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 지보장
옷고르던 할머니들 이웃 다쳤다는 소식에 “우야꼬…”
면소재지 소화리의 대로변에 열려
옷 펼쳐놓은 노점 할머니들 모여 수다
40년 넘은 옷궤짝 ‘세월의 흔적’
챙겨나온 곡식 흥정 벌이던 농민
헐값에 사려는 장꾼에
“아까바서 몬 판다” 볼멘소리
“분다 분다 바람이 분다. 만고강산에 바람이 분다….” 마장군은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산을 내려왔다. ‘마도치’라고도 불린 마장군은 1890년경 이 지역을 무대로 출몰한 화적(火賊·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무리)의 두목이다. 그는 개화기의 정세를 풍자하듯 어떤 때는 도포에 갓을 쓴 선비 복장으로, 어떤 때는 군인 복장으로, 때로는 일반 상민의 복장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의 지보장에는 경운기를 끌고 나오는 농민들이 있을 뿐이다. 면소재지의 시골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농사로 삶을 잇는 농민이 대부분이다. 봄철의 장터에서 이들은 모종과 씨앗, 농기구 파는 곳에 주로 모인다.
지보장(1·6일)은 지보면 소재지인 소화리 대로변 양쪽으로 열린다. 농번기라 모두들 일하러 나갔는지 모종 사러 온 사람만 간간이 보일 뿐, 대개는 장꾼들끼리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 직접 농사일을 하는 김규영 할아버지(85)는 “할멈이 밭에 토마토 모종을 심다가 모자란다고 해서 얼른 사러 나왔다”고 한다. 예천 자랑을 해달라는 부탁에 김씨 할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물맛이 얼마나 좋으면 예천이라 했겠노. 단술 예(醴), 샘 천(泉) 아이가. 여기가 옛날에는 얼라 나이 열댓살만 되믄 대부분 한가락 하는 한량이라 캤다. 없이 살아도 살맛 났다 카이. 400년 전부터 예천은 활로 유명한 고장 아이가. 그래서 아들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걸던 시절도 있었던 기라.” 농사일이 힘들고 젊은 사람도 없지만 쑥쑥 자라는 작물이 자식 같다며 웃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오늘의 농촌이 읽힌다.
풍양면에서 온 박씨 할머니가 옷가지를 펼쳐놓은 노점 주위로 할머니들이 모여 놀고 있다. 한쪽 구석에 드러누운 옷 궤짝은 40여년을 함께해 온 것이란다. 요즘 가벼운 상자도 많은데 무겁게 저걸 들고 다니시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저 궤짝도 한식구나 같은데 쓰다가 좀 불편하다고 버리면 벌 받는데이” 한다.
장터에 가면 오래된 손수레나 됫박을 해지면 붙이고 덧붙여가며 반세기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함인지 사용하던 물건이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물이 주는 친근함이 주인과 닮아 있다.
윗마을 아랫마을 이야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옷을 고르던 한 할머니가 “우야꼬, 많이 다쳤나. 주스라도 사 들고 병원에 가봐야 안 되겠나” 한다. 도화리 강씨 할아버지가 농기구에 팔을 다쳐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할머니들은 천원짜리 몇장씩 쌈지에서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만원을 만들어 병원 갈 채비를 한다.
‘육지 속의 섬마을’로 유명한 회룡포에서 온 이씨 할머니는 옷을 고르다 말고 사진을 찍고 있는 필자에게 농을 건넨다. “이 문디 가시나야, 뭐 할라꼬 꼬부랑 할마시 사진을 찍어 쌓노?” “할머니 시집보내 드리려고요.” “뭐라꼬?” 한바탕 요란한 웃음소리에 놀랐는지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흔들거린다. 옛날에는 지보에서 누에를 많이 쳤기에 옷감을 볼 줄 안다는 이씨 할머니다. 할머니는 “누에가 뽕잎 갉아 먹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린다”며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네번 잠자면서 몸집을 키우고 실을 토해 고치를 짓는 과정을 들려준다.
지보장은 파는 사람이 농민이고, 사는 사람이 장꾼이다. 농민들이 집에 두었던 곡식을 챙겨 장터에 나오면 장꾼들이 낚아채 흥정이 벌어진다. 한참을 장꾼과 실랑이하던 배씨 할머니가 다시 자루 주둥이를 싸맨다. “내사마 이것들 거둘 때까지 공들인 시간이 아까바서 몬 판다” 하는 볼멘소리를 남긴 채 다른 곳으로 간다. 봄에 갖고 나오면 더 많이 쳐준다고 해서 이제야 갖고 왔는데, 헐값에 사려는 장꾼의 흥정에 잔뜩 화가 나신 것이다.
장터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농부들의 행복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먹을 것을 많이 주는 땅만큼 진실할 수는 없으니까.
예천에는 이 밖에도 쪽파·표고·건초누에분말·한우가 유명한 예천장(2·7일), 풍양가지·배가 유명한 풍양장(3·8일), 하우스수박·표고·예천용궁순대로 유명한 용궁장(4·9일)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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