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지난 22일 오전 6시 55분 먼 길을 떠나셨다.
이제 천국에 잘 도착하여 사랑하는 이국자선생님도 만나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신봉승, 심우성선생 등 먼저 가신 친구들 만나
인사동 이야기들 하시느라 바쁠 것이다.




 선생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 예?

 그 곳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는 차별의 세상도 아니고요.

설사 차별이 있다 해도 집사님 빽으로 지옥에 내치지는 않겠지요.

머지않아 선생님 좋아하시는 복분자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눈물이 말랐네요.

고마웠다는 인사도. 먼저 떠나 섭섭하다는 원망도,

모두 바람에 날아 가 버렸습니다.


선생님! 사람 사는 게 바람처럼 이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요즘 부쩍 눈물이 자주 흐르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봅니다.

후회가 더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인사동은 불 꺼진 등불입니다.

누가 선생님처럼 가슴 아파하며 골목골목을 찿겠습니까?

외로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제자들 불러내어 곰탕 건대기 건져놓고

소주 잔 부딪히는 그런 시간을 어찌 만나겠습니까?

또, 김승환선생과 방동규선생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사동을 방황하던,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생각납니다.

단골로 드나드셨던 나주곰탕을 비롯하여 귀천’, ‘인사동 사람들’, '여자만'

포도나무집’, ‘유목민어디를 가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조를 사랑했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노래 인사동 아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인 바뀐 황량한 인사동 골목 어디에선가 선생님의 시가 흘러나올 것이다.

선생님의 슬픈 인사동 노래가...


 

그동안 미친 망둥이처럼 날 뛰는 나를 보며 마음은 또 얼마나 졸였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전시 사진 들고 동오리 찾았을 때 일입니다.

그 날 선생님 내외분의 행복한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네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기어이 끌어 앉혔는데,

이국자 선생님께서 끓어주신 된장국은 콧등이 시리도록 맛있었습니다.

문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어쩌면 행복이란 것 자체가 슬픈 것일까요


 

 

그리고 천상병선생 20주기 맞았을 때 일입니다.

인사동 봄 소풍 잔치 때도 오직 선생님만 걱정에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여 만들어 준 그 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없지만,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돌아 가실 때마다 선생님 뒷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아마 선생님은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못난 조문호가 큰 절 올립니다.


 

 강민 선생의 장례식은 지난22일부터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인장으로 열렸는데,

824일 오전 9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도 열었다.

8241030분에 발인하여 용인, ‘양주 장충동산에 안장되었다.




 

지난 23일 오후 4시경 정영신씨와 분당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김명성씨와 김상현, 김상윤, 전태수씨를 만났는데.

장례식장에는 정승재, 조준영, 서정란, 김가배, 이도연, 김이하, 정복수, 전활철, 노광래,

서정춘씨가 있었고 뒤늦게 구중서선생님도 오셨다.




- 강민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시-  


<이승의 간이역>

내 떠나야 할
인생의 간이역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꽃밭이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 난 강민 시인은 1962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 파도, 세월’,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공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도 있다.

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진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삶의 애환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 동인지 현실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학원을 비롯해 주부생활편집국장, 금성출판사 상무이사 등 출판계에 몸담았고

많은 문인과 교류해 걸어 다니는 한국 문단사로 불렸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사동 아리랑 1

비 / 강 민


인사동을 걷는다


스산한 경인년 여름, 비는 멎지 않았다
찻집<귀천>의 주인 목순옥 여사도 떠났다
그녀는 거기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천상병 시인 만나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다고 말하였을까

세월의 이끼 낀 인사동을 걷는다

흐르는 세월처럼
눈물처럼
비는 멎지 않는다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 2019


2010년 경인년 여름, 비가 출출히 내리는 날 인사동을 걷는다.
인사동 나오면 늘 들르던 곳이 찻집<귀천>이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경영하던 조그마한 찻집은 문학인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사랑방이다.
시인은 약속 없이 귀천에 와도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을 만나곤 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웃고 울던 그들도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해 저세상으로 하나씩 둘씩 떠났다.

담배 한 갑, 막걸리 두 병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천상병 시인도 이미 하늘나라로 갔고,
시인 부인인 목순옥 여사도 25년 인사동 지킴이를 내려놓고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이제 인사동에 와도 갈 곳이 없다.
흐르는 세월처럼, 비처럼, 눈물이 멎지 않는다.(박미산)






인사동 아리랑 7

유목민 이야기 / 강민

 

날이 저문다

해가 저문다

골목길의 모습이

기우는 낙일(落日)에 젖어 낯설다

갑자기 붐비는 인파, 시끄러운 소음이 멎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그의 부인 목순옥,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

그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움직임이 없다

슬프다

정물화된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쭈그러진 모자에 카메라를 든 유목민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옆에 개량한복의 예쁜 사진작가가 웃고 있다

이 삭막한 인사동의 길잡이 부부

막힌 가슴이 뚫린다

소음이 들리고

정물화된 풍경이 움직인다

다시 한 세월은 가고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2014.

 

인사동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위로 북촌 한옥마을을 두고, 아래로 종각(보신각)과 탑골공원을 두고 있다. 좌우 위쪽으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이 그 아래에 광화문과 종묘가 나란히 있고 인사동은 그 안쪽에 있으니 서울 문화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안국역에서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 쪽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화랑, 고서점, 미술상, 공예점, 찻집, 술집 등이 어우러져 있었으나 쌈지길 등 세련된 현대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옛 정취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특히, 고서점이나 책방은 거의 사라지고 통문관 정도만 남아있다.

시인이 찾은 유목민에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은, 평소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잘 어울렸던 문인들이었을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은 귀천과 유목민 등을 오가며 자신의 붓글씨를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4.19를 노래했던 <!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썼던 신동문 시인은 붓을 꺾은 뒤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무료 침술을 해준 걸로 유명하다. 박이엽 방송작가는 나의 서양 미술 순례(서경식) 등을 번역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이들은 움직임이 없다. 젊은 날, 시대의 울분을 나누고 예술을 말하던,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인사동이지만 언젠가부터 그곳을 메우던 사람들은 술잔을 놓고 하나 둘 떠나고 없으니 술집 상호처럼 머물지 않는 유목의 인생을 실감하게 한다.

이제 시인도 인사동이 낯설고 허전하다.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 부부를 통해 아직 인연의 끈이 다하지 않음을 알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시인과 친분이 있고, 인사동 이야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조문호, 정영신 다큐 사진가일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시인에게 인사동은 현재의 연을 쌓는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시인학교가 인사동을 떠났고, 귀천은 남았으되 귀천의 주인과 사람들이 떠났듯이 유목민의 이야기도 언제까지 쓰일지 알 수 없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한때의 삶과 인사(人事)에 대해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아주 귀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이동훈)




            


강민 선생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들을 찾아보니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 200여장을 무작위로 추려내다보니, 날자와 장소를 미처 메모하지 못했네요.

언젠가 시간나면 그 당시의 이야기까지 곁들여 추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조문호가 찍었는데, 조문호가 나온 사진은 정영신씨가 찍었습니다.




 






























































































































































































강 민선생 캐리커쳐는 시인이며 화가에다, 무용평론까지 하신

고 김영태선생의 예술가 초상 시리즈 9집에서 스크랩했습니다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인사동으로 올라 온지도 벌써 해를 넘겼다.
여관방에서 자고 끼니는 식권으로 해결하지만, 마냥 행복해 하신다.
매일같이 친구 만나고, 고서점을 더나들며 책 사 모우는 재미로 산단다.
거기다 간간이 들어오는 원고청탁에다 무대공연까지 있으니 신바람 난 것이다.

선생께서 혼자 상경하셨을 땐, 안 서러워 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잘 됐다 싶다.

천성이 떠도는 광대나 다름없는데, 갇혀 사셨으니 감옥이나 마찬가지였을게다.


 

지난 27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하시며 인사동 아리랑 이야기를 꺼내셨다.
인사동 숙소에만 아리랑과 관련된 서적이 50권이나 있고,
제주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부터 아리랑에 관한 자료들이 없는게 없단다.
언젠가는 인사동에 아리랑박물관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란다.

수집한 아리랑 책들을 보기위해 신궁장여관 숙소에 들렸더니, 여관방 자체가 박물관이었다.

한 평 남짓한 방에 오밀조밀 붙이고 걸고 쌓아, 마치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화개장터 같았다.

그 책들의 표지들을 모두 복사했는데, 더러는 귀중한 자료들도 여러 권 보였다.

심우성선생께서 신문에 난 사진자료까지 다 오려 스크랩하기에,

컴퓨터 한 대 들여 놓으라 말씀드렸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인터넷에 왠 만한 사진자료들은 다 있는데다, 원고지에 글 쓰는 게 안 스러워 한 말이지만,

민속학자가 컴퓨터 가지고 노는 것도 좀 웃긴다 싶었다.

비록 여관에서 혼자 지내는 신세지만 친구 분들 중에는 제일 부자다.
받은 원고료로 책사고, 남는 돈은 매일같이 친구들 술 받아 드린다.
“선생님께서 술값 내시면 여관비하고 밥값은 우짭니꺼?”라며 물었더니
제자들이 여관비로 한 달에 60만원씩 보내주고, 잘 아는 후배가 식권도 대 준다는 것이다.
부러웠다. 선생님은 분명 복 받은 분이셨다.

그 복으로 인사동 아리랑박물관까지 꼭 만들 것으로 믿는다.

사진,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터줏대감들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 분이 바로 시인 강 민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시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고, 심우성선생은 몸으로 인사동 아리랑을 추신다.

두 분 다 인사동을 너무 짝사랑해, 인사동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시겠단다.

지난 17일 오후3시 무렵, 두 분을 만나러 인사동 ‘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 유금호선생, 그리고 시인 이애정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옷상자를 챙겨든 심우성선생께서 싱글 벙글 들어오신다.
대학로에 공연이 있어 상복 한벌 지어 오셨는데, 삼일동안의 출연료 대신 옷 한 벌 지어 달랬단다.

‘유목민’으로 술 마시러 가자는 강민선생의 말씀에 심우성선생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오늘은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복분자에다 민어회를 시켰는데,
그 술값을 유금호선생께서 다 내 주시어, 한시름 놓게 했다.

 

뒤 늦게 심우성선생께서 재 등장하시어, 복분자 한 병 추가했다.

사진, 글 / 조문호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연주된 아리랑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인사동 아리랑'이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2월 28일자 A25면). 외모도 차림도 수수한 젊은 음악도들이 쌈지길에 하나둘 모여들면서 연주된 아리랑·애국가는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년들의 나라 사랑을 느끼게 해 가슴 뭉클했다. 비록 작은 스케일의 짧은 동영상이었지만 야외 연주실황의 관건인 잔향 처리 기술과 고른 화질은 높이 살 만했다. '이런 것이 삶의 아리랑이구나' 하는 느낌은 로마 콜로세움 원형극장에서 펼쳐진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의 개선행진곡보다 더 큰 감동으로 와닿았다.

일찍이 소프라노 조수미는 안정준 편곡의 '아리아리랑'을, 가수 나윤선은 재즈로 편곡된 아리랑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아리랑의 정서와 애환 속에는 세계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감대가 녹아있다. 초·중등 음악 교과서에는 세계 각국의 민요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젠 우리도 아리랑이 각국 음악 교과서에 실려 불려질 수 있고, 또 외국의 연주 단체들이 아리랑을 연주곡으로 선곡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홍보와 지원이 필요한 때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지정된 아리랑을 정작 한국에서는 듣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아리랑은 행사용 음악으로 연주하는 데 머무르며 생활 음악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 인사동을 비롯해 팔도 아리랑의 소재 지방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에 상설 무대를 만들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아리랑 공연을 보여주고 즐겨 부르는 것이 아리랑을 지켜나가는 우리의 문화적 사명이다. '인사동 아리랑'을 만든 김신중 감독처럼 나라 사랑 정신과 탁월한 문화적 콘텐츠를 겸비한 젊은 공연 기획자가 문화계 전반에 많이 배출되어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나아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문화축전에서도 큰 활약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하갑돈 / 전 남도문화센터 대표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3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아리랑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퍼졌다. 45명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인사동 쌈지길에서 'This is Arirang(인사동 아리랑)'을 연주한 것이다. 합창단과 한복 놀이단까지 20대의 청년들 76명이 함께한 대형 아리랑 플래시몹이다.

이 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인사동을 거닐던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세 군중도 모였다. 2일 유튜브에는 6분 35초 길이의 ‘인사동 아리랑’이라는 영상이 공개됐고, 이 영상은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올린 플래시몹 'This is Arirang(인사동 아리랑)'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대박이 났다. 아마추어 대학생들이 만든 '아리랑'이 현재까지 조회 수 133만건을 기록한 것. 유튜브의 '아리랑' 콘텐츠로는 최고 기록이다. '인사동 아리랑'을 본떠 파라과이 교민들이 시내 쇼핑센터에서 공연한 '아리랑',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리버사이드 아리랑' 영상이 유튜브에 잇따라 올라왔다. 영상을 보고 감동한 국내외 네티즌들이 올린 댓글도 1400개가 넘는다.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댓글이 올라온다.

영상에서 한 여성이 바이올린으로 아리랑 선율을 연주한다. 이어 대여섯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아리랑 연주에 화음을 더한다. 연주자들은 하나 둘 늘어나고 어느새 완성된 오케스트라 선율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연주에 맞춰 합창단이 아리랑을 부르자, 시민들도 함께 따라부른다. 연주의 마지막은 애국가로 이어졌다. 오케스트라를 둘러싼 시민들은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함께 제창한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한 대학생의 열정으로 시작됐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재학중인 김신중(23)씨는 지난해 유네스코가 아리랑을 세계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아리랑을 듣고 싶어서 인사동을 방문했지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는 사연도 접했다.

김신중 씨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섭외하기 위해 45명의 연주자를 한 명 한 명 섭외했다. 9개의 청년 단체들도 김씨와 친구들의 기획에 함께 했다.

이들은 행사기획과 음악편곡부터 홍보, 영상 편집 등 모든 과정을 100% 청년의 힘으로 이뤄냈다. 기업의 후원이나 풍족한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신중 씨는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 됐지만, 외국인들이 정작 한국에서 아리랑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공연을 기획했다"면서 "이렇게 호응이 클 줄은 몰랐다. 영상이 알려진 후, 공연 악보를 구해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고 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영상 촬영, 진행 스태프 등 100명 넘는 인원이 참여했지만 제작비는 80만원밖에 안 들었다. 물과 간식비, 악기·장비 운반용 차량 대여비 정도다. 공연 기획 단체 프리포먼스 등 9개 단체가 '재능 기부' 형식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단돈 80만원으로 만들었지만

김신중 씨는 온라인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아리랑’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감동이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김신중 씨는 “음악적으로 완벽하지 못할 수 있지만, 쌈지길에서 함께 아리랑을 부른 시민들, 또 영상을 접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떠올렸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1919년 일제의 억압에 맞선 3·1만세운동을 2013년 대한민국 청년들이 감동적인 문화행사로 승화시킨 것이다.

김신중 씨는 원래 클라리넷 전공으로 음대 진학을 꿈꾸다 경영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하지만 입대 후 군악대에 복무하면서 공연 기획에 눈을 떴다. 작년 여름부터 서울 도곡동 스튜디오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진행하는 피아니스트 박창수씨를 도와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김신중 씨는 "올해 8·15 광복절 때는 팔도의 아리랑을 플래시몹으로 올려보고 싶다.


 

작년 3·1절 인사동에서 플래시몹, 유튜브 조회 수 130만 건 돌파
연주·촬영 등 100여명 무료 참가… 미국·파라과이에서도 따라서 제작

 

 김신중씨 사진   

 
김신중(24·경희대 경영학과 3년·사진)씨는 작년 초 서울 몇몇 대학의 음대 건물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3·1절 때 인사동 거리에서 '아리랑' 공연을 해보려고 하는데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열명을 붙들고 얘기하면, 한둘 정도 반신반의하며 대답했다. 사기꾼 쳐다보듯 얼굴을 돌리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취지에 공감한 이가 한둘씩 모여,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76명이 꾸려졌다.

이렇게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올린 플래시몹 'This is Arirang(인사동 아리랑)'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대박이 났다. 아마추어 대학생들이 만든 '아리랑'이 현재까지 조회 수 133만건을 기록한 것. 유튜브의 '아리랑' 콘텐츠로는 최고 기록이다. '인사동 아리랑'을 본떠 파라과이 교민들이 시내 쇼핑센터에서 공연한 '아리랑',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리버사이드 아리랑' 영상이 유튜브에 잇따라 올라왔다. 영상을 보고 감동한 국내외 네티즌들이 올린 댓글도 1400개가 넘는다.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댓글이 올라온다.

"그냥 눈물이 나오네요. 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정말 멋지네요. 눈물이 송골송골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해외에서 접속한 외국인들이 영어로 쓴 댓글도 많다. "나는 한국인들이 부럽다. 그들은 민요를 자랑스럽게 부른다. 내 나라와는 정반대다."(Muhammed Ichwan) "아름다운 노래다. 멕시코시티에서" "매우 감동적이다. 아리랑을 알지만, 이렇게 대단한 음악인 줄은 몰랐다."(아야코 구로가와)


 
작년 3월 1일 대학생들이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공연한 플래시몹 ‘This is Arirang’. 단돈 80만원을

들였지만 유튜브에서 조회 수 133만건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유튜브 영상을 틀면, 가슴이 뭉클하다. 바이올린 독주자가 나와 아리랑 첫 소절을 연주하면, 선글라스를 낀 첼리스트가 다음 소절에서 화음을 넣고, 현악·관악 주자와 합창단이 차례로 나선다. 태극기를 흔드는 아이의 얼굴과 스마트폰 촬영에 바쁜 행인들의 표정이 스친다. 아리랑이 '애국가'로 바뀌면서 성악도들이 가세해 웅장한 목소리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던 행인들 가운데는 감동한 나머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이들까지 있다.

김신중씨는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 됐지만, 외국인들이 정작 한국에서 아리랑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공연을 기획했다"면서 "이렇게 호응이 클 줄은 몰랐다. 영상이 알려진 후, 공연 악보를 구해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고 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영상 촬영, 진행 스태프 등 100명 넘는 인원이 참여했지만 제작비는 80만원밖에 안 들었다. 물과 간식비, 악기·장비 운반용 차량 대여비 정도다. 공연 기획 단체 프리포먼스 등 9개 단체가 '재능 기부' 형식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단돈 80만원으로 만들었지만, 정부가 수억원씩 쓴 각종 아리랑 행사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김씨는 원래 클라리넷 전공으로 음대 진학을 꿈꾸다 경영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하지만 입대 후 군악대에 복무하면서 공연 기획에 눈을 떴다. 작년 여름부터 서울 도곡동 스튜디오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진행하는 피아니스트 박창수씨를 도와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올해 8·15 광복절 때는 팔도의 아리랑을 플래시몹으로 올려보고 싶다"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인사동 아리랑 영상입니다. 어떤 외국인이 '아리랑'을 듣고 싶어서 한국에서도 가장 한국적이라는 인사동에 들렀는데 그 어디에서도 아리랑은 들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기획하고 준비해 40여 명의 연주자들을 한 명씩 섭외하고, 그렇게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인사동 한복판에서 연주된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만든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This is 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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