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⒀ 충북 단양장

좋은 땅에서 키운 ‘단양 육쪽마늘’ 맵고 달고…

마늘 축제 열리는 10월이면
전국에서 관광버스 타고 사러와
마늘종·완두콩 좌판 곳곳에
소백산서 캐온 각종 버섯·약초도

 

“그 값에는 안 돼유. 엥간히 깎아유.”

 마늘종을 갖고 단양장에 나온 이동춘씨(79) 부부가 중간상인 박씨 아주머니(67)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양반 고장 사람들이라 그런지 말과 행동이 느려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하다. 세 사람 다 마늘종이 놓인 저울 눈금만 쳐다볼 뿐 흥정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에 펼쳐놓고 직접 팔지 왜 싼값에 넘기냐고 묻자 이씨 할아버지는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최고지유. 자연에서 터를 얻어 사는디…” 한다. 오늘 갖고 나온 마늘종은 그렇지 않지만, 다른 때는 손수 농사지어 거둔 것인데도 손님들이 국산 맞느냐 물어보며 믿지 않는 때가 있다고. 그게 싫어서 싼값에라도 한꺼번에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식 같은 농산물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파는 것보다 도매상에 넘기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는 것이다.

 단양장(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전리)은 1일과 6일에 선다. 1985년에 도전리 일대에 상가가 조성되면서 단양전통시장이 개설됐지만, 장 분위기는 아무래도 장날이 돼야 산다. 이 장에서 가장 유명한 건 육쪽마늘이다. 난지형 마늘은 가을철 벼 수확이 끝난 뒤에 심어 이듬해 모내기하기 전에 거두어들이는데, 단양의 육쪽마늘은 한지형 마늘이라 하지가 지나야 수확을 한다. 단양 육쪽마늘의 명성은 토질 덕분이라고 한다. 단양은 우리나라 최대의 석회암 지역으로, 땅속의 석회 성분이 마늘 속으로 들어가 매우면서도 달고 향이 좋은 마늘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마늘축제가 열리는 10월이면 저장성이 좋은 단양 마늘을 사려고 전국 여인네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몰려와 장터가 인산인해를 이룬단다.

 적성면에서 온 유재동씨(61)는 “간장에 담갔을 때 가라앉는 마늘이 진짜 단양 육쪽마늘이여유” 하고 일러준다. 유씨는 정성껏 마늘을 키우고도 저장창고가 없어 값이 쌀 때 팔아야 하니 속이 상한단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단양 사람들에게 마늘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마늘 수확하는 철에 장마라도 져봐유. 그게 빗물이 아니라 눈물이어유. 팔려고 난장에 가지고 와서는 빗으로 마늘 뿌리를 빗기는 사람까지 있어유. 단양 마늘은 수염이 많거든유.”

 버스 정류장 양옆으로는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황옥희 할머니(92)가 가로수를 양산 삼아 앉아 마늘종 몇단으로 좌판을 열었다. 황씨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살림이며 농사일을 직접 해낸다고 한다. “응딩이 조금만 움직이면 곳곳에 먹을 것이 지천이여. 숭년만 안 들면 굶을 일은 없어유.” 야구 모자까지 쓰고 장사하는 황씨 할머니 얼굴이 고향에 있는 장승 같다.

 단양 땅에는 마늘 말고도 자랑거리가 많다. 고수동굴은 오랜 세월 땅속으로 흘러내린 물이 석회암을 녹여 만들어졌다. 자연의 힘이 빚은 천연동굴로, 1976년 천연기념물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그 유명한 단양팔경은 조선 시대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단양에 발을 디디면 도담삼봉을 비롯해 죽순 모양의 옥순봉, 거북처럼 버티고 있는 구담봉, 우탁의 휴양지로 알려진 사인암 등의 비경이 곳곳에서 반긴다.

 산악 지대인 단양은 서리 내리는 기간이 길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커 송이·표고 같은 버섯과 각종 약초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나온다. 또 소백산 깊은 산속에서 나온 온갖 산나물이 장날이면 소쿠리에 담긴 채 손님들을 기다린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수동굴이 있는 동네에 산다”고 자랑하는 엄씨(70)는 장에서 완두콩을 팔고 있다. 엄씨는 여자들 폐경기 장애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해 찾는 사람이 많다며 완두콩 예찬을 구수하게 늘어놓는다. “한 양쟁이 사봐유. 요즘 테레비에서는 비타민A랑 나이아신인가 뭔가도 많아 폐암 예방에도 좋다고 하드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자연이라는 것을 장터에서 다시 배운다.

 단양에서는 단양장 외에도 3·8일에는 영춘장이, 4·9일에는 매포장이 열린다.





 


        

“고흥 갯바람 쐬고 큰 마늘인디…장아찌 담가 봐~”

깊은 산 많은 지역환경 영향
인삼·표고·오미자 많이 볼수 있어
때늦은 봄나물들 좌판에 오밀조밀
한창 수확 양파·마늘 등도…

 

 

 

 

전북 진안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여 있는 할머니들의 보따리 속이 궁금하여 슬금슬금 다가가 옆에 퍼질러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마령면 동촌리의 강씨 할머니(83)는 텃밭에서 뽑아 온 인삼 몇뿌리와 바꾼 옷가지들을 자랑한다.

 “지난 장에서 눈독 들여 놓은 옷 때문에 인삼 쬐께 캐갖고 역부러 왔어라우.”  인삼 몇뿌리 판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산 할머니 얼굴이 초록 들판처럼 환하다. 시골 장터에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필요한 물건은 돈을 따지지 않고 바꾸었다. 빗자루 하나와 참외 한보따리를 바꾸면서도 “아따, 그만 넣으랑께” 하며 참외 하나 더 넣으려는 손을 물리치곤 했다.

 윗집 딸이 남자 따라 서울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고, 서울서 사업한다고 자랑한 아들놈이 망하고 내려와 장날이면 창고의 곡식을 갖고 나가 좌판을 열어도 흉보지 않았다. 돈보다 귀한 것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읍내 학교에서 수업을 끝낸 아들을 국숫집에 데려가 곱빼기를 먹이고 차 태워 보내면서도 엄마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날도 장날이었다.

 팔 것이 있을 땐 장터에 좌판을 차려 놓고 질펀하게 앉으면 그만이었다. 고쟁이 쌈지 속에서 나온 찢어진 천원짜리에 밥풀이 붙어 있어도 누구 하나 채근하지 않았다. 두세시간 걸려 펼쳐 놓은 좌판에서 개시도 못한 아저씨가 안주 없는 강소주를 병째 나발 불어도 괜찮았다. 비 오는 날 빗방울도 많이 판 사람에게나 덜 판 사람에게나 고르게 떨어졌다.

 난전을 펼쳐 놓고 장 구경을 다녀도 주인 없는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빗자루 몇개 둘러메고 장터를 돌아다니던 할아버지가 아랫마을 친구를 만나 국밥집에 들어가며 장사를 끝내도 그만이었다. 다음 장날이 있기 때문이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을 품은 진안장(진안읍 군상리)은 4일과 9일이면 열린다. 2009년 장옥이 현대화되면서 2010년 2월부터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진안엔 깊은 산이 많아 인삼·표고·오미자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고, 장에서도 이런 농산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진안 땅 흙이 좋아 농사짓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가 솔찬하당께.”  장 보러 나온 고홍석 할아버지(93)가 진안 자랑에 팔을 걷어붙인다. 마이산은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2003년에는 국가지정 명승 제12호로 지정된 명산이다. 자연의 신비로 만들어진 마이산의 암봉우리 남쪽 벼랑 아래에는 돌로 쌓은 탑이 곳곳에 서 있다. 1885년 마이산 기슭에 들어온 이갑용 처사(1860~1957년)가 오랜 세월 혼자 힘으로 세운 것들이다. 장비 하나 없이 돌 한덩이 한덩이를 쌓아올려 강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탑을 만든 비결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아따, 아짐! 요것이 고흥 갯바람 쐬고 큰 마늘인디, 장아찌 담가서 아재 줘봐. 정력제가 따로 없당께.” 고흥에서 트럭 가득 마늘을 싣고 나온 박차동씨(56)가 백운면 원촌마을에서 온 이씨 아주머니(63)를 붙잡고는 마늘장아찌 담그는 방법까지 일러준다. 지나가는 사람을 다 아는 듯 인사하기에 “그렇게 발이 넓으세요?” 하고 물어본 내게 박씨는 “장에 나오면 다 한식구여. 내가 이 근방 장을 다 돈당께. 근께 모르는 사람이 없써라우” 하고 답한다. 박씨는 진안장 외에도 임실장·관촌장·장계장을 돌아다니며 마늘과 과일을 팔아온 세월이 31년째라고 한다.

 도시 문화가 곳곳에 번져 각 지역만의 풍습이 점차 잊혀지고 있다. 동네마다 있던 서낭당이며 당골네(무당) 등도 대부분 사라졌다. 산에서 자란 나물과 논바닥에 퍼진 둑새풀을 베어 보리와 섞어 죽을 쑤어 먹었다는 홍영애 할머니(82)는 풀죽이 깔끄러워 목에 넘어가지 않아 입안에서 굴렸던 때가 한없이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산에서 늦게 내려온 봄나물들이 할머니들의 좌판에 오밀조밀 널려 있다. 요즘 한창 수확하는 양파며 마늘 등 싱싱한 날것들과 오래도록 고향을 지켜온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장터 바닥은 언제 만나도 정겹고 포근하다. 

 


 

 

 

 

 




 

                                                                             경북 예천 지보장

 

                          옷고르던 할머니들 이웃 다쳤다는 소식에 “우야꼬…”


 


면소재지 소화리의 대로변에 열려
옷 펼쳐놓은 노점 할머니들 모여 수다
40년 넘은 옷궤짝 ‘세월의 흔적’
챙겨나온 곡식 흥정 벌이던 농민
헐값에 사려는 장꾼에
“아까바서 몬 판다” 볼멘소리 

 
“분다 분다 바람이 분다. 만고강산에 바람이 분다….” 마장군은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산을 내려왔다. ‘마도치’라고도 불린 마장군은 1890년경 이 지역을 무대로 출몰한 화적(火賊·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무리)의 두목이다. 그는 개화기의 정세를 풍자하듯 어떤 때는 도포에 갓을 쓴 선비 복장으로, 어떤 때는 군인 복장으로, 때로는 일반 상민의 복장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의 지보장에는 경운기를 끌고 나오는 농민들이 있을 뿐이다. 면소재지의 시골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농사로 삶을 잇는 농민이 대부분이다. 봄철의 장터에서 이들은 모종과 씨앗, 농기구 파는 곳에 주로 모인다.

 지보장(1·6일)은 지보면 소재지인 소화리 대로변 양쪽으로 열린다. 농번기라 모두들 일하러 나갔는지 모종 사러 온 사람만 간간이 보일 뿐, 대개는 장꾼들끼리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 직접 농사일을 하는 김규영 할아버지(85)는 “할멈이 밭에 토마토 모종을 심다가 모자란다고 해서 얼른 사러 나왔다”고 한다. 예천 자랑을 해달라는 부탁에 김씨 할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물맛이 얼마나 좋으면 예천이라 했겠노. 단술 예(醴), 샘 천(泉) 아이가. 여기가 옛날에는 얼라 나이 열댓살만 되믄 대부분 한가락 하는 한량이라 캤다. 없이 살아도 살맛 났다 카이. 400년 전부터 예천은 활로 유명한 고장 아이가. 그래서 아들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걸던 시절도 있었던 기라.” 농사일이 힘들고 젊은 사람도 없지만 쑥쑥 자라는 작물이 자식 같다며 웃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오늘의 농촌이 읽힌다.

 풍양면에서 온 박씨 할머니가 옷가지를 펼쳐놓은 노점 주위로 할머니들이 모여 놀고 있다. 한쪽 구석에 드러누운 옷 궤짝은 40여년을 함께해 온 것이란다. 요즘 가벼운 상자도 많은데 무겁게 저걸 들고 다니시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저 궤짝도 한식구나 같은데 쓰다가 좀 불편하다고 버리면 벌 받는데이” 한다.

 장터에 가면 오래된 손수레나 됫박을 해지면 붙이고 덧붙여가며 반세기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함인지 사용하던 물건이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물이 주는 친근함이 주인과 닮아 있다.

 윗마을 아랫마을 이야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옷을 고르던 한 할머니가 “우야꼬, 많이 다쳤나. 주스라도 사 들고 병원에 가봐야 안 되겠나” 한다. 도화리 강씨 할아버지가 농기구에 팔을 다쳐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할머니들은 천원짜리 몇장씩 쌈지에서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만원을 만들어 병원 갈 채비를 한다.

 ‘육지 속의 섬마을’로 유명한 회룡포에서 온 이씨 할머니는 옷을 고르다 말고 사진을 찍고 있는 필자에게 농을 건넨다. “이 문디 가시나야, 뭐 할라꼬 꼬부랑 할마시 사진을 찍어 쌓노?” “할머니 시집보내 드리려고요.” “뭐라꼬?” 한바탕 요란한 웃음소리에 놀랐는지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흔들거린다. 옛날에는 지보에서 누에를 많이 쳤기에 옷감을 볼 줄 안다는 이씨 할머니다. 할머니는 “누에가 뽕잎 갉아 먹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린다”며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네번 잠자면서 몸집을 키우고 실을 토해 고치를 짓는 과정을 들려준다.

 지보장은 파는 사람이 농민이고, 사는 사람이 장꾼이다. 농민들이 집에 두었던 곡식을 챙겨 장터에 나오면 장꾼들이 낚아채 흥정이 벌어진다. 한참을 장꾼과 실랑이하던 배씨 할머니가 다시 자루 주둥이를 싸맨다. “내사마 이것들 거둘 때까지 공들인 시간이 아까바서 몬 판다” 하는 볼멘소리를 남긴 채 다른 곳으로 간다. 봄에 갖고 나오면 더 많이 쳐준다고 해서 이제야 갖고 왔는데, 헐값에 사려는 장꾼의 흥정에 잔뜩 화가 나신 것이다.

 장터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농부들의 행복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먹을 것을 많이 주는 땅만큼 진실할 수는 없으니까.

 예천에는 이 밖에도 쪽파·표고·건초누에분말·한우가 유명한 예천장(2·7일), 풍양가지·배가 유명한 풍양장(3·8일), 하우스수박·표고·예천용궁순대로 유명한 용궁장(4·9일)이 열린다.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⑽ 인천 강화장

 

화문석·꽃방석·꽃삼합…왕골공예품 즐비

 

 

고려땐 천도한 이후 생겨
일찍이 외국과 직물·도자기 등 무역
상거래 활발해지자 보부상들 몰려

전등사 전설 등 숱한 이야깃거리

인삼막걸리·밴댕이회 ‘일품’
고소한 순무김치도 입맛 자극



 장터 맛은 사람 맛이다. 사람들이 어울려 형성되는 것이 장인데, 그중에서도 사람 중심의 장이란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곳이 바로 강화장(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이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볼거리와 먹거리 또한 넘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문화 유적지가 많아 역사가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강화읍내 동락천을 중심으로 웃거리장과 아랫거리장이 있었고, 새벽녘이면 아랫거리장 옆에 화문석장이 열렸다. 강화장은 고려 때 강화로 천도한 이후 생겼다고 한다. 외국 무역이 일찍 이루어졌기에 직물이나 화문석·도자기가 거래되기도 했다.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보부상들이 하나둘 강화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오일장이 서게 되었고, 1960년대에 상설시장과 함께 장터가 생겼다. 1993년에 강화장의 중심인 동락천이 복개되면서 이곳으로 100여명의 지역 주민들이 농산물과 특산품을 싸 들고나와 난장을 펼쳐 장을 만들어 갔다. 지금은 2일과 7일이 드는 날마다 오일장이 열린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장의 파라솔이 사람들을 반긴다. 봄날 장터를 둘러보면 할머니들 보자기 위에 들판이 통째로 마실 나온 것 같다. 사람들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나물들이 고개를 바짝 곧추세우더니 할머니 손길이 닿자 어느새 제 모양을 갖춘다. 시집가는 색시처럼 들떠 있는 색색의 나물에서 고향을 만난다.

 “화문석 하나 만드는 데 60만번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유의순 할머니(80)를 화문석 파는 가게에서 만났다. 송해면에서 온 유씨 할머니는 30년 동안 화문석을 짜 왔기에 요즘도 장에 나오면 화문석부터 구경한다면서 “그 시절 장날은 사람들 솜씨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매겨지는 값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날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토산품매장에는 화문석과 꽃방석·꽃삼합 등 손으로 만든 완초(왕골) 공예품들이 즐비하다. 화문석 매장을 운영하는 김영숙씨(73)는 지금도 인근 마을에서 화문석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받아 ‘강화 화문석’만 판다고 한다.

 “내가 장아찌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으면 대한민국 돈은 전부 내 주머니에 들어왔을 것”이라며 큰소리치는 김화자씨(74)가 쑥으로 만든 송편과 장아찌를 펼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맛을 보인다. 맛보기로 건네준 송편을 받아먹던 어느 할머니가 대뜸 “전등사에서 벌거벗은 여인이 추녀를 떠받들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전등사 전설의 한토막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자 절을 짓던 목수가 그 배신에 대한 노여움으로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평생 추녀를 이게 했다는 이야기다. “여편네들이 모이는 장터는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 그러니 이거 말고도 숱한 이야깃거리가 떠돌고 있지.” 전등사 나부상 이야기를 꺼낸 박씨 할머니의 귀띔이다.

 강화는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곳 사람과 북한 사람이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북한 사투리가 묻어나는 말씨가 들리기도 한다. “빨리 오시겨” 하는 지인의 소리에 놀란 박씨 할머니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장터 안 풍경이 살아 꿈틀대듯 정겹다.

 지푸라기에 엮여 온 달걀에서는 병아리가 뛰쳐나올 것 같고, 갓 쓴 엿장수의 가위 소리에 놀란 사물들은 춤을 추듯 출렁거린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산성 밑에서 자란 쑥은 역사를 이야기해 주고, 보자기에 펼쳐진 돌미나리는 새초롬하게 초록을 내뿜고 있다. 물동이 일 때 쓰는 똬리와 물 푸는 데 쓰는 표주박, 수수 줄기로 맨 빗자루까지 옛날 시골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모두 나와 있어 마치 장터가 이동 박물관 같다.

 장옥 2층에는 먹거리도 풍성하다. 인삼막걸리와 밴댕이회도 일품이지만, 강화 특산품인 자줏빛 동그란 순무를 듬성듬성 썰어 밴댕이젓갈로 양념한 순무김치의 고소함 또한 입맛을 자극한다. 음식 장사를 한 지 40년이 넘었다는 방씨 할머니(78)가 “이 짓이라도 하고 있어 내가 살지, 언제까지 할지는 나도 모르갓시다” 하며 또 음식을 만든다. 방씨 할머니도 다른 장꾼들도 모두 살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쉬지 않고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⑼경남 창원 경화장

난장 위로 흩날리는 꽃비…‘벚꽃장’으로 유명

일제강점기때 감시 쉽도록
경화동에 한국인만 살게해
되레 민족의식 싹트며 장터 날로 커져

채소장사하며 35년간 글쓴 할머니
동의보감 읽으려 한자 공부 할아버지
장터는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
 

 

  해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봄의 향연 군항제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전역에서 펼쳐진다.  경화장(진해구 경화동)을 찾은 날은 바람이 불고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난장 위로 꽃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봄에 취하기엔 매서운 날씨였지만, 휘날리는 벚꽃으로 금방이라도 하얗게 물들 것만 같은 처연한 풍경이었다. 장바닥으로 떨어지는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하다는 할머니들 말씀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진해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도시 미관을 위해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데서 유래한다. 광복 후에는 일본 나무라며 벚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다. 하지만 이후 왕벚나무가 우리나라 고유 수종으로 확인됐고, 1960년대 관광도시 계획에 따라 35만여그루의 벚나무를 새로 심으면서 진해는 다시 ‘벚꽃의 도시’가 되었다.

 ‘벚꽃장’으로도 유명한 경화장에서는 일본이 세운 100년 전의 도시계획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1910년 이후 바둑판 같은 형태의 주거단지를 경화동에 만들었다. 조선 말까지 진해에서 가장 큰 장은 풍호동에 있던 풍덕개장이었는데, 그곳에다 비행장을 만들면서 장터를 한국인 주거단지인 경화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경화동에 사는 김씨 할머니(92)는 17세에 시집와 지금까지 경화장에 나온다. 그러니 이 장의 역사를 훤히 알고 있다.

 “왜놈들이 우릴 감시할라꼬 한국인들만 몰아서 살게 한 기라. 안 그라마 와 한국 사람들만 여다 모았겠노.”

 일본이 경화동에 한국인만 거주하게 함으로써 감시를 쉽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싹트며 장터가 날로 커졌다는 것이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고 장터를 자랑하는 김씨 할머니의 모습이 참 의기양양해 보였다.

 채소 상자 골판지를 뜯어 무릎 위에 올려 놓고 한땀 한땀 수놓듯이 글 쓰는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더니 전찬애 할머니(72)가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한테 모욕을 당할 때 힘이 더 납니더. 그때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글을 썼더니 그기 무기가 되고 자신감도 생기데예. 몇십년 동안 글을 써 보니 이기 행복이구나 싶습디더.”

 할머니는 장사를 하다가도 좋은 글이 생각나면 박스를 뜯어 써 온 지가 35년이 되었다고 한다. 장바닥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장소와 종이를 가리지 않고, 손님만 없으면 웅크리고 앉아 글을 쓴단다. 이렇게 쓴 글을 저녁에 집으로 가져가 원고지에 다시 옮겨 적으며 정리한다. 어릴 적 먹을 것이 없어 구걸했던 부끄러운 기억과 장터를 돌아다니며 겪은 온갖 수모가 글의 소재가 되었다.

 전씨 할머니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바로 이런 글을 엮어 만든 책이 세상에 나오던 날이라고 회고한다.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와 파릇파릇한 풋고추가 펼쳐진 좌판에서 고추를 고르던 박씨 할머니(78)가 한마디 거든다.

 “이 아지매가 경화장에서는 유명 인사인 기라. 책도 내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강의도 한다 안 카나.”

 빨갛고 노란 색색의 희망을 써 내려가는 전씨 할머니 어깨 위로 벚꽃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장터 한쪽에서는 몸을 잔뜩 움츠린 굼벵이가 반원형의 똬리를 틀고 죽은 척하며 엎드려 있다. 암갈색의 입과 발, 말간 몸통과 감청색 엉덩이를 한 굼벵이가 햇빛을 받자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박는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굼실굼실 머리를 들고 도망을 친다.

 32년째 굼벵이와 참개구리 등을 팔면서 병에 대한 상담까지 하고 있는 김남권씨(62)는 노점상인회장이기도 하다.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위해 한자 공부도 열심히 한다며 글씨를 쓴 두루마리를 펼쳐 보인다. 장터에 가면 이처럼 장인 정신으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여럿 만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장터가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이 되기도 한다.

 경화장은 3일과 8일에 선다. 각종 채소와 과일이 특산물이다. 경화장 외에 진해에서 열리는 장으로는 웅천동의 웅천장(4·9일)과 마천동의 마천장(5·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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