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새꿈어린이공원’은 어린이공원이라기보다 주민들의 만남의 자리고 소통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가끔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고, 주말엔 빵을 나누어주는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민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지만, 나눔 행사는 계속 이어진다.

때로는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예배를 보는 극성맞은 분도 계시다, 그렇게 기도할 자리가 없는지 모르겠다.

몇일 전에는 어느 교회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공원에서 음식을 나누어주며 예배를 보고 있었다.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가난한 빈민들에게 대접하는 것이야 좋지만,

추운 장소에서 웅크려 먹는 모습들이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주변에 있는 교회나 회관 같은 공간을 빌릴 수 없다면, 차라리 도시락을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누는 마음이야 고맙기 그지없지만, 추운데서 떨며 먹는 사람들의 고충도 좀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난 아무리 배고파도 마음에 없는 기도와 찬송 부르며, 그렇게 밥을 얻어먹지는 않는다.

빈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목적인지, 전도가 목적인지, 좀 분명했으면 좋겠다.

자칫 베풀고도 욕먹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진,글 / 조문호












서울역 쪽방촌, 동자동에 봄 사건났다.


지난 성탄절을 맞이하여 동자동의‘성민교회’에서 중늙은이 다섯 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식장은 이른시간부터 축하하러 온 주민들로 가득 찼다.

김승영 김유례 부부, 이기영 홍홍임 부부, 심경섭 천정미 부부, 김만기 이경희 부부,

박성일 박소영 부부 등 다들 아는 분들이었는데, 모두들 멋진 예복을 차려입고는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쪽방 촌에서 눈이 맞아 살기는 하나, 결혼식을 못 올린 부부들인데,

꿈에도 생각 못한 드레스를 입게 된 신부들의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부들도 곱게 꾸몄으나, 신랑들도 때 빼고 광냈는지, 연예인 빰 칠 듯 잘 생겼더라.

노숙에서 쪽방으로 발전하고, 거기다 결혼에 이르면 여기서는 성공한 케이스다.

1,200세대가 사는 쪽방촌에서 독거신세를 면한다는 것은 사법고시 붙는 것보다 더 어렵다.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살면 오죽 좋겠으나, 쪽방촌에는 여자가 귀한 것이다.

다들 돈과 인연은 없었지만, 따뜻한 인정은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들이 쉽게 연정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결혼식에 축하하는 가족들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다섯 쌍 중, 심경섭, 천정미 부부 가족뿐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외로워하지 않는다. “동자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이니까...”

그 날, 잔칫 돈은 ‘한국교회봉사단’에서 댔지만, 일은 ‘동자동 사랑방 공제협동조합’과 ‘성민교회’에서 다 했다.
주례사는 ‘한국교회봉사단’ 이사장이신 손인웅 목사께서 하셨고,

김유선, 이승아씨의 가야금 이중주와 김경환의 샌드아트 등 다양한 공연들이 벌어져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주민을 대표하여 동자동사랑방의 우건일이사장께서 인사말을 했지만,

김정호씨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부른 축가가 죽였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 운다네”

아무튼, “아침에도 울지 말고, 저녁에도 울지 말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시게나...”

사진, 글 / 조문호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전시한 ’사람이다‘전에 반가운 분이 찾아 오셨더라.


‘포토 트래블 인’의 노은향씨 였는데, 쪽방촌 사람들에게 전달해 달라며, 내의 스물 한 벌과 양말 네 박스를 가져오셨다.

일전에 빈민들을 돕고 싶다는 전화는 받았으나, 전시장 오는 김에 직접 가져 오신 것이다.


전시가 끝난 후, 동자동으로 옮겨 놓았으나 하루라도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 

방을 차지한 짐도 짐이지만, 추위에 떠는 주민들을 생각해서다.
‘서울역 쪽방촌상담소’나 ‘동자동 사랑방’같은 단체에 넘겨 줄 수도 있었으나 많은 량이 아닌데다,

사이즈가 대개 커서 체형에 맞는 분들을 찾아, 직접 전해 주고 싶어서다.






'홈리스추모제'가 열린 지난 21일, 배낭에 몇 개 들어가지 않아 두 차례나 짐을 옮겼으나, 약간은 조심스러웠다.

누군 주고, 누군 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나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체형이 맞는 분들을 불러내어 전달했는데, 다들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이제 남아 있는 여섯벌은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고, 은둔하는 분들을 찾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을에 뜻밖의 잔치가 열린 것이다.

동자동에 사는 다섯 쌍의 합동결혼식이 지난 25일 오후4시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있었다.

다들 노숙에서 탈출하여 함께 살고 있으나, 여지 것 결혼식을 못 올린 늙은 부부들이다.

박소영 신부는 지난 번 전해주었지만, 내의가 모자라 세 쌍은 한 벌씩 밖에 전해주지 못했다.

대신 신혼여행 같다오면, 멋진 결혼사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들 얼굴은 모르지만, 노은향씨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동짓날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 추모제'가 열렸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다.
해마다 이맘때면 홀로 세상을 떠난 이름 없는 민초들을 추모하는 자리가 열린다.

올해 12월 21일의 동짓날은 눈 대신 비가 내렸다.

한겨울 치고는 덜 추웠지만, 빈민들의 삶은 일년 내내 혹한의 겨울이다.

매년, 죽어가는 거리의 노숙자나 쪽방 촌 빈민들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욱 절실하지만,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장례라도 제대로 치루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고독사’나 시체를 포기하는 각서, 사망신고를 할 수 없어, 죽어도 죽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죽는 것을 미리 걱정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은, 사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노숙인이나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을 대신해 43개의 민간단체가 나섰다.

한 해동안 세상을 떠난 빈민들을 추모하며, 살아 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죽어서나마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올 한 해 동안 동자동 쪽방 촌에서만 돌아가신 분이 25명이고, 무연고자는 40명에 달했다.

대부분 영정사진이 없어 얼굴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대통령이란 년은 마약주사나 맞으며, 멀쩡한 상판대기와 변기나 뜯어 고치는 지랄을 하는데,

무슨 놈의 팔자가 그렇게 기구하여, 죽어가며 자기 얼굴 한 장 못 남겼는지 모르겠다.

이제 국민들 세금 도적질하는 정치꾼들, 없는 사람 착취하는 재벌, 눈치보는 공무원들은 말끔히 쓸어내야 한다.


이 날 추모제에 내린 비는, 비가 아니라 원혼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죽는 무연고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힘 모아 싸워야 한다.






추모제에서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노숙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한 무료 증명사진 촬영 등의 행사도 진행됐다.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장례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엽서에 담은 ‘1000인의 우체통 프로젝트’ 이벤트도 열었다.

노숙을 탈출하는 윷놀이도 진행되었고, 따끈한 동지팥죽도 한 그릇씩 나누어 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굵어졌으나,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현의씨의 추모사, 민중가수 박준의 노래, 안상호씨와 '희망공간 거리의 아빠들' 합창단 공연도 이어졌다.

이정훈씨의 연대발언과 동자동주민을 대표한 차재설씨의 투쟁발언도 있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라지만, 홈리스의 평균수명은 48세라는 걸 잊지 말자.
죽음을 방치하면 천벌 받는다.





이 날 추모제에는 '동자동사랑방'의 박정아 대표와 공제조합 우건일 조합장을 비롯한 동자동주민들이 대거 몰려나와 행사를 도우며,

팥죽을 나누어 주었다. 반가운 사진가로는 ‘한겨레’ 김봉규기자,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 기자, 김 원, 최인기씨를 만났다.

 

사진, 글 / 조문호


































































































격일제로 마시던 술을, 요즘은 전시 때문에 매일 마시게 된다.

지난13일도 전시장 문 닫기가 무섭게 김남진 관장 따라 나섰다.
정영신과 사진하는 후배 한 분과 마셨는데, 아쉽지만 먼저 일어나야 했다.
몇 일전,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박씨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만나 한 잔 더 하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모두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고 있었다.

노숙하는 자가 시계나 핸드폰이 있을리 없어 허탕을 친 것이다.
하는 수 없어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식도락’으로 사람들이 더나들었다.

밤 늦은 그 때까지 문이 열릴 리가 없었기에, 궁금해 들여다보았더니
방에는 동네 분들이 가득 앉아 있었고, 주위에 서성거리는 분도 계셨다.
음성 ‘꽃동네’에서 오셨단다.








매주 화요일은 ‘꽃동네’ 수녀님들이 동자동을 찾아, 빈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날이었다.
다들 일어날 시간이었으나 음식이 남아있어 끼어 앉았더니, 뜻밖의 슬픈 소식도 접했다.

김순애, 박미숙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전시하는 사정을 알고, '사랑방'에서 연락하지 않은 모양이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단 한차례 밖에 뵙지는 못했으나, 영정사진마저 없었다는 말에 가슴 아팠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렸다. 저승에서는 마음 편히 사시라고...






동자동에서는 함께 식사 할 때가 종종 있으나, 술은 일절 구경할 수 없다.
식사시간이 아닌 늦은 시간인데도, 술 마시지 않는 분만 모여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정씨 딱 두 사람 뿐이었다.







그 역시 닭고기 안주에 술 생각이 나는지,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고기만 몇 점 집어먹고 일어나려니, 수녀님이 선물봉지를 안겨주었다.
식빵 한 줄, 삶은 밤과 밑반찬 두 가지가 조금씩 담겨 있었다.






요긴한 선물도 고맙지만, 환하게 웃는 수녀님 모습에 온갖 시름이 다 녹았다.
고맙다며 맞잡은 손의 온기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토요일은 마음이 바빴다.
아침 열시에는 동네 청소도 해야하고, 오후에는 박근혜 끌어내리려 광화문에도 가야하기 때문이다.
열시에 ‘동자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다들 청소하러 뿔뿔이 흩어지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만 몇 개 남아 있었다.

난, 청소하는 사진을 찍고 싶어 카메라까지 가져왔었는데, 부끄러운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 동네 청소하는 걸, 자랑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배낭 속에 집어 넣고, 나도 청소하러 따라 나섰다.

골목에서 청소하는 박정아씨를 만났지만, 인사만 나눈 채, 열심히 청소를 했다.

왜, 사람들이 담배 꽁초를 그냥 버리면 청소하기 쉬울 텐데, 꺼내기 힘든 맨홀에 집어넣는지 모르겠다.

사람들 심리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두어 시간, 청소하고 돌아오니, 다들 돌아와 있었다.
동자동 주민들이 시위 나갈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어, 카메라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마침, 토요일이라 공원에서 빵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나온 사람들이 적었다,

덕분에, 나도 빵 한 봉지 얻을 수 있는 행운이 따랐다. 그 정도의 빵이면 시위장에서 하루 종일 먹고 남을 분량이었다.

그런데, 반갑게도 첫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나온 이기영씨를 만나 사진을 찍기도하고, 동네사람들도 여럿 찍었다.
더디어, ‘동자동 사랑방’ 앞에는 전쟁터에 출정하려는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의 출정 화두는 “박근혜 방 빼~‘였다. 모두들 피켓 들고 눈길 행진을 시작했다.
집결지인 인사동 ‘남인사마당’으로 떠나며, 모두들 전의를 다졌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동자방 쪽방에 들어 앉아 일을 하다보면, 주변이 산만해 집중이 잘 안 된다.
서울역에서 외치는 확성기소리가 마치 난리 난 듯 왕왕거린다.

지난 18일엔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해, 카메라를 메고 나갔다.
서울역 광장으로 가기위해 지하도로 들어가니,
잘 아는 노숙자 두 명이 동전놀이를 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박씨가 돌아보며 죽은 처 삼촌 만난 듯 외친다.
"어! 기자형님 오셨네. 사진 찍어요. 찍어...“

요즘 동자동에서 나에게 두 가지 칭호가 따라 다니는데,
공무원들이나 젊은 양반들은 사진작가라 부르지만,
동내 사람과 노숙자들은 대개 기자양반이라 부른다.
지랄 같은 사진작가란 말보다, 늙어 쭈그러져도 기자 노릇은 하고 있으니,
기자라는 말이 더 편하더라.

‘가위 바위 보!’ 한 번으로 동전을 가져가는 놀음을 하고 있었는데,
전부의 동전이 삼천 원을 넘지 않았으니, 다시 빌려 주기를 계속했다.
잘 못해 동전이 시멘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손끝이 무디어 집어 올리기도 힘든데,
이기는 잠깐의 기쁨에,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걸리 두 병 값 밖에 되지 않는 돈이지만, 자기 전에 마시려고 버티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밖에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재미있다.
“배때지가 부르니 지랄 떠는 기지요. 지랄하면 몇 푼 주는 모양인데,
씨발넘들이 거지라고 사람차별까지 하고 지랄이야”

궁금증에 “막걸리 한 병 사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보니, 대통령하야반대 및 안보 지키기 국민대회’란
듣도 보도 못한 단체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보수단체 늙은이 천여 명쯤 되어 보이는데, 보아하니 박사모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야당과 좌파의 민중혁명 음모를 규탄한다”며 나발 불었는데, 정말 과관 이었다.

그런데, 만만한 게 태극기인지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야단이더라.

나라를 위하는 척 호들갑 떠는 게 정상은 아니라, 서울역을 오가는 젊은이들 보기 부끄러웠다.
나도 거기서 사진 찍고 있었으니, 같은 패거리로 볼까봐, 얼른 막걸리 사서 지하도로 내려갔다.

‘제발, 늙은 놈 쪽 팔리게 하지마라. 이 정신 나간 꼰대들아!’ 

 

막걸리를 들고 가니, 박씨가 반색을 하며 반긴다.
“기자형님 진짜 막걸리 사왔네. 최고다 최고”
야! 천오백 원짜리 막걸리 한 병에 저렇게들 좋아하는데,
국민들의 돈을 엄청나게 도둑질한 기집 년은 뻔뻔스럽게 버티고 있으니, 또 분통이 터졌다.

술 한 잔 마시며, 고함을 내 질렀다
“박그내를 박살내자” 지나가는 젊은이들도 따라 외쳤다.
술 마시던 노숙자 둘도 덩달아 박살내자고 외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저녁무렵, 새로 가입한 동자동사랑방 공제협동조합원의 교육이 있었다.
교육의 자리라기보다 동자동 협동조합의 소개와 권리, 의무 등을 알려주며,
새로 들어 온 조합원들을 소개하는 친목의 자리였다.

박정아, 선동수, 차재설씨, 세 분이 차례대로 조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대략은 알았지만, 5년 동안 엄청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
4백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은 푼돈이 출자금 1억 8천 만 원을 넘기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조금씩이나마 저축하며, 서로 힘을 나누는 유익한 단체였다.

그날, 이배식, 허미라씨 같은 아는 분도 계셨지만, 강희숙, 최윤정, 강현경, 김병홍, 남일우씨 등 여러 명과 얼굴을 익혔다.

술은 없었지만, 조합에서 근사한 만찬자리를 ‘식도락’에 마련했는데, 밥상에 닭도리탕까지 올라왔다. 간만에 맛보는 별미였다.

집에서 먹으라며 싸준 밀감 봉다리를 달랑거리며 돌아오다, 구멍가게를 기웃거렸다.
각자 유언장을 써 두라는 이야기에 술 생각이 났는데, 도저히 맨 정신에는 유서를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어, 다음에 쓰기로 했다.


혼자서 절대 술 마시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핑게삼아...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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