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짱돌의 역사』 출간 기념전


이태호展 / LEETAEHO / 李泰豪 / mixed media
2020_0420 ▶︎ 2020_0504



글_강성원, 김진하, 최태만 || 면수_240쪽 || 판형_국배판(22.5×30cm) 소프트양장초판발행
2020년 1월15일 || ISBN 979-11-88845-03-3 || 가격_40.000원 || 출판사_나무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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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현실을 관통하는'짱돌'의 미학1. 작업은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각자 동기나 입장, 내용과 형식이 다르다. 서정적 내면, 사회적 내용, 미술에 대한 개념, 기술적 숙련도, 대중성이나 시장성, 조형적 형식, 소통방식 등 작가들이 중요시하는 게 많다. 각 요소들의 불규칙한 교집합으로 구성된 작가들마다의 미술에 대한 접근방식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 그러나 그런 다양함도 단순화시켜 보면 크게 둘로 나뉜다. 기존 미술제도의 틀 내부에서 자기형식의 완결도와 스타일을 추구하며 보편적 미학으로 관객이나 시장에 연착륙하려는 입장과, 고착된 미술개념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며 제도적 틀을 돌파하려는 저돌적 자세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현대미술작가는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둘을 절충해서 작업을 진행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인'과 자기 발언을 시도하는 '작가'의 영역 사이에서 천칭 손잡이처럼 양쪽을 아우르는 균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상당 부분이 미술관/상업화랑, 대안공간/아트페어를 동시에 수용하고 욕망해온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생활인이기도 한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이해가 되면서도 뭔가 애매하고 또 아쉽다. ●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지금까지 이태호는 기성 상업공간이나 주류미술계의 제도나 관행에서 벗어나서 작업해왔다. 작가들끼리 암묵적으로 형성한 '화단'이란 협소한 구조에서 궤도 이탈한 채로. 자신의 작업행위가 어떻게 시민들과의 공통된 삶의 분모로부터 도출된 인식의 시각적 기호가 될 것인가에 대해, 또 미술이 동시대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서 기능할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직접 혹은 여타의 매체를 통해 대면한 당대 및 역사적 사건과 현상에 대한 문제적 시각 - 거기에 반응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사유 - 그런 사건과 현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 - 그리고 그 사건의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바탕에서 발화發話했다. 현실에 반응하는 자신의 시각과 인식을 소재에 맞는 형식으로 형상화하고, 주제에 어울리는 소통방식을 시도했다. 내용에 따라서 재료나 형식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때그때마다 작업스타일은 달라졌다. 특정한 방식으로의 게릴라식 개입과 탈주는, 당연히 자기복제적 매너리즘의 반복을 배제하면서 장르문법의 정형화된 틀로부터도 벗어났다.


이태호_근대 짱돌의 역사-전봉준의 돌_혼합재료_2010


2. 이태호는 조각을 전공했다. 그러나 초기작업 약간에서만 조각적 흔적이 있을 뿐, 주로 일상에서 채집한 온갖 레디메이드 혼합재료와 시각이미지로 문자·사진·데꼴라쥬·몽타쥬·이야기조각·설치·혼합기법·타이포그라피·영상·스텐실·실크스크린·목판화·T셔츠·거리미술·설치·퍼포먼스…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형식들을 파노라마처럼 변주했다. 작품이 소통되는 장소도 전시장으로부터 길거리에 이르기까지 구분이 없다. 그만큼 다채롭다. 또 자유롭다. 언뜻 보면, 40년을 진행한 작업이 어떤 게 '이태호的'이고 또 '이태호式'인지 종잡기 어려워도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그의 다양한 스타일을 관통하는, 가공하지 않은 현실미학이 드러난다. 현실을 향해, 역사를 향해, 미술을 향해, 우리들의 의식을 향해 던지는 '짱돌'의 미학 말이다. ● 짱돌은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다. 잘 다듬어진 조약돌과는 달리 깨어지고 모가 나서 못생겼다. 무엇을 두드리는 도구이거나, 그 스스로 특별난 것 없는 흔한 존재이거나, 강자에게 항거하는 약자들의 돌팔매를 위한 원시적 무기 이미지다. 이런 짱돌을 작업의 소재이자 작업내용을 견인하는 의미론적 단서로 상정하는 건, 작가 자신의 계급성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특정한 대상에 저항과 공격성을 담보하고 있어서다. 물론 그 짱돌의 공격 대상은 불의한 권력, 폭력적 역사, 사람들 내면의 부조리한 모순, 허위로 포장된 미술도 된다. 그러니까 여러 작업 경향을 가로지르는 이태호의 현실미학은 자신의 작업을 짱돌로 대체하려는 작가적 의도가 그 바탕임을 노정하고 있다. ● 위에서 언급한 여러 작업 스타일의 등가물처럼, 이태호는 지난 40여 년간 여러 직업도 전전했다. 학부시절 소설가 등단·조각가·잡지사 기자·미국 유학 시절 노동자·미술평론가·미대교수·국제미술전 기획자·공공미술기획자·번역가·작가 등 고정되지 않은 이력들이다. 작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작업을 유지하자면 시공간적·경제적 조건에 맞는 작업 방식이 필요해서 이태호 특유의 작업스타일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잡지사 기자시절엔 잡지사진과 글씨를 재배치하면서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을 직시한 꼴라쥬나 편집을 응용한 작업을, 가난한 유학생시절엔 학교작업실에서 버려진 조각재료들을 활용한 입체를, 그리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는 가볼러지(garbology)적 도시생태학의 관점에서 버려진 폐품을 재활용하며 역으로 동시대적 한국사회와 일상적 문화를 연역해내는 「상패」와 「책읽기」연작 등의 작업을, 대학에서 근무하던 시기인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때엔 학생들과 공동작업한 스텐실 기법의 그래피티와 영상작업을, 세월호 정국에선 그래피티와 T셔츠 등을, 이후 광화문 탄핵시위 때는 다큐멘터리 현장사진을, 그리고 최근에는 목판화벽보 붙이기 거리미술작업을 하고 있다. 직업을 통한 사회적 경험이 작업소재로 상당 부분 활용된 모양새다. ● 다종다양한 직업편력만큼이나, 그리고 고착된 미술제도에 대한 일탈의 의지만큼이나, 그의 작업은 특정한 양식이나 스타일로 구획 지을 수 없게 전개되어왔다. 래디컬하고 즉발적인 형식을 창출하고 구사해온 이태호의 이런 게릴라식 작업은 당연히 특정한 스타일이나 고정된 양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진술도 중언부언하는 관념이나 겉멋으로 포장된 미사여구의 수사를 배제한 채 간단하고 단호하다. 미술행위를 하는 이유와 태도에 의해서 자신의 미학적 입장이 선명하게 결정 났기 때문이다. 거기엔 선험적으로 양식화된 관념적 스타일이 개입할 자리는 당연히 없다. 현실과 사유와 작업이 자연스럽게 통일된 주지적인 실천의 과정이 개념으로 전치되었을 뿐이니까. 살아있는 과정의 기록이자 증빙, 그 결과로서의 사회적 지향성이 이태호에게 있어서는 작업인 셈이다. ● 전반적으로 푸어아트(Poor Art)나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와 같은 날것에 가까운 질료성과 거기에 반응하는 순발력이 두드러지는 것은, 미디어보다는 메시지를 중시해서 당대적 사건과 현상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비정규군 같은 발언 본능 때문일 게다. 물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 기능과 의미를 상실한 채로 용도가 폐기된 상품은 교환가치라는 '아우라'를 상실한 것들이다. 그런 레디메이드 주검들을 문화적 부장품이나 기표들로 재배치하는 것은, 그 '쓸쓸한' 아우라의 사체가 현실을 역으로 반영 할 수 있는 오브제라서 그렇다. 거세된 물신성에서 바로 조금 전까지의 삶을 냉정하고 리얼하게 반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재료는 이태호가 구사할 수 있는 적절한 음소이자 어휘로 손색이 없다. 일상에서 채집한 질료로부터 곧바로 작업으로의 이행은 제작과정과 기타 시공간적 전시조건을 부담 없이 만든다. 작업의 핵심 개념인 소통으로 직진할 수 있는 속도를 확보한다는 것이고. 정형화된 소비적·타성적·습관적 작업 관습이나 제도에 매몰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 이렇듯 작업을 관통하는 토대에는 이태호가 일상에서 대면하거나 체험한 개별적 사건과 더불어, 한국근현대사를 가늠하는 대하적 서사의 맥락화와 재구성화라는 미학적 통찰이 분모로 깔려있다. 그것은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그의 성찰로부터 기인한다. 착종된 근대성(Modernity), 근대성의 허위가 구축한 탐욕스런 자본주의, 천박한 자본과 결탁한 마초 권력, 그 결과 비뚤어지고 왜곡된 시민의식 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떻게 작업으로 드러내고 관객과 교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미적 돌팔매가 바로 그의 '짱돌미학'인 셈이다. ● 바로 그 지점에서 이태호가 궁극적으로 주목한 목표점은, 작가만의 관념적 세계에서 주물러진 채로 고립이 '신성神性'으로 고체화된 한국현대미술의 '소도蘇塗'로부터 속세로의 탈주다. 이는 미술에서 누락되었던 사회·역사적 지점에서의 타자와의 교감과 대화의 추구다. 기실 그랬다. 한국현대미술은 작가만의 관념과 미적 양식만 남기고, 광장의 살아있는 화용론적 언어들을 거세시켜 왔다. 그 결과 그곳에는 타자와 단절된 작가의 독백과 사물의 방백만이 자리했다. 우물 안 고립의 성채는 사회적 소통을 차단한다. 공감을 위한 공동의 장에서라야 관객과 수평적 만남이 가능하고, 그런 공감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열림을 지향하는 미술행위의 단서다. 대중들과 유리되지 않은 일상적 재료와 내용과 언어로 짱돌을 던지는 이태호의 어법과 행위는, 그래서 생생하고 자연스럽다. ● 위의 기술로 보자면 이태호는 천성적으로 리얼리스트다. 그러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서술하거나 재현하는 자연주의나 기계적 리얼리즘으로부터 일탈한 다양한 양식적 지점에선 모던한 실험적 형식주의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그는 김수영과 닮았다. 김수영은 자기반성과 문학적 성찰에 입각한 모더니스트인데, 그의 통찰의 범주에 동시대 사회에 대한 참여와 비판이 있었기에 그는 독자들의 공감에 의해 진화한 리얼리스트로 '해석'되고 '수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이태호에게 있어서도 이런 리얼리스트/모더니스트란 단선적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자기가 감지하고 인식한 바대로 정직하게 말하고, 관객 또한 주체적으로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이니까. 이태호의 작업을 특정한 진영이나 범주에 가두고 규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그는 스스로의 본능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고 발언하는 작가일 뿐이다.



이태호_대통령상_필름_00:05:04_2006


3. 1980년대. 한국에서의 수컷들 삶은 새벽 사우나에서 자신의 육체를 훈증으로 쪄야만 할 정도로 자해(self-injury)적이었다. 어제의 피로와 간밤의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스트레스의 원인인 생존투쟁, 그 이면의 정치사회적 구조와, 개도국 시민성과, 오로지 경제적 욕망만을 향하는 행태에의 반성이나 성찰은 간과하면서, 그저 지친 몸뚱이에서 수분을 강제로 배출하는 행위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개별인들의 일상적 행위이자 사회문화적 현상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과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삶을 못살게 구는 이율배반적인 실존의 현실에서 살았다는 반증이었다. 밤새 술집을 거쳐 새벽 사우나에 다다른 지친 영혼과 육체는, 그래야만 한국 중산층의 도회적 계급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 이런 사회·직장생활을 하는 가장들의 소돔이자 유토피아를, 소위 중산층이라는 모순된 삶의 한 단편을, 이태호는 전자렌지 속 시뻘건 조명아래에서 드러눕거나 앉은 고깃덩이 인체인 「사우나」(주1)란 작품으로 제시했다. 당시 한국미술계에서는 다소간 낯선,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활용한 풍유였는데, 형식과 주제의 일치가 선명한 작품이었다. 웰메이드(well made)의 조각적 장인성을 거부하고 대충 깎은 미니어쳐 목각 인체, 기성품인 전자렌지의 사우나로의 전치, 그러면서도 기존 조각형식에서 일탈한 개념적 형상성이 구축한 명징한 서사적 주제 때문에 그 비판성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나의 작가 이태호에 대한 기억은 이 작품의 동시대적 전형성으로부터였다. 강렬했고 또 반복적인 장인성에 매몰되어있던 당시 한국 미술계의 보수적 행태에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 그러나 이후 이태호의 작품은 볼 수가 없었다. 1984년 「사우나」를 제작할 당시 그는 그룹『현실과 발언』의 동인이자, 미술잡지『계간미술』의 기자였다. 그런 그가 1986년 서른 중반의 늦깎이로 미국유학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 말 미국에서 돌아온 그가 미술평론가이자 대학교수로 지낸다는 소식만 어디선가 들었다. ● 그를 다시 만난 건 재작년 그가 목판화를 하면서다. 선배 손기환 형이 그의 목판화 작업을 도와주면서 함께 자주 만나고, 또 2018년 그의 동덕갤러리 개인전 『근대 짱돌의 역사』전을 통해 미처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작업궤적의 전모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유실된 「사우나」 원작 대신, 나중에 재제작한 「사우나」를 다시 대면하면서. ● 『근대 짱돌의 역사』전의 인상은 이랬다. 70년대 이래 뭔가 허공에 떠도는 것 같았던 한국의 개념주의(적)미술(주2)에, 명료한 현실적 메시지가 착색되어지는 느낌. 작품과 관객인 나 '사이' 행간의 소통프로세스에서 정치적 맥락을 발생시키는 그런 소통궤적의 확인. 장르구분을 무화시키는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면서 자신이 대면한 현실에서의 동시대적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날 선 언어들의 향연 같다는 느낌. 잘 다듬어지거나 화장되지 않은 결과물에서 배어나는 작업에 대한 원초적 사유가 돋보였고, 거기에 비례하는 날것의 질료와 형식을 통해서 물질을 넘어서는 동시대 삶의 체험적·현장적 메시지가 선명하게 개념화되었다. 전시가 왜 필요하고, 전시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시장 미술의 좋은 예였다.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발언하면서도, 제도화된 조형문법으로부터는 탈피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신선했다. ● 이 전시 이후 최근 이태호는 목판화를 찍거나 인쇄해서 거리에 벽보처럼 붙이는 현장작업을 한다. 목판화란 장르의 강력한 표현력을 스트리트 아트의 전달방식과 결합한 것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과 더불어 이미 그 장르적 효용도가 다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던 목판화의 매체적 장점을 거리로 장소이동을 함으로써, 개별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목판화의 '표현의 장르' 개념을 적극적인 '소통의 미디어' 로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행위다. 이태호 본인이 판각한 시인 김수영의 초상 목판화와 그의 주요한 시와 산문의 한 구절인 "시여, 침을 뱉어라",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등의 타이포그라피를 스텐실 기법으로 첨가해서 거리 곳곳에 부착했다. 안국동·인사동·신촌·홍대입구·압구정동…. 여기에 대한 그의 작가노트 한 구절을 보자.


이태호_사우나_혼합재료_36×52×35cm_1984


『어떤 후배가 물었다. "왜 김수영을 거리에 붙이고 다닙니까?" 내가 대답했다.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 물건을 사라는 광고밖에 없어서.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 라는 메시지만 있어서. 그 소리밖에 없는 거리에서 그것에서 자유롭게 내 목소리를 내보고 싶어서. 내가 생각하며 살고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나만의 표정을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 목소리로 증명하고 싶어서. Commodity(상품)로 뒤덮인 거리에서, 그것을 비집고 들어가 Humanity(인간)의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서. 공기와 물마저도 사고 파는, 구매(상품)와, 소비(물건)와, 소모(시간)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구매와 지불이라는 자본주의적 질서'에서 벗어나 햇빛과 나무와 그림자라는, 그저, 혹은 거저 주고받는 자연과 인간의 질서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늘날에도 세상에 예술과 문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그저, 혹은 거저 주고받는 상태여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런 상태를 동경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이 거리의 작업은 대중들에게 무엇을 "하자!"는 수직적 접근이 아니다. 김수영의 얼굴과 그의 산문과 시의 짧은 문구만 인용해 놓았을 뿐이다. 김수영이 현실을 사유하는 태도를 지금 우리들의 일상에 다시금 던져본 것이다. 진부하게 반복되는 우리 삶의 양태와 매너리즘을 "툭"하니 건드려서 자극을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이태호 자신부터 현실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되새김질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술 이전의, 삶에 대한 그 나름의 호흡 방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작가인 한 어쩔 수 없이 미술로 연계된다. 미술이 그의 삶의 기록이자 그것을 담는 미디어니까. 작가인 그는 그 삶의 증언자이자 결국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 이렇듯 벽보와 같은 일상적 경험의 질료가 작업으로 연결되는 통로에는, 여전히 궁극적인 주제를 향한 그의 미적 태도와 현실이 통찰로 버무려져 있다. 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작업을 위한 '온몸'이 체질과 반성에 의해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앞선 개인전에서의 다양한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소재와 내용의 변주를 취한 것이다. 현실과, 자기 자신에게조차, 게으른 머무름을 용납하지 않아서다. 진부함에의 거역, 그것은 삶과 작업에 대한 일종의 폭포 같은 에너지다. 이 부분에서 작가 이태호는 김수영과 닮았다.



이태호_상패-전두환씨에게_혼합재료_28×34cm_2002


"김수영 글의 근본 에너지가 속도라면, 이 속도는 어떤 일정한 곳 혹은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곳으로부터 다른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데 그 의미를 둔다. 이 나아감-움직임의 역학을 김화영은 '벗어 버리다' 혹은 '날아간다'는 단어에서 찾는다. 움직임의 동적 관계는 '삐뚤리게 맺어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표출하는 마찰력'을 전제한다. 상호 흡수되거나 순화되는 것이 아니라 충돌됨으로써 그것은 어떤 의미의 생성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나아감-전진과 상승의 에너지는, 그가 정확하게 적은대로, 시인에게 있어 '초월의 세계가 아닌 땅의 세계, 생활과 현실에서' 추구된다." _시의 희생자 김수영, 문광훈, 생각의 나무, p54



이태호_푸른 김수영-벽보_목판화_현장설치_2019


"그 어떤 곳으로부터 다른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작업의 변주와 탈주의 방향과 에너지를 통해서 이태호도 '초월의 세계'가 아닌 '땅의 세계, 생활과 현실'을 지향하며 자신의 미적 실천을 강화시킨다. 그 과정은 이성적이다. 현실에서의 소재를 포착하는 것은 그의 갈등과 분노의 감정에 의해서겠지만, 작업과정에서의 언어와 형식은 절제되고, 마침내 관객에게 노출되는 결과물은 자연스레 '거리 두기(소격효과)'의 인지적 방식을 작동한다. 작품에 몰입하지 말고, 관객 스스로의 인식으로 제시된 작품을 경험(해석)하라는 의도다. 작가가 현실/미술과의 관계에서 그랬듯, 관객도 작품과의 비판적인 마찰로 자기식의 주제를 간파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 이럴 때 소통은 작가로부터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계몽적 메커니즘에 기대지 않는다. 관객의 관념과 충돌하고 또 수용되는 의미화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관객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관객 고유의 권리에 의한 개념화 과정이다. 소통의 혁명이랄까, 이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모호한 서정적 '분위기'나, 교감 과정에 제멋대로 군림하는 '아우라'의 권위를 해체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전달 매개체일 뿐 그자체로 메시지가 될 수 없다는 이태호의 자기미술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다. 그런 점에서 작업의 초월적·신화적 창조성에 대한 이태호의 회의는 관객과의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자동 전환한다. ● 일테면 『근대 짱돌의 역사』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간단한 문구와 돌멩이일 뿐이다. 작가의 어떤 손맛도 개입되지 않았고, 전시된 오브제와 프린트된 설명문은 감정 없이 드라이하다. 별도로 연출한 분위기도 없다. 관객은 그 가공하지 않은 물질인 돌(faktura)과 그 돌에 대한 비물질적 정보(factography)를 바탕으로, 작가와 동등한 선상에서 짱돌을 해석한다. 그리고는 자의적으로 기의를 찾아내게 된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각자의 영역에 있고, 아우라가 제거된 비물질성의 매개체(작품)는 관객의 인식 과정에 복무하는 것이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송수신의 의도가 합치되든 아니든 간에 작품은 사람 사이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 수평적 소통의 '관계성'에 대해 또 다른 예의 작업으로 「대통령상」이라는 풍자적 비디오 작품이 있다. 미술계의 고착된 관습에 대한 거역을 시도한 것이다. 작가로 출세하는 뻔한 길과 뻔한 권위와 뻔한 관전(국전, 미술대전)제도의 허위를 B급 대중문화적 코스츔으로 풍자함으로써, 주류 제도미술의 허위와 속물성을 반어적으로 풍자했다. 동어반복적인 테크닉과 자기표절을'스타일'이라는 레토릭으로 세련되게 포장하고, 작품보다는 작품외적인 출세와 명예에 집착하며, 허울뿐인 스펙을 예술성과 동일시하는 한국미술계의 풍토를 비판한 것이었다. 목판화 벽보 및 스텐실 벽화작업은 이런 작가적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중들의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거리미술(Street Art)이다. 자본주의 주류미술방식과의 마찰이자, 그 마찰력을 기존 제도권미술구조에서 이탈하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내용과 형식이다. 또 소통의 문화정치학적인 기표이자 기의이기도 하다.


이태호_현실과 발언의 꿈_혼합재료_42×33×30cm_2017


절대적으로 고정된 미술과 미학은 있을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따라서 미술에 대한 문화적 개념은 바뀌고 또 새롭게 도출된다. 삶의 양식과 문화적 조건에 따라 시視방식 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의 존재론적 가치도 변한다. 미술과 당대 현실과의 의미론적 조우, 그게 미술의 진화다. 평범한 이 말이, 관념이 신앙처럼 견고하게 이데아화가 된 한국주류미술계엔 '쇠귀에 경 읽기'일진 모르겠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이태호는 그렇게 작업해 왔다. ● 곧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이태호는 1980년 이후 40여 년을 그렇게 줄탁동시啐啄同時와 줄탁동기啐啄同機로 한국미술과 현실의 모순과 허위, 그 단단한 껍질에 미학적 '짱돌'을 던져왔다. 자신도 미술도 거듭나기 위한 그의 깨우침이 사회문화와 역사에 대한 두드림으로 확장된 실천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과 현실에 대해서 할 말과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는, 청년이다. 한국사회의 허위에 거침없이 짱돌을 던지는, 작가다. ■ 김진하


각주주1) 1984년 제작되어 『현실과 발언-행복의 모습전』에 출품된 작품. 이 작품은 이태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분실되었고, 2005년 재제작한 작품이 현재 남아있다.주2) 물론 1980년대 이후 일련의 현실주의적 작업들에서 이런 경향은 있었다. 이태호가 속해있던 동인인 『현실과 발언』을 필두로해서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쳐 지금의 젊은 작가들도 있다. 다만 이태호를 지목해서 말하는 이유는, 지난 40년을 시종일관 같은 태도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어서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비판적 개념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작가는 드물다. 주재환·김정헌·이태호·손기환·박불똥과 같은 직접적 이미지 형과, 이불의 초기작업 '화엄'과 같은 비유형, 박이소와 같은 해석학적 코드에 의한 작업 등 소수로만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Vol.20200209b | 이태호展 / LEETAEHO / 李泰豪 / mixed media



이태호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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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규 (학고제 대표)  (0) 2016.03.06
박 건 (서양화가)  (0) 2016.03.06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4년 6월26일 서울 경운동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의 다섯번째 주제전 ‘6·25전’ 출품작으로 첫선을 보인 <디엠제트>는 작가 김용태의 대표 걸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사진콜라주라는 새로운 형식과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의 사진’을 내건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문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훗날 재전시회 때 원본이 아니라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사진작가 고 김영수가 찍었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여섯번째로 조각가 이태호씨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주제전 ‘6·25전’에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김용태의 대표작 <디엠제트>(DMZ)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진 190장 콜라주 작품 ‘DMZ’
사진속 한국 여성과 미군 통해
휴전·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호소력있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훗날 “여성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진들을 없애 원본은 이제 없다
‘DMZ’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위에서 폭발하고 사라졌다

 

■ ‘현실과 발언’의 청년시대

 

 

1980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흉흉하고, 불길하고, 우울했던 해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는 내내 계엄령 아래서 살았던 것 같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그 엄청난 소식도 ‘카더라’와 소문에 의해 더듬더듬 알게 됐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고, 친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갑자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해 12월 말 밤늦은 귀갓길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누워 있던 그때 ‘현실과 발언’의 최민과 성완경 두 분이 찾아왔다. 회원으로 같이 활동해보자 했다. 두 분의 방문 자체가 황송해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했다.

 

 

‘미술은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게 당시 미술인 대부분이 인정하는 정답이었다. 미술은 냄새나고 구차스런 현실을 떠나 어떤 고상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발’은 그 이름에서부터 정답을 무시하고, ‘현실’ 뿐만 아니라, ‘발언’까지 들고 나온 미술그룹이어서 당연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 창립전이 ‘촛불전시회’가 되고, 결국 취소되는 사태를 겪은 뒤 나는 현발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꼼짝없이 모더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작가주의에 찌든, 이리저리 집단으로 몰려다니거나, 누굴 대표해 발언하거나, 또 그런 일로 쓸데없이 주위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름 깐깐한 미술쟁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현발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참여하고 있던 여러 미술그룹 가운데, 현발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는 ‘학벌’이니 ‘동문’이니 하는 게 없었고, 강요되는 ‘선후배 서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 앞에서 그런 것들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현발은 재미있었고, 지적 자극과 도전이 있었다. 회원들은 음주가무에 있어서도 탁월했지만, 토론과 의견 개진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그리고 미술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연습장이자 경기장이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많은 회원들이 당시 미친 듯한 속도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부는 그러한 현실을 강요하거나 주도하는 정부 혹은 대기업 등 권력에 예리한 관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발의 주제전 ‘제2회 도시와 시각전’과 ‘제3회 행복의 모습전’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4회전의 주제는 ‘6·25’로 정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6·25는 최대의 사건이었지만 한국 미술에서 그것을 다룬 작품은 실로 미미했다. 그러한 한국미술사의 기이한 현상을 두고 자성하는 의미의 토론을 하다가 ‘6·25’가 그 해 전시의 주제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용태의 작품 ‘디엠제트’의 폭발

 

 

그 ‘6·25전’에 김용태는 작품 <디엠제트>(DMZ)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용태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이 촬영한 뒤 찾아가지 않고 있는 사진들을 구해 왔다. 그리고 검은색 배경 위에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어 대문자로 ‘DMZ’를 만들었다. 모두 800여 장을 수거해 왔다는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사진은 180여장으로, 크기는 3×5에서 11×14인치까지 다양했다.

 

 

되돌아보니, 작품 ‘디엠제트’를 나는 3회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났다. 맨 처음은 역시 현발의 <6·25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84년 인사동 아람미술관에서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88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민중미술전>(민중 아트-어 뉴 컬처럴 무브먼트 프롬 코리아)에서였다.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201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30년전>이었다.

 

여기서 작품 <디엠제트>의 특징과 내 느낌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 감동은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이 아니다. 또한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처럼 작가가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조작하거나 합성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사진을 김용태 작가가 발견해 수집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견된 사물’이다. 그 사진들은 원본 자체에는 아무런 조작 없이, 작가에 의해 디엠제트라는 글자로 배열됐을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차용’ 방식이다.

 

 

그 사진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8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을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도 모더니즘의 ‘보편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지닌 호소력과 설득력이다. 그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개념과 기호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는 일종의 ‘개념미술’이다. 그것은 한국의 당장의 현실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라는 추상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과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가 여전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은 미군 병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한국의 여인들과, 병사의 배경에 있는 풍경들에 관심을 간다. 사진 배경에는 한국의 기와집과 초가집 등 그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가 하면, 국적 불명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 ‘키치’들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 앞의 미군 병사들이 비선택적으로 한국에 와서 삶의 한동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시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는 배경의 글에서 한국을 지옥이라 했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도 나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글에서 한국은 우리가 사는 한국이 아니다. 군 복무로서 한동안 보내는 그들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제대 뒤 흔히, 근무하던 부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사진들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는 병사들의 포즈나 배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 그 구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특별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한국 여인이 흑인과 백인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진이다. 완전히 다른 피부색의 두 아이를 가진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다.

 

 

지난 ‘현실과 발언 30년전’의 인터뷰에서 김용태 작가는 전시회 이후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사진에 나오는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사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의 원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 뒤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사진작가 김영수의 사진 복사본이다. 이는 개념미술가로서의 김용태를 잘 드러내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작품=물건=상품=매매’라는 도식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디엠제트’ 이후, 미술 현장을 떠났다. 그 대신 삶의 현장으로 갔다. 문화를 통한 사회변혁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였다.

 

 

■ ‘디엠제트’를 입체작품으로 세우자

 

 

김용태 작가가 투병중일 때 나는 작가에게 작품 ‘디엠제트’를 입체로 제작해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입체작품 <러브>(LOVE)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 ‘LOVE’란 글자를 회화로뿐만 아니라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있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디엠제트’가 ‘러브’보다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조각가인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 함께 일도 하고 재밌게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용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제 이 제안은 수사를 넘어 하나의 필수 사업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그의 작품 ‘디엠제트’가 기념비로 서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되어,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래서 디엠제트도 사라진 뒤, 그 땅 한가운데에 김용태의 ‘디엠제트’ 기념비가 서는 것을.

 

 

이태호 / 현실과 발언 동인·경희대 교수

 

 

1984년 ‘6·25전’ 출품작 <디엠제트>에 쓰인 실사 사진 가운데 일부.

 

 “우월감 젖은 미군의 점령군 행세 폭로한 것”

 

용태형이 말하는 ‘DMZ’

 

 

“다섯번째 주제전 ‘6·25’을 2개월 남짓 앞둔 1984년 4월의 어느 일요일, ‘현실과 발언’ 회원 일행은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봄이었으나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동두천 기지촌’에라도 가보자는 한 회원의 제안에 따른 길이었다. ‘아직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어쩌면 특수한 문화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을 품고서였다.”

미술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인 ‘디엠제트’(DMZ)의 창작 과정과 ‘6·25’전의 의미에 대해 고 김용태 선생이 직접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현실과 발언>, 열화당 펴냄

 

 

4월 동두천 기지촌 답사 때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김용태 선생이 사진관을 순례하며 수집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들의 기념사진들이다.

 

 

 

사진속 체념한듯한 여성의 사진
뇌리에 깊게 남아 작품 만들어
미군 장교들이 사진 뜯어내기도
“진정한 작품 이해 없었다”고 회고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간 걷다 보니 ‘내국인 출입 금함’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골목에 당도했다. … 우리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장면은 사진과 진열창 속의 많은 컬러사진이었다. … 그 사진들 중에서 국제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웃고 있었으나 특히 여자의 표정은 삶을 체념한 듯한 우울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계속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두천을 다녀온 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 어느 날 중앙청 앞 신호등에서 멈춘 출근 버스 속에서 본 풍경이 자꾸만 아롱거렸다. … 조선조 태조 4년에 창건된 광화문, 그 지붕의 잿빛 기와와 화려한 단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그 아래쪽 붉은 대문, 노랑머리의 키 큰 외국인과 곱슬머리의 젊은 한국 여인, 해태상, 동상마냥 서 있던 전투경찰의 자세, 일제 때 지어진 중앙청 건물, 그 뒤쪽의 장엄한 인왕산 등등.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동두천 사진관에서 느꼈던 ‘분단의 현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김용태는 혼자서 동두천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진열창 속의 사진들을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관 주인과 장기·바둑·화투를 놀아 주고 때로는 막걸리를 대접하며, 한 장에 300~500원씩 흥정하거나 1천~2천원까지 지불하며 모두 800장을 모았고, 그 가운데 190여장을 골라 출품했다.

 

 

마침내 그해 6월26일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6·25’ 주제전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진 콜라주 형식의 ‘디엠제트’는 전례없는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정작 김용태는 관객의 반응을 두고 “내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왜 이런 사진들이 미술전시회에 나와 있는가란 의구심과 6·25란 역사적 주제와 이 사진과의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많이 받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이에프케이엔>(AFKN)의 프로듀서였던 테리 크라우제의 제안으로, 85년 2월 한달간 미8군 영내에서 ‘2인전’이 열렸는데 첫날부터 일부 미군 장교와 대부분 한국인인 그 부인들의 항의로 사진들이 떨어져 나갔고, 특히 미8군 최고층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서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불쾌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용태는 “동두천 사진들은 그들이 우월감에 젖은, 즉 점령군이란 명목 아래 과시해온 많은 행위들 중에 하나의 표시를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기고문을 마무리지었다.

 

 

[한겨레신문]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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