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인간도시컨센서스 ‘도시올레’
ㆍ의암 손병희 집터 → 천도교 중앙총부 터 → 독립선언문 인쇄 장소 → 태화관 자리

서울 안국동사거리에서 한남고가도로까지 이어지는 ‘삼일로’는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가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1919년 3월1일 시민들이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퍼졌다. 시민단체 ‘인간도시컨센서스’는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삼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3·1운동 관련 공간들을 걷는 ‘도시올레-동네한바퀴’를 27일 열었다.

이날 행사는 북촌의 ‘의암 손병희 집터’에서 시작됐다. 현재는 카페가 들어선 이곳에서 3·1운동이 기획됐다. 집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민족대표들이 거사를 하루 앞두고 최초이자 마지막 모임을 연 곳이기 때문이다. 안내를 맡은 박길수 모시는사람들 대표는 “한옥이 밀집된 북촌은 관광명소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는 역사의 표피”라면서 “북촌 집집마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촌에 친일파들이 1920년대까지 많이 살다가 그 자리를 민족주의자들이 차지했지만, 나중에는 이들이 친일파로 변절을 했다”면서 “하나의 장소가 담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도시올레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이 27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이종일 동상 앞에서

박길수 모시는사람들 대표(오른쪽)에게 독립선언서 인쇄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인간도시컨센서스 제공


참가자들은 손병희가 출퇴근하던 길을 따라 ‘천도교 중앙총부터’로 이동했다. 현재 덕성여중 자리다. 이곳에서 기독교, 불교와 3·1운동 제휴를 논의했다. 민족적 통합의 중심 장소였던 셈이다. 당시 최린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을 설득해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나중에 친일로 돌아섰다.

참가자들은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보성사터’도 찾았다. 현재는 조계사 뒤편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이곳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옥파 이종일의 동상이 서있다.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학교 구내 인쇄소에서 2월27일 밤 독립선언서 2만1000장이 인쇄됐다. 불 꺼진 인쇄소에서 소리가 나자 경찰이 들이닥쳤지만, 5000원(당시 80㎏ 쌀 한 가마 가격이 5원가량)을 주고 경찰의 입을 막은 일이 있었다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 자리를 지나 마지막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도착했다. 이어 열린 포럼에선 삼일로를 중심으로 3·1운동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토론했다.

삼일로는 일제 저항운동의 공간이었던 인사동 일대와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남산 일대를 연결하는 길이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교수는 “3·1운동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오늘날 시민사회 리더들로 볼 수 있다”면서 “3·1운동은 민족 저항운동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소통을 통해 담론을 형성한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 정체성의 시발점인 3·1운동의 상징적 공간인 삼일로를 정비해 서울의 상징공간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서울연구원도 흩어져 있는 3·1운동의 공간을 엮어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외부 용역을 주기로 했다.

참가자들은 “자주 다니던 길을 3·1운동을 통해 바라보니 느낌이 색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임소현씨(50)는 “직접 땅을 밟아보니 옛 사람들이 어떤 싸움을 했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면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3·1절의 정신을 알리는 기념관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향신문]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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