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영기이사장, 작년 6월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촬영



지난 16일 오전7시 '동자동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유영기(66)이사장이
급성호흡기능 부전으로 영등포 '신화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년 초만 해도 멀쩡한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에 화들짝 놀랐다.

혹시 '코로나119' 바이러스 감염이 아닌지 걱정되어서다.

만약 그렇다면 동자동 쪽방 촌도 모두 격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사인이 폐암이라 했다.



올 들어 유독 피곤하고 힘든 증상이 자주나타나

지난 25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폐암진단을 받았는데,

척추로 전이된 상태라 방사선치료를 받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입원환자에 대한 전원 퇴원조치로, 2월말 '경희대병원'으로 옮겼는데,

폐렴증세로 호흡곤란을 일으켜 1인실에 격리되었단다,


 

항암치료는 계속 받아왔으나 하반신이 마비되며 통증이 심해 힘들어 했는데,

2주 이상 입원이 안 된다는 규정으로 '신화요양병원'으로 옮긴지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위중한 환자를 퇴원시키는 것도 이해되지 않지만,

문제는 사망해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장례를 치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벌써 일주일이 가깝도록 냉동실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쪽방 촌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죽어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장기간 화장도 못한 채 방치되거나, 가족이 나타나도 시신을 포기하여

'동자동사랑방'에서 장례를 대신 치러 주는 실정이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지만,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빨리 가족이 나타나야 장례를 치룰텐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리고 사랑방마을협동회의 정기총회를 비롯하여 할 일도 많은데,

갑작스런 이사장의 죽음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다.



지난 17사망 소식을 듣고  동자동사랑방’을 들렸는데,

선동수 간사장은 가족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홍렬, 유한수, 이남기, 황춘화, 씨 등 많은 이웃을 만났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은 술을 마시거나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차피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 죽음에 초연할 수밖에 없다.



 

죽어도 저승마저 편히 못가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정거장에 기다리지만, 부디 극락왕생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사람이 참 간사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덥다고 난리치더니, 하루아침에 춥다며 웃옷을 찾는다.


사실, 쌀쌀해지면, 술 맛 나는 계절 아니던가?
술 생각에 새꿈 공원으로 나갔더니, 여기 저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구멍가게 강재원씨는 이미 맛이 가버렸더라.
어머니 몰래 소주 몇 병을 빼돌려 놓고 허풍을 떨어댔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자락에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었다.
이남기씨의 빠진 이빨 사이로 즐거움이 넘쳐 흘렀다.






이홍렬씨는 소주파가 아니라, 주위만 맴돌았다.
내가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자리를 만드니,
그 때야 한 잔 하시며, 옛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추석명절의 쓸쓸함이 유난히 길어, 그 때가 그리운 것 같았다.






20여 년이 지난 추석 전 날,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다 돈뭉치를 주웠다는 것이다.
거금 백만원이나 들어있는 쇼핑빽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그 날 청소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고,
남은 돈은 명절 보너스 로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없는 사람들 적선했으니, 아마 복 받았을 거다.
그래도 혼자 챙기지 않고, 함께 나누었으니 인간적이지 않은가?
신고해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도리지만, 어찌 혼자 독식하는 야박함에 비할소냐.





지난 해 동자동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다섯 쌍 중의 두 내외도 나와 있었다.
이기영, 홍홍임씨 내외와 김만귀, 이경희씨 내외는 찰떡궁합이다.
그 날도 두 내외가 짜장면으로 정분을 나누었는데,
김만귀씨 아들 정훈이가 동내재롱 다 부린다. 동자동의 유일한 기쁨조다.






이 날은 ‘구글 보지’로 통하는 유씨도 등장했다.
사실은, 이름보다 별명이 더 잘 기억된다. 옆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그랬다.
“꼭다리 옆방이 짹짹이 방이잖아” 이름은 얼른 기억나지 않지만, 별명은 바로 나온다.
날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찍새로 불러다오.






그날의 화제는 어딜 가나 지갑 분실사고 였다.
지난 추석 전 날, 이모씨가 지갑을 분실한 모양인데, 그 일로 뒷말이 많았다.
CCTV에 줏는 사람 모습이 찍혔다며 경찰까지 개입했으나,
아무도 이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동내에서 인심을 잃은 것이다.






이미 술이 취해 있었는데, 인사동에서 술친구들이 날 불러 재꼈다.
인사동‘툇마루’로 자리옮겨 마시느라, 지갑에 만원짜리 한 장 달랑 남겼는데,
그마저 임자가 따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역에서 지하계단을 올라가다 옆방에 사는 최완석씨를 만났는데,
구석에서 노숙자 한 사람이 손을 흔들어댔다.
자세히 보니 “소주 한 병과 김밥 한 줄이 소원”이라던 이상구씨였다.






몇 달 만에 만났는데, 얼굴도 많이 상했지만, 다리를 다쳐 목발을 옆에 두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찾길래,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지갑을 마저 털어야 했다.
누구에게 구제 금융을 요청하던, 그건 내일 일이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든 이상구씨의 고마워하는 표정에 내일 걱정까지 사라지더라.






“돈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던가”


사진,글 / 조문호




페이스북 친구가 된 김길석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내 손이 잛아 나는 반토막만 나왔네





































 

지난 26일의 동자동 새꿈 공원에는 김정호, 유영기, 정재헌, 이재화, 김원호,

이홍렬, 강병국, 강재원, 김용만씨 등 반가운 분들이 나와 한담을 나누었다.

이 날은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돌려주기로 약속한 추석이 다가와서인지,

영정사진을 찍어달라는 분이 의외로 많았다.

 


주민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박성일씨는 몇몇 사람들은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사람들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동자동 빈민을 지원해 온 명성도 손을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민씨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영정사진을 부탁해 찍어주었는데, 사진은 언제 줄 것이냐는 것이다.

추석에 빨래줄 전시 때 가져가라니, 그 때는 없다고 말했다.

육개월 정도 동자동을 떠날 것인데,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젠 사람이 무섭다며, 갑 질하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말도 덧 붙였다.

착한 정민씨가 무엇에 저렇게 마음을 다쳤을까?



 


짐작은 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실태를 알고 나니,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굴 위해, 뭘 위해 개고생을 하는지 한심한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선량한 주민들이 더 많다는데, 위안을 갖고 산다.

 

제일 시급한 것은 빈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주민들이 민관단체의 잘 못된 관행이나 갑 질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도 빈민들이 발 벗고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힘없다며 포기해버리고, 알고도 모른 척 한다면, 절대 개선할 수 없다.



 


지탄받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정작 가진 자들이다.

그 많은 돈을 정당한 노력에 의해 벌었겠느냐? 전두환, 이명박 같은 도둑놈들이 가진 자들의 대부분이다.

요즘 일부 언론에서 빈민들의 인권 운운하며, 빈민들을 가두고 소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몰지각한 사진인들의 가시적인 접근도 문제이긴 하지만, 빈민들은 숨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이여! 자부심을 갖고 우리들의 권익을 되찾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자.

오는 4일 추석날 펼치는 동자동 새꿈공원의 합동차례도 함께하자.

첫 빨래줄 전시였던 5월 어버이날 이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빨래 줄에 걸어 당사자에게 돌려주려 한다.

영정사진은 물론 지난 5‘5,18민주묘지 참배에서 찍은 사진과 도끼상소 등

각종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일요일의 동자동은 한산해서 좋지만, 밥 사먹기가 지랄 같다.
직장인이 없어 쪽방 사람들이 이용하는 광주식당까지 닫아 버린다.
하루 쯤 굶어도 죽지는 않으니, 발길을 공원으로 돌려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입구에는 여러 사람이 술로 다독이고 있었다.
트랜지스터에서는 ‘돌아가는 동자동’이 아니라 ‘돌아가는 삼각지’가 흘러나왔다.
김상구씨가 잔뜩 어깨에 힘을 실어 장단을 맞추고 있었는데,
직장인 없는 일요일의 동자동은 쪽방 사람들 세상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자리를 지키는 정재헌씨를 비롯하여
구멍가게 주인 강재원씨, 전설로 통하는 전찬우씨,
의리의 사나이 이준기씨, 이법사로 불러달라는 이원식씨,
그리고 김상구, 이태수, 박동구씨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술과 담배가 바닥나 물주를 기다리는 중이었던지,
소주 세병과 담배 한 갑을 사갔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늘 술자리를 지키며 빈병을 치워주는 황옥선 할매에게도
우유 한 팩 드렸더니, 기분 좋아 노래까지 하신다.
작년 추석 노래자랑에선 상까지 탔는데, 올해도 나간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구멍가게 주인인 강재원씨가 할 말이 있다며 날 좀 보잖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냐고 귀를 쫑긋 세웠더니, 나도 생각나지 않는 지난겨울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줄테니, 소주 한 병만 외상으로 달라 한 것을 거절한 게 아직까지 마음에 걸린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구멍가게에서 외상 주는 곳이 어딨냐고 그랬더니, 그 때는 사람을 잘 못 봤으나, 앞으론 잘 하겠단다.
그리고는 면전에서 내 칭찬을 해대는데, 얼굴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가게에서 십만원치 팔아야 만원도 남지 않는다며, 돈도 잘 빌려주지 않는 땡보 양반의 또 다른 순진한 모습에 놀랐다. 



 


이번엔 이홍렬씨에 이어, 화장을 지운 김은자씨가 나타났다.
난 이 여인을 ‘친절한 금자’씨로 바꾸어 부른다.

김은자씨는 왕년에 룸살롱 마담으로 전전하며, 사내께나 휘어잡은 여인이다.
세월에 밀려 쪽방 촌까지 들어 온, 그 한 많은 사연을 한 번 들어 볼 작정이다.






그 날은 화장을 하지 않아, 나도 사진 찍을 생각을 않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이준기씨는 같이 한 판 찍자며 졸라댔다.
“안 된다는데 왜 그래~”라는 날선 반응에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대머리라 모자 안 쓰면 찍기 싫은 거나 마찬가지다”고 했더니, 그때야 알아차렸다.






담장 모퉁이에 올려놓은 조그만 라디오에서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다'는 대목에서는 은자씨가 슬퍼하고,
현인의 ’체리핑크 맘보‘에서는 다들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이 것이 사람 사는 재미다.
하잘 것 없는 사연에 울고, 흥겨운 멜로디에 웃는 사람들...
배우고 가진 자들이 서민들의 순수한 이 맛을 알리 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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