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야전예술가

우창헌展 / WOOCHANGHEON / 禹昌憲 / painting

2020_0603 ▶︎ 2020_0609

 

우창헌_지붕 슁글 치는 원기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717b | 우창헌展으로 갑니다.

우창헌 홈페이지_www.woochangheon.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9일_10:00am~12: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우리 시대의 삶의 최전방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주방보조나 건설 노동자, 택배 배달부, 모텔 청소부, 편의점 알바생 등에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약육강식의 정글의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적 전위도 바로 그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이란 것이 변함없이 삶과 세계의 진실에 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우창헌_석고보드 치는 영복이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우창헌_콩쥐 화이팅!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나는 땀을 철철 흘리는 노동자의 등짝이야말로 어떤 예술가의 예술보다도 예술적이라고 생각된다. 그건 바로 삶이고 세계이며, 현실 그 자체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우리 사회의 하부에서 온몸으로 싸우는 최전방 사람들의 편이 되어줄 수 없다면, 대체 예술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만약에 예술이란 것이 수난의 길을 걸어가는 저 고통받는 사람들 편이 돼 주었던 적이 실제로 드물었거나, 이를테면 행여라도 그들을 위한 12폭 제단화 같은 찬가를 바쳤던 적이 없다면, 왜 지금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또 아방가르드 전위의 시절을 넘어, 진작에 행위이고 실천이며 철학적, 정치적 메시지이자 개념으로 간주된지도 오래인 우리의 예술은, 왜 삶과 현실 속으로 온몸으로 뛰어들어서는 안되는가?

 

우창헌_청년 노동자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우창헌_청년 노동자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삶이 바로 예술이다. 그리고 실천이 바로 예술이다. 또 이를테면 가족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며, 자신이 가진 나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운 삶과 세상에 대한 찬가이다. 예술이란 노래이며, 노래이기에 우리 척박한 삶에 절실히 필요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실용적인 것이다. 삶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느낀 태초의 예술가는 아마 터져나오는 감격으로 첫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 고마운 축복임을 발견한 그는 아마도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거친 벌판을 행군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적 정글의 밑바닥에서 고난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 속에 이 삶과 세계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겸허히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창헌_다시 태어남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45.5×65.2cm_2018

 

16회 개인전은 사람다운 사람들, 땀 흘려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아울러 이 삶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나의 노래들이 들어 있다. 가슴 속에 노래가 있는 한,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고마운 멋진 삶이었으며, 하루 하루가 믿기지 않는 축복이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축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45.5×65.2cm_2017

 

우창헌_사람의 집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7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60.6×60.6cm_2015

 

우리 예술가들이 창조해야 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만은 아니다. 바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점과 살아야 할 이유까지도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가치있고 가치 없는지,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무엇이 아름다우며 무엇이 추한지, 혼돈의 시대가 되어 실제로 온갖 쓰레기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려들며, 진정한 보석들이 자갈밭에 널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업수이 여겨지며 버려져 있다면 곱게 보듬어 소중히 감싸주고 싶다. 이를테면 그건 땀 흘려 온몸으로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한없는 인내와 용기와 열정이며, 또는 가족을 일구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헌신하며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이며, 또는 마치 들꽃처럼 평가절하되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정성어린 애틋한 삶이다. 나는 예술이란 것은 그 스스로가 추앙받거나 가치있어지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모든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그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고 남을 빛나게 해 주므로, 예술은 마땅히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을, 아름다운 사람들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낮게 살고 높이 행하라. 이는 야전예술가의 첫째 지상명령이다. 자갈밭에서 보석을 일구라. 이것이 두번째 지상명령이다. ■ 우창헌

 

 

Vol.20200603a | 우창헌展 / WOOCHANGHEON / 禹昌憲 / painting

 

우리·지구별을 위한 에스키스

최병민展 / CHOEBYOUNGMIN / 崔秉眠 / sculpture
2020_0518 ▶︎ 2020_0527



최병민_우리를 위한 에스키스_각 12.5×7×5.5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910c | 최병민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지구와 거기에 사는 우리. 지구별은 그런 우리들 삶에 주어진 공간이자 환경이다. 또 생명의 토양이기도 귀의할 종착지이기도 하다. 현재 살아있는 우리의 육신과, 하늘과 땅으로 분리된 혼백(魂魄)이 모두 머무르는 현장인 우주이기도 하다. 최병민의 이번 전시 마께뜨 작업은 그런 행성인 지구별과 인류에 대한 작가의 겸허한 잠언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지구별과 인류에게 바치는 있는 그대로의 기원과 헌사이기도 하고.


최병민_우리를 위한 에스키스_각 12.5×7×5.5cm_2020

최병민_지구별을 위한 에스키스_21×17×7cm_2020

최병민_지구별을 위한 에스키스_17×7×7cm_2020

최병민_지구별을 위한 에스키스_38×15×7cm_2020

최병민_지구별을 위한 에스키스_각 21×17×7cm_2020

최병민_우리를 위한 에스키스_18.5×6.5×5.5cm_2020

우주와 자연과 생명앞에서 겸손한 마음의 기표. 그것은 간단한 형식과 어법만 동반한다. 일체의 수사나 조각적 형태·동세·질료에 괘념치 않고 그의 마음에 드리운, 그리고 최종적으로 환원된 결과적 이미지만 간결하게 기술한다. 해·달·별·구름·지구·사람이 하나의 형상으로 어울리며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표상한다. 자연이다. 생명현상을 견인하는 기제다. 최병민의 이번 전시는 그 자연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진술을 꾸밈없이 평범하되, 게송(偈頌)처럼 담백하게 이미지화한 것이다. 경건하다. 이 작은 에스키스가 대형으로 번안되는 기회를 기대해 본다. ■ 나무아트


Vol.20200518c | 최병민展 / CHOEBYOUNGMIN / 崔秉眠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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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장과 통도사는 작년 5월에 촬영하였으니, 딱 일 년 전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 때만해도 시장 정비사업을 하느라 반쯤은 새로운 장옥이 들어섰고,

나머지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재래시장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언양장은 2일,7일 열리는 5일장으로 남창재래시장과 더불어 울산에서는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백년 전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언양장에는 숯과 미나리, 불고기 등이 유명하다.

울산을 비롯해 청도, 밀양, 동래, 양산, 경주, 영천까지 7개 고을의 산물이 모이는 장이라고 해서 ‘7읍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언양시장에는 옛 우시장과 함께 같이한  50년 역사를 가진 곰탕집도 있고, 대장간과 오래된 장옥도 일부 남아있다.

인근 시골 할머니들이 가져 온 농산물을 펼쳐 파는 골목전도 있고, 아직까지 시골의 정겨움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2010년 언양장이 ‘언양알프스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아보니, 당시 울주군수가 영남알프스에 꽃혀 일대의 이름들을 모두 ‘알프스’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 돌대가리 군수가 행정을 좌지우지 했다는 것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두 번째 들린 곳은 양산군 하북면 영축산에 둥지 튼 통도사였다.

일주문을 통해 사찰로 진입하니, 비가 오는 궂은 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자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통도사의 최대보물은 대웅전으로 금강계단, 적멸보궁, 대방광전 등 4면의 편액이 모두 달리 적혀있는데,

특히 금강계단 중앙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바로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 사찰이다.

 

 

 
신라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과 중로전, 하로전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라는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약사전은 중생을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극락보전, 혜장보각, 용화전 등의 가람과 석탑, 석등, 봉발탑 등이 적제 적소에 배치되어 대가람의 균형을 잡고 있다.

 

 



통도사는 20여 년 전 달력에 게재될 사진을 찍기위해 계절마다 수차례 들렸던 사찰이라 감회가 남 다르다.

 

사진, 글 / 조문호 

 

 

 

 

 

 

 

 

 

 

 

 

 

 

 

 

 

 

 

 

 

 

 

 

 

 

 

 

 

 

 

 

 

 

 

 

 

 

 

 

 

 

 

 

 

 

 

 

 

 

 

 

 

 

 

 

 

 

 

 

 

 

 

 

 

 

 

 

 

 

 

 

 

 

 

 

 

 

 

 

 

 

 

 

 

 

 

 

 

 

 

 

 

 

 

 

 

 

 

 

 

 

 

'통인가게’에서 세종대왕 탄신623돌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그 날이 스승의 날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 두었다. 세종대왕이야 말로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 아니던가?

스승의 날은 일찍부터 마음이 바빴다. 스승 찾아 저승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서울역으로 거리의 철학자 부터 만나러갔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스승이다.

그는 막걸리 한 잔에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다.

몇 잔의 낮술에 천하를 얻은 듯 하다. 축축하게 비에젖은 인사동조차 술 맛 땡기게 한다.

‘통인화랑’에는 반가운 분들이 모여 있었다.
'통인' 김완규, 이계선 내외를 비롯하여 권재일, 이윤영, 오치우, 배일동, 이동환, 송재엽씨 등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인사 나누랴! 사진 찍으랴! 술 마시랴! 혼자 바빴다.
그런데, 관우선생이 나만 알리지 않고, 참석하는 분은 자기 먹을 안주를 챙겨오라 했던 모양이다.
인사동 거리 악사까지 불러 잔치에 풍악을 울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차별한다면 거지같은 나를 친구로 여기겠는가?

전시장에는 화가 최승호씨의 ‘일지’가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차가운 철판에 인간 내면 심리를 서정적으로 드러냈다.

전시는 6월7일까지 열린다.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를 비롯하여 권재일 한글학회장,
‘훈민정음은 없다“는 영화 제작자 오치우씨 등 여러 명이 나와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배일동씨의 절창은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무서운 폭풍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일찍부터 술이 취해 실수는 안 했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기자란 자가 정신을 놓아 기억도 잘 안 난다.

세종대왕께서 노비의 출산 휴가를 넉넉하게 주었다며, 정치로 인문정신을 구현했다는 권회장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순신, 제갈공명, 이 세 분의 공통점을 묻는 퀴즈도 나왔는데, 답은 모두 54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분들에 비하면 징그럽게도 오래 산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지하철 타러가다 만다라 화가 전인경씨를 만났다. 스승이신 이인섭선생 만나러 ‘유목민’ 간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으며 스승의 날을 마무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주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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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여파 이주원씨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잘 모르는 분이라 궁금했는데, 칡뫼선생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나만 모르는 주변 분 같았다.




12일 오전엔 김명성씨 따라 장호원에 갈 일이 있어 일찍부터 차를 끌고 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약속시간인 다섯시가 임박해 차 돌려 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인사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주원씨와 약속한 ‘화인갤러리’로 간 것이다.




그 자리는 옛날 이해림씨가 운영한 술집 ‘평화만들기’ 자리였다.
수안스님 전시 뒷풀이를 비롯한 많은 일들이 생각나는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다.



쌈지 뒷골목은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는데, 이름도 반가운 '정선곤드레쌈밥'집도 생겼더라.



'화인갤러리'로 바뀐 후 첫 걸음인데, 마침 전시작을 철수하고 있었다.
칡뫼 김구, 여파 이주원 선생 등 여러 명이 참여한 단체전이었다.



칡뫼선생이 먼저 와 있었는데, 걷어내기 직전의 출품작 두 점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개인전을 못 봐 아쉬웠는데, 두 점이라도 봐 천만다행이었다.



뒷골목 밤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에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칡뫼선생 이야기로는 몇 년 전에 한 작업으로, 그 때는 작품도 제법 팔렸다고 한다. 
왜 주제를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계속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리움에 병든 세상이 아니던가?




뒤 이어 여파선생이 나타났는데, 서울이 아니라 천안에서 왔다고 했다.
하기야! 칡뫼선생도 김포서 왔지 않았는가? 서울역 부근에 사는 거지 팔자가 상팔자가 아닌가 싶다.




난, 이주원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는 우리 집 숟가락이 몇 개인 것 까지 다 알고 있었다.
블로그 ‘인사동 사람들’ 단골손님으로 가끔 정다운 댓글로 위안도 준 분이다.
온라인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진 몇 안 되는 귀한 인연이었다.




뒤늦게 임경일씨가 나타나 술 마시러 갈 때가 되었는데, 끌고 온 차가 골칫거리였다.



'툇마루'로 가기 위해 골목을 나서는데, 정영신씨가 지나가다 손을 흔들었다.

사진으로 본 정영신씨보다 더 젊어보인다는 여파선생 말에 내가 사진을 잘 못 찍은 것 같았다. 




술 마시려면 차는 어쩔 것인가?  일단 마시고 보자.
‘툇마루’에서 녹두빈대떡 안주로 막걸리 한 사발 마셔버렸다.
이 좋은 날, 술 한 잔 마시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이차로 간곳은 벽치기 골목에 있는 ‘유목민’이었다.
요즘 술 마시러 인사동에 잘 나오지 않아 몇 달 만에 들렸는데, 대개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화가 여파선생은 사진 작업도 병행한다는데, 그 작업들이 궁금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인섭선생과 주인장 전활철씨가 나타났다.



술은 땡기지만, 몸에서 그만 마시라는 신호가 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대리운전을 부르라며 여파선생이 따라 나섰지만, 손을 흔들었다.
주차비도 제법 나왔을 텐데, 여파선생이 계산해 버렸다.
차를 끌어 내 ‘아라아트’ 옆 빈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 타러 간 것이다.



내일 새벽 다시 나올 생각하면 귀찮지만, 어쩌겠는가?
“성질 마이 죽었다. 음주면허증으로 그 술 마시고 두 번 걸음하다니...”

사진, 글 / 조문호




























녹색연구-서울-공터
강홍구展 / KANGHONGGOO / 姜洪求 / photography
2020_0501 ▶︎ 2020_0531 / 월요일 휴관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선유도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140×20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907c | 강홍구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

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 31-14(가회동 130-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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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앤제이 갤러리에서는 오는 2020년 5월 1일(금)부터 5월 31일(일)까지, 강홍구 개인전 『녹색연구-서울-공터』展을 개최한다. 강홍구 작가는 1990년대부터 디지털 풍경사진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들을 카메라에 담아왔으며, 2009년부터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도시화와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동네의 모습을 기록해왔다. 그는 그때부터 현재까지 촬영한 사진을 캔버스 위에 흑백 출력한 후 아크릴로 색을 올려 그려내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사진 이미지를 아크릴 물감으로 덮어 그려내는 작가의 제스쳐는 우리에게 두 가지 면을 상기시키는데, 그 중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 이후 사진 매체를 향한 고질적인 의심, 즉 보이는 대상 또는 기록된 사실에 대한 의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상을 덮어버린 작가의 제스쳐(페인팅)로 인해 발생하는 언캐니(uncanny)함이다.  ● 분할된 화면과 그 위에 올려 진 물감은 이미지(정보)의 취약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물감 아래 가려진 본래의 이미지는 관람자에게 능동적인 사고와 상상을 요청한다. 작가의 이러한 조작은 매끈한 듯 보이는 우리의 사회 역시 어떤 조작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임을 은유하고, 작가의 조작을 캐내는 과정은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 사회 구조의 이면을 들추고자 했던 작가의 사고를 따라가는 과정이 된다. 동시에 작품들은 그러한 능동적 사고를 멈춘 채 갤러리의 화이트 벽에 걸린 그럴듯한 이미지로 소비해버리려는 욕망을 순순히 허락하지는 않는다. 본래 흑백이 아니었을, 그러나 인위적으로 흑백으로 출력된 이미지는 우리 주변 어디선가 보았을 장면들을 낯설게 만들고, 다시 작가의 손을 통해 본래의 색을 찾고자하는 피사체들은 이미 인공이 되어버려 부자연스럽게 '자연스러움'을 취득하려는 '자연'의 이미지가 된다. 본래 자연이었던 것의 이런 기괴한 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편함, 그리고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언캐니함을 경험하게 한다.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송현동 1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90×200cm_2019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한 노트에서 더욱 정교해진 사회의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녹색의 물감들로 가린 공간의 민낯들, 그리고 그 폭력의 주체들은 아무리 애써본들 더 이상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기이한 사건들과 상황들, 어색할 정도로 매끈한 이미지들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며 그 아래의 구조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무엇이 진실이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10여년이 넘도록 녹색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작가는 복잡한 구조를 파헤쳐내는 대신 그것을 덮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렇게 덮여진 기이한 이미지들을 보여줄 뿐이니 말이다. ■ 원앤제이 갤러리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송현동 2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90×200cm_2019


지금은 사라진 옛 한국일보사 건물에 취미 화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강의실이 9층이었는지 10층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거기서 내려다보면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가 보였다. 미국식 건물들이 커다란 나무들과 녹지 사이에 여유 있게 서 있고, 높은 돌담이 사방을 둘러치고 있었다. 어쩐지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 넓이 3만6천642㎡인 송현동 공터는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 바깥 숲 정원 송현(松峴)이었다. 안평대군, 봉림대군의 사저가 있었고 왕족들과 고위 관리들의 집터로 나중에 친일파 윤덕영 형제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이 사들여 사택 부지로 썼고, 그 후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숙소 터가 되었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 1997년 6월 삼성생명이 1400억원에 부지를 매입 했다가, 2008년 대한항공이 2천900억원에 다시 매입해 7성급 관광호텔 건립을 구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4-5000억에 매각 하려 하고 있다.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서울숲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140×200cm_2019


송현동 공터에서 시작해서 근래 몇 년 동안 관심을 갖고 살펴 본 것은 서울에 아직 남아 있는 공터와 그 공터를 덮고 있는 녹색이었다. 용산역의 개발 취소 구역, 청계천, 평택으로 이사 간 용산의 미군 주둔지, 한강의 섬들, 은평 뉴타운, 창신동 채석장 흔적... 그 밖의 여러 공원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 장소들, 특히 송현동, 용산역 등의 값비싸고 넓은 공터일수록 역사라는 이름의 폭력과 개발이라는 욕망이 마주쳐 일종의 개발 지연이 일어난 곳들이다. 그리고 이곳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잡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녹색으로 뒤덮여 있다. 특히 대형 공터의 녹색 나무와 풀들은 커다란 상처를 임시로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서울에서 아직 녹색으로 남아 있는 장소들은 상처를 겨우 가리고 있거나 운 좋게 상처 입지 않은 장소이다. 인왕산, 남산, 낙산을 비롯한 산들과 한강의 섬들의 일부가 상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곳이다. 특히 밤섬은 여의도 윤중제를 쌓기 위해 1968년 폭파 되었던 섬이 스스로 되살아난 경우이다. 이 밖에도 노들섬, 선유도, 여의도... 등에는 녹색이 남아 있고 모습이 완전히 바뀐 잠실도 그렇다. 낙산 근처의 창신동 채석장이 있던 절벽 위 아래 마을들의 작은 공터는 텃밭으로 쓰이는 곳도 있었고, 은평 뉴타운 지역에 있던 조팝나무들이 있던 공터는 사라져버렸다. 푸코가 말했던 일종의 헤테로피아로서의 공터들은 일시적인 유토피아이며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 물론 서울의 모든 공터를 다루는 것은 작업의 목표가 아니었므로 많은 곳이 제외되었고, 사실 모든 곳을 다룰 수도 없었다. 작업의 제작 방식은 디지털 사진 프린트 위에 아크릴 채색이다. 십여 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이며 여전히 사진과 그림 사이에 있는 어떤 다큐멘터리적 이미지를 만들려는 시도인데, 이번에는 약간 그림 쪽으로 가까이 간 듯도 하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위는 이제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적합하고, 찍는 것과 그리는 것을 같이 할 수 있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 토지, 부동산 전문가들은 공터가 도시 공간의 차등화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토지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도시의 땅값은 일종의 위치 자본이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차액 지대, 즉 돈을 얼마나 남길 수 있느냐에 따라 개발의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 차액지대를 많이 남길 수 있는 서울은 도시 전체가 개발 대상 지역이며 동시에 폭력적인 곳이다. 물론 서울뿐만 아니고 전국이 그렇지만, 서울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한 곳이다. 인간과, 공간, 자연에 대한 폭력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창신동 4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200×560cm_2019



내가 서울에 처음 왔던 것은 1976년 여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기다리며 목포에 있는 어느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치던 스물 한 살 무렵이었다. 12시간이나 걸리는 완행 야간 열차를 타고 덕수궁에서 열리던 인상파전을 보기 서울에 왔었다. 그림은 뭘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1호선 지하철 공사 때문에 어수선한 거리만 떠오른다. 다시 목포에 가기 위해 서울역에 갔을 때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역 광장에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열차가 들어오고 개찰구가 열리면 모조리 뛰어갈 태세였다. ● 당시 완행열차는 좌석 지정도 없었기 때문에 먼저 뛰어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게 임자였다. 사고가 잦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압사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개찰 시간이 임박하자 역무원들이 기다란 대나무 장대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앉으라며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너 사람이 휘두르는 장대 때문에 사람들은 강제로 자리에 앉았고, 그에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물론 어차피 앉아 갈 수 없을 테니 천천히 타자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대와 무관했지만, 그 폭력적인 질서 유지 방식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일은 내게 서울을 특별히 폭력적인 장소로 각인 시켰다. 군부 독재 아래에서 성장하면서 웬만한 폭력과 억압을 당연시하고 살았지만, 그 장면은 40여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생생하다. 폭력과 억압의 일상화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에 무감각해진다는 의미이다.


강홍구_녹색연구-서울-공터-노들섬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_140×200cm_2020



내가 태어나 자랐던 1950년대 이후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폭력과 억압은 더욱 정교해지고 세련되었다. 직접적인 육체, 정신적 폭력에서 자본과 권력은 섬세한 제도화를 통해 보다 부드러운 방식의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서울의 공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마 그것일 것이다. 때문에 공터들은 언젠가 멋진 건물과 시설이 들어선 곳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소유하고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익을 보는지를 들여다보면 폭력의 진정한 심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강홍구



Vol.20200502f | 강홍구展 / KANGHONGGOO / 姜洪求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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