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갯바람 쐬고 큰 마늘인디…장아찌 담가 봐~”
깊은 산 많은 지역환경 영향
인삼·표고·오미자 많이 볼수 있어
때늦은 봄나물들 좌판에 오밀조밀
한창 수확 양파·마늘 등도…
전북 진안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여 있는 할머니들의 보따리 속이 궁금하여 슬금슬금 다가가 옆에 퍼질러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마령면 동촌리의 강씨 할머니(83)는 텃밭에서 뽑아 온 인삼 몇뿌리와 바꾼 옷가지들을 자랑한다.
“지난 장에서 눈독 들여 놓은 옷 때문에 인삼 쬐께 캐갖고 역부러 왔어라우.” 인삼 몇뿌리 판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산 할머니 얼굴이 초록 들판처럼 환하다. 시골 장터에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필요한 물건은 돈을 따지지 않고 바꾸었다. 빗자루 하나와 참외 한보따리를 바꾸면서도 “아따, 그만 넣으랑께” 하며 참외 하나 더 넣으려는 손을 물리치곤 했다.
윗집 딸이 남자 따라 서울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고, 서울서 사업한다고 자랑한 아들놈이 망하고 내려와 장날이면 창고의 곡식을 갖고 나가 좌판을 열어도 흉보지 않았다. 돈보다 귀한 것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읍내 학교에서 수업을 끝낸 아들을 국숫집에 데려가 곱빼기를 먹이고 차 태워 보내면서도 엄마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날도 장날이었다.
팔 것이 있을 땐 장터에 좌판을 차려 놓고 질펀하게 앉으면 그만이었다. 고쟁이 쌈지 속에서 나온 찢어진 천원짜리에 밥풀이 붙어 있어도 누구 하나 채근하지 않았다. 두세시간 걸려 펼쳐 놓은 좌판에서 개시도 못한 아저씨가 안주 없는 강소주를 병째 나발 불어도 괜찮았다. 비 오는 날 빗방울도 많이 판 사람에게나 덜 판 사람에게나 고르게 떨어졌다.
난전을 펼쳐 놓고 장 구경을 다녀도 주인 없는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빗자루 몇개 둘러메고 장터를 돌아다니던 할아버지가 아랫마을 친구를 만나 국밥집에 들어가며 장사를 끝내도 그만이었다. 다음 장날이 있기 때문이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을 품은 진안장(진안읍 군상리)은 4일과 9일이면 열린다. 2009년 장옥이 현대화되면서 2010년 2월부터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진안엔 깊은 산이 많아 인삼·표고·오미자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고, 장에서도 이런 농산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진안 땅 흙이 좋아 농사짓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가 솔찬하당께.” 장 보러 나온 고홍석 할아버지(93)가 진안 자랑에 팔을 걷어붙인다. 마이산은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2003년에는 국가지정 명승 제12호로 지정된 명산이다. 자연의 신비로 만들어진 마이산의 암봉우리 남쪽 벼랑 아래에는 돌로 쌓은 탑이 곳곳에 서 있다. 1885년 마이산 기슭에 들어온 이갑용 처사(1860~1957년)가 오랜 세월 혼자 힘으로 세운 것들이다. 장비 하나 없이 돌 한덩이 한덩이를 쌓아올려 강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탑을 만든 비결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아따, 아짐! 요것이 고흥 갯바람 쐬고 큰 마늘인디, 장아찌 담가서 아재 줘봐. 정력제가 따로 없당께.” 고흥에서 트럭 가득 마늘을 싣고 나온 박차동씨(56)가 백운면 원촌마을에서 온 이씨 아주머니(63)를 붙잡고는 마늘장아찌 담그는 방법까지 일러준다. 지나가는 사람을 다 아는 듯 인사하기에 “그렇게 발이 넓으세요?” 하고 물어본 내게 박씨는 “장에 나오면 다 한식구여. 내가 이 근방 장을 다 돈당께. 근께 모르는 사람이 없써라우” 하고 답한다. 박씨는 진안장 외에도 임실장·관촌장·장계장을 돌아다니며 마늘과 과일을 팔아온 세월이 31년째라고 한다.
도시 문화가 곳곳에 번져 각 지역만의 풍습이 점차 잊혀지고 있다. 동네마다 있던 서낭당이며 당골네(무당) 등도 대부분 사라졌다. 산에서 자란 나물과 논바닥에 퍼진 둑새풀을 베어 보리와 섞어 죽을 쑤어 먹었다는 홍영애 할머니(82)는 풀죽이 깔끄러워 목에 넘어가지 않아 입안에서 굴렸던 때가 한없이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산에서 늦게 내려온 봄나물들이 할머니들의 좌판에 오밀조밀 널려 있다. 요즘 한창 수확하는 양파며 마늘 등 싱싱한 날것들과 오래도록 고향을 지켜온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장터 바닥은 언제 만나도 정겹고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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