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태백 철암장

 

시간 멈춘 검은도시, 열흘에 한번
화려했던 지난날, 추억하는 상인들…

주변 탄광들 문닫으며 쇠락의 길로
매달 10·20·30일 장 열려
중부내륙순환·백두대간협곡열차 영향
관광객들 많이 늘어

 


“하늘만 빼곤 온통 까만 동네였드래요. 물도, 땅도, 아이들 얼굴도요. 겨울에 눈이 오면 하얀 이불 같다며 좋아했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철암장(강원 태백시 철암동)은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60년째 장사를 한다는 이준태 할아버지(80)는 철암장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처음 장에 나왔을 때는 지붕이 없어 밀가루 포대로 비바람을 막았는데도 사람들로 넘쳐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돈이 흔했다고 한다.

 생선을 다듬던 이씨 할아버지는 “저 앞에 보이는 삼방동 불빛이 나를 불렀어” 한다. 기차 타고 가다 삼방동 산비탈을 밝힌 불빛에 끌려 철암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부가 되려고 탄광을 찾아갔으나 키가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 장삿길로 들어섰단다. 철암장 맞은편에 자리한 삼방동은 광부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좁은 골목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바로 골목이 나와 마치 미로 같은 동네다.

 태백 철암장은 여느 장과 달리 열흘 만에 장이 선다. 매달 10·20·30일이 장날이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검은 도시의 텅 빈 장옥에는 번창했던 과거만 무성하게 남아 있었다. 머지않아 5월이면 헐리게 될 장옥을 지키며 지난날을 추억할 뿐이었다. 검은 석탄으로 철암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그 시절을 모두들 그리워하는 것이다.

 전국 석탄 생산량의 40%나 차지했던 철암의 탄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장터 뒤편의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국가등록문화재 제21호)’에선 아직까지 탄가루를 재우느라 연신 물을 뿜어내며 석탄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연탄 선탄(캐낸 석탄 가운데서 나쁜 것을 가려냄) 시설로, 근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시장 안에서 40년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진씨 아저씨(67)는 난로에 다리미를 달궈 다리미질하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흐뭇한 순간은 탄광에서 일하는 신랑이 결혼식에 입을 신사복을 빌리러 찾아올 때. 진씨는 그 젊은 광부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빌려주긴 했지만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늘 마음 한쪽이 아렸단다. 그래도 당시엔 공무원이나 상인보다 광부가 인기가 있어 광부증만 있으면 장가도 쉽게 갈 수 있었다. 광부 부인들은 막장에 들어가는 남편 운을 점치려고 무당집을 많이 찾았다는 게 진씨의 말이다.

 철암장이 상설시장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1970년대에는 시장 안에 무당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처럼 노점상도 많아 난전이 철암역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것.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대부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났고, 12만명이던 태백 인구가 지금은 5만명도 안 된다.

 아버지가 광부였다는 화가 허강일씨(40)에게 철암장은 떡볶이로 기억된다. 허씨는 엄마 따라 장에 왔다가 떡볶이라도 먹게 되면 일부러 옷에 빨간 국물을 묻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허씨는 삼방동 옛 우물 벽면에 엄마가 아들 등목을 시키는 모습을 강아지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삼방동에 폐가가 늘어나자 담벼락에 탄광촌의 추억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허씨는 최근 이 일대를 역사 속의 탄광마을로 재생시키는 ‘태백 철암탄광 역사촌’이 만들어져 다행이라며, 꼭 한번 들러보라는 당부까지 한다.

 요즘은 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와 백두대간협곡열차(V-트레인)가 운행되면서 철암장과 그 주변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장터 사람들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철암장과 연결된 까치발 건물. 철암에 사람이 몰리던 시절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느라 하천 바닥에 박은 건물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그 시절의 영화를 알려주는 명물이 됐다.

 따스한 봄날,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아득한 아날로그 여행을 떠나보자. 시간이 멈춰버린 검은 동네, 철암장이 그곳에 있다.

 철암장 외에 태백에서 열리는 장은 통리장(5·15·25일), 장성장(4·14·24일)이 있다. 모두 열흘에 한번씩 열린다.

(30)부산 구포장


 

부산 최대 5일장, ‘구포국수’ ·가축시장 유명
만세운동·한국전쟁 추억 ‘오롯’

 





장터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봄꽃이 아니라 봄나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작디작은 새싹으로 비집고 나와 찬바람을 견뎌낸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를 비롯한 온갖 봄나물이 난장에서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선산을 가꾸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는 박기성 할아버지(76)는 장에 나와 이것저것 파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기 사는 재미 아이가. 장에 나오마 살맛이 난다카이.” 박씨 할아버지는 “자연이 보물창고”라며 손수 캔 칡 한쪽을 내준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오면 매운맛이 나는 갖가지 나물을 희고 검고 노랗고 붉고 파란 다섯 가지 색으로 맞춰 오신채(五辛菜·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생채 요리)를 해 먹었다고 한다. 봄을 맞은 구포장은 그 오신채를 통째로 차려놓은 듯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봄나물 냄새가 가득하다.

 1919년 3월2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포장(부산 북구 구포동)은 1972년부터 상설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오일장의 명성이 더 높아 3일과 8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계절 따라 나오는 온갖 농수산물과 이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다.

 장에 들어서면 가축 골목을 시작으로 채소·과일 골목, 수산물 골목, 의류 골목, 약재 골목, 먹거리 골목이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낀 골목에는 농산물 보따리를 갖고 나온 할머니들이 난전을 펼쳐놓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요지에 자리해 예부터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지금도 장날이면 김해·양산·밀양·창원뿐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에서도 숱한 장돌뱅이들이 몰려온다.

 구포장은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장이 처음 들어선 17세기에는 곡물이나 가축, 소금, 수공업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장터에서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구포국수’가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그 시절 추억이 가미된 맛이라고 한다. 하기야 어떤 이는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택가 골목길에 선 난전으로 들어서자 양산시 물금읍에서 온 최해식 할아버지(84)가 직접 농사지은 연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거 무마(먹으면) 치매도 안 걸리고 머리도 조아집니더. 연근 좀 사 가이소.”

최씨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연근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젊었을 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최씨 할아버지. 지금은 천원짜리 하나를 팔더라도 진심을 다한다며, 그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장사하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연근을 사 가는 강씨 할머니(76) 봉지에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덤이라며 넣어준다. 요즘 제철인 연근은 비타민C와 비타민B가 많아 피부미용과 해독에 좋단다.

 구포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장이다. 매년 10월 말이면 ‘정이 있는 구포시장 장터축제’도 열린다. 주택가 골목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 앞은 봄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와 더불어 따뜻한 정이 장터에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가축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놓여있는 것도 더러 볼 수 있다. 연신 죽어가는 가축의 속내야 어찌 알까마는 삶의 무상이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한 풍경이다.

 42년째 떡을 팔고 있는 주씨 할머니(81) 쟁반 위에는 ‘천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떡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다. 떡을 참 잘 썬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석봉 엄마가 살아 와도 내보다는 못할 끼다”라며 옛날에 장바닥에서 불렀던 노래를 들려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력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장 외에 부산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오시게장·하단장·월내장(2·7일), 사덕장·녹산장(1·6일), 덕두장·좌천장(4·9일), 송정장(5·10일) 등이 있다.

장터순례(29)전북 익산 북부장


“황토밭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전국 두번째로 큰 재래시장
전주·김제·군산·완주에 둘러싸여
교통 편리하고
채소·수산물 가격 싸
언제나 문전성시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선다.

▲익산 북부장은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이다. 이웃한 전주·김제·군산·완주 등에서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배 속에 들어간 건 절대 돈 받지 않는다”는 마이크 소리를 따라 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자 파는 강성구씨(30)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6년째 장사한다는 강씨는 배 속에 들어간 것은 무조건 공짜이니 많이 먹으란다.

 젊은 장꾼의 너스레에 끌려 맛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밑지지 않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할매들 장 한 바퀴 돌고 다시 찾아오는 것 보믄 아직은 정이 살아 있당께요” 한다. 과자 한 뭉치 산 허씨 할머니(76)도 한마디 한다. “얻어먹기만 하고 안 사면 쓰간디. 정은 주고받는 것이여.”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서 있다. 할머니들 앞에는 찹쌀·콩·고구마·땅콩·냉이와 말린 나물 등이 펼쳐져 있어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 마당 한 귀퉁이가 이사 온 것 같다.

 고구마와 말린 나물을 펼쳐 놓은 소씨 할머니(82)는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왔다. 할머니는 고구마 자랑이 한창이다.

 “황토밭에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땅이 너무 질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서 캔 것들이여. 이 고구마 맛 한번 보면 내 말 알 것이구만.”

 할머니 앞에는 고구마들이 등을 포개고 나란히 누워 햇빛과 노닐고 있다.

 1975년에 개설된 익산 북부장(익산시 남중동)은 전국에서 경기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으로, 끝자리가 4·9인 날이면 오일장이 선다. 전주·김제·군산·완주가 둘러싼 지역의 중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들 지역에선 어디서든 20~30분이면 올 수 있다.

 북부장은 익산 황토밭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 군산에서 나오는 각종 수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전국에서 고구마가 세번째로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자색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자주빛 고운님>은 이 지역에서 나는 천연 생막걸리다. 자수정처럼 고운 보석 빛깔을 품고 있어 익산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는 중이다.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품은 천혜의 곡창지대로, 백제 시대에는 왕궁이 있던 ‘서동요의 고장’이다. 또 이웃한 군산·강경과 함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화강암의 원산지로 오래전부터 석공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같은 석조 문화재들이 많아 근대 문명의 박물관으로 불리지만, 일제의 아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익산은 또한 102년의 철도 역사가 있는 교통 도시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보석박물관인 ‘주얼팰리스’도 있다. 주얼팰리스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유사한 모양으로 설계되었는데, 이곳에선 ‘나만의 보석 만들기 체험’도 가능해 목걸이나 휴대전화 고리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콩과 마늘을 갖고 나왔다는 구씨 할머니(85)는 오랜만에 나와 시세를 잘 모르겠다며 말을 이어간다.

 “오늘 사람 구경 많이 했응께 남는 장사 했제. 옛날에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 안 지응께 필요한 것끼리 모다 바꾸고 그랬어. ‘아짐, 오늘은 뭐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가 생각나서 한번씩 나오믄 사람 말을 안 믿고 ‘중국 것 아니냐?’ ‘농사진 것 맞냐?’고 자꾸 물어싸….”

 큰길가에서 김을 파는 염씨(46)는 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엠에프(IMF) 때 장돌뱅이 길에 들어섰다는 염씨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장바닥에서 흘려보냈다. 인근의 익산장과 군산 대야장, 완주 봉동장·삼례장을 도는데 사철 파는 물건이 다르다고 한다. “장터 흐름을 읽을 줄 알면 장삿길도 편하다”는 염씨는 장터에서 세상살이를 배워간다.

 익산에서 열리는 장은 이 밖에도 천년고도 마한백제가 살아 있는 금마장(2·7일), 함열장(2·7일), 여산장(1·6일), 조선 시대부터 장이 열렸다는 황등장(5·10일)이 있다.

 

 

 

  • 온 대지가 잠든 겨울의 새벽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새벽 4시 무렵, 어둠을 뚫고 한 대의 트럭이 들어와 멈춘다. 동시에 또 다른 트럭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트럭 천막 사이로 간간히 들리는 소 울음소리가 잠든 대지를 깨우자 새벽이 일어날 채비를 서두른다. 소를 실은 차량들의 전조등이 어슴푸레한 새벽을 밝히는 가운데, 구슬픈 소 울음소리가 허허로운 공간을 메운다. 우시장이 개장하는 새벽 6시 무렵에야 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소와,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인과의 사투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6시부터 경매에 들어가 8시 30분이면 완전히 끝나는 우시장의 풍경은 서글픈 노예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을 올려보며 슬피 울어대는 어미 잃은 송아지의 애잔한 울음에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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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우시장은 1977년부터 홍천읍 갈마곡리 일대에 형성됐으나 2005년경 주거지역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북방면 하화계리로 옮겼다. 인근에 위치한 횡성이나 양양의 우시장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다. 춘천이나 인제, 철원, 양구, 고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홍천우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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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은 강원도 영서 내륙의 중앙에 자리해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동쪽과 서쪽의 말과 기후도 다르다고 한다. 동쪽 사람들은 거센 영동지방 사투리를 쓰지만, 서쪽 사람들은 경기도 말씨에 더 가깝다. 2000년대부터 홍천 전체를 대표하는 ‘늘푸른 홍천 한우’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새롭게 탄생했다. 가족처럼 키우는 한우는 외국 소에 비해 올레인산이 많아 구수한 맛이 난다고 한다. 소의 사육기간은 거세우가 30개월이고, 일반 소는 2년 정도. 치솟는 사료 값과 수입쇠고기를 감당할 수 없는 농민들의 근심이 소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 옛날부터 농가의 소는 논밭 다음으로 큰 재산이었다. 지금도 산비탈에 있는 밭이나 경운기가 들어가지 않는 땅은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한다. 소는 힘든 일을 척척 해내는 든든한 일꾼이기에, 집안의 머슴처럼 사람대접 받으며 한 식구로 살았다. 남의 논밭을 가는 품앗이로 돈을 벌어주기도 하고, 소를 팔아 도시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 등록금을 해결하는 등 농촌에서의 재산목록 1호였다.
    “내 자식도 이렇게는 안 키웠어.” 소 팔러 나온 장 씨(76세)는 “방 옆 헛간에 키우며 끼니도 먼저 챙겨줄 정도로 귀하게 여겼으나, 사료값 때문에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소를 내다 팔려니 가슴이 아프다”며 한숨을 내쉰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중개인의 입만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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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시장 앞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모두들 소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이한경(84세) 할아버지는 14마리나 되는 많은 소를 몰고 나왔단다. 직접 소를 키운다는 할아버지는 젊은이와 힘을 겨루어도 이길 수 있다며 힘자랑에 열을 올린다.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큰 힘이 된다며,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와 함께 살아서인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진 이 씨 할아버지는 점점 목소리도 소 울음을 닮아간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새끼에 대한 애정은 사람 못지않다며 말을 이어간다. “송아지가 팔려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미 소가 밥도 안 먹고, 밤낮으로 울어대서 차마 볼 수가 없어. 소가 밥을 안 먹으니, 내 입에 밥숟가락 넣는 것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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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가 좋은 소냐는 물음에 이 씨 할아버지는 “콧등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어야 하는데, 콧등이 말라 있으면 건강한 소로 안 본다”고 답했다. 눈에는 눈곱이 없어야 하고, 배는 늘어지지 않아야 하며, 소털 또한 부드럽고 많아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너무 큰 송아지는 잘 크지 않는다며 덧붙이는 얘기가 재미있다. “소도 각선미가 있어야 허요. 앞다리 무릎 아래가 가늘어야 좋은 소 인겨.” 사계절 중 소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계절이 언제냐는 물음에는 귀신도 모른다면서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때 쯤 되면 소 값이 다소 내린단다. 또한 소 볼 줄 안다고 남의 소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다고 한다. 말 한마디에 몇 십만 원이 왔다 갔다 하기에 우시장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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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에서 소금(소값)이나 알아 볼 겸 나왔다는 최종대(59세) 씨는 “소털 셀 수 없듯이, 소 값도 알 수 없드래요. 소 살 사람은 소 콧구멍과 숨소리까지 따지는 기래요.”라며 소를 살 때 뿔이 앞으로 나왔는지, 뒤로 났는지, 옆으로 퍼졌는지까지 살핀다고 한다. 소의 좋고 나쁨을 알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살펴보는 수밖에 없단다. 이 소나 저 소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소 값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 홍천우시장이 예전만 못하다는 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은 경매가 시작되고부터다. 피를 말리는 경매를 없애고 직거래를 터야만 농민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남정네들의 푸념이 새벽공기보다 무겁게 내려앉는다. 언젠가는 소가 아닌 사람 마음도 경매할 날이 올 것이라는 농민들의 원망이 소 울음소리와 함께 허공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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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에는 소를 육용으로 키우는 것보다 일을 시키기 위해 키웠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의 운명과 역할까지 바뀌어, 일하는 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소도 사람의 주민등록증처럼 등록시켜 귀표를 하나씩 달아야 하는데, 귀표 없는 소는 팔 수도 잡을 수도 없단다. 소는 암소와 황소, 송아지와 임신한 소로 분류하여 체중에 따라 가격을 정하지만, 시세에 따라 매번 다르다. 한쪽에서는 도축장으로 갈 덩치 큰 소들이 저울에 올랐다 빠져나가기도 한다. 소가 새 주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뻗치다 힘에 부쳐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순간, 그 순한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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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시장 한쪽에는 밭갈이할 소를 보러 나왔다는 나병연(53세) 씨가 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 씨의 밭은 모두 산비탈에 있어 아직도 소 두 마리로 밭갈이를 하는데, 밭갈이 소는 어려서부터 코뚜레를 꿰어 길을 잘 들여야 쟁기를 끌 수가 있단다. 나 씨가 밭갈이 소를 고르자 즉석에서 품평회가 벌어진다. “엉덩이가 암팡진 것이 쟁기질은 잘하겠어, 한 달만 길들이면 되겠구먼.” 소를 평가할 때는 먼저 소의 골격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살피고, 뿔의 모양과 소 울음소리까지 들어본다고 한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살펴야 하는 것은, 소도 주인을 닮아가기에 주인의 성격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 장터에 가면 마치 과거를 먹고 사는 것만 같다. 특히 홍천우시장에서 유명한 소몰이꾼 이야기는 몇 해 전 일인데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소몰이꾼이 산을 넘다 만난 도둑과 싸우다 의형제를 맺어 같이 소몰이꾼이 되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큰돈이 오가는 우시장에는 야바위꾼들이 모여들어 투전판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그 꾐에 빠져 소 판 돈을 몽땅 날린 사람들의 술주정은 소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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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개상인 거간꾼의 농으로 영하의 차가운 공기에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간다. “요 울음이 쌍둥이 만들 울음이요”라며 소꼬리를 잡아채자 큰 소가 움직거리며 긴 울음을 토해낸다. 잠시나마 사고파는 사람들의 무거웠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 달구지에 나무를 실은 소와 지게에 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불교의 선종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으로 상징화해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소는 사람 가장 가까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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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또한 장터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장터에서 만나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장이 쇠락해 가는데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장날이면 장터에 나와 삶의 현장인 장터를 지켜내고 있었다. 치열한 삶을 살아내면서도 부모의 삶을 자식들에게 되 물림하지 않으려고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은 통 크게 밭 한 뙈기를 장터로 옮겨와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삶의 체취가 묻어있는 장터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는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터 골목 귀퉁이에서 홍시감 몇 개 소쿠리에 담아, 고루내리는 햇빛을 등에 이고 앉아있는 할머니얼굴은, 고향마을 입구에 600년이나 묵은 당산나무평상에서, 볼우물이 생기도록 담뱃대를 빨던 옆집 할머니모습이었다.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이야기가 숨어있는 얼굴을 찾은 것이다. 그 모습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았다. 사람이 그리워서 호박 한덩이 갖고나와 온종일 바람과 공간과 햇빛과 놀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장터에 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가 찾고자했던 얼굴이었고, 여기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 솟구치게 일어났다. 

      
    사진을 처음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이다. 그 당시 장날은 잔치가 열리는 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장터에 가면 어렸을 적 동무들과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던 고향집 마당처럼 편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장에 나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함께 놀고, 시골마을까지 따라가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장터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 보물창고 같았다. 이 얼굴들은 시간을 뒤로 돌려 타임머신을 타고 보여 지는 향수와, 어머니 고향 같은 연민의 정보다 더 따뜻한 사랑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 할머니 얼굴에서는 아쟁 소리처럼 심금을 울리고, 또 다른 얼굴에서는 남도의 육자배기처럼 정겨움이 흘러넘쳤다. 그런데 시골장터에도 서서히 문화가 바뀌기 시작해, 장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이, 물건과 복장이 바뀌어 갔다. 모든 것이 변하는 걸 지켜보며 사진이 시간성을 갖는다는 말이 점점 실감 있게 다가왔다. 서둘러 우리나라 장터를 모두 기록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의 장터를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540여 곳의 전국에 있는 오일장을 기록했으나 아직도 수 십 개의 장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상을 보는 관점이나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보부상에 대한 사료를 찾아가면서 포괄적인 인문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장을 지키는 개개인의 사람들로 집중되었다.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 마음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찍히는 사람과의 소통에 관점을 두어 인터뷰를 시작한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그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서 앵글을 잡아 평면적인 사진만을 고집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따뜻한 인간애이기 때문이다. 내 사진의 시작은 장터였다. 그래서 그 끝 또한 장터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필생의 작업이다.

      
    그리고 벙어리로 남는 사진이 아니라 그들의 말과 혼이 담긴, 말할 수 있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사진이다. 그곳 장터에 가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터순례(28)강원 고성 거진장

     

    거진항서 10분 거리…“싱싱한 도치·대게 팔아요”
    인근엔 북녘 볼수있는 통일전망대
    덩달아 관광객 사시사철 붐벼
    상인들 새벽녘 항구서 작업한 해산물
    장터로 건너와 내다 팔아

     


     강원 고성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북교류 1번지’로 불리며 활기가 넘쳤었다. 군 전체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데다 절반가량은 군사지역이지만, 북녘이 그만큼 가까운 까닭에 금강산 관광의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한때 주춤했던 고성이 요즘 동해안 관광명소로 이름을 얻고 있다. 금강산이 보이는 현내면의 통일전망대는 사시사철 실향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인지라 거진장도 덩달아 잔칫집처럼 웅성댄다.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수다. 처녀 때 피란와서 이젠 할망구가 다 됐어. 살아생전 고향 땅이나 한번 밟아보고 죽는 게 소원이드래요.”

     행여 바람에 실린 고향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 높은 지대에 집을 마련했다는 김동선 할머니(86)의 오래된 습관 하나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60년째 생선을 말려 거진장에 내다 팔고 있다. 처음에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했다고 한다.

     거진장은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에서 1·6일에 열린다. 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거진항이 나온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태잡이로 유명해 ‘명태의 고향’으로도 불렸다. 명태가 귀해진 지금은 그 빈 자리를 다른 생선이 넘보고 있다.

     요즘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겨울 생선 중 하나가 도치다. 도치는 아귀·물메기와 함께 ‘못난이 삼형제’로 꼽힐 만큼 못생겼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공처럼 웅크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데, 이곳 사람들은 ‘심퉁이’란 별명으로 부르며 즐겨 먹는다. 암컷은 시큼한 김치를 넣어 알탕으로 요리하고, 수컷은 데쳐서 숙회로 먹는다고 한다.

     거진항에서 도치를 고르던 최씨 할머니(78)가 죽왕면에 있는 왕골마을 자랑을 한다.

     “왕골마실에 한번 가봐. 집집마다 다른 항아리굴뚝이 있어 구경꾼들이 많아.”

     왕골마을은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으로, 북방식 전통한옥의 원형과 함께 600여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집마다 다르게 쌓은 굴뚝 위에 항아리가 얹힌 것이 특징이다.

     해가 떠오르는 거진항의 아침은 너무도 정겹다. 잡은 생선을 배에서 내리고 경매에 붙이느라 아수라장이지만, 치열한 삶이 아름다운 시(詩)로 재탄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도 마찬가지다. 먼저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가 신호를 보냈는지 갈매기들이 순식간에 손수레 옆으로 날아든다. 도치를 사러 나왔다는 박순덕 할머니(85)는 “먹이 찾아 갈매기들이 날아드는 것 보믄 사람이나 똑같은 기래요. 나도 묵고 살라고 반평생 동안 죽자 살자 이곳에 나오니께” 하며 웃는다.

     대게 작업이 한창인 곳에서 일손 빠른 외국인을 만났다. 인도네시아에서 1년 전에 왔다는 라스니까씨(38)는 한국말도 드문드문 잘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한국 사람들 참 친절하게 잘해 줍니다. 그렇지만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어 바다를 향해 소리도 질러보고, 고향 노래도 불러 본답니다.”

     말끝을 흐리는 라스니까씨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거진항과 거진장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다. 거진항에서 대게 작업을 끝낸 허씨 할머니(70)가 손수레 가득 대게를 싣고 거진장으로 건너왔다. 새벽녘에는 거진항에서 대게 꺼내는 작업을 하고, 장이 서면 장터로 와 대게를 내다 판다.

     허씨 할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거진항과 거진장을 오가며 살고 있단다. 대게 색깔에 맞추었는지 할머니의 옷과 장화 모두 붉은색이다.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할머니 입이 귀에 걸린다. “방금 잡은 대게가 만원에 일곱 마리!” 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린다. 평생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할머니는 즐겁게 일하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며 멋진 포즈로 한마디 건넨다.

     “빨간 옷 입고 빨간 대게 파는 할머이 잊지 말래요.”

     고성에는 이 밖에도 진부령 용대리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간성읍에 서는 간성장(2·7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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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빛 좋은 날 담벼락에 기대어 들판의 나락 익어가는 소리에 마음을 살찌웠던 곳, 언제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고향 풍경이다. 그리고 5일마다 열렸던 시골장의 정겨움은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움이다. 바쁜 일상에서 고향 찾기가 힘들다면 서울 근교에 있는 성남 모란장에 가보자. 지하철 8호선을 타고 모란역 5번 출구로 향하면 그 유명한 모란장이 나온다. 북녘땅에 홀어머니를 두고 온 아들(김창숙)이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모란이란 지명을 붙여 모란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1962년, 황무지였던 지금의 모란시장 주변을 개간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지역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5일장도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다. 성남대로변에 무질서하게 난립했던 상인들을 모아 지금의 자리인 대원천복개지 위로 옮긴 것은 1990년 9월 무렵이다. 3천 평이 넘는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에 4일과 9일이 들어간날이면 모란장이 열린다. 10만여 명의 손님들과 팔도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모란장은,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5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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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부터 도심 속의 시골장터라는 입소문이 전해지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장터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과 팔려는 사람들로 온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길 건너 건물옥상에서 내려다본 형형색색 파라솔에 뒤덮인 풍경은 지구촌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거대한 축제장같다. 오색 파라솔 숲 속에는 만병통치약에서부터 시작해 화초와 갖가지 곡식이나 생선, 그리고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 땅이나 바다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이 나와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지하철입구, 혹은 버스 정류장, 골목 한 귀퉁이마다 보자기만 펼쳐놓으면 곧바로 장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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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푸대를 끌고 가는 김경식(66세)씨를 불러 세워 주위 장꾼들이 짓궂은 농을 걸지만 농속에는 인정이 묻어있다. “저 사람 첨 볼 때는 코를 질질 흘리고 비실비실 웃기만 해 어디가 모자란 사람인가 했당께”, “그래도 하루에 10만 원이나 벌 때도 있다카데예”, “키가 멀대 같아도 마음이 착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불러주제. 그란디 혼자 돈 벌어서 엇다 쓰까이?” 난로 가에 모인 장꾼들이 돌아가며 김씨 이야기를 해댄다. 노숙자생활을 하던 끝에 모란장에 들어와 수레로 물건을 날라주며 살아가고 있다는 김씨는 할머니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란다. “장날 되면 짐보따리 옮겨주고 벌어들이는 돈이 5만 원이 넘어요.” 사람 좋은 웃음을 베어 문 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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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의 모란장은 추위와 싸우는 한 판 전쟁이다. 이른 아침부터 석유난로 위에서는 밥이 데워지고 찌개가 끓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장작불도 덩달아 바쁘다. 해가 뜨기 전, 푸르스름한 색깔이 장터에 깔리자 여인네들의 밥먹는 소리와, 화롯불 가에 둘러서서 날리는 장정들의 잡담들이 어우러져 훈훈한 웃음소리를 만들어 낸다. 새벽 4시부터 나와 준비 했다는 양씨(75세)가 열어놓은 2평 남짓한 난장에서 녹두전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양씨가 녹두전을 뒤집자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던 박씨(37세)가 한마디 건넨다. “고향 생각도 나고, 일이 안 풀리면 장에 나오죠. 연로하신 분들 일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절로 생기거든요. 이 맛에 장에 나옵니다.”

     

  • 때때로 장터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도 만나고, 뽕짝뽕짝 박자를 맞추는 유행가 가사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장돌뱅이들도 만난다. 이곳 저곳 돌고 도는 장꾼들의 인생이야말로 길 위에 펼쳐진 난장의 삶이다. 경기도 5일장을 돌고 도는 노씨(65세)는 각종 약재를 팔며 장돌뱅이 생활을 해온 지가 15년째라고 한다. “장에 오는 사람들은 됫박에 담긴 것을 좋아하는데, 장에서는 저울만 사용하라내요. 장에서까지 그람수를 재서 팔다가 그나마 남은 정(情)까지 없어질까 걱정됩니다. 15년 동안 내 몸뚱이처럼 지니고 다녔는데 장에서 못쓰게 한다고 버리면 벌 받지요. 이 됫박이 먹고 살게 해주었는데….” 박스에 담긴 됫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는 노씨의 볼멘소리가 길 위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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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란장은 IT산업의 중심인 성남시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말을 맞은 장날이 되면, 남한산성을 거쳐 모란장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사 속의 자연을 느끼는 남한산성 성곽 길을 둘러, 모란장의 먹거리 촌에서 음식도 즐기고 물건도 산다는 것이다. 모란시장 입구에는 많은 종류의 화분들이 꽃을 피워 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 뒤로는 자루에 담은 곡물들이 제각각 이름표를 달고 줄지어 서있다. 곡물전에서 화롯불에 손을 녹이고 있는 이씨(75세)할머니는 새벽 5시부터 나와 전을 폈다고 한다. 추운데 일찍 나오셨다며 인사를 건넸더니 “내가 여서 장사한지가 35년째나되요, 내 고향도 잊어 버리것당께, 새끼덜 갈킨다고 나오다본께 꽃색시가 할매가 되뿌렸제. 이 검정콩은 고향땅에서 올라 온 것이여.” 농사는 땅심도 좋아야 하지만 부지런해야 한다는 이씨 할머니는 장사 또한 부지런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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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초전 앞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약초이름과 그 효능을 읽어보는 박씨(83세) 노인이 삼매경에 빠져있다. 장터에 갈 때마다 우리네 인간들이 먹고 사는 먹거리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물전에서는 제각각 모양을 갖춘 생선들이 누워서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둘이 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른다는 물메기가 왔어요. 물메기...” 라고 외쳐대는 김씨(53세)는 새벽에 동해 뱃사람한테 직접 받아왔다는 말로 지나가는 여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빨간 고무대야 안에서 가물치와 미꾸라지, 메기, 자라, 잉어 등이 팔딱거려 끈끈한 생명력이 그대로 전달된다. 또한 의류와 신발, 잡화 등, 잠시 백화점이 외출 나온 풍경처럼 없는 것이 없는 모란장은, 넓은데도 장보기가 무척 편리하다. 채소면 채소, 어물전이면 어물 등 모든 것이 품목별로 나누어져 있다. 전국에서 올라온 싱싱하고 질 좋은 먹거리로 오후 1시쯤 되면 사람들로 절정을 이룬다. 특히 김장철이 되면 수도권 고추시세를 판가름 할 정도로 도매와 소매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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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소한 참깨 냄새가 진동하는 기름골목에 들어서면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름집들이 즐비하다. 42곳이나 된다는 기름집에서는 참기름과 들기름은 기본이고 산초와 홍화씨 기름까지, 기름이라는 기름은 다 모여 있다. 오래된 단골들도 많아 장날이 되면 기름 사러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30년째 단골집에서만 기름을 산다는 허씨(76세) 할머니는 설날에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들기름을 사러 나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웃하며 장사해온 이들은 서로 정이 들어 의형제를 맺거나 사돈지간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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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터에서 사물들을 관찰하다 보면 주인의 손길에 의해 상품이 변해가는 모습들이 멋진 데커레이션을 연상케 한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을 수 있도록 보기 좋게 상품을 나열하는 모양새가 예술가들의 설치미술과 다를 게 없다.
      손자들 사탕이나 공책을 사주기 위해 닭장에 있는 달걀을 짚으로 엮어 장으로 향하던 어르신의 모습은 어렸을 적 보았던 눈익은 풍경이다. 충남 조치원에서 손자 방학 끝나면 책이라도 한 권 사주고 싶어 농사지은 깨와 짚으로 계란까지 엮어서 온 권씨(78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곡물전을 기웃거리며 배낭 속의 깨를 보여주고 흥정을 붙여보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깨알 속에는 가장 먼저 햇빛을 받은 놈도 있을 것이고, 한풀이한 여인네 작대기에 혼쭐난 놈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오이 하나 가지 하나도 자식처럼 정을 주면서 키운다. 그렇게 노부부가 정을 담아 키운 참깨를 짊어지고 나왔으나 할아버지 등짝에 들러붙어 내려올 줄을 모른다. 한 푼이래도 더 받으려는 권씨 할아버지의 애잔한 모습이 카메라 파인더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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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27)충북 괴산장

     


    뻥튀기집 앞 순서 기다리는 할머니들 수다 삼매경

    600년 전통자랑…충북서 가장 커
    지역에서 직접 키운 농산물만 파는
    토요일 ‘할머니 장터’ 눈길

     

    난장 끝머리 뻥튀기집 앞에 늘어선 줄. 할머니들이 추위와 지루함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위 사진)

    2004년 괴산장을 방문했을때 본 뻥튀기 기계.(중간 사진)

    장터 체험에 나선 어린이들로 순식간에 화사해진 괴산장.(아래 사진)

     

     

     

     “남들이 도와줘 장사헌 것이지 혼자 한 것이 아니구먼유.”

     55년 동안 괴산장터를 지키고 있는 백명희 할머니(88)의 철물점은 지금 3대가 함께 하고 있다. 스물다섯살에 혼자되어 장삿길로 들어섰다는 백씨 할머니가 말을 잇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지유? 장사는 때로 밑지기도 허구먼유. 남자들 상대하면서 안 싸우려면 밑지고도 팔아야 해유. 나중엔 단골이 되지만유.”

     새마을운동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하던 시절, ‘와랑와랑’ 돌아간다고 해 ‘와랑기계’라 부르던 탈곡기와 ‘새끼 꼬는 기계’인 제승기(=새끼틀)는 사람들이 줄 서서 사갈 만큼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1970년대 무렵에는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기계였다고 한다.

     “그땐 100원만 있으면 오징어 10마리를 살 수 있는 시절이었어유. 돈은 귀했지만 서로 정도 많고, 사람 맘들이 참 순했지유. 지금 사람들은 무조건 소리부터 내지르고 참질 않네유. 사람들 맘은 늘 그대로 있어야 되는데 세월 따라 자꾸 변해가는구먼유.”

     철물점이 사랑방 역할까지 하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장에 나온 사람들이 백씨 할머니를 찾아왔다. 불정면에서 온 김씨(68)는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아버지 때부터 단골집이어유. 이 집 어르신을 보고 가야 장에 온 것 같구먼유.”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장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6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괴산장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선다. 3일과 8일이면 읍내 시계탑 로터리를 지나 도로 양쪽으로 길게 노점이 늘어선다. 도로를 경계로 장옥이 설치된 곳은 상설시장이고, 그 반대쪽이 오일마다 한번씩 펼쳐지는 난장이다. 충북에서 가장 크다는 장답게 나오는 물건 종류만도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산처럼 쌓아놓은 과일이며 채소와 수산물, 잡화 등이 사람들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종류별로 과자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놓고선 “맛보는 건 공짜”라고 외쳐대는 장꾼의 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든다. 입구에 펼쳐진 가축전은 장터 체험에 나선 어린이들로 소란스럽다. 어린이들이 강아지와 노는 것을 보니 마치 작은 동물원에 온 것 같다. 아이들이 철망 안에 오밀조밀 드러누운 강아지를 만지자 강아지가 부스스 일어나 귀를 쫑긋 세운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짓는 말간 웃음이 햇살에 퍼져 나간다.

     난장 끝머리 뻥튀기집 앞에는 이름표를 단 깡통과 올망졸망한 보자기들이 50여개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농번기가 끝난 겨울 장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뻥튀기집이 가장 바쁘다. 튀기는 곡물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뻥튀기가 노인들의 ‘참살이(웰빙) 주전부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도 아랑곳 않고 이웃 마을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기삼녀 할머니(78)를 만났다. 할머니는 마을 자랑을 해달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 대답한다.

     “우리 동네 입구에 8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있구먼유. 그 느티나무 덕분에 가뭄도 없고 큰물도 들지 않아 모두가 잘 살고 있네유.”

     괴산은 영험한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은 고을이다. 느티나무를 뜻하는 ‘괴(槐)’자를 써 괴산(槐山)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괴산장은 3년 전부터 3~11월이면 토요일마다 ‘할머니 장터’를 열고 있다. 괴산에 사는 할머니들이 직접 농사지은 우리 농산물만 파는 장이다. 토요일장에 나온다는 신현자 할머니(77)는 봄에서 여름까지는 씀바귀를 비롯한 각종 나물, 한여름이면 대학찰옥수수와 배추 모종, 가을이 되면 곡물과 콩이 많이 나온다며 자랑을 한다.

    최근 괴산장은 ‘산막이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산막이 옛길’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이름을 고쳤다고 하는데, 상인들은 아직도 ‘괴산장’이라고들 부른다. 옆에서 장돌뱅이 인생만 20여년이라는 박씨(59)가 한마디 던진다.

     “내용이 바뀌어야 되지유, 이름만 바뀌면 어쩐대유.”

     괴산장 외에 괴산에서 열리는 장은 사과가 많이 나오는 연풍장(2·7일), 목도막걸리를 생산하는 목도장(4·9일), 전국 으뜸의 고추 산지로 유명한 청천면에서 열리는 청천장(5·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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