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공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아래) 김충현, 경주 통일전 삼국통일 기념비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정말 그렇다. 어떻게 미치지 않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한 우물만 파면서 뭔가 일가를 이룬다는 것. 일가(一家)라는 말, 아주 멋있다. 집념, 그 불굴의 의지, 인간승리의 모습,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불광불급, 이 신조어가 가슴을 흔든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너무 약아빠진 사람들로 넘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우직한 바보가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바보가 산을 옮겨놓는다. 원래 이 말은 어리석은 사람을 야유하기 위해 쓴 말이다. 하기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산을 옮기려 할까. 하지만 우직한 집념은 산을 옮겨 놓을 수 있다! 진정한 바보만이 이룩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우공(愚公)이 그립다. 약아빠진 세태에서 바보가 더욱 그립다.

예술가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집념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의 ‘한 우물 파기’는 빛나는 성과물을 낳게도 한다. 작가에게는 비록 가시밭길이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동을 안을 수 있는 즐거운 자리가 된다. 그래서 일가를 이룬 작가의 전시장은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근래 전시장을 순례하면서 나는 몇 명의 ‘바보들’을 만났다. 백악미술관에서 일중 김충현의 현판 글씨 개인전(1.15-2.25)을 보았다. 공공기관으로부터 개인 택호에 이르기까지 일중은 많고도 많은 현판을 썼다. 나는 일중의 글씨를 좋아한다. 특히 그의 예서체를 좋아한다. 힘이 있으면서도 조형적 결구는 정말 예술이다. 게다가 한글 서예까지 일가를 이루어 감동을 안긴다. 추사 김정희는 말했다. 붓글씨 연습하느라고 몽당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아하, 추사 같은 거목도 연습, 또 연습, 정말 미치광이 흉내를 냈다. 한 우물 파기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재미화가 최동열(3.5-3.29, 아트링크갤러리)은 매년 몇 달씩 히말라야 설산에서 체류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해발 수천 미터의 움막에서 히말라야의 정기(精氣)를 화면에 담는다. 추위와 싸우면서 화가는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화폭에 듬뿍 담는다. 나그네가 아닌 거주자의 입장에서 현장과 씨름하고 있는 모습, 작품 속에서 하나의 울림으로 전달된다.

안종연은 개인전(2.27-3.22,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에서 ‘모하의 빛’을 펼쳤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그의 작업은 눈길을 끈다. 렌티큘라 작품을 비롯 빛을 이용한 설치작업까지 집념의 집적이다. 안종연은 유리구슬 안에 LED 장치를 넣는 기술을 개발하여 오묘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기술은 특허를 받은 것이다. 역시 오랜 세월의 적공(積功)에 의한 결과이다. 사진작가 조문호는 ‘청량리 588’이라는 특이한 소재로 개인전(2.25-3.10, 아라아트센터)을 개최했다. 1980년대의 사창가 풍경이다. 작가는 현장의 진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창녀촌에서 살았다. 하여 그곳 여자들과 인간적 교류를 트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협조 아래 카메라를 들 수 있었다. 집념과 의지가 없었으면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 박영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리 작가’이다. 그는 평생 보리라는 소재와 씨름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초기의 사실적인 묘사로부터 후기의 추상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보리(麥)는 이제 보리(菩提) 즉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렀다. 평생 집념의 세계는 ‘보리 작가’로서의 일가를 이루게 했다. 이번 개인전 ‘생명의 소리’(3.18-3.24, 인사아트센터)는 이 점을 보여준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홍지동 상명대 입구로 이전하여 개관 기념전을 열었다. 그동안 ‘남의 집 살림’으로 힘들어하더니, 드디어 내 집 마련하여 박물관 문을 연 것이다. ‘바보 김달진’을 위해 미술계의 원로 중진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여 개관행사를 축하했다. 김달진 관장은 정말 ‘바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술자료와 평생 씨름하면서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바로 우공이산의 산 증인이다. 그는 정말 산을 옮겨놓았다. 엄청난 신념이고 사명감이다. 우리 시대 미술계의 대표적 우공 김달진, 나는 같은 시대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우공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불광불급.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주위에 ‘미친 사람들’이 박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 볼 가치가 있다. 출세주의자들의 장기판 사회에서 일탈한 괴짜들, 그 바보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는 풍요로워진다. 정말 미치지 않고 어떻게 미칠 수 있는가. 광인(狂人) 만세! 불광불급! 아, 나도 미치고 싶구나.


[스크랩] 서울아트가이드 4월호 .


식민지 시대는 그곳을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의 왕궁을 놀이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섰다. 봄날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이를 즐기고자 상춘객들은 대거 몰려갔다. 아, 그런데, 창경원에서 소싸움도 했다고? 금시초문이다. 해방을 맞이한 1948년 여름, 창경원에서는 소싸움을 구경시켜 주었다. 당시 소싸움은 대중용 볼거리였던 모양이다. 창경원에서의 소싸움, 이런 사실을 알려준 것은 고암 이응노이다. 젊은 시절의 고암은 숱한 드로잉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제의 소싸움 그림이었다. 현장에서 속도감 있게 연필로 그린 소싸움 장면이 시대를 증거하고 있다. 현재 창경원은 본명인 창경궁으로 바뀌었고 동물원과 식물원도 이전되었다. 소싸움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술은 시대의 산물인가 보다.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고암 이응노 드로잉 1930-1950년대’(1.27-3.1) 전시, 참으로 획기적이다. 이들 드로잉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발굴 작품이다. 드로잉은 무려 600장 가량, 아니 앞 뒤로 그린 것 까지 포함하면 약 800장 정도의 대량이다. 그것도 1940년대 드로잉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렇듯 많은 드로잉을 남긴 화가가 이 땅에 있었던가. 감동 그 자체일 따름이다. 이들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젊은 시절 고암의 족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암은 치열하게 정진했던 작가였다. 드로잉의 현장은 농촌의 자연풍경으로부터 도시 뒷골목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인 인물화부터 누드 크로키까지 고향 홍성에서부터 일본 명승지까지, 종횡무진 다양한 소재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 고마운 점은 상당수의 그림에 제작일과 제작 장소를 표기했다는 점이다. 이 기록 때문에 우리는 고암의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과거라는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창경원에서의 소싸움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번 고암 드로잉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고암 전시 이외 권진규, 송영수, 김세중, 문신 등의 근대조소작품전과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의 근대 채묵화 4인전, 엘리자베스 키스, 폴 자쿨레, 릴리안 밀러 등 근대기 외국인 판화가가 묘사한 조선의 풍물, 그리고 해외 현대작가 전시 등이 아트센터 전관을 화려하게 꾸몄다. 썰렁한 겨울에 미술 애호가들에게 안복을 안겨준 전시였다. 지난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가나문화재단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의 원력에 의한 산물이다. 화랑과 옥션을 운영하면서 쌓은 미술의 공공재(公共財)를 사회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은 작가레지던시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장흥아틀리에와 파리시떼데자르의 작업장을 작가들에게 무상 제공한다. 벌써 입주작가를 선정하여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전시의 경우, 공립미술관에서 개최했음직한 내용이지만 아직 그런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것들을 다룰 예정이다. 그만큼 컨텐츠의 수준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저러한 문화사업을 위하여 이호재 회장은 자신의 부동산, 주식, 소장 미술품 등을 재단에 출연시켰다. 화상 출신의 이와 같은 문화사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국내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향후 미술관 건립까지 계획하고 있는 바, 가나문화재단의 역할에 기대를 걸게 한다.


고암 대전, 홍성, 예산 …?
이런 분위기에서 마련된 전시, 고암 드로잉 작품의 발굴 전시는 재단의 성격과 향후 진로를 짐작하게 한다. 다시 고암으로 돌아가 보자. 드로잉 가운데 홍성 생가 마을 풍경이 눈길을 끈다. 고암의 고향논쟁으로 홍성과 예산이 서로 싸운 적 있다. 결국 승소한 홍성은 고암 생가를 복원했고 생가기념관까지 건립하여 지역 문화사업으로 가꾸고 있다. 그런데 추정 복원된 생가와 고암의 드로잉과 차이가 있는 바, 행복한 고민거리 하나가 출현된 셈이다. <자택 마을>을 그린 고암은 지명을 ‘예산군 덕산면’이라고 표기했다. 대전시에는 이응노미술관이 있다. 그러니까 이응노미술관은 ‘고암 담론의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이 주요 업무라고 본다. 하지만 이번 발굴 전시를 보고 대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고암 드로잉 전시는 홍성과 대전을 포함하여 고암 프로젝트의 본격적 발진을 재차 촉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국제무대는커녕 국내 미술시장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하는 고암, 하지만 국제 경쟁력 상위권의 작가, 고암을 다시 봐야 한다. 누가 프로 화가인가. 다량의 드로잉 작품은 후학들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그러고 보니 가나문화재단은 초장부터 작가들에게 커다란 숙제 하나씩을 안긴 셈이다.

‘청량리 588’ 사진전이 시작된 이틀 만에 작품 하나가 팔렸다.
그것도 가난하기 그지없는 서양화가 장경호씨가 샀기에 더 뉴스거리다.

588사진들은 일 이 십만 원 정도의 싼 작품이 아니다. 한 컷에 두 장만 뽑는 오리지널
프린트라 11X14인치 소품 한 점에 300만원이고, 최고는 1,000만원씩이나 한다.

돈이 없어 허덕이며 연이어 전시를 하는 우리 내외가 안 서러워 도와주려는 마음이
앞섰겠으나, 사진을 소장하고 싶은 가치도 알았던 것 같다.

지난 26일 정오 무렵, ‘백련’에서 막걸리 반주에 추어탕을 같이 먹고 올라와서는

두둑한 돈 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며 작품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  놀랐으나, 그 속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건 감동 자체다.
너무 고마워 정우일씨와 화신포차에서 한 잔 한 후, ‘무다헌’에서 한 잔 사고 싶었으나 술값을 먼저 내 미안하게 만들었다.
밤 늦은 시간, 술이 취해 마지막 전철을 타고 오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진집출판으로 우연찮게 연이은 전시를 하지만, 두 달 가까이 정신없이 뛰다보니 그의 탈진상태다.

주변 사람들 걱정처럼 스스로의 대책 없음도 자책했지만, 지난 작업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세월의 무게에 실린 588사진들이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좀 더 부지런히 남기지 못했음도 한스러웠다.

전시 둘째 날에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기자들한테 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고,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기국서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시인 정우일, 홍행숙씨, 무도인 김형진씨, 이종률,  공윤희씨 그리고 이계익선생을 모시고 나온 노광래, 편근희씨를 만났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김준권씨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展, 개막식 및 화집 출판기념회가 지난 10일 오후4시 인사동 ‘아라아트’2층 전시실에서 많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의 작품평, 김윤수, 김명곤, 유홍준, 김명성씨의 축사와  작가 인사말로 진행된 개막식에는 백기완, 손장섭, 황명걸, 신경림, 임재경, 신학철, 황석연, 이애주, 임진택, 이강군, 박홍순, 이도윤, 류연복, 정정식, 이인철, 조윤수, 이태호, 성효숙, 민정기씨 등 2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하여 작품들을 감상하며 전시를 축하했다.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김준권씨의 작품들은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목판에 새겨냈다. 그가 30년간 제작한 작품은 550여 점이지만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선정해 총 250여 점을 선보인다.

아라아트 2층부터 5층까지 4개 층의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이 목판화전은 오는 29일까지 이어진다.

 

 

 

 

 

 

 

 

 

 

 

 

 

 

 

 

 

 

 

 

 

 

 

 

 

 

 

 

 

 

 

 

 

 





윤범모 미술시평 / 올해의 작가상과 사진가 노순택


국립현대미술관은 SBS문화재단과 공동주최로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창작지원금을 받고 ‘공동 개인전’을 개최한 작가는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 4명이다. 이들은 내일의 한국미술을 이끌고 갈 유망주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기야 국립미술관 전시장까지 진출하기 위해 이들의 노고는 얼마나 컸을까. 올해의 작가상은 2년 임기의 운영위원회에서 관리한다. 운영위원회는 작가추천위원회를 관리하고, 여기서 추천된 후보작가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번에도 10명의 후보작가 명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우선순위에 오른 후보작가라 하여 모두가 작가상의 전시장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전시의 성격이 ‘경쟁’구도라는 점이 부담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미술계에서 성장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당락을 결정 받아야 하는 경쟁체제는 정말 부담이지 않을 수 없다. 금년에도 몇몇 후보 작가들은 전시 참여를 거절했다. 4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과정도 쉽지 않지만, 심사위원단 구성과 전시 개최 이후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경쟁구도,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전시방식의 어려움을 절감하기도 했다.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시상식이 있던 날, 예고했던 행사시간이 넘어가도 심사는 끝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참여한 심사위원들끼리의 견해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각 작가의 작업장을 방문했고, 미술관 전시장을 살펴보았고, 또 각 작가마다의 작품설명회도 청취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과정의 치열한 논쟁은 이 상의 엄격성을 반증한다. 과연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이같은 질문에 정답은 있기나 한가. 시각에 따라 작가에 대한 평가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담론 생산의 가능성을 꼽고 싶다. 올해의 작가상은 우여곡절 끝에 노순택 작가가 선정되었다. 이 상을 제정한 이래 사진작가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노순택 전시장의 제목이다. 뭐? 무능한 풍경? 게다가, 젊은 뱀? 이는 무엇인가.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무능한 풍경은 한국사회의 갈등과 비극의 현장에서 기인한다. 오랜 시간동안 노순택은 사회적 쟁점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갈등의 현장, 그곳은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용산 재개발 지역의 참사, 쌍용차 살인해고, 밀양 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사태, 그리고 세월호 참사 현장 등이다. 분쟁과 갈등의 현장에서 노순택은 살아 있는 ‘현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진작품 속에 고정되어 있는 장면은 언뜻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는 현장에서의 기록사진치고는 현장 분위기와 거리가 있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경우 사진은 과연 진실인가. 어쩌면 ‘무능한 풍경’이지 않은가. ‘젊은 뱀’은 카메라를 의미한다. 사진기 발명 170여 년, 미술사에서 사진은 매우 짧은 장르의 하나이다. 오늘날 카메라 성능은 발달되어 누구나 손쉽게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촬영행위는 더 이상 예술일 수만은 없다. ‘젊은 뱀’이 지니고 있는 특성, 과연 무엇인가.

노순택은 카메라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그의 작품에 담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심사평에 의거하면, 노순택은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카메라의 본질과 사진작가로서의 존재 의미를 고민하고 성취도 높은 현장의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P-XIII050101, 2013, Pigment on fine art paper, 100×75.5cm


 

노순택의 사진은 사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분쟁의 현장이라는 특성 이외 카메라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한다. 이 점이 올해의 작가상이 주는 과외의 소득이다. 노순택이 올해의 작가상 수상작가로 결정된 직후, 어디에선가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현장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가 수상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우려감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그동안 ‘국립’ 현대미술관은 현실과 거리가 먼 작품 중심으로 전시사업을 펼쳐왔다. 사람은 현장에서 산다. 현실을 배제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노순택의 수상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수상작가에게 축하를 보낸다.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윤범모 미술시평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설계공모 당선자 : 연초제조창, 존재하다, (주)원도시건축건축사사무소 (주)팀텐건축사사무소


“평생 작업한 모든 작품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 지르고 싶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싶다는 원로작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작가는 많다. 이들의 하소연은 작품 수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보관 문제 때문에 그렇다. 소수의 인기작가야 예외겠지만, 대부분 작가들은 사후의 작품보관 문제로 고민한다. 작품은 애물단지, 유족에게 넘겨봐야 짐만 되기 십상이다. 아니, 작품 관리를 엉성하게 하여 작가 사후의 명성에 먹칠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유족 덕분에 화명(畵名)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애물단지 미술작품, 왜 이런표현이 돌고 있는가.

어떤 미망인이 날 찾아왔다. 이름 대면 알만한 화가의 미망인이다. 하지만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지 못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집안 형편은 쪼그라들었고, 이런 형편의 반영이기라도 하듯 살림집의 평수는 줄어들었다.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유작들, 이사 다닐 때 마다 커다란 짐이 되었다. 작품 보관 때문에 방 한 칸 더 있는 집을 구해야 했다. 물론 다 돈과 관련 있다. 생활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짐만 되고 있는 작품들, 이 작품의 처리를 부탁하고 싶단다. 하지만 이런 딱한 사정을 듣고도 나는 뚜렷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이런 상담을 한 경우는 정말 많다. 손상기의 경우, 미망인은 유작 가운데 우수작만 남기고 태작은 불태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작품 선별작업에 참여했고, 이른바 태작을 골랐다. 하지만 아무리 태작이라 하여 불태우게 할 수 없었다. 공간을 차지하는 짐, 이 문제를 덜어주면 그런대로 대안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액자를 모두 떼어내고 캔버스만 모아 진공 압축시켰다. 이불 보관하는 원리를 작품 보관에 응용한 것이다. 유작의 보관문제, 정말 심각하다. 어떤 집은 작품 상속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고, 또 어떤 집은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작품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노작가들의 한숨은 깊다. 자식에게 넘겨봐야 짐만 되는 작품들, 이들 작품의 처리문제가 정말 골치를 아프게 한다.

나는 미술관을 위하여 작품구입심의 회의에 자주 가는 편이다. 미술품감정가 단체의 수장을 맡았었기 때문인지, 혹은 평단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서인지, 전국 여러 미술관의 작품 구입문제를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난감한 안건은 작품기증 문제이다. 어떤 작가는 생애의 모든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고자 의사를 전달해 왔다. 경우에 따라 조건을 달기도 하지만 무조건 기증도 적지 않다. 하지만 수장고 시설 때문에 한 작가의 전량을 기증받을 수 없는 미술관 사정이다. 선별하여 작품을 받겠다면 유족은 전량의 처리가 아니므로 난색을 표한다. 그렇다면 이들 미술품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겠다는데도 받아줄 형편이 되지 않는 나라, 뭔가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화가들은 분노의 표현으로, 아니면 체념의 표현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싶다.”

미술품은 나라의 보물, 보관문제를

미술품은 나라의 보물이다. 현재 미술품의 평가가 어떻게 되든 미술품은 나라의 재산이다. 그런 재산을, 즉 국부(國富)를, 나라가 지켜내지 못한다면, 정말 그런 나라라 한다면, 절망이다. 미술품 창고를 지어 미술품 보관문제를 공공사업으로 펼치는 나라, 그런 문화국가가 대한민국이기를 염원한다. 지방 여러 곳에 미술품창고를 지어 미술품을 보관해주는 그런 제도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는 작고, 원로, 아니 젊은 작가들을 위해서도 절실한 문제이다. 작품 소장가들도 환영할 제도일 것이다. 나라가 작가나 소장가를 대신하여 미술품을 보관해주자. 최소한의 경비만 받고, 아니, 보관 창고비를 작품으로 대신 받고, 나라의 재산인 미술품을 관리해주자. 이제 원로작가의 입에서 이런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뭔가 대책을 마련하자.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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