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술 마시는 호기를 부리다 혼쭐 난 날이었다.

인사동에서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서 24시간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당분간 술과 담배를 자제할 작정이나, 생각을 따라주지 않으니, 한 낱 구호에 불과하다.



 


병원에서의 허송세월로 밀렸던 봄의 일정을 서둘러야 했다.

강진과 정선에도 가야하지만, 중간 중간 서울에서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이 스스로를 위한 일인지,


남을 위한 일인지도 분간 되지 않고, 하지 않는다고 문제생길 일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길들어왔던 관습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 귀찮은 관습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른다.




 

16일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라 오찬모임에 가야 했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최경자여사 전민조선생 등 네 분이 만나는

조촐한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나, 갑자기 전민조선생께서 일이 생겨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약 인원수를 맞추느라 계획에도 없던 내가 끼이게 되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최근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병원에 입원한 후로,

매년 치루어 왔던 생신 오찬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셨으나,

정영신씨가 손사래를 쳐 자리를 만들었으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데다.

불편한 몸으로 긴 시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어떠하든, 정영신씨를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한정식선생의 인사동 작업실을 찾아 그동안 못들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사모님 걱정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습이 역역했다.






지난 해 사별하여 홀로 계신 이명동선생님의 초라한 모습을 늘 안쓰러워 하셨는데,


사진가 이완교선생 까지 사별하시어, 더 힘든 것 같았다.

이완교 선생께서는 사별한 후, 그리도 구슬피 울었다는 말씀도 전해주셨다.

혼자 남는다는 외로움의 웅덩이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일이다.





오찬장인 이화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께서는 운동 삼아 늘 걸어 다니시는 구간이지만,

, 힘들어 택시를 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식당으로 가다 테라로사에 계시던 강운구선생과 이갑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 다음 일정은 자하문로에 위치한 이안의 개관전시에 참석하는 일이다.

개관전으로 치루어지는 더레퍼런스 #1 : Asia Art Book Library였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중국,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의 아트북 241권을

5명의 작가들이 국가별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는데, 나에게는 좀 생경스러웠다.





발행인 김정은씨를 비롯하여 한정식, 황규태, 박진영, 박지숙, 김다울씨 등

여러 명이 행사장에 있었으나, 전시된 다양한 출판물들만 살펴보았다.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어, 인사동에서 기다릴 작정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디프레스 갤러리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호련씨의 'collaged image'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쇼케이스에 걸려있는 작품 한 점에 나도 모르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작가는 물론 안내하는 사람조차 없었으나,

혼자서 두 개 층에 걸린 작품들을 훔쳐보듯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젊은 여인들의 자유스러운 동작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사진 같은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인데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관음증적 욕망을 끌어내는 이 은밀한 엿보기는

보는 이에게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흥분까지 불러 일으켰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물장난을 치거나, 작업에 몰입하거나,

누워있는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 모습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시선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이면서도 허구이자 사실적이면서도 어딘지 추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많은 사내가 젊은 여인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이르니,

요즘 부는 미투의 휘오리에 휘말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생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서평에 이렇게 썼다.

작가가 그린 신체는 단지 대상의 닮음 꼴에 그친 도상,

대상의 외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감각이고 대상의 신체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나름 강렬하게 감각하고 욕망화한 것, 체험한 신체의 대상화이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신경, 감각을 다분히 건드리는 그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저기에 있다.

그림 안에서 유령처럼, 환각적인 존재인 냥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체이면서도 물질적 존재감 없이 몽롱하게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저 존재성은

욕망의 대상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방증하는 회화적 제스처로 다가온다적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독특한 체험의 전시였는데, 오는 3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다.



 


지름길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들어섰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보니, 한정식 선생을 모시고 내가 가는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살다보면, 우연하게 통하는 일도 많다.

인사동에서 한정식선생을 배웅한 후, 유목민에 잠시 들렸다.

갈증도 풀 겸, 화장실에도 들려 잠시 쉬고 싶었다.



 


그 다음의 일정은 태국에서 귀국한 고영준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40년 지기의 사우였지만, 사업장을 태국으로 옮기고 부터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는데,

이틀 뒤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귀국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말에 강진으로 떠나야 했으나, 그 결혼식 때문에 연기한 셈이다.

그를 만난 김에 축의금만 전해주고, 결혼식은 빠질 심산이었던 것은

축의금이래야 두 사람 밥값도 미치지 못하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약속장소인 멕도날드에 들렸더니, 고영준씨 뿐 아니라

오래된 사우인 유성준씨와 최성규, 김흥묵씨도 있었다.





40여년 전, 인사동에 있었던 꽃나라라는 흑백 암실에서 만나기 시작한 분들인데,

오랫동안 하는 일이 다르고, 사진에 대한 생각마저 달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지만,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분들이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 만난 많은 선배들이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한 평생 누드를 찍어왔던 정운봉 선생을 비롯하여,

백로사진을 열심히 찍던 경찰서장 출신의 이봉하선생,

사진계 소식지를 만들어 사진인들에 돌렸던 정철용씨,

작년 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인사동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던

이기윤씨 등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떠나는 구나

안타깝고 허무했으나, 나 또한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쓴 웃음이 흘렀다.



 

 

고영준씨는 태국에 살지만, 폐친이라 나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글에 마음이 아렸던지, 자신의 카메라를 싸 들고 왔다.

난 이미 카메라를 구했고, 다른 카메라는 잘 사용하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인정에 콧 잔등이 찡했다.



   



다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는데,

술 한 잔 하자는 인사법에서 밥 한 그릇 먹자는 인사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여섯명이 소주 한 병으로 끝냈는데, 겨우 반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니, 입만 버린 셈이다.

밥값은 정영신씨가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 이 웃기는 짜장면은 또 무얼꼬?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오늘은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다.
이번 생신은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여사께서 오찬을 미리 예약해 두었단다.
약속장소가 지하철 3호선 동대역 6번 출구라기에 내심 어디로 갈지 궁금했는데,
'남산타워 레스토랑'이라는 것이다.

사실 ‘남산타워’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생전 처음이었다.
촌놈 출세한 것이다. 여지 것 마누라에게 구경시켜 주지 못한 게 걸렸으나,
본래 잘 알려진 사람 많은 관광지를 기피하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오래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날씨가 받혀주었다.

완연한 봄 날씨였다.
따스한 봄볕에 괜히 마음이 들떴는데, 역시 늙어도 봄은 좋더라.

그 자리는 주인공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최경자, 정영신, 전민조선생과
나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움직이기 딱 좋은 인원에다 좋은 분들과 만났으니,
봄 사건 한번 엮었으면 좋으련만, 통풍이 도져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모습은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낯설었다.
희뿌연 스모그에 뒤 덮힌 시가지가 햇살에 드러났는데, 서울 같지않았다.
또 촘촘히 들어 선 높은 빌딩과 집들은 얼마나 많은지,
집 없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산타워는 오래된 탑이라 전망대에 오르는 에리베이터가 벽에 가려져있었다.
서울시가지를 내려보며 오르기를 기대했는데, 탑승료 만원이면 너무 비싸다 싶었다.
오래되어 투자금의 몇 배 이상 벌었을 것이고,
더구나 그 위의 식당예약으로 가는데 말이다.

식당 분위기는 좋았다.
마치 비행기로 하늘에 올라 밥 먹는 것 같았다. 다 좋은데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어쩌랴!
더구나 전민조선생께서 사진 찍는다며 맥주잔을 입에 대는 포즈를 취하라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술 같으면 몰라도 맥주는 더 마실 수 없었다.
통풍에 맥주는 쥐약이니까...

좌우지간 한정식산생의 생신을 기념하는 오찬회는 즐거웠다.
원님 덕에 나팔 분 격이나, 모두들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선생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백세까지만 건강하게 사십시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라져가는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한 김기찬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께서 10주기를 맞는 지난 8월 27일,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란 제목의 책을 펴내며,

중학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김기찬선생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미망인 최경자여사를 비롯하여 사진가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윤한수씨, ‘눈빛’ 편집장 안미숙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등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과 글을 쓴 필자들이 모였다.

안미숙편집장은 인사말에서 “이 책을 지궁스럽게 만들었다”며 잘 쓰지 않는 말부터 끄집어냈다.

이번에 나온 사진 에세이에 김기찬선생께서 ‘지궁스럽다’는 말을 썼는데,

그 뜻이 책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윤한수씨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데가 있다“로 찍혀 나왔다.

정말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두 내외는 김기찬선생을 지극하다 못해 끔찍히도 모셔왔다.

한정식선생께서도 그의 지극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규상씨가 “지난 번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사진집이 재판되었을 때,
고인의 무덤까지 사진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사진에세이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제본소에서 책 나오기를 안절부절 기다리던 이규상씨가, 뒤늦게 책을 안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내 놓은 책들은 금방 구워낸 붕어빵처럼 따끈따끈했다.

10주기에 맞추어 선보이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의 지극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이야 김기찬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싹터 온 인간적 정리도 한 몫 한 듯하다.

그 분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진을 위해 그만큼 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뻔히 안 팔릴 줄 알면서도 기록적 가치만 있으면 무조건 출판하는 그의 뚝심에 모두들 걱정이 대단하지만.

그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많이 사 보는 방법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이지만...

 

 

 

책에 실린 김기찬선생의 생전 모습 / 한정식선생께서 찍었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주옥같은 사진과 글들이 마치 당시의 상황과 애잔한 마음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가 한정식선생과 전민조씨는 평소에 지켜 보았던 작가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적었고,

사진가이자 건축가인 윤한수씨는 선생께서 다녔던 골목 골목을 답사하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다.

사회학교수 김호기씨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 역사학교수 이광수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사진책도서관’대표 최종규씨 등 여러 필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김기찬선생의 작가론과 골목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부산대 사회학 교수 윤일성씨의 ‘도시 빈곤에 대한 두가지 시선’

-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연구-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를 하찮게 여기는, 서양귀신 씬 사진가들은 꼭 읽어야 한다.

“최민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작가이고 김기찬은 ‘따사로운 온기’의 작가이다.”
그 논문에 쓰인 이 한마디가 양대 다큐멘터리 대가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각설하고, 이야기를 다시 추모 만찬장으로 돌린다.
추모사를 겸한 이규상씨의 인사말과 이완교선생의 추억담 등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김기찬선생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토록 골목을 사랑한 분이 어디 있었는가?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음식은 얼마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너무 황송스러웠다.

고맙게도 누가 몰래 밥값을 냈으나  계산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컨데 황규태선생께서 내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이차로 자리를 옮긴 맥주집에는 이규상, 안미숙 내외와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임종업씨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한 잔 마신김에 좀 과음했다.

뒤늦게 '한겨레신문'의 김봉규씨가 온 것으로 기억되나 카메라에 그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 취했나?
아무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기개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예술’ 발행인 이,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일, 많은 사진가들을 만났다.
행사장인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정식, 육명심, 전민조, 최경자선생과 같이 나왔으나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육명심선생만 인사동까지 함께 하셨는데, "가까운 곳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박대조씨의 'Where do we go now'전이 열리는 ‘나우갤러리’로 올라 가셨다.

그 곳에는 행사장에서 만났던 이순심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박하선, 박종우,
김현숙, 정면주 교수 등이 먼저 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고, 나중에는 곽명우씨도 왔다.

때 만난, 육명심선생의 강의가 발동되었다.
내조를 잘 해주시는 사모님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사진사까지 거침없었다.
일전에 들었던 말씀이거나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진가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강의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무엇보다 설득력이 필요하다며 말씀을 끝내셨다.
사진가보다 사진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진,글 / 조문호

 

 

 

 

 

 

 

 

 



우울증까지 겹쳐 오랫동안 고생하신 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완쾌되셨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인사동 ‘월평’에서 오찬 모임을 갖는다는 반가운 연락에 아내와 함께 서둘렀다.

그 자리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씨 내외,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씨도 함께 오셨다.
이규상씨 내외는 10권의 사진집 만드는 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지만, 어렵게 참석하셨다.

건강을 되찾은 밝은 모습의 한선생님께서는 못다한 이야기로 일사천리 바쁘신데,
최경자씨의 수다까지 더해 듣는 귀는 마냥 즐거웠다.

반가운 소식에 반가운 분들 만나, 술과 음식까지 배불리 먹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하랴!
늘 오늘 만 같아라. ㅎㅎ

 

 

 

 

 

 





그동안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정기적으로 가져왔으나, 이번에는 이명동선생의 전시가 열리는 ‘한미사진미술관’이 있는 ‘어양’ 중식레스토랑에서 모임을 가졌다.

지난 7월 28일 정오에 가진 오찬회에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 전민조, 조문호, 구자호, 김영수, 유병용, 이기명, 고 김기찬씨 미망인 최경자씨등 모두 열 한 명이 참석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사진사를 정리해 오신 육명심선생께서 우리나라 근대사진사에서 이명동선생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초창기 사진은 대부분 사진관 인물사진이었지요. 그 때의 사진관은 상류층들이 주로 활용하는 곳으로 대개 연미복을 입고 찍었어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가들도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엘리트로 국내작가로는 이해선, 서순삼, 현일영, 박필호씨 등이 주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명동선생께서 당시로는 아마추어 사진가에 불과한 임응식씨를 내 세워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사진계 흐름을 완전히 뒤집은 거지요. 그렇지만 그때 나는 이명동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진협회 창설이나 '동아사진콘테스트'로 사진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싫었거든요. 그런데 이명동선생의 숙적이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가 이종화선생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더니, 문상 오신 이명동선생께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장례가 끝 날 동안 지키고 계셨어요. 결국 이명동선생의 인간적인 면모에 끌려 생각을 바꾸게 된거지요. 그동안 사진계에서 이명동선생의 도움을 받지않은 분이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 임응식선생과 임선생의 직계였던 홍순태교수가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한 번 도와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도와주는 그런 분이예요. 모든 공적과 실리를 임응식선생께 돌리고 뒤에만 계시던 이명동선생께서 임응식선생이 세상을 떠나시니, 그 아들 임범택씨를 위해 팔방으로 애쓰셨어요. 분명한 가치관과 인간적인 의리로 똘똘 뭉친 분이지요.”

올해로 이명동선생의 연세가 아흔다섯에 이르지만 건강상태는 물론 기억력까지 너무 좋아 팔순 정도의 연세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백수는 물론 아직도 십년 정도는 건강하게 사실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사진계의 최고 원로이자 산증인이지만, 병석에 계신 사모님 간병으로 만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다. 사진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나오셔서 사진계 비사들을 들려주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유병용교수가 인터뷰를 가져 많은 사료들을 기록해 놓았다니, 머지않아 한국사진사의 볼만한 책 한 권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는 이명동선생 이야기 외에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사진가 전민조씨와 고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씨가 독일 사진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다녀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울시가 일억 오천만원 상당의 전민조씨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동안 순수사진에 밀려 뒷전에 머물던 기록사진의 가치가 늦게나마 인정받았다는 것은 다큐멘터리사진을 하는 입장에서 엄청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좌로부터 사진가 육명심, 전민조, 이기명, 한정식씨, 한미수석큐레이트 손영주씨,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 고 김기찬

      미망인 최경자씨, 사진가 이완교, 김영수, 구자호, 유병용씨와 앞 줄은 필자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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