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를 앞 세우고 행진하는 이한열 장례행렬



최근 들어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영등포 서인형씨 사무실에서 열린 공모전 회의에 함께 했다,

그 날 최석태씨는 신인 발굴을 위한  좋은 안건을 많이 내 놓았다.

구태에서 벗어난 그런 사진 공모전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볼만했다.





회의가 끝나 가까운 식당으로 옮겼는데,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듯 했다.

너무 어지러워 서인형씨에게 택시비까지 부담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지난 2일은 최석태씨가 여수의 최병수씨를 데리고 정영신씨 집으로 온다기에, 나도 함께 했다.





코 구멍한 방에 사내 세 명이 들어가니 집이 꽉 차더라.

최병수씨가 차를 끌고 와 술 한 잔 못했지만, 주된 화제는 '87민주항쟁' 시절의 투쟁사였다.



최병수작 '한열이를 살려내라'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와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이야기 였다.

그 당시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 판넬을 최병수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림판이 너무 커 육교를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아, 중간에 정첩을 달아 접을 수 있도록 만들었단다.

그 이튿날 장례 행렬이 연세대 교정에서 출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현동 육교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림판을 접어 무난히 통과시켰더니, 지켜보던 시민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사진 찍느라 나도 현장에 있었던 것 같았다.

‘87민주항쟁’ 화일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아! 그 때 찍었구나. 그 사진들 모아 전시 한번 해요. 이한열 기념관에서라도..”

최병수씨가 부추겼지만, 전시라는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뭉게 버렸다.


87년도에 전시를 하려니 '사협' 이사장이란 자가 못하게 해 ‘직장을 그만두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사진한다는 사람이 지레 겁먹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광목천으로 대학로 ‘여백갤러리'를 돌려 길거리 벽으로 끌어내어 전시를 했는데,

정작 현장에서 싸웠던 투사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87년12월 대학로에서 전시한 '87 민주항쟁' 포스터



92년도에는 김영삼 후보 여의도 유세장 주변에 합판을 세워 전시했으나 정치꾼에게 이용만 당했고,

‘87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은 해도 전시를 추진한다는 말은 있었으나, 감감소식이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놈이 먹는다'는 말이 딱 맞은데, 이젠 전시 할 형편도 안 되지만 해 준다 해도 안 한다.

반 평생 찍은 사진 필름과 디지털이미지는 죽기 전에 몽땅 불 태우거나 삭제할 것이다.

사진 소장자에게나 가치를 높여 줄 생각이다.





최병수씨를 알게 된 것은 2017년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에서다.

그의 저돌적인 작업이나 투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오죽하면 민중미술의 거두인 신학철선생께서 “병수 니가 최고다”며 엄지를 치켜 세웠을까?

그 당시 광장에 철공소 차려 작품 제작하느라 많은 빚을 졌고, 지난 번 ‘민예총 기금 마련전’도 고생만 했다.

똥파리들은 팔아 먹기도 잘하고, 한 자리 꿰 차기도 했으나, 모든 걸 다 바친 최병수는 왜 찬밥 신세인가?

전시를 기획한 최석태가 그를 돕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이유다. 




 

곰이 책을 보는 ‘휴먼’이란 대형 작품을 만들어 ‘전시장’ 앞문과 뒷문에 설치했는데,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 작품이야말로 도서관 입구의 조형물로는 안성마춤이었다.

혹시 교육 행정가나 관련 있는 분이 계시면 도와주기 바란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그를 인터뷰하여 “광화문광장에 철공소 차린 최병수”란 제목의 기사를 쓴 적도 있다.

그 때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올리니, 최병수를 모르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살아 온 자체가 예술이다.





“최병수는 이한열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신촌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미술 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갔다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잡혀 갔다고 한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붙였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이고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도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 들고 현장에 가서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머리을 공격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세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돈 안 되는 짓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하여 텐트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워 광장은 자연스럽게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촛불광장을 예술광장으로 이끌어간 그의 노력은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새 해를 맞아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이 시원섭섭하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병석에서 고생한 정영신씨 모친께서 지난 년 말 임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영신씨가 병원비 마련하려 여러 일을 해 왔으나, 이제 한 숨 돌린 것이다.






먼저 정영신씨의 ‘민예총’사무국 상근 직부터 내 놓고, 비상근 봉사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4년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해 준 ‘서울문화투데이’도 새해부터 손을 떼었다. 
미진했던 사진 작업에 매달리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오후 5시 무렵, 계동에 있는 '한국민예총'사무국에 들렸다.

업무 인계하러 갔던 정영신씨가 짐이 있다기에 차를 끌고 간 것이다.
사무실에는 서인형 국장이 새 사무처장으로 임명된 김윤기씨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영신씨는 '민예총'기금마련전 할 무렵부터 사의 뜻을 밝혔지만, 서인형국장은 왜 그만두는가?

조직 내부 일이라 언급할 수 없으나, 이사장이 큰 실수 한 것 같았다.






저녁 먹고 가자는 정영신씨 말에 끌려 '민예총‘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田多‘식당에 갔다.
처음 가본 식당인데, 어머니와 두 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모녀가 정답게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차를 끌고 갔으니,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오늘의 도시락’을 시키고, 서인형, 김윤기, 정영신씨는 모듬전을 시켜 막걸리를 마셨다.
마침, ‘민예총’ 기금마련전을 기획한 최석태씨와 연락 된 것 같았다.

좀 있으니, 최석태씨와 여수에서 활동하는 최병수씨가 함께 왔더라.





이한열열사 대형걸개 그림으로 알려진 최병수는 온 몸을 민중미술에 던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의 갖가지 직업으로 기능을 닦았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반가운 분을 보니 술 생각이 더 간절했지만, 보고도 못 먹는 장떡이었다.
긴 시간 동안 막걸리 반잔으로 입만 축이려니 죽을 맛이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그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래 전 최병수씨 아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귀똥 찬 묘약으로 완쾌한 적이 있단다.
신학철선생 부인 강고은씨가 힘겹게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최병수씨가 그 약을 권했는데,
서서히 효험이 나타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으나, 최병수씨가 단골집에서 한 잔만 더 하자며 손을 끌었다.
차마 거절 못해 따라 나섰는데, 소주 한 잔으로 버티야하는 지루한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석태씨가 오래전 중앙일보 미술잡지 기자로 일할 때, 최병수씨를 취재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때 헤드라인에 쓴 말이 관료작가라 했다는데, 김윤기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신촌 그림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서 받을 때 본인은 화가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경찰관이 화가라고 못을 박아 졸지에 관에서 만들어 준 화가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화제가 비아그라로 옮겨갔다.

서인형씨 말에 의하면, 요즘 한약방이 안 되는 이유가 비아그라 때문이라 했다.
전에는 집사람들이 남편 양기 돋우기 위해 보약을 지어 먹였으나,
요즘은 비아그라‘ 때문에 보약 먹일 필요가 없어졌단다.
웃어 넘기기에는 좀 거시기한 이야기였다.





몸은 술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앞으로 놀 일 궁리하느라 바빴다.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잘 놀겠지만, 나도 동자동에서 재미있게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이제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둘만 먼저 일어나, 녹번동에서 축배를 들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촛불역사'전에 추가한 사진이 많으니 한 번 봐달라는 정영신씨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모처럼 광화문광장으로 나가보니, 그 뜨거웠던 열기는 오간데없고,

최병수씨의 설치작품들이 늘린 텐트촌 분위기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관객 몇 명을 앉히고 손병희씨가 노래부르고 있었고, 최병수씨는 또 뭘 만들려는지 자재를 반입하고 있었다.

송경동 촌장이나 신유아씨 등 그 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여전했고, 광장극장에서는 철거를 앞둔 쫑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이해성 극장장이나 춤꾼 장순향 교수의 모습도 보였다.



 


궁핍현대미술광장앞에는 곽명우씨와 정영신씨가 서 있었다. 광장에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나온 사람 대부분이 전시장을 찾으니 일반 전시장보다는 관객이 많은 편이었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돌아보니, 너무 많이 걸려 답답해 보였다.

그러나 힘들게 만들어 온 곽명우씨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한 장이라도 더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마지막 전시인 '촛불역사'전은 정영신씨가 맡았으나, 좀 더 치밀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했다.

촛불집회에서 만난 사진가들의 작품을 모았으나급하게 추진된 일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분 사진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내 와 들죽 날죽 했다.

정영신씨는 작은 전시장이지만, 촛불집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메인 전시장은 기존 사진가들이 보내 온 기록으로 채우고,

그 옆엔 광화문미술행동'의 기록과 함께 촛불시민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급히 SNS에 올려 다양한 사진을 모았는데, 화가 김진하, 이재민씨의 사진을 받기도 하고

시인 정덕수, 김명지씨 등 시인들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사진을 모았다.

광장에서 노숙하는 정덕수시인은 뜨거운 현장의 열기대신, 그 이면 생활상을 보여 주었




 
그러나 촛불시민들이 보내 온 사진은 핸드폰사진이라 크게 뽑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작은 규격의 사진을 200여장 뽑았던 것이다.

전시장이 작으니 오밀 조밀 재미있겠다 싶었으나, 막상 DP를 해보니  허전했다.


열림식을 치룬 뒤, 몇 장만 다시 크게 뽑기 위해 조율하는 과정에서 사진계 마당발 곽명우씨가 나선 것이다.

곽명우씨는 규격을 바꾸는 사진에 한정하지 않고, 더 다양한 사진들을 보여주고 싶어 

자신의 파일에서 이런 저런 사진들을 골라 내 프린트 업체에 맡겼다고 한다.

 

그 이틀 날 사진을 찾아와 곽명우씨와 빈자리를 채웠으나, 사진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좀 남기고 싶었으나, 빈 틈 없이 다 채워 버려 전시장이 답답해 보인 것이다





사진가의 주관이 개입된 사진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대로 찍은 순수한 사진이 대중에게 더 친숙하겠다며 자위했다.


집회 현장의 텐트전시장이니 만큼, 전시 분위기나 작품성보다 그 날의 현장을 돌아보며

촛불시민으로서의 보람을 되 세기길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모습이나 반가운 분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으니, 책 보듯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재미를 느끼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촛불의 전진기지 ‘광화문광장’에 무허가 철공소 하나 들어섰다.

박근혜 잡을 무기 공장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에게 예술적 결기를 다지게 하는 환경미술가 최병수의 현장 작업실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부패 정치를 예술로 치유하는 블렉리스트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되어버렸다.






최병수는 이한열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신촌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미술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부쳤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이고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도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한열 열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동아리 ‘만화사랑’과의 인연으로 내놓은

그의 첫 대형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으로 진보 운동 판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유명세나 재능보다 초지일관 지켜온 예술의 사회 실천적 헌신에 더 무게를 둔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들고 현장에 가서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머리을 공격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세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돈 안 되는 짓거리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하여 텐트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워 광장은 자연스럽게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숙소로 사용하던 텐트마저 틈틈이 가져 온 각종 공구들로 가득 차버려,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전전하며 노숙 아닌 노숙자신세로 전락하였다.

아직도 그가 광장에 조형물을 얼마나 더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박근혜가 물러날 때 까지 이어질 것 같다.

설치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 시작했다는 그가 만든 악세사리 용품도 제법 잘 팔릴 것 같았다.

블랙리스트라는 글귀가 새겨진 면도날 목걸이에서부터 뺏지, 그리고 꿈을 조형화한 열쇠고리 등,

매사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사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촛불광장을 예술광장으로 이끈 현장예술가들의 피와 땀이 베인 투쟁사는 역사의 한 현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박근혜는 하루빨리 퇴진하여 모든 작가들이 제자리에서 정상적인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박근혜는 특검 내치며 괘변만 늘어놓고,

정치인들은 권력 쟁탈전에 눈알 뒤집혀, 민생법안은 돌볼 겨를이 없다.

공무원들은 일손 놓아버렸고, 물가는 천정부지다.

 

박근혜 주변 무리들의 집요한 권력욕은 이제 이성 잃은 지 오래다.

날조된 기사로 도배된 엄청난 분량의 지라시를 가가호호 배포하며,

조선일보에 주말집회 광고까지 실었더라.

보지 않아도 계속 놓고 가니, 조선일보 역시 지라시나 다를 바 없다.

 

대개의 노년층들은 어린 시절부터 받은 반공교육과

부패정권 나팔수 노릇하는 언론에 세뇌된 불쌍한 세대들이다.

이젠 광신도로 변해 죽을 때까지 바뀌기란 어렵다.

얼마 전 태극기를 감고 아파트에서 자살한 노인이 바로 그런 전형이다.

 

그런 사람은 제쳐두더라도 좀 배웠다는 분들의 잘못된 사고가 더 무섭다.

새 박사라며 온갖 똥 폼 다 잡던 윤무부씨가 휠체어를 탄 채

군대여 일어나라는 피켓을 목에 건 사진을 보았다.

분명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구테타 일으키는 게 군인이던가?

 

경기지사 지낸 김문수씨의 박근혜 두둔하는 소리도 어이없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쪽팔리는 짓은 제발 하지마라.

여론조사에서 80%이상이 꾸준히 박근혜의 탄핵을 요구하는데도,

박사모는 태극기가 촛불을 앞질렀다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나라꼴이 이렇게 된 것은 권력자들의 책임에 앞서, 국민들의 무관심도 한 몫 했다.

나 하나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나? 하는 생각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잘 못 배워 모르거나, 권력욕에 눈 뒤집힌 정치꾼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알면서도 침묵하는 자들이 더 비겁한 것이다.

 

지난 4일 정오 무렵 광화문광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로 내려갔다.

우연히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태극기 집회에 간다고 말했다.

박사모의 하수인이 된 고향친구의 연락이 빗발쳐 하는 수 없이 나간다는 것이다.

빌붙어 사람 모우는 그 역시 정치 쓰레기일 뿐인데, 이러한 지역연고도 큰 문제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4차 촛불집회 날은 입춘이었다.

주류 아닌 예술가들의 입춘 시국퍼포먼스는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였다.

유진규씨의 행위예술은 꽃을 피우기 위한 고통스러운 몸짓이었다.

이상호씨가 이끄는 풍물패의 풍물한마당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광화문 미술행동에서는 새로운 나라로!’란 주제를 내 걸었다.

광장갤러리에 설치된 걸개그림은 판화가 김준권, 박홍규, 김봉준, 김진하, 김억,

류연복,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정비파, 이철수, 홍선웅, 홍진숙씨의 작품이 내 걸렸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 세화로 꾸민 판화전도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열린 서예퍼포먼스에서 여태명씨는 탄핵대길. 안민다경을 썼고, 박수훈씨는 탄핵농자지대본을 썼다.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 위에 쓰는 시민들의 자유발언대 참여도 이어졌다.

 

날이 갈수록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지는 예술행동 판은 풍성해지고 있다.

침묵하는 자들도, 이제 일어나라.

오는 정월대보름날 열릴 15차 촛불집회에 다 함께 나서자.

 

사진, / 조문호

    


























































































 


 



정영신사진



지난 14일 열린, ‘광화문미술행동’의 네 번째 프로젝트 ‘응답하라! 1987’이 시민들의 참여속에 진행되었다.

체감온도가 영하13도에 이르는 한파가 시민들의 몸을 얼어붙게 하였으나,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강한 투지는 한파를 견뎌내게 했다.





이날은 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추모를 겸했는데,

박종철열사의 대형 사진과 그 당시 그림들은 30년 전의 민주항쟁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얼마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지 현수막 걸개그림들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지지대가 풀려나가 다시 끌어 메는 등 작가들이 고생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와 연대한 추모제였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탁 치니 억하며 죽었다”는 그 때의 말도 그렇지만, 청문회나 특검에서 오리발 내며 거짓말로 일관하는

오늘의 상황이 더 지능적이고 악랄하다.






현수막전에는 신학철선생의 ‘초혼가’, 조문호의 ‘87민주항쟁’,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등

그 때 그 시절의 이미지들이 내 걸렸으나 추운 날씨 탓인지 정치적 한기를 더욱 체감케 했다.

‘한국민족춤협회’에서는 ‘백년의 바람 춤’을 추었는데, 백년만의 바람인지 엄청 난 북풍이 몰아쳤다.

그 바람찬 광장에서 지켜보는 시민들은 이를 악물며 결기를 다지게 했다.






시민참여 인증샷 ‘그날, 나도 거기에 있었다’와 차벽공략에 설치될 그림판 작업도 진행되었다.

사진가들이 찍어주는 인증샷에 참여하며, 굳은 얼굴을 펴기도 했고,

작가들과 시민들은 언 손을 녹여가며 글이나 그림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김준권, 류연복, 김진화, 윤병권, 장경호, 이인철, 정영신씨 등 많은 작가들이 고생했으나,

이 날은 대구에서 올라 온 이재갑씨가 인증샷과 사진기록을 돕기도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하는 윤병권씨가 이재갑씨의 어린 시절 고향친구라는 것이다.

우연히 이산가족 만난 듯한 반가움에 얼었던 얼굴을 활짝 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이광군, 남 준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오후4시부터 다른 일과 겹쳐 잠시 떠나야했다.

그 시간의 기록은 정영신씨의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오후6시가 지나서야 현장으로 복귀하니, 시민들은 종각방향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우렁찬 함성은 영하의 날씨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청와대 문고리 잡고 발악하는 박근혜나 자기 잇속 차리느라 잔머리 굴리는 정치꾼들을 보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이제 민심을 그르치는 정치꾼은 발 붙이지 못하게 모두들 눈 똑바로 떠야 할 것 같다.






작업을 마무리한 “광화문 미술행동”팀들은 ‘남원추어탕’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먼저 본 작가 외에도 김진열, 김 억, 최병수, 이재민씨 등 많은 분들이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파하여 장경호, 최병수씨와 차 한 잔하는 자리에서 사진가 곽명우, 남 준씨를 만나기도 했다.

다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느라 늦은 시간 까지 고생하고 있었다.







오는 21일 열릴 ‘광화문 미술행동’ 다섯 번째 프로젝트 ‘차벽을 넘어 광장으로‘의 주제는 “동녘이 밝아 온다”다.

정오부터 ‘서울민미협’의 깃발전을 시작으로 ‘광장 갤러리’ 설치, ‘세화 목판화 찍기(김준권, 류연복)’,

‘서예 퍼포먼스(정고암, 강병인, 여태명)’ ‘시민과 작가가 함께하는 그림, 글쓰기’, ‘인증샷 사진촬영 등

다양한 미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뒤편과 미대사관 앞에서 펼쳐진다.





오랫동안 끌어 온 집회의 누적된 피로와 추위로 시민들이 완급을 조절하고 있으나,

다음 집회에서 다시 한 번 동력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 걸 악용하여 뒤집기를 시도하는 ‘박사모’ 잔당들의 역습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은 박사모 잔당보다, 박근혜 무리가 척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과의 싸움이다.

13차 촛불집회에는 모두 나서서, 끝장을 내자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조문호사진































































정영신사진




















조문호사진



















내가 왜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展
2016_1224 ▶ 2017_0113


이윤엽_구속하라 근혜_다색목판화_30×20cm_2016



초대일시 / 2016_1230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이윤엽_정택용_오진호_최병수_노순택
일상의실천_광장신문편집위원회

기획 / 신유아
관람문의_Tel. +82.(0)10.9270.0830
관람시간 / 10:00am~09:00pm


궁핍현대미술광장
Field Museum of Poor Political Contemporary Art
서울 종로구 세종로 188 광화문광장 한가운데


당신은 지금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광장에 서 계십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계신가요. 다섯 명이 모인 자리에 다섯 개의 사연이 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건 더 이어져야 할 304개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 삶의 이야기도, 삶의 이유도 같을 리 없습니다. 하물며 1백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던 이 광장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박근혜 당선 이틀 뒤 목숨을 끊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씨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와 손배가압류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마땅히 사회가, 정치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나 '누군가'의 당선은 한 노동자가 품어야 할 일말의 희망마저 거두어 간 것이었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과 부정선거에 항의해 서울역 고가에서 분신한 이남종 씨의 외침은 어떠한가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씨는 "힘들고 배고팠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지금 이 광장에는 가혹한 노조파괴의 과정에서 죽어간 동료 한광호 씨의 영정을 붙들고 힘겹게 싸우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 광장은 노동자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한겨울 오체투지를 이어가며 흐느꼈던 곳입니다. 쌍용차,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고통이 배어있기도 합니다. 세월호참사 304명의 작은 영정이 밤새 빛나는 광장이지요.



내가 왜展_궁핍현대미술광장_2016


광장신문발행위원회_『광장신문』 첫 번째 호외_2016


다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왜 서 계신가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왜 서 있을까요.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 『내가 왜』는 노래패 꽃다지의 노래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노래는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시리고 추운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농락당한 우리의 삶에 '왜'를 되묻고 있습니다



정택용_박근혜퇴진캠핑촌 / 나규환_우리바뀐애_스티로폼조각에 채색_높이 3m_2016


독재자의 딸 2012 『타임』 표지 / 민성훈_독재자의 딸의 무당 최순실_2016

노순택_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 이재용과 정몽구_2016


정택용_새마음애국퇴근혜애국청소봉사단발대식_가변크기_2016


당신과 나의 삶이 파괴되는 밑그림에 농락당한 사회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어두운 장막의 뒤에서 누군가 즐겁고 화려한 파티를 벌여왔음을 낱낱이 알게 되었죠. 그래서인가 봅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이 광장에서 만난 까닭. 어떤 시의 한 구절이 그 까닭을 말해줍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광장에서 만난 거겠죠.



정택용_희망촛불_강성봉, 이원석 외 민미협회원들_2016


오진호_캠핑촌 웹자보 시리즈_가변크기_2016


노순택_잘라라 약자에게만 가혹한 그 손을_80장의 종이를 이어붙임_가변크기_2016


'궁핍현대미술광장'은 초라하고 궁색한 한국 정치의 풍경을 그립니다. 가난할지언정 삶을 위해 싸우는, 소중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다채로운 광장의 외침을 담으려 합니다. 궁핍한 정치의 멱살을 잡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예술이니까요. ■ 신유아



Vol.20161224d | 내가 왜-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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