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가 무색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에는 광화문광장 시위에 일장기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 난지 75년이 지났건만,

친일 청산은 커녕, 오히려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란 전시 제목이 실감났다.

 

다시 한 번 미치광이 전광훈 개독집단과 꼴통 보수 세력이 친일 잔재라는 걸 입증했다.

그 뿐이던가?  맞장구치며 부추기는 보수언론이 더 문제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씹는 보수언론 논리에 귀가 막혔다.

 

독재자 이승만의 일제 계승과 무고한 민중 학살을 몰라서 하는 말이던가?

그렇게 일제 치하가 그리우면 국적을 바꾸던지, 차라리 일본으로 이민가라.

언론이란 가면을 쓰고 국민을 이간질 시키는 무리부터 척결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위급한 때가 아닌가?

도저히 쪽방 구석에 처박혀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갔다.

시위를 끝내고 지하철로 몰려드는 늙은이들의 행렬이 측은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거리로 내 몰았을까? 역병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요즘 떠도는 유행어처럼 독립운동은 못해도 꼬장은 부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원칙도 가치관도 없이, 젊은이들로 부터 지탄 받고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인사동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거리엔 발길만 분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리 사진부터 찍었겠지만, 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유목민’ 앞에 연출가 기국서씨와 김명성씨 모습이 보였다.

김명성씨가 추진한 독립 자료전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개막식이 있던 날은 작업 때문에 밀양에 있었단다.

 

모처럼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기국서씨가 고충을 털어 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했다

결과에 돈이 걸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미칠 것 같단다.

 

비록 기국서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주변과 얽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도 권력이나 돈에 치우치면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나 친일시인 서정주와 다를 게 무엇인가?

차라리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한 쪽 자리에는 ‘뮤아트’ 김상현씨가 후배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유진오씨는 분주히 ‘유목민’ 일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출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인 이승철씨, 박재웅씨 일행에 이어 단청장 이인섭씨가 나타났다.

좀 있으니, 시인 정희성씨와 소설가 현기영, 산악인 박기성씨가 왔다.

 

이 우울한 날 어찌 술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때와 달리, 기국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시국처럼, 술자리마저 흩어져 사분오열이었다.

‘유진커피숍’에서 팥빙수에 더운 속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꼭 찾아갈 곳이 있다.

바로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전이다.

그 전시를 보며,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되새기자.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죽을 쑨다.

그 많던 관광객이 코로나 광풍에 휩쓸린지 오래다.

 

장사는 안 되어도, 친근한 오래전의 풍경은 되살아난다.

 

이제 물밀 듯 밀려오던 그 때의 호황은 꿈도 못 꾸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미 점포 비운 가게들이 속출하고, 새 주인 기다리는 가게도 많다.

새로 들어 온 상인들은 기존 업종보다 다른 업종으로 바꾼다.

 

음식점에서 커피 집으로 바뀐 정도야 그게 그거지만

낙원상가와 가까운 인사동4길은 악기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아트프라자’의 대 변신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건물에,

인사동 문화에 애착을 가진 새로운 경영자가 들어왔다.

 

건물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든다고 한다.

이미 공예품매장으로 어수선 하던 1층이 갤러리로 바뀌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백 여 평의 7개 층 전관에 한 달 동안 전시 한 건 없는 ‘아라아트’ 같이

파리 날리는 전시장이 더 많은 시절에 걱정은 되나 나름의 전략이 있단다.

 

오랫동안 임자 못 만난, 보물 없는 ‘보물창고’를 비롯한

인사동 큰 길가의 가게들이야 무슨 업종이 들어서던 명맥은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골목 안으로 한걸음만 들어가도 문 닫은 집이 속출한다.

 다시 채우려면 숱한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신통하게, 손님 몰리는 곳도 있다,

인사동 16길에서 벽치기 길로 이어지는 골목 술집들이다.

 

‘유목민’, ‘누룩’ 등의 몇몇 술집은 코로나 이전보다 손님이 많단다.

답답한 세상 술 잔에라도 풀지 않는다면 어찌 살겠는가?

 

앞으로 인사동에 어떤 업종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인사동 문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사동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 같다. 

 

희망사항에 불과하겠지만 인사동 미술시장이 더 활성화되고

전통문화와 예술가들의 풍류가 함께 어울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인사동만 젖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젖는다.

 

분주했던 수요일 거리치고는 한적했다.

 

찾아 간 전시는 어설픈 모방에 불과했다.

 

어차피 사는 자체가 모방이 아니던가?

 

비에 젖은 허탈감에 술 생각만 간절하다.

 

그런데, 그 많던 술벗들은 어디 갔는가?

 

전화를 버렸으니, 내가 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술 한 잔에 마음 달래려 해도 처량하게 궁상떨기는 더더욱 싫었다.

 

애잔하게 연주하는 ‘예스터데이’가 들려온다.

 

가사 후반부를 곱씹으니, 남의 말이 아니었다.

 

“Now I long for yesterday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 way

oh, I believe in yesterday“

 

“이젠 지난날이 자꾸만 그리워지네.

지난 날 사랑은 너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 난 어디든 숨을 곳이 필요해.

오! 그 때가 좋았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전시 교체로 분주했던 인사동의 화요일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 광풍에 거리두기가 시작되며 생긴 썰렁한 풍경인데,

육 개월이나 끌어 온 전염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일 들린 인사동은 '갤러리H' 전시 작가 등 몇 몇만 오갈 뿐,

작품 반입으로 분주했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잡화상에 진열된 영혼 없는 작품만 손님을 기다렸다.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이 고통 받지만, 예술가들 삶도 말이 아니다.

찾는 관객도 없지만, 작품 거래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전시장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나 건물주는 집세 챙기기에 바쁘다.

 

갤러리도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지만, 작가들도 손을 놓고 있다.

돈 벌이보다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여는 경우도 많은데,

찾는 사람이 없으니, 전시할 생각조차 않는다.

 

잘 나가는 작가야 살아남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전업해야 할 형편이다.

배운 도둑질이 그 뿐이라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할 것이다.

인사동 갤러리만 죽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도 다 죽는다.

 

작가들의 가난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작가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존심에 기초생활수급비도 마다했으나, 이제 생각을 바꾼 작가도 여럿 생겼다.

 

예술을 전공해도 전업 작가가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다.

그 중 어려운 분야가 문학과 연극 사진 등인데,

이제 예술 창작을 보상하는 구조적인 개선이 절실하다.

 

정부도 코로나 여파로 상인들 대책은 세우지만 예술가들 생계는 관심조차 없다.

정치판에 들어 간 도종환과 박양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예술가를 대표한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화를 위한 자리 같다.

 

이제는 월급쟁이가 제일 부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특혜 받는 국회의원 세비와 고위공직자 임금부터 줄여야 한다.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꾼은 모두 끌어내리자.

 

예술가는 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며, 가난한 예술가는 국민이 아니던가?

이제 작가들이 작업실에서 뛰쳐나와 화염병을 들 차례다.

 

사진, 글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전시한 박건씨

‘카메라 시인 상’ 받아 본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봐라.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영예로운 상을 운이 좋아 받게 된 것이다.

 

지난달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인사동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로

‘인사동 그 정처 없는 발길’이란 글과 사진을 포스팅 했는데,

그 글을 본 작가 박건씨가 ‘카메라 시인상’이란 과분한 상을 준 것이다.

 

당시 박 건씨는 ‘나무아트’에서 ‘자가격리 F4’ 전시를 열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카메라 시인 상’ 작품을 만들어 찾아가라는 거다.

그러나 상을 받는 게 쪽팔려, 차일피일하다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페북 댓글에 올라온 ‘나무아트’ 김진하관장의 찾아가라는 독촉을 받아서야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한 달이나 지나버렸다.

그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상 받으러 간 25일은 인사동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쌈지 앞 담장에는 양반 꽃이라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슬픈 전설이 담긴 능소화 아래는

소녀들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무화랑’에 올라 가 김진하관장으로부터 상을 전해 받았는데,

마치 아파트 한 동을 통째로 받는 기분이었다.

내 평생 이런 영광스런 상은 처음 받아 보았다.

 

아파트 칸칸에다 상을 주게 된 행적을 적었는데,

마치 유적지에 세워 둔 공덕비 비문처럼 느껴졌다.

한 쪽에는 마스크를 쓴 신사임당 지폐에 재난기본소득이라며

작가의 서명까지 해 두었다.

 

그 돈도 작품의 일부지만, 뜻하는 바가 컸다.

돈이지만 사용할 수 없는 영원한 돈인 것이다.

이제 죽을 때까지 비상금은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 상 자체를 우습게 여겼는데,

이 상은 개인이 주는 순수한 상인데다, 상 자체가 작품이 아닌가.

볼 때마다 각오를 다지며 두고두고 기념해야겠다.

 

이런 게 제대로 된 상이다.

다른 상은 다 버려도, 이 상은 죽을 때 같이 화장할 거다.

다시 한 번 상을 준 박 건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뵐 기회가 생겼다.

강민시인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인사동 어르신들을 뵐 기회가 없어졌다.

진즉부터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는데, 모처럼 연락을 주셨다.

안부 전화였으나, 내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뵙자고 말씀드리고,

늘 뵙고 싶어 했던 정영신씨 한데도 전화했다.

 

약속한 날,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매번 늦게 나가 민망했는데, 너무 일찍 와 버렸다.

한참을 ‘나주곰탕’ 앞에서 서성였는데, 시간이 가까워오니 정영신씨와 나타났다.

길에서 만난 모양인데,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다.

 

날씨가 더워 뜨거운 곰탕그릇 대하기가 두려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선생께서도 시원한 막국수 먹으러 가자신다.

마침 ‘나주곰탕’ 초입에 방선생님 성을 빌린 ‘방태막국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간신히 자리 잡았다.

 

방 선생님은 술을 끊었다지만, 내 걱정에 한 잔만 하시겠단다.

막걸리 한 병을 마셨는데, 선생님 생각한다는 게 피차 입만 버렸다.

 

‘방동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으나, 혹시 간첩이라도 있을까 싶어 소개부터 한다.

방동규(85세)선생은 이름보다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통한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는 한 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에 깡패 17명과 맞싸운 일도 있고,

희대의 주먹 이정재도 방선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했단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라, 구비문학계의 전설로 남은 위인이다.

법을 잘 아는 법대출신이라 낭만주먹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아 해외 유랑도 했었다

한 때 농촌운동에도 나선 파란과 굴곡의 인생이었다.

 

2005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의 인연으로 경복궁과 연을 맺은 적도 있다.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되었는데,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아직까지 육체미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체력단련에 혼신을 다한다.

 

2006년에는 "배추가 돌아왔다"란 두 권의 자서전을 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부분의 으뜸은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한 번도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러 다니시는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주장이시다.

 

그런데, 선생님 슬하에 딸이 둘 있는데, 부전여전이었다.

나이 쉰이 가깝도록 미혼인데, 방그래양은 중국 대련대학 조소과 교수로,

시래양은 중국에서 운동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두 딸이 아버지처럼 운동도 잘 하지만, 생각이 깨어 있었다.

 

그 날 막국수를 드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래양이 얼마 전 귀국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왔더란다.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인데, 예능은 말할 것도 없다.

조각으로 국제대회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는데,

그 날 방선생께서 핸드폰으로 보여 준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 전시라도 한번 주선해 보고 싶어졌다.

 

그날 들은 이야기 중 그래양이 가장 돋보였던 점은 자본주의의 부정이었다.

조각가로서의 예술세계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고 했다는데, 아버지를 빼 닮았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선생께서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권하지 않았는데,

정영신씨 이야기로는 자꾸 빈 술잔에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아직 재난카드가 살아남아 ‘유목민’에 갔으나, 문이 걸려있었다.

인사동에 낮술 마실만한 곳이 없어, 아쉽지만 보내 드려야 했다.

 

내가 비실비실하니, 앞으로 인사동에서 선생님 뵐 일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더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 조차 두문불출하니, 더 만나 뵐 수 없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인사동에서 포장마차라도 한 번 할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시가 종로 삼일대로 일대에 2개동(지상 17층과 12층)을 짓는 공평 15-16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안이 통과되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서피맛골과 대로 사이의 금강제화 종로점, 클락스 종로점 등 노포 일부는 보존하고, 새 건물 2개동 중 12층은 누구나 이용 가능한 옥상정원으로 조성한다. 준공예정일은 2024년 3월이다.

 

개발지역 조감도

지난 16일 들린 서피맛골 현장에는 건축물을 철거한 후, 유적을 발굴하는 탐사작업이 시작되고있었다. 발굴된 유적은 아직 모르지만, 한국전쟁의 잔재인 대형포탄이 나오기도 했단다. 이제 서피맛골의 아름다운 추억도 아득한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통을 지나는 왕이나 고관대작들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 ’에서 유래되었다. 사극에서나 볼 수 있듯이 "어이 물럿거라. 좆 대감 나가신다!" 라며 앞에서 소리 소리 지르면, 이 거덜 행렬과 맞닥치는 아랫 것들은 말에서 내려 바짝 엎드려야 했다. 백성들도 양반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개같이 엎어져 숨 죽여야 했다. 그러다보니 출근하는 하급관리들은 매번 늦어지기 일쑤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큰길 뒤편에 양반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만든 것이다

이 길이 피맛길로, 요즘으로 치면 '하이패스'나 마찬가지다.

 

서민들이 오가는 이러한 뒷길에 어찌 술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음식 파는 밥집이나 대폿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피맛골에서 파는 빈대떡과 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근 관청들이 철거되면서 피맛골에 더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 중반에 이미 200개 이상의 선술집이 들어섰다는 조선총독부 기록도 남았다는데, 해방 이후에도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정겨운 골목이었다.

 

자료사진

세월에 장사 없다.  이곳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2008년부터다.

당시 서울시에서 피맛골이 포함된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대한 정비계획안을 마련하며부터 피맛골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600년간 쌓여온 피맛골의 역사는 급격한 재개발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르메이에르 건물로 대체된 피맛골은 쇼핑몰의 푸드코트처럼 정갈한 상점으로 변신해 특유의 체취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 문화거리와 연결된 '서피맛골'은 살아남았으나, 그나마 재개발 열기에 대부분 문을 닫거나 간신히 연명한 상태였다. 막상 가보면 셔터가 내려졌거나, 전기사용을 해지한다는 고지서들이 나붙어 있었다. 이미 그 때부터 죽은 골목이 된 셈이다.

 

자료사진 / 고갈비 파는 이름없는 집

골목어귀에 을씨년스럽게 나붙은 '서피맛골 주점촌'이란 팻말만 흔적을 남겼다.

120년 전, 3·1 운동을 모의했던 ‘승동교회’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름 없는 주막'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저 '고갈비 파는 집'이라 불리지만, 오랫동안 정든 술집이었다.

처음 갈 때가 40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집은 반세기의 풍상을 겪은 주막이다.

 

그리고 시인 박종수씨에서 수필가 한귀남씨로 이어진 ‘시인통신’에서부터 '열차집‘, '전봇대집' 등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빈대떡과 고갈비를 안주로 밤을 지세고, 아침 일찍 청진동 해장국에서 속 풀던 추억의 장소가 바로 피맛골이다. 뒤늦게 생겼지만, 마지막으로 들렸던 곳이 김완기씨가 운영하던 ’불타는 소금구이‘였다. 그 뿐인가 지금의 '남인사마당' 옆예는 '예총' 건물도 있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려 '사진협회'나 '문인협회'는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다. 그뒤 건물이 철거되어 순라꾼들 아지트가 되었지만, 예술가들의 사연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이제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정들었던 서피맛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사동에 오래된 것과 정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으니,  기억하는 늙은이가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사람 마주하기도 무서워하는 유령의 도시를 살아야 할 사람들이 가엽다.

돈과 물질에 눈 먼 자업자득 인 걸 어쩌랴!

 

사진,글 / 조문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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