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건너편은 우리나라 대기업 빌딩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굴지의 기업 GS건설빌딩과 전 대우빌딩인 금호빌딩도 있고, 남대문경찰서 뒤로 서울시티타워인 그린화재빌딩과

힐튼호텔, CJ홈쇼핑 건물도 보인다.

그러나 그 거대한 빌딩 틈으로 쪽방들이 코딱지처럼 다닥 다닥 붙어있다.
옛날 사창가였던, 양동을 비롯해 동자동, 도동 등지에 전세 100만원에 월20만원 정도하는 한 평 남짓의 쪽방들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보기로 작정했다.

그 실상을 전해 들어 마음 굳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공식적인 길을 따르기 앞 서, 그들의 실상부터 파악할 겸, 추석 이튿날 동자동을 찾았다.

명절이라 그런지, 동자동 놀이터에 많은 분들이 모였더라.

일단, 그분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갔으나, 나도 모르게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갔다,

개성이 독특한 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마치 공원자체가 연극 무대 같았다.






몸이 불편한 분들이야 나오지 못하지만, 웬만하면 답답한 방안보다 공원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날 공원 곳곳에 낮술을 즐기는 분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 인심이나 담배인심은 좋았다.

처음에는 인사로 권하는 줄 알았는데, 담배가 없으면 아무에게나 담배를 달라 했다.

예전에야 담배 인심 하나는 좋았으나, 담배 값이 비싸진 이후론 보기 드문 미덕이다.






그러나 원색적인 욕설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겉으로는 거칠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진 않겠지만, “야이 씨발놈아”란 말이 일상적인 언어였다.

듣는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걸보니, 그냥 친근함을 나타내는 악의 없는 욕설이더라.


그런데, 그 곳에도 남자들이 여자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성태엄마란 분은 아무 남자에게나 시비를 걸고 쫒아 다니며 진득이를 붙어 결국 도망가게 했다,

가겟집 할머니가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쳐가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날, 세상살이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술에 가두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오죽하면 공원 주변에 술중독자 상담을 위한 현수막이나, 공원에서 술 담배를 즐기는 것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성 플래카드도 걸렸으나. 공염불인 것 같았다.

놀이터에 가뭄에 콩 나듯 한 어린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노인들의 해방구라 그냥 묵인하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런데 놀이터의 분위기를 확 바꾼 것은 하투놀이였다.
한 남자분이 신문지를 깔고 화투판을 벌였는데,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 여섯 사람이 돌아서서 섰다판을 벌였는데, 투전이라기보다 하나의 나누는 놀이였다.

돈을 딴 사람이 구경하는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 뿐 이었다.

가진 자보다 없는 자들이 더 인정이 많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잠시, 환자들이 누워계신 쪽방 몇 곳을 찾아보았다.
어떤 분은 귀가 어두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어떤 분은 내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있지만, 찾지 않는다는 분도 계셨고, 죽는 날만 기다린다며 체념한 분도 계셨다.

다들, 복에 없는 돈보다는 사람 사는 정에 목말라 했다.

그렇지만 한 푼이라도 생기면 가난한 자식에게 주고 싶다는 말씀도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게다. 다시 찾아 올 날을 적어드리고, 물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서울역 주변에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사는 쪽방촌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다들 가난을 물려 받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 뿐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으로 사는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라도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초생활 수급비 60만원에서 집세 20만원을 제하면 남는 게 뭐있겠나?

임대료를 도와주거나, 추위나 더위, 화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절실했다.

내일은 양동과 도동 방향을 돌아보고, 월요일부터 작업에 들어 갈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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