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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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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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지난 5월17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좋아하는 화가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라, 기대했던 전시였다.

 

전시장으로 가다 지리산에 은거하는 무예가 하태웅씨를 만났다.

그 역시 ‘모심’전을 보고 가는 길이라는데, 그날 일진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그 날은 가야 할 전시가 세 곳이나 되어 ‘일타삼피’라며 좋아했으나,

반가운 분들 만나다 보면 술에 녹초가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덱스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창성의 ‘나는 시민군이다’전과

김진열의 ‘모심’전은 민중의 한과 연결되어 궤를 같이한 전시라고 느껴졌다.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민중들의 아픔을 담아내는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4시에 개막식이 열린 ‘나는 시민군이다’부터 보고 갔더니,

김진하관장과 나종희씨 두 분만 남아있고 모두 뒤풀이 집으로 가버렸다.

 

전시된 작품을 돌아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레오록’에 소개된 작품을 보긴 했으나 실제 작품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만든 작품들은 마치 찢기고 분열된 민중의 노동이고 상처였다.

투박한 질감은 존재 자체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용도를 다해 휘어지고 녹슬거나 쇠락한 사물을 연결하거나 덧붙인 형체 위에

붓질한 드로잉은 막 쌓아 올린 토담처럼 간결하면서도 원시적 편안함을 주었다.

 

투박한 조형적 감수성이 빚어낸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경외감이 일었고,

버려진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역동적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작가의 삶이 베인 원시적인 힘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직관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물질과 거침없는 붓질에서 민중의 울림이 일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김진열씨의 생명존중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비평 ‘투박한 존엄, 그 생명의 모심’으로 부족한 소견을 대신한다.

 

“김진열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윤의 판화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처럼 익명적 민중성을 확보한다. 다만 오윤이나 리베라가 객관적으로 기호화된 인물의 전형성을 확보했다면, 김진열의 인물들은 정서를 환기하는 추상적 기운으로 기능하는 점이 다르다. 김진열의 작업이 사실주의적 재현성보다는 표현주의적 속성에 가까운 건, 정형적으로 패턴화된 캐릭터를 부여받은 인물 구성 방식에서 이탈하는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인해서다. 그런 면에서 김진열의 비정형적 형상성의 회화적 긴장감은 오히려 싱싱하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05243701

전시는 5월30일까지 열린다.

 

작품에 대한 여운을 안은채, 뒤풀이 장소인 ‘사랑채’로 갔더니, 김진열씨 외에도 미술평론가 최석태,

화가 장경호, 김 구, 손기환, 김재홍, 이태호, 이재민, 이운구, 이흥덕, 조신호, 김이하시인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앞쪽에는 지방에서 오신 손님들이 계셨고 다락방까지 가득 차 끼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가운 분들 사진 찍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신 술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주를 드시는 분이 없어, 탈 많은 막걸리를 마신 게 마음이 걸렸다.

 

정동지를 '사랑채'에 남겨둔 채, 이창성씨 뒤풀이가 열리는 ‘부산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막식에서 사람이 많아 인사도 드리지 못한 이창성선배께 인사도 드리고,

시민군 방송원이었던 차명숙씨 더러 40여 년 전에 찍힌 예쁜 모습에 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왜 술만 취하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놈의 술만 들어갔다 하면 180도로 바뀌어 버린다.

정동지라도 같이 있으면 덜 할 것 같아 부산식당으로 불렀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김문호, 이규상씨와 ‘사랑채’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김문호씨와 이규상씨는 언제 갔는지도 모르겠고, 정동지마저 줄행랑쳤다.

오죽하면 인사동 물귀신 장경호씨가 택시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겠나?

뒤늦게 찍은 사진을 보니, '예당'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임경일씨 모습도 보였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해, 술 자리는 일체 가지 않기로 맹세했으나, 이 역시 개 맹세 될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0작성]

중국에는 용, 인도에는 코끼리, 이집트에는 사자가 있듯이 대한민국에는 호랑이가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20세기 초반 일제의 대대적인 사냥 작전으로 사실상 멸종되기까지, 호랑이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일명 ‘호랑이 나라’로 불렸다.

서울 인사동 무우수갤러리는 지난 1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기획전으로 ‘大韓 호랑이展-호랑이 나라에서 만난 우리 호랑이’를 열고 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을 맞아 마련한 기획전으로 조각가 고선례, 동양화 작가 리강, 미술사가로 요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문인 화가 이태호, 민화 작가 김연우, 문선영, 전지우, 지민선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적 미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호랑이가 까치를 바라보는 표정이나 더덩실 춤추는 모습은 우리 민족 흥과 익살스러움을 표현한 듯 친근하다. 산맥으로 이어지는 푸른 호랑이와 붉은 하늘 아래서 눈을 번뜩이는 호랑이는 신령스럽고 기백이 넘친다.

모란꽃 피어난 호피와 비단 자수처럼 표현된 호랑이 배겟모는 장식적이며 힙(hip)하다.

호랑이 나라답게 호랑이가 갖는 문화·예술적 의미는 실로 크고 그것의 창조적 표현력 또한 감탄스럽다.

 

민초들은 호랑이를 산군(山君) 산신(山神) 산중영웅(山中英雄)으로 부르며 사악한 기운을 막고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받들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지명, 세시풍속, 설화, 속담, 문학, 예술 곳곳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우리 민족의 호랑이에 대한 사랑은 현대사회에서도 계속된다. 국제사회에 한국을 널리 알린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호돌이’가 한국의 마스코트로, 2018년에 개최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수호랑’이 한국을 대표했다.

 

[스크랩] 스포츠경향 / 손봉석기자

 

‘인사아트센터’ 지하전시장에서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거대한 뿌리’전이 지난 22일 개막되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성탄절에서야 짬을 낼 수 있었으나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전시장에서 꼼꼼하게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태호, 김정헌, 김진하, 강경구, 임옥상, 박재동, 신학철, 노원희,

박 건, 민정기, 박영균, 손기환, 이명복, 이인철, 이흥덕, 정정엽 작가 등

기라성 같은 민중미술가들과 가수 정태춘 등 30여명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출품 작가마다 서사와 주제에 따른 표현이 다양했고,

김수영을 그린 초상화의 표정도 다채로웠다.

 

전시작을 돌아보며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오르거나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는 등 오로지 김수영시인만을 추억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 전시는 27일 까지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2

지난 18일 오후는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전시 디피하는 날이었다.

 

사진 액자는 진즉 ‘나무아트’ 전시장에 올려놓은 터라 인사동 거리부터 돌아보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따라 거리공연에 나선 뮤지션이 세 명이나 되었다.

다양한 음악으로 거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유독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러시아 소녀를 경찰관이 제지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주변에 있는 가게 주인이 신고를 했단다.

 

"에라이~ 돈밖에 모르는 썩을 놈의 인간들..."

바이얼린 연주가 무슨 영업 방해가 되며,

비록 방해가 된다 해도 어떻게 자식 같은 외국 소녀에게 상처를 주는가?

 

연주하던 소녀가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걸 보고서야 ‘나무아트’에 올라가니,

이미 김진하관장이 액자를 배치하고 있었다.

전문가가 하는 일에 나설 수 없어 포장 해체하는 정도만 도왔다.

 

마침 거리미술가로 알려진 이태호 교수가 오셨다.

고 김수영시인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판화 두 점을 출품하기로 했는데,

어디서 주최하는 행사인지 궁금해 했다.

 

정영신씨가 기획자 소개도 할 겸, 그 일을 추진하는 김발렌티노를 불렀는데,

김수영시인의 대형 시비도 만들어 둔 게 있다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그런데, 김진하관장께서 토론토 Tai Kim씨가 보내왔다는 예쁜 엽서를 전해 주었다.

페친으로서 정선에 불난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행운의 크로바까지 붙여 보내 와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김진하관장의 전시 디피 솜씨는 일사불란했다.

그 많은 액자를 짜임새 있게 배치했는데,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한 후 이태호 선생과 함께 ‘툇마루’로 식사하러 갔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을 설치할 ‘유목민’ 골목에도 잠시 들렸다.

골목 테이블에는 이인섭, 유근오, 노현덕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유목민’ 안 쪽에는 김수길씨도 있었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나 술 한 잔 나누지 못하니 무슨 재미랴.

전시 기간 내내 짐 때문에 차를 끌고 다녀야 할 텐데,

참아야 할 술 고문은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각인된 빛 그리고 풍경

김태현展 / KIMTAEHYUN / 金太鉉 / sculpture.painting 

2021_0203 ▶ 2021_0223 / 2월 11~12일 휴관

 

김태현_fushun, dakeng 탄광_스테인리스_60×240cm_20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00pm / 2월 11~12일 휴관

 

 

가가 갤러리

GAGA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4(인사동 183-4번지) 1층

Tel. 070.7758.3025

www.gagagallery.com

 

 

부조(relief)로 각인된 풍경 - 풍경조각 ● 『각인된 빛, 그리고 풍경』展은 조각가 김태현의 첫 개인전 제목이다. 작가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중국 북경의 중앙미술대학원에서 '도시설계디자인 공공미술'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는 그가 중국에서 제작한 작품과, 귀국 후 한국에서 제작한 최근의 작품들이 함께 출품되고 있다. ● 제목에서 시사하듯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풍경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른바 풍경조각(Landscape Sculpture)이다. 작가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상적으로 만났던 혹은 어떤 의미에서 각별히 자신의 뇌리에 "각인"된 풍경들을 입체적으로, 즉 조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흔히 만나는 풍경화는 종이나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평면이다. 하지만 작가의 풍경 조각은 주로 스테인레스(stainless)강판이 베이스가 되고 있고 그 위에 다시 스테인레스 등 물질이 입체적으로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평면이 아니라 조각예술이다. ● 그는 대학 시절부터 철을 주재료로 사용하며 그 절단과 용접을 통한 형상 조각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스테인레스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스테인레스 강판을 배경으로 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떤 형상으로 오리고 자른 후 그 위에 여러 겹으로 붙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부조(relief)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김태현_선유도 어촌마을_스테인리스에 유채, LED_60×60cm_2020

 

 

부조(relief)로 표현하다 ● 전시 출품작을 관통하는 특징이라면 대부분이 부조로 표현됐다는 점이다. 총 19작품 중 3점을 제외한 16점이 부조작품이다. 아마도 풍경을 표현하기로 하면서 조각예술이지만 평면 회화와 가까운 부조라는 방식이 자연스레 선택됐을 것이다. ● 작품 중에는 「파도 Wave」에서처럼 표면에 미세한 요철을 남기는 저부조(bas relief)가 있는가 하면, 작품 「다컹 탄광 Coal Mine Dakeng」처럼 전면으로 상당히 튀어나와 있는 큰 부피의 고부조(high relief)도 있다. 「파도」 「고랭지 논」 등 저부조는 용접봉을 마치 붓으로 그림 그리듯 사용하여 철판 위에 도톰하게 양각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저부조 작품들은 표면에 색을 올려 하늘과 파도를 구분하는 등 다분히 회화적이다. ● 이와 달리 작품 「다컹 탄광」등 고부조 작품들은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일체 회화적 표현을 배제하고 있다. 오로지 조각적 표현, 즉 입체적/공간적 표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색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철을 이용한 조각적 기법만 구사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의 철조각 기법, 즉 일렁이는 하늘에선 철판을 두드려 만드는 단조(鍛造) 기법을, 전신주와 철로에선 스테인레스 봉을 자르고 붙이는 용접 기법을, 그리고 산과 언덕 등에서는 스테인레스 강판을 오리고, 붙이고, 지지는 등 다양한 기법을 볼 수 있다.

 

김태현_안반덕 고랭지 논_스테인리스에 유채, LED_60×60cm_2020

 

 

대상에 더 다가가기 ● 나의 시선이 「다컹 탄광」에 유난히 머무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한 기법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화들, 다시 말해 대상물을 먼 시선으로 잡은 산과 들의 지평선 혹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다컹 탄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여타의 작품과 달리 이 작품에선 대상지에 한층 '다가가' 그 지역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작가가 대상에 "다가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단순히 멀리서 본 '경치'와,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냄새 맡고 소리를 들으며, 즉 작가가 오감으로 체험하며 제작한 작품이 같을 수는 없다. ● 「다컹 탄광」은 푸른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을 그린 산수화(山水畵)가 아니다. 어찌 보면 우울한 하늘과 부조화스런 파괴된 자연이 있는 황량한 풍경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듯한 풍경 한가운데에 갑작스레 왕복 철로가 건설돼 있고 거기에 전선과 전신주가 서있다. 또한 철로 옆 산등성이를 파헤치고 산업용 대로가 뻗어 있다. 중국 무순시에 있다는(정식명칭:西露天矿)「다컹 탄광」은 지난 2차 세계대전 중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 전쟁에 쓰기 위한 석탄 등 자원을 조달하기 위해 급히 건설했던 곳이다. 이 역사적 유물을 본 순간 작가는 한반도에서도 있었던 일제의 수탈을 떠올리며 깊은 공감을 느꼈고, 그래서 작품화 하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 나는 여기에서 작가가 현장에서 느꼈던 공감과, 그 공감이 작품제작을 추동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작가는 작품 제작에 앞서 현지에 있는 전쟁과 역사의 자취를 살펴봤고,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처럼 작가가 느낀 공감이 그저 지나는 여행객의 시선을 넘어서 현장에 다가가게 했고, 그 결과 그 역사와 현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고 나는 해석한다.

 

김태현_곰소 염전_스테인리스에 유채, LED_80×80cm_2020

 

 

LED 빛과의 결합 ● 전시된 작품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풍경에 결합된 LED 빛이라 할 수 있다. LED는 출현 이래 그 안전도, 사용편의성, 비교적 오랜 수명, 다양한 연출 가능성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김태현작가도 「북경 로마 호수」, 「곰소 염전」,「안반덕 고랭지 밭」 등 11점의 작품에서 LED 빛을 사용하고 있다. 그 다양한 색조의 불빛은 직접 드러나지 않고, 도시 빌딩의 뒤편에서 빛나며 인공적 문명을 상징하기도 하고, 산과 들과 물의 주변에서 은은히 빛나며 신비감과 거리감 혹은 어떤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 작품에서 하나의 매력 포인트로 작용하기도 한다. ● 하지만 조각예술에서 LED 빛이 언제나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용 방식과 빈도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양가적 가치를 결과하기도 한다. 즉 어느 경우에는 "신의 한 수"가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작품의 본질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장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는 깊은 생각 없이 새로운 기법이나 유행을 차용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김태현_계단식 논_스테인리스에 유채_20×75cm_2019

 

김태현_Beijing · Roma · lake_스테인리스, LED_14×240cm_2019

 

 

이번 첫 개인전을 통해 나는 김태현 작가의 창조적 열정과 두려움을 모르는 실험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흔히 조각 예술은 물질을 다루는 기법과 능력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다양한 실험과 수련을 계속하는 한편 자기만의 주제와 목소리를 찾아가는 작가의 성실한 자세를 보면서 나는 경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한 사람의 동료로써 내가 그에게 큰 기대를 거는 이유일 것이다. (2021년 2월 12일) ■ 이태호

 

 

김태현_구상나무_스테인리스, 혼합재료_42×70×20cm_2020

 

 

일상적 찰나의 조각을 모으면 자연은 내게 경이로운 풍경으로 영감을 준다. 풍경 속 자연물들은 각기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역할을 해내는 사회 안의 구성원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나치는 자연 광경 안의 무심한 나무는 얼마나 모진 풍파 견뎌가며 그 안의 나이테를 만든 것인가. 노동의 장소는 나에게 영감을 주고 이는 작품의 소재가 된다. 육체노동이 오롯이 쏟아지는 시간과 힘의 가치는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용광로처럼 뜨겁고 쇠처럼 단단한 공간감을 자아낸다. 노동집약적인 용접을 이용한 회화적 화면 구성이 삶에 열정을 작품에 각인시킨다. 자연과 사회의 현상을 일상적 삶과 기억들을 재조명하는 프레임으로 적용시켜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마는 사소한 풍경과 그것에 깃든 추억과 기억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그 자연이 가진 일상에 다른 가치를 재해석하고 싶다. 온 세상 만물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이기 때문이다. ■ 김태현

 

 

Vol.20210204a | 김태현展 / KIMTAEHYUN / 金太鉉 / sculpture.painting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 않다.

그 많은 인파는 오간데 없고, 북한 거리처럼 적막강산이다.

전시장이나 가게들은 겨울철이라 날릴 파리조차 없다.

빈 점포에 임대 쪽지 붙은 곳이 도처에 늘렸다.

 

전염병이 끝나면 본래의 인사동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마 많은 것들이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갤러리들은 밀린 임대료에 버텨내지 못하고,

팔리는 작품조차 없으니 작가인들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코로나에 주눅 들어 인사동 출입을 자제하지만,

요즘은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이다.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말하고 싶다’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말하고 싶다’가 드디어 말했다.

 

이 전시는 정치 풍자와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이야기.

현실의 아픔과 분노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사동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좋은 작품을 싼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말하고 싶다’는 소통만이 아이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반출 없는 완판 전을 목표로 세웠기 때문이다.

이 불경기에 전시 닷새 만에 숱한 작품이 팔려나갔는데,

팔리지 않는 나의 홈리스 사진도 두 점이나 팔렸다.

 

전시작은 고경일, 김우성, 레오다브, 박건, 박순철, 박재동, 성완경,

아트만두, 이윤엽, 이하, 이태호, 이현정, 조문호, 주 홍, 정보경,

하일지, 홍성담씨 등 열 일곱 명의 야전 작가가 참가하고 있다.

 

인사동 활성화와 작가 생존을 위해 인사동에 전시 보러 가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는 아니다.

전시는 26일까지다.

 

사진, 글 / 조문호

 

위쪽 사진은 1월 13일 찍었고, 아래 사진은 12일 찍었다




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 많은 사람이 몰려 나왔다. 서서히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중국관광객이 없어 예전 같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발길은 꾸준이 이어졌다.

새로 생긴 악세사리 가게에는 손님들이 미어터졌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빌려 온 카메라가 이틀째 작동되지 않았다.

노출초과로 사진의 계조가 드러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먼저 이태호씨의 '근대짱돌의 역사"전이 열리는 '나무화랑'부터 찾았는데,

텅 빈 다른 전시장에 비해 의외로 관람객이 많았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마치 박물관에 들어 선 느낌이었다.




일단 기존 미술개념의 제도적 틀을 깨려는 저돌적 자세가 돋보였다.

주로 일상에서 채집한 짱돌 같은 사물도 있지만, 회화, 목판화, 문자, 영상,

설치, 사진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끌어들였다.


 

장소도 전시장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타이포그라피가 첨가된 김수영시인의

목판화 벽보붙이기가 인사동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 나 붙었다.

상업광고가 판치는 거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미술이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을 찾아냈다.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분석에 의한 인식을 형상화하여 소통을 시도했다.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풍자로, 때로는 날선 비판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오래전 어느 매체에 소개된 작가의 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 

미술은 성스럽고 순수한 게 아니다. 노동하는 현실과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 바로 이태호씨의 작업 태도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작가를 이렇게 말했다.

"곧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이태호는 1980년 이후 40여 년을 그렇게 줄탁동시啐啄同時와 줄탁동기啐啄同機로 한국미술과 현실의 모순과 허위,

그 단단한 껍질에 미학적 '짱돌'을 던져왔다. 자신도 미술도 거듭나기 위한 그의 깨우침이 사회문화와 역사에 대한 두드림으로 확장된 실천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과 현실에 대해서 할 말과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는 청년이다. 한국사회의 허위에 거침없이 짱돌을 던지는 작가다."




이태호 화집발간기념전 '근대짱돌의 역사"전은 5월4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김해에서 올라 온 신미숙씨의 초대전이 열리는 ‘31갤러리를 찾았다.

전시장은 정물과 누드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더러는 유물 단면이 배경이 되어 의아하기도 했으나,

그가 발표한 '가야유물의 회화적이미지 표현' 이라는 논문제목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 전시는 4월28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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