사진디 하늘이라도 도와줘야제. 날씨 땜시 나락이 큰일 났당께.” 부인이 좋아하는 고등어자반과 밭농사 ‘일꾼’인 낫을 사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초로의 농부 뒷모습에서 땅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고창 땅에서는 고창장 외에도 여러 장이 열린다. 해리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특산물인 해리장(4·9일), 수박으로 유명해 여름철이면 수박축제가 열리는 대산장(2·7일), 쌀·보리·고추·고구마가 많이 나오는 흥덕장(4·9일), 복분자술·작설차·풍천장어·대추나무나침반이 나오는 상하장(1·6일), 어물전이 풍성한 무장장(5·10일)이 있다.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16)보성 벌교장

     “여그 뻘에서 난 꼬막은 쫀득쫀득 차지지라”

    대하소설 ‘태백산맥’ 주무대
    짱뚱어·꼬막·녹차 등으로 유명
    읍내 중심가에 매일서는 상설시장
    4·9일 장날엔 주변이 모두 장터로
    여름철엔 ‘서대’가 횟감으로 인기

     

     “내 태 자리가 여그 여자만 갯벌이여. 고향 땅이 좋은께 여때꺼정 대처에 나가본 적이 없당께. 허벅지까지 빠지는 뻘 속에서 고상을 해봐야 꼬막 장사든 바지락 장사든 할 자격이 있제.”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의 벌교장. 여름철이라 바지락을 팔고 있는 송씨 할머니(77)의 시원시원한 말투가 갯벌에서 산 아낙네답다. 꼬막 자랑 좀 해달라는 말에 할머니는 신이 났다.

     “입성 좋은 사람은 맛을 다 알제. 잘 삶아야 제맛이 나는디 삶기가 영판 까다로와. 제맛을 내려면 한쪽으로만 저어야지, 이리저리 저으면 맛이 안 나. 까먹기도 사납고. 여그 뻘은 모래가 없어 꼬막이 쫀득쫀득 차지다 보니께 다른 데 꼬막이 못 따라오제. 내 얼굴도 땡글땡글허니 꼬막 같지라.”

     벌교는 변두리 갯벌에 불과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시가지로 변하면서 역사의 빛깔이 빨리 흡수된 지역이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보성과 인근 고흥 땅에서 나는 농수산물을 공출하는 데 있어 벌교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교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말이 생겼다.

     벌교장은 읍내 중심가에 선다. 195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매일 서는 상설시장이 되었지만, 지금도 4일과 9일이 든 장날이면 주민들이 농산물을 갖고 나와 농협 옆길과 담벼락에 난장을 펼친다. 꼬막의 고장이자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장은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다.

     옥수수를 삶아와 농협 담벼락에 앉아 팔고 있는 유끝순 할머니(76) 머리로 뜨거운 땡볕이 내리쬔다. 옥수수를 맛보라며 낱알을 건네주는 할머니께 덥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날이 더워야 나락이 잘 크제” 하더니 “여그 앉아 있어도 그놈들이 무럭무럭 커가는 재미에 더위도 모른당께” 한다. 할머니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일러주더니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 집은 딸부자였어. 딸을 하도 낳아싼께 내 이름을 끝순이라고 했는디, 내 밑으로 여동상이 또 있당께. 어렸을 때는 먹을 것이 귀해 풀대죽 먹고 컸는디, 서럼 중에 배곯는 서럼이 질로 큽디다. 근디 시상이 좋아져 농사지어 갖고 나오면 잘 팔려. 무공해라고. 어째, 자네도 옥수수 좀 살랑가?”

     마을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옥수수를 떠안기는 할머니의 장사 수완이 대단하다. 할머니가 사는 벌교읍 고읍리는 가을이면 온 마을 지붕이 노란색으로 덮인단다.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된 500년 된 신령스러운 은행나무 덕분이란다.

     보성에는 이 말고도 유명한 나무가 있다. 차나무다. ‘술을 즐기는 백성은 망하고 차를 즐기는 백성은 흥한다.’ 차 마시기를 즐겨 자신의 호조차 다산(茶山)으로 지은 정약용이 남긴 말인데, 요즘도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쓴다. 백성을 흥하게 하는 차의 본고장이 보성으로, 해마다 5월이면 녹차대축제를 연다. 보성에 있는 200여곳의 차밭은 지역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특히 보성읍 봉산리는 국내 최대의 차 재배단지다.

     벌교역전 수산물 파는 곳에서는 요즘 한창 나오는 서대가 횟감으로 인기다. 벌교가 고향인 박씨(53)는 주문받은 서대회를 썰기에 바쁘다. “짱뚱어탕과 같이 먹으면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다”며 벌교 갯벌 자랑까지 덧붙인다. 짱뚱어는 오염이 안 된 갯벌에서 햇볕을 쬐어야 살 수 있는데,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양식이 되지 않는단다. 이렇듯 갯벌은 대지의 청소부다. 자연을 정화하고 수많은 생명을 키운다. “갯벌이 숨을 쉬어야 살아가기가 덜 팍팍허제.” 갯벌에서 살아온 박씨의 말에서 고향의 냄새를 느낀다.

     보성에서 벌교장 외에 열리는 장은 차와 꼬막으로 유명한 보성장(2·7일), 쌀과 잡곡이 많이 나오는 복내장(4·9일), 특산품인 용문석으로 유명한 조성장(3·8일), 느타리·토마토·참다래가 풍성한 예당장(5·10일), 녹차된장이 인기 높은 희령장(4·9일)이 있다.         

     

     

     

     

    "영감이 드라이브가자."하면 만사 제쳐놓고 따라 나선다는 고씨(72세)는 해안도로변 길 따라 장날마다 나온다. 경운기를 타고 장보러 가지만 장날만 되면 잔칫날 같이 즐겁다는 고씨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매일보는 바다지만 영감하고 바닷가로 달리니 촘말로 좋수다." 영감이 좋아하는 자리돔 젓갈을 담그기 위해 나왔다며 자리돔 자랑이 대단하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자리는 5월에서 8월까지 잡히는데, 6cm에서 10cm 정도의 크기로 횟감이나 구이는 물론 젓갈을 담기도 한다. 자신이 태어난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자리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제주에서는 흔한 물고기라고 한다. "물이 좋수꽈?" "1㎏에 얼마우꽈?" 제주도 방언으로 흥정하는 모습이 정겹다.
    장입구에는 제주답게 귤이 종류별로 나와 있고, 자두며 복숭아, 참외, 수박 등 색색의 과일들이 화려하기만하다. 제주산 망고와 여러 종류의 귤을 팔고 있는 최경수(35세) 씨는 귤 종류만 80가지라며 그 중 세미놀은 수확하자마자 찾는 사람들이 많아 육지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제주에서만 팔린다고 한다. 세미놀은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노지 감귤이다. 야생으로 자라기 때문에 못생겼지만 비타민C가 일반 귤보다 높다고 한다.

    • 바다로 둘러싸인 섬답게 어물전에는 자리돔, 옥돔, 우럭, 조기, 갈치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갈치는 은빛을 뽐내며 좌판에 일렬로 누워있다. 고선아(44세) 씨는 15년 동안 제주갈치만 팔아 왔는데, 좋은 갈치를 내다 팔기 위해 밤낚시를 한단다. 특히 성산포갈치를 알아준다는 고씨는 밤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갈치가 잡히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새벽녘이나 되어야 갈치가 걸려든다고 한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낚는 봄 갈치가 있는가 하면, 밤에만 낚는 가을 갈치도 있다며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은색갈치의 꿈틀거리는 모습이 바로 예술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옆에서 옥돔을 손질하던 박씨 할망이 "야야, 이제 갈치박사 다됐네"라고 거들자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에 스며든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햇볕이 났다가, 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가 장터의 다양한 풍경들을 연출한다.

    • 천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제주의 한라산과 용암동굴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 제주는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개로 삼았다는 여신 설문대할망이 창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치마에 흙을 담아 제주를 만들고,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서 나르다 치마가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지금의 오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주에는 총 255개의 오름이 있는데 오름의 능선이 보이는 곡선미는 마치 엄마의 너른 품속 같다.
      이 밖에도 제주는 삼무(三無)의 섬으로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고 했다. 집주인이 일하러 가면서 집 입구에 ‘정낭’이라는 나무를 걸쳐놓으면 집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다. 그런데 지금은 주거시설이 현대화되면서 ‘정낭’은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관광지로 거듭나면서 삼려(三麗)와 삼보(三寶)가 생겨났다. 제주의 아름다운 문화와 자연, 민속과 언어와 식물 그리고 청정한 특산물이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섬으로 이루어진 제주에는 물질하는 해녀들도 많지만, 검은 현무암의 돌담을 두른 밭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 자연의 모습이 아닌 설치미술을 보는 듯 경이롭다.

    • 옛 장옥 맞은편에 있는 텃밭에서 콩을 파종하던 송씨(60세)가 "어디에서 와시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는 얘기에 "그럼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느냐?"며 짓는 할망의 한숨이 호미끝자락에 묻혀 흙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땅도 자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제주 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가장 비참했던 소요사태로 제주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지슬>은 제주도 학살을 배경으로, 제주사람이 제주토박이말로 만든 1948년부터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풀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간의 이야기로 만든 독립영화다.
      제주에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한다. 제주도 어느 장터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은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끈으로 묶어 구덕처럼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구덕은 그릇이 귀한 제주도에서 그릇대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아이를 재울 때도 ‘애기구덕’이라는 제주식 요람에 눕혔고, 해녀들이 물질할 때도 구덕을 가지고 물에 들어갔다.
      한켠에 짊어진 보따리를 내려놓고 쉬고 있는 송당리에서 온 이씨(75세)에게 다가가 올해 농사는 잘되었냐고 묻자 "태풍만 없으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다. 초파일날 등불이 고요하면 참깨 농사가 잘된다는 등, 제주여인들은 날씨변화로 한 해 농사를 점친다. 이씨 할머니는 "여기서 나는 당근이 맛있다고 소문났어."라며 당근을 들어 보인다. 구좌읍의 화산회토에서 재배하는 구좌당근은 전국물량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당근자랑이 열심인 이씨 할머니에게 제주도에 논이 보이지 않던데 벼농사는 짓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논둑으로 막아놓은 돌담이 현무암이라 물이 저절로 빠져나가 논농사는 할 수 없어. 여기서는 ‘산듸’를 심어 제사도 지내고 잔치할 때도 쓰지. 산듸는 부지런하지 않으면 지을 수도 없어."라며 대답한다. 제주도에서 ‘산듸’란 밭에 씨를 뿌려 키우는 찰벼 품종인 밭벼를 말한다.

    • 요즘 장터에 가보면 시장 체험활동을 나온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핑크색 양말로 주세요! 엄마한테 선물할거예요." 무리지어 장터에 나온 어린이들이 양말 파는 가게에 우르르 몰려가 양말 사는 ‘시장체험’을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선물할 양말을 고르는 모습이 진지하기만 하다.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옛 장옥에서 2년 전 고성장에서 만났던 김옥순(82세) 할머니를 만났다. 야채와 과일을 팔고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장터 안에서 점도 봐주었다. 제주도에 있는 무당은 영력을 중시하지만 자기 집에 신당을 차리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강신영매가 없이 매개물인 무점구(巫占具)를 통해서만 신의 뜻을 물어 점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염주 알을 돌리고, 쌀을 뿌리고, 작은 종지를 뿌리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예시하고 있었다. 일곱 살에 언문을 깨우쳐 이치를 터득했다는 할머니는 장사하다가 말문이 트여 점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50년 넘게 훔쳐본 셈이다. 지금은 점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데 "지난 겨울 여기서 잘 아는 할망이 이것저것 묻기에 점괘 따라 말해주었더니, 그 이후로 할망 얼굴이 보이질 않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서워지기 시작해 그만뒀어." 제주장, 함덕장, 고성장, 세화장을 본다는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장사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몸은 꼬챙이처럼 말랐어도 힘은 웬만한 남정네 보다 세니 걱정 말라며, 여태껏 제주 땅을 한 번도 벗어 난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할머니를 보며 제주 섬은 ‘여신의 섬’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219년 전 전 재산을 내놓아 제주도 백성을 먹여 살린 김만덕도 제주 여성이었다. 제주 여인네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남다르다. 자신에게 불리한 공간마저도 생산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저력이 있으며, 위기의 순간에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여인들의 삶이 꿈틀대는 세화장터는 생활문화를 꽃 피우는 창이었다.

      당근, 양파, 마늘의 주산지인 세화장(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은 5일과 10일이 들어간 날에 장이 선다. 세화장 외에 제주에서 열리는 장은 감귤, 채소, 원예의 주산지인 함덕장(1, 6일), 성산포 은갈치, 성산 월동무, 전복, 광어, 감자, 활소라로 유명한 성산장(1, 6일), 대정 암반수 마늘로 유명한 모슬포장(1, 6일) 할머니장터가 있는 제주장(2, 7일)과 성읍민속마을, 제주민속촌과 파프리카, 은갈치가 나오는 표선장(2, 7일) 옥돔, 갈치, 고등어가 많은 중문장(3, 8일), 열매를 먹으면 백 살까지 산다는 백년초 군락지인 한림장(4, 9일), 제주의 대표축제인 들불축제와 노천탕이 있는 고성장(4, 9일), 자리돔 축제가 열리는 서귀포장(4, 9일)이 있다. 

     

     

     

     

     

     

     

     

     


     

     

     

                                                                     

                                                                         -강원 삼척 도계장-

     

                                        할머니 배낭에서 옥수수 와르르~얼마에 팔거래요?

                                                                                  해발 300m 고산지대 위치
                                                                                  다른 지역에 비해 장 늦게 서
                                                                                  읍사무소 앞 난장엔 싱싱한 해산물
                                                                                  잔뜩 물 오른 문어 유달리 많아
                                                                                  보석·가방 파는외국인도 ‘눈길’



     


    “탄광이 많을 적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장이 컸어. 강아지가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호황이었지. 오죽하면 탄가루가 날려도 좋으니 탄광 문을 닫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었겠어? 그땐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남은 탄광이래야 서너곳뿐이니 장날 아니면 사람 얼굴 보기도 힘들어. 밭에 있는 호박 몇덩이 갖고 나와 앉아 있다 그냥 가는구먼.”

     호박 다섯개와 칡가루 한되를 갖고 장에 나온 이순자 할머니(81)가 열변을 토한다. 장터에 나온 할머니들의 삶을 훔쳐보는 일은 시간을 조각조각 쪼갠 다음 다시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이곳은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의 도계장. 강원도 오일장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선다. 여기도 오전 9시가 넘었는데도 짐 실은 트럭들이 아직 다리 위 광장에 모여 있다. 이불을 싣고 나온 장꾼 박씨(57)는 산골이라 장이 늦게 선다며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꾼들 틈으로 무거운 배낭을 둘러멘 할머니가 걸어오고 있다. 도계읍 차구리에서 온 강씨 할머니(76)다. “뭐예요? 팔 거면 내려놔 봐요.” 마늘과 깻잎, 가지를 파는 최씨(71)가 할머니 등짝에 붙어 있는 배낭을 내려 풀어헤치자 초록색 잎으로 감싸인 옥수수 80여개가 흘러내린다. 장꾼 최씨와 강씨 할머니의 흥정이 시작된다.

     “여물지도 않았는데…. 얼마에 팔 거래요?” “만삼천원만 주드래요.” “만원에 줄 거면 놓고 가세요.” “그렇게는 안 돼요.”

     강씨 할머니는 옥수수를 배낭에 주섬주섬 넣었다 도로 풀었다 하기를 몇번이나 반복하더니 천원을 포기한 1만2000원에 팔아넘긴다. 빈 배낭을 메고 나오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하늘의 먹구름보다 무겁고, 얼굴에는 제값을 다 받아내지 못한 서운함이 가득하다.

     “할머니, 금방 비가 올 것 같으니 맛있는 것 사서 얼른 집에 가세요.”

     애써 말을 붙였지만 할머니는 듣는 척도 않는다. 잘못 참견했다간 욕먹을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할머니 입장에선 흥정할 때 도와주지 않은 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여름철 장터를 찾아다니다 보면 종종 소낙비를 만난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비닐봉투로 모자를 만들어 쓰는 사람을 비롯해 갖가지 풍경을 만나는 것도 이때다. 비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비닐을 치는 할머니들의 손놀림에선 삶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장터 한쪽에서는 샤니(52)와 알리(36)가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가져온 보석과 가방을 팔고 있다. 샤니가 한국 사람들의 인정에 빠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터를 찾아다닌 지도 2년이다. 너와집으로 유명한 도계읍 신리에서 온 김씨(63)가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며 구경하다가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동굴에 가봤냐고 말을 건넨다. 샤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젓는다.

     도계읍은 해발 300m가 넘는 고산지대로 평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탄광이 들어서기 전에는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옥수수나 감자를 심어 간신히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도계장(4·9일)은 탄광 개발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1965년 3월에 개설됐다. 도계읍사무소 앞 길가에 서는 난장에는 싱싱한 해산물이 많이 나오는데, 이날은 잔뜩 물오른 문어가 유달리 많았다.

     제사상에 올릴 문어를 사러 원덕읍 갈남리 신남마을에서 온 유씨 할머니는 “해신당에 가면 재미난 것 많어. 가봤어?” 하며 눈웃음을 짓는다. 신남마을에 있는 해신당공원은 풍랑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처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을 중심으로 꾸민 민속공원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남근 조각이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남마을에서는 지금도 정월대보름이면 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사람이 중심인 장터에 사람들이 없으니 서글퍼진다. 옛날에 보았던 풍각쟁이와 곡마단, 원숭이와 함께 나온 약장수의 익살스러운 농담에 환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립다.

     도계장 외에 삼척에서 열리는 장은 골목 사이사이 노점이 들어서는 삼척장(2·7일), 임원항에서 잡은 어물이 나오는 호산장(5·10일), 1100년 된 느티나무 주변으로 열리는 근덕장(1·6일)이 있다.




     

           

                                            갓 들어온 자리돔, 물 좋수꽈? 얼마우꽈?

     

    은빛 비늘 뽐내는 어물전 갈치
    구덕 짊어지고 장 보러 나온 할머니
    발음 세고 빠른 제주 방언
    생활문화 꽃 피우는 장터

                                                 맨 위부터 구덕을 짊어지고 장에 나온 할머니, 어물전의 갈치, 자리돔, 모슬포장 전경.
     

     

     

    “모기 이놈 물렀거라, 구문초님 행차하신다. 어험!”

     이렇게 적힌 재미난 쪽지가 사람들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모슬포장(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서 각종 모종과 화분을 팔고 있는 이씨(66) 부부가 장터 입구에 차려놓은 노점이다. 부부는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철이라 사람들이 구문초를 많이 찾기에 이렇게 써놓았다며 웃는다.

     전 펴고 걷는 데 두시간이나 걸린다는 이씨 부부는 37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한번은 손님이 꽃 이름을 묻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 퍼뜩 떠오른 차 이름인 <쏘나타>를 댄 게 두고두고 미안해, 지금은 식물 이름을 써놓고 판단다.

     모슬포장 입구에는 제주답게 귤이 종류별로 나와 있다. 자두며 복숭아, 참외, 수박 등 색색의 과일도 화려하고, 어물전에는 갈치가 은빛 비늘을 뽐내며 주인 앞에 앉아 있다. 건너편으로는 먹구름을 잔뜩 이고 있는 바다가 보인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햇빛이 났다가도 곧 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린다. 변덕스러운 날씨 덕분에 자연과 시장은 오히려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모슬포항에서 갓 잡혀 들어온 자리돔이 문성돈씨(63) 손에 의해 진·선·미로 구분되어 바구니에 담긴다. 문씨는 자리돔이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선이라며 “5월에서 8월까지 잡히는 것들은 횟감으로 쓰거나 구워 먹고 젓갈로 담그기도 한다”고 이야기한다. 각종 채소와 산초잎을 넣은 자리돔물회는 제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안덕면 덕수리에서 자리돔을 사러 장에 나온 고씨(62)는 “물이 좋수꽈?” “1㎏에 얼마우꽈?” 하고 묻는다. 고씨는 채소를 좋아해 쌈을 자주 먹는데 이때 된장 대신 얹어 먹는 쌈장으로 쓰려고 해마다 자리돔젓갈을 담근다고 한다.

     구덕(바구니를 뜻하는 제주 방언)을 짊어지고 장 보러 나온 대정읍 인성리의 김씨 할머니(83)에게 올해 농사가 잘되었냐고 묻자 “호박순이 오그라들어 농사가 다 잘되고 있다”면서 이제 태풍만 없으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한다. 김씨 할머니는 “초파일날 등불이 고요하면 참깨 농사가 잘된다”는 이야기도 한다. 제주 여자들만의 농사 지혜인가 보다.

     제주 어느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끈을 이용해 구덕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모습이다. 구덕은 그릇이 귀한 제주에서 요긴한 물건이었다. 아이를 재울 때도 ‘애기구덕’이라는 제주식 요람에 눕혔고, 해녀들은 물질할 때도 구덕을 가지고 물에 들어갔다.

     제주는 삼무(三無)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 도적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는 것이다. 집을 비울 때 집주인은 ‘정낭’이라는 나무를 입구에 걸쳐놓는다. 집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다. 삼다(三多)는 너무도 유명하다. 돌·바람·여자가 많다는 뜻이다.

     1960년대 이후 제주가 관광지로 거듭나면서 삼보(三寶)와 삼려(三麗)가 생겨났다. 바다·한라산·언어가 제주의 세가지 보물이라면 순박한 인심, 수려한 자연, 감귤을 비롯한 각종 열매는 제주의 세가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그중 제주 방언은 타 지방 사람들에게 신기한 느낌마저 준다. “제주 방언이 강한 것은 바람 탓”이라는 게 장에서 만난 송성민씨(47)의 이야기다. 세찬 바람이 불 때도 상대방이 알아듣게 말을 하려다 보니 발음이 세고 빨라졌다는 것이다.

     모슬포장은 1일과 6일이면 선다. 공식 명칭은 ‘대정오일시장’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모슬포장으로 더 많이 불린다. 포목 장사를 하는 강씨 할머니(83)를 만난 것은 파장 무렵이었다. 40년째 모슬포장을 지키고 있어 단골이 많다고 한다. 강씨 할머니는 젊어서 양장점을 해본 경험으로 포목점을 하게 되었단다. 지금도 새로운 원단이 나오면 펼쳐놓고 디자인하는 재미가 “촘말로 좋수다” 하는 강씨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여인들의 삶이 꿈틀대는 제주의 장터는 생활문화를 꽃피우는 창이다.

     제주에는 이밖에도 장이 많다. 1·6일에는 모슬포장 외에도 오메기떡과 함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함덕장, 양파가 많이 나오는 성산장이 선다. 2·7일에는 은갈치·옥돔·대장간이 이름난 제주민속장과 바나나·감귤·고사리가 나오는 표선장이, 3·8일에는 옥돔·갈치·고등어가 많은 중문장이 열린다. 4·9일에는 한림장(옥돔·양송이·해물)과 고성장(바나나·감귤·해물), 서귀포장(옥돔·갈치·고등어)이 손님을 맞는다. 당근·양파·해물·과일이 많은 세화장은 5·10일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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