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지 다섯 달 만에 첫 집들이를 했다.
사진가들이나 오랜 지인들이야 몇몇 다녀갔지만, 동네 주민으로는 처음이었다.
돈 생기면 한 턱 쏘겠다는 생각은 늘 해왔지만, 방이 좁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름 전 박정아님 따라 김정호님 댁에 급습한 적이 있었다.


김정호님 댁은 내방 보다 넓기도 하지만, 술상도 있고 고기 구울 불판도 있었다.
갑작스런 방문이지만 즉석에서 고기구워 즐겁게 마셨다.
주민을 위해 부탁할 게 있어 들렸지만, 견해를 서로 달리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집들이 날짜를 20일로 정해버린 것이다.






막상 날자가 다가오니 걱정이었다.
모시고 싶은 분은 많은데, 방이 좁아 다 앉을 수가 없었다.
우선 몸이 여린 박정아, 허미라, 김종호, 선동수, 네 분을 모셨다.
방에 다섯 사람이 들어앉은 것도 처음이지만, 방이 꽉 찼다.
술 마시며 말하는 데야 지장이 없었지만, 운신이 힘들었다.
준비한 음식이래야 중국집에서 가져 온 요리 한 접시와
소주 두 병, 맥주 한 병이 고작이었는데, 한 참 잘 못 생각했다.
안주는 남았지만, 술이 금세 비워져 버렸다.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다시 사오는 것보다, 다음 날 술집에서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다.
더 많은 동네 분들 모셔서 술 대접해야 할 숙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일단 사는 꼴이야 보여주었지만, 처음으로 방이 좀 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방에서 죽어 나갈 작정이었으나, 4층에서 시신 끌어내릴 일도 힘들겠다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랑방’ 게시판에 나붙은 글이 눈길을 끈다.
“대통령직 내려 노시오! 비아그라 먹지마세요. 큰 일 나요”

그러나 이미 정신 나간 여자라, 좋은 충고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지 애비보다 한 수 더 뜬다.
은근히 폭력사태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지난 9일은 동자동 주민자치회의 가 있는 날이라 일찍부터 나왔다.
대개 참석하지 않는 분이 많아 의견이라도 듣기 위해서다.
‘식도락’에서 끼니를 때웠으나, 추워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김정오, 한정민, 이남기, 강 호씨 등 여러 명을 만났을 뿐이다.
이번 회의는 공지만 했던 예전 같지 않고, 좀 다를 것으로 추측했다.
어쩌면 주민자치회의 활성화를 위해 주민대표를 선출할 것이란 기대까지 했다.

오후4시 무렵, 회의장소인 ‘동자동 희망 나눔의 집’ 이층으로 갔더니,
3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 부임한 의사와 보안관 소개도 있었다.
추측대로, 예전과 달리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 시작했다.
그럴러면 주민 대표를 뽑아야 했으나, 갑작스런 안이라 다음 달로 연기했다.
주민들이 선호하는 덕망 있는 분으로 뽑아야 하기에,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더 이상 줄 세우지 않은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주민이 다 나눌 수 없는 소량이라면 쪽방 등록 번호순으로 끊어, 연결하자는
이남기씨의 제안에 공감한다. 내용물의 좋고 나쁨은 따질 필요 없다.
몸이 불편해 못 타는 분들을 위한 전달방법도 찾아야한다.
봄이 오면 꽃놀이 갈 장소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각자가 조금만 신경 써 주인의식을 가지면 삶이 훨씬 나아진다.

동자동 사람들이여! 봄의 숨소리가 들린다.
서울에서 제일 정 많은 달동네로 만들자.

사진, 글 / 조문호



















박근혜정부는 복지공약을 대거 앞세우며 들어 선 부패정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부분의 공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그가 내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일명 ‘송파 세모녀법’으로 알려 진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이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법은 실패했다. 잘못된 개정안이라 실패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가난한 이들이 생계를 비관해 목숨을 끊고 있는 현실이 박근혜정부의 무능과 실패를 방증한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박근혜가 당선 다음 날 도시락을 싸들고 창신동 쪽방 지역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을 방문했고, 탄액안 가결 직후엔 ‘시국이 어수선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힘들어지는 것은 서민의 삶이었다’며 단 한 곳의 사각지대도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챙길 것을 당부하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쇼 하나는 귀 막히게 한다.

그가 바꾼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은 복잡하고 까다롭게 만들어, 사각지대를 더 많이 만들었다.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경범죄 처벌법을 개정해 구걸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들고, 부정수급 근절을 방지한다며 부정수급통합콜센터를 만들었다. 온정주의를 표방하며 기초연금 개악안을 통과시킬 때도 ‘더 어려운 노인’을 도와야한다며 상위20%를 제외시켰다. 기초생활수급비도 외관상으로는 높였지만, 여지 것 지급받은 기초노령연금을 수입으로 잡아 공제했으니, 주고 뺏는 것이라며 수혜자들의 반발만 샀다. 실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대통령의 상징적 행보에서 동원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이었다.

더구나 청와대의 구체적인 지시로 어버이연합이니 엄마부대가 행동해 왔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때문에 송파 세 모녀가 죽어간다는 주장을 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공방 때문에 기초법 개정안, 이른바 송파 세모녀 법이 통과 되지 않는 다는 주장도 했다. 그들은 송파 세모녀법이 실제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빈곤사회연대와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송파 세모녀 3주기 복지 사각지대 피해 당사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긴급복지지원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생활고로 건강보험료가 체납돼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해 사각지대 놓인 다양한 사례가 공개됐다.

서울 중계동에 사는 60대 L씨는 2013년 교통사고로 목발을 짚고 다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정부로부터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딸 결혼 후 아내와 이혼하여 홀로 됐지만, 부양의무자인 첫째 딸이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딸이 시집간 후 연락이 닿지 않아 남과 다름없지만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대답 뿐”이라고 말했다. 정신 장애를 가진 30대 A씨는 홀로 살고 있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긴급복지지원제도 수급 신청을 거절당했다. 50대 B씨는 노숙기간이 6개월을 넘겨 복지지원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되었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빈곤층의 여건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박경석 빈곤사회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2일에도 영등포에서 40대 남성이 실직한 뒤 5개월 간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해 집을 비우기로 한 날 자살했다”며 “여전히 400만명이 기초생활보장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송파 세모녀법은 실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영 사무국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서는 급여 선정기준과 보장 수준을 현실화하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미혁 의원은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으로 유형별로 수급자 선정기준이 다층화됐지만, 빈곤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돕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소득인정액 산출 방식을 포함해 제도를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날 증언대회에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김미혁의원을 비롯하여 윤호중의원, 우상호의원, 양승조의원이 나와 인사말을 했고, 빈곤사회연대 박경석 공동대표와 김윤영 사무국장에 이어 ‘홈리스’의 박사라씨와 이진영, ‘동자동사랑방’의 김호태씨가 나와 다양한 사례를 증언했다. ‘동자동사랑방’에서는 박정아 대표와 선동수 간사, 최남순, 김영진, 한정민씨 등 여러 명이 참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간 심한 감기증세로 꼼짝않고 방에서만 지냈다.
일단 사진을 찍지 않으니, 일 할 게 없어 편했다.
컴퓨터도 켜지 않은 채, 들어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천장에 붙여 둔 천상병선생의 윙크하는 사진이 위안했으나,
점점 고립감이 엄습해 온다. 죽음에 대한 연습인가?

쪽방은 방문을 닫으면 옆방에 사람이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철저한 고립만 남는다.

그렇지만 그 고립을 은근히 즐겨온 게 사실인데, 몸이 아프니 도리가 없다.
엊저녁엔 장경호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찾아 와 병원가자고 난리를 피웠지만,

그마저 귀찮은 것이다. 사람이 싫어지면, 사진도 찍을 필요가 없고,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 봄이 올 때까지 한 번 기다려보자.

곧 입춘이니, 광화문광장에서 한 판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이틀 만에 밥을 먹기 위해, ‘식도락’으로 내려갔다.
그마저 늦은 시간이라, 밥은 일인분만 남아 있었다.
발알 하나 남기지 않고 밥솥을 비웠으나,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입맛이 없어 살기위해 먹는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지더라.

아마, 나 혼자 먹었더라면, 밥 숱 가락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렵게 남을 돕는 공간이라 밥 한 톨 남길 수 없었다.
다 먹은 후, 맛있게 먹었다는 난에 스티커를 한 장 붙였다.
허미라씨가 매일 오후1시부터 주민들과 정 나누는 티타임을 갖는단다.
허마담이 타주는 다방커피가 그리웠으나, 커피만 안 된다니 정이나 나눠야지...

내가 모르는 '서울역쪽방촌상담소'에 대해, 최남선씨에게 많은 것을 물어 보았다.
쪽방촌상담소는 관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단체에 하청을 주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겨 김정호씨 에게도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사랑방조합’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단다.

관의 도움이나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게 위해서다.

 

줄 세우는 거지취급도 싫다지만, 그건 주민들이 바꾸어 가야 할 일이다.
피난민들을 위해 한국전쟁 때나 있었던, 줄 세우는 짓은 이제 끝내야 한다.
주민들에게 지급하는 물품도 날자를 정해, 시간 나는 데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고,
소량의 후원 물품도 돌아가며 나누는 방법으로 바꾸면 된다.
빈민들을 구제한다는 가시적인 효과를 노리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좀 더 합리적인 여러 방안을 마련하여, 협상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저녁에는 안승룡씨 전시 오픈이 있어, 강남 ‘스페이스22’에 가야했다.
반가운 분들 만났으니, 어찌 술잔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지러워 일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길의 서울역 지하도엔 웅크려 자는 노숙자가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저렇게도 살아가는데, 어찌 힘내지 않을소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밤,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요즘, 술 마신 다음 날은 어김없이 방구석 헤 메는 게 습관이 되었다.
살만하면 또 나부대는데, 요즘 술 마실 일이 좀 잦다.
광화문 광장이나 전시장에 가다보면, 당연히 반가운 사람만나 술마시지만,
쪽방까지 찾아와 술 마시게 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 즐거운 비명이다.






요즘 감기기운이 좀 체로 가시지 않는데다, 편두성으로 목구멍까지 부어올랐다.
30일은 미디어작가 김도이군이 찾아 와 ‘광주식당’에서 낮술 한 잔 때렸다.
31일은 헤어 디자이너 박정자씨를 만나 순대국집에서 한 잔하고, 노래방까지 따라 갔다.
본래 노래방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목소리도 안 나오지만, 한 번 질러봤다.
‘비나리는 호남선’에서 ‘봄날은 간다’로 지랄발광을 떨었다.
아마 옆에서 보았다면, 진짜 가관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고 일어나니, 목에다 머리까지 아파 죽겠더라.
오후3시에 광화문 판화전에서 미팅이 있지만, 부도내야 했다.
호빵 두 개를 전기밥솥에 푹 고아 죽처럼 먹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니나 다를까 늦어 막에 화가 장경호씨의 전화를 받았다.
왜 오늘 나오지 않냐기에, 아파 못간다고 했더니, 화들짝 놀란 것이다.
아픈거야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기어드는 목소리를 듣고는 심상찮다고 판단한 것 같다,





좀 있으니 정영신씨가 들이 닥치고, 뒤 이어 정덕수시인을 대동해 장경호씨가 나타난 것이다.
다짜고짜 병원가자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내 몸은 내가 안다며 괜찮데도, 링겔이라도 한 병 맞고 오자는 것이다.
정덕수씨는 덩달아 광화문텐트촌에서 웅크려 자는 것 보다 따뜻한 병원에서 하루 좀 지내자고 하소연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며, 버텼다.





그런데, 쪽방에 네 사람이 들어 앉으니 꽉 차더라.
오붓한 자리에서 술 한 잔 때렸으면 좋겠으나, 따끈한 뉴스만 전해 들어야 했다.

반질이 사퇴했다는 이야기와 최효준씨가 '서울시립미술관장'이 됐다는 소식이었다.
둘 다 반가운 소식이라 감기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반질반질한 반가 꼬라지 안 보게 되었으니, 속이 후련했다.
늦게나마 꿈에서 깼으니, 천만다행이다 싶다.





이제 괜찮다며, 억지로 돌려보냈다.
다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쪽방 촌에서 아파도 하소연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엊저녁 술자리에서 남아 싸온 술국을 데워 밥 한 술 떴다.
하루만 더 쉬면 될 것 같았다.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연이어 마시려면 몸 관리 좀 해야했다.
내일은 동자동 사랑방에서 놀며, 동네 분들 불편한 이야기나 좀 들어야겠다.
정치판부터 바뀌어야 하지만, 마을의 작은 일부터 잘못된 것은 하나하나 바꾸어야 한다.


죽기 전에 바른 세상 한 번 보고 죽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새해 첫 날부터 열 받았다.
부모님의 차례를 지낼 수 없어 ‘동자 희망 나눔 센터’에서 치루는 합동제례에 함께했다.

70여년 살아왔으나, 가족 없이 합동차례를 지내는 것도 처음이지만, 정월 초하루 날 이렇게 열 받아 본 적이 없다.

돈이나 권력 가진 자들의 갑 질이야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빈민들을 위해 만든 “동자 희망 나눔 센터”도 마찬가지였다.

문 앞에서 만난 직원의 사진 찍지말라는 첫 말에 그만 울화가 치민 것이다.

인사부터 나누며 이런 저런 사정을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하는 것과 강압적으로 찍지말라는 것은 천지차이다.

등짐에서 카메라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직원마다 사진 찍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일전에 자치회의 진행의 잘못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한 글을 꼽게 여겨, 보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사람들의 초상권 보호를 위한다지만, 그 문제는 그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 내가 걱정할 일이다.

그동안 사진을 찍어왔지만, 대개의 주민들이 나의 사진기록을 묵인해 주었다.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몇몇 분은 내가 피하기도 하지만,

삭제해 달라면 그 자리에서 삭제해 별 문제가 되지않고, 오히려 찍어 달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을 위한 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작은 기록들은 먼 훗날, 그들 삶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합동 차례는 여기 저기 알려 권장할 일인데다, 뒷모습만 나오니 초상권 운운할 문제는 더구나 아니었다.

그런데 직원들은 찍으면서 나만 찍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박근혜 하는 짓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었다.






문제는 주민들에 대한 갑 질이 아주 조직적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말 잘 듣는 몇 명에게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할 지원품을 여유있게 주는 완장부대를 둔 것이다.

자원봉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나를 그렇게 만만하게 본 것일까? 사진 찍지 말라면 그만 두고, 싫다면 나오지 않을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난 빈민들의 보다나은 삶을 위해 남은 목숨 바치러 온 사람이다.

아니, 돕는 다는 말보다 스스로의 권익을 찾으러 왔다.

그렇게 제지하는데도 계속 사진을 찍으니, 잘 아는 완장부대 영감이 “너 맞을레”라며 욱박질렀다.

“당신 깡패야?”라고 되물었더니, 손으로 맞는 것만 맞는 것이냐?“며 슬며시 꼬리 내린다.


명절제사를 제대로 치루지 못해 합동제례에 모시는 불효막심에 가슴 아팠으나,

어쩌면 허례허식일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위안도 가졌다.

합동제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권장할 일이었다.

차례를 일 년에 네 번씩 치러 왔지만, 제사상 한 번 차리는데, 20만원은 족히 들기 때문이다.


많이 차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성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없다.

마음의 정성이라도 모우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모님에게 차례를 올렸다.

부족함을 용서 빌며, 앞으로 마을 분들과 잘 지내며 더불어 사시라는 부탁도 드렸다.






이젠 우리 조상들이 지키던 고유의 신은 외국의 하나님 신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천 이백여명의 주민 중에 제사상에 절한 주민은 열 댓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명절이 되어 더러는 일가친척 댁에 간 분도 계시고,

좁은 방이지만 정성 것 차례 올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미 판세가 바뀌었다.

우리집 제사 역시, 형제자매가 모두 하나님을 믿어 내가 맡은 게 아니던가.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제사 밥 먹던 일도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다.

설날 주민들과 어울려 떡국이라도 한 그릇 나누며 정 나누길 기대를 했으나, 그마저 깨졌다.

‘동자동 사랑방’처럼 온 주민이 한마음이 되어 치루는 제사가 아니라, 아낙네들 마저 보이지 않았다

대개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다'듯이 추석선물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주민 간의 따뜻한 말 한마디 없는 냉냉한 분위기가 더 서글펐다.


그리고 어제도 '사랑의 빨간 밥집'이란 후원단체에서 나와 쌀을 나누어 주었다.

난, 쌀이 남아 줄 서지 않았지만, 그 행렬도 길었다. 사는데 제일 중요한 품목이니까...

그러나 거지처럼 줄세우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

'나눔의 집'에 일괄 넘겨 날자를 정해 수시로 받아가게 했으면 좋겠다.











차례를 지낸 주민들은 이층 사무실에 쌓아 둔 지원품을 힘들게 내렸는데, 그 시간도 제법 걸렸다.

그 사이 물품을 받으려는 동내주민들의 행렬은 장사진을 쳤다. 지원품의 종류도 다양했다.

쌀과 삼계탕, 식혜 등이 담긴 포장박스 외에도 사과 한 알, 계란 세 알, 양말 몇 컬레로 나누는 품목도 있었다.


그런데, 민간단체나 기업에서 후원한 물품을 나누어 주는데, 최소한 어디에서 누가 주는 물건인지 알고나 받아야 할 것 아닌가?

그게 베푸는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리고 어디에서 어떤 물품이 얼마나 보내왔고, 몇 명의 주민에게 어떻게 배부되는지, 주민들도 소상하게 알 권리가 있다.

이것이 주민을 무시하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길들이는 일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잘 못된 모든 일은 하나 하나 시정되어져야 한다.






허기진 몸으로 주민들 틈에 끼어 지원품을 받아들고 서둘러 돌아왔다.

광화문에서 열릴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제례에도 참여해야하고,

설날에도 쉬지 않는 ‘미술행동’에도 참여해야하기 때문이다.

방으로 돌아와 선물로 준 일회용 삼계탕으로 끼니를 때웠다.

설날 밥상치고는 좀 특별했으나, 시장이 반찬이란 말처럼 잘 먹었다.

그 동안 방이 좁아 밥상 하나 둘 자리도 없었는데, 선물이 담긴 포장박스를 뒤집어니 좋은 밥상이 되더라.

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각오를 다진, 새해 첫 날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노숙인은 선물도 받을 수 없다.


공짜 물품에 매달리지 않은 강완우씨, 아직 자존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설날이 가까워오니, 쪽방촌 사람들도 좀 쌔게 나가더라.
평소 소주 마시던 사람들이 그 날은 위스키를 마셨다.
나도 만원 보탰지만, 쓸데없는 허풍이었다.

‘동자동사랑방’으로 갔더니, ‘식도락’ 돼지를 잡았다.
밥 먹을 때 마다 천 원씩 넣은 돼지 저금통을 깬 것이다.
허미라씨가 열심히 세더니, 사십 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한 달간의 식자재비도 안 되는 돈이지만, 많은 편이란다.
하기야! 천원도 없어 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식자재비야 그 돈으로 대략 메울 수 있다지만,
점포 월세 50만원은 고스란히 ‘동자동사랑방’에서 나간다.
공동체 주민을 위한 봉사라지만,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비는 보조해 줘야 한다.
이보다 더 확실한 빈민 지원이 어디 있겠는가?

엉뚱한 곳으로 세는 세금 단속해, 이런 봉사단체에 지원하라.
올해는 빈민의 삶 깊숙이 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더 높다.
빈곤사회연대, 동자동사랑방 등 26개 단체가 연대한 ‘부양의무제 기준 폐지행동’ 발족 기자회견이

지난 26일 정오 무렵, 서울역 앞에서 열렸다.






‘법도 사람이 만드는데, 법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위의 소득으로 수급에서 탈락되어 살길이 막막해 목숨을 끊은 거제 이씨 할머니 유서에 적힌 글이다.

부양의무제가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며, 사람을 죽인 것이다.






빈곤사회연대 윤애숙씨를 비롯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배진수,

사진 찍는 빈민운동가 최인기씨 등 많은 단체에서 나왔고, 김종오, 이상준, 박정아, 선동수, 최남선씨 등

동자동 사랑방조합원들도 여럿 참석했다.





동자동에 사는 이상준씨는 “자식 어렸을 때, 내 몸 아프다고 돌보지도 못했는데,

자식한테 나를 돌봐달라고 어떻게 말합니까?

젊은이나 늙은이나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데 가족이 무슨 죄가 있다고 족쇄를 채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동자동 쪽방 촌에서 기초생활수급을 못 받는 대부분의 빈민들도 부양의무제에 걸려 못 받는다.

부양의무제기준은 가족을 가난에 빠뜨리거나, 가족관계까지 멀어지게 하는 천륜을 어기는 악법이다.






나 역시 살기가 어려워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한지가 두 달이 지났다.

매달 방세 낼 때마다 입이 바짝 바짝 타들어 갔으나, 담당공무원은 천하태평이었다.

연락 끊긴 딸의 동의가 없다며 미루더니, 기자회견이 있는 26일에서야 방문했다.


다음 달부터 지급 된다니 일단 마음이 놓이긴 하나, 이제부터 소득 생기는 일은 하지 못한다.

수입만 생기면 잘리거나 돈을 적게 주니 누가 일할 생각 하겠는가?

자립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 완전 사육하는 제도였다.






여지것 미운털 박혀 그런지, 번번이 제외되었으나, 이제 출판이나 전시지원도 받아서는 안 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창작발표마저 봉쇄된 것이다.

다른 수급자들이 돈 벌이에 나서지 못하는 것처럼 족쇄를 채워버렸다.

가족에게 짐을 지우는 부양의무제의 조속한 폐지와 함께 수급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간디는 ‘빈곤은 가장 잔인한 형태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가난하다는 그 자체로 가혹하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끊게 하는 참혹함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빈민을 위한 정책부터 우선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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