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지난 주말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푸른 사상’ 여름호에 게재될 특집 대담을 위해 맹문재교수가 진행했다.

 

'한국출판콘텐츠센터'에 있는 ‘푸른사상사’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만나뵙고 이야기 들은 좋은 시간이었는데, 방배추 선생의 입심은 여전하셨다.

 

오후2시부터 시작된 대담이 어둑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긴 시간 대담이 이어졌으나 여쭈어보지 못한 게 많아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단다.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은 선생의 또렷한 기억력이다.

나 역시 오래된 일은 물론, 엊그제 일도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팔순 후반인 선생의 기억력은 아직까지 생생하셨다.

 

하기야! 방동규선생은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위인이 아니던가?

방선생의 입심보다 살아오신 내력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 때는 조선 최고의 주먹인 방배추란 별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

그 것도 정치깡패나 돈에 팔린 주먹이 아니라 의협의 주먹이었다.

 

잘 못된 것을 그냥 못 보는 선생의 기질은 어릴 때부터 타고 난 것 같았다.

못된 놈은 상급자를 가리지 않고 손을 보았으니, 다섯 번이나 퇴학 당하여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 전력을 가진 방선생께서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뺨 석대 맞고

시작된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그 센 주먹을 나라를 위해 쓰라는 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백기완선생은 노동자의 세상을 설파하셨지만, 방동규선생은 노동을 일상화하는 분이다.

탄광에서 부터 농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그 연세에 아직까지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신념의 소유자다.

 

두 분에 대한 이력이야 여러 권의 자서전에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는 일제강점기 때 국민학교 5년 다닌 게 전부인 백기완 선생께서

장관 집이나 부자 집 자식들 영어 과외 공부를 도맡았다고 한다.

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은 백기완선생은 외국말을 지독히 싫어하는데다,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 아니던가?

 

그 이유는 적과 싸우려면 적을 모르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독학의 피나는 노력도 따랐겠지만,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나오다 백기완선생을 만났으면

다친대는 없냐고 걱정해 줘야 마땅한데, 기죽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또 하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역사가 모든 것을 기록 한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인 너도 기록될 수 밖에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언질이었다.

한 평생 육체적 고통에 더해 마음의 자물쇠마저 차고 계셨으니,

어디 마음 편한 날이 하루라도 있었겠는가?

 

불쌈꾼’이고 민중사상가인 백기완 선생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자체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온몸을 던지셨다.

 

진행자인 맹문재씨가 대담 말미에 백기완선생과의 관계를 내게도 물었는데,

오래된 인연이긴 하나 뚜렷한 기억이 떠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선생의 존함만 알았던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후배로 부터 백기완선생 사진 좀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함께 자택을 찾아 간 것이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 인상은 온화하게 느껴졌으나,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범상한 모습에 기가 죽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날이 서 있었다.

낙천주의자인 나로서는 선생 앞에 쫄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고개도 못 고 말씀만 들었던 기억이다.

 

그 뒤 1987년 대선에 출마하셨을 때는 87 민주항쟁’ 기록 자체를 선생의 행보에 맞추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대학로 유세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쇳소리 같은 선생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타고 난 선동가였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룰 것 같은 신념으로 희망찼으나, 양김 단일화를 위해 뜻을 접어셨다.

백기완 선생은 “그때 내 말만 들었으면 군사독재가 진즉 청산됐을 것”이라며

이루지 못한 뜻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그 뒤 90년대 중반 무렵, 양평의 어느 행사에 참석하신 적이 있었다.

사진하는 김영수 작업실에 들려 오랜시간 함께 했는데, 처음으로 자상한 모습을 보았다.

김영수의 소변 색이 이상하다는 말에 확인해 보고는

당장 술을 끊으라고 나무라던 큰형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성격이 암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지만,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 팔십도로 바뀐다. 

그렇지만, 선생 앞에서는 감히 술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이후엔 전시 개막식에나 광화문광장 등에서 자주 뵐 수 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반가워하며 기념사진 찍기 바쁘니, 나 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소인배 임을 감지하셨는지, 떨어져서 올리는 목례에 늘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면 카메라로 인사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르장머리는 그 때부터 생겨 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선생께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뛰어 넘어 모두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도 보지 못하고 가셨다.

 

한 평생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힘겹게 사신 선생의 지난한 생애가 너무 가슴 아프다.

찬바람 부는 '광화문광장'에서 버티던 선생의 모습은 보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역사란 족쇄에 갇혀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기라도 하셨겠나?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투사였다.

민중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선생의 노랫 말이 귓가에 아롱거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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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께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다 같이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었으나, 먼 길을 앞서 떠나셨다.

 

사회장으로 진행된 백기완 선생 '영결식은 19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발인식을 시작으로 엄수되었다.

대학로 '통일연구소'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종로를 거쳐 서울광장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하관식은 오후 3시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먼 길 떠나시는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부터 설쳤으나,

순간적인 실수로 차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안달을 했다.

문제는 거리두기로 승용차를 끌고 간 게 탈이였다.

창경궁 앞에서 서울대병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발인식도 보지 못하고, 멀리서 이동하는 운구행렬만 지켜보아야 했다.

 

운구행렬이 대학로 소나무 길로 접어들며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노제가 끝날 때까지 다시 꼼짝할 수 없었다.

 

운구 행렬에 백기완 선생을 형상화한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대형 한지 인형도 등장했다.

꽃상여와 만장, 여러 명의 풍물패를 앞세우고 노제 장소인 '통일문제연구소'와 '학림다방' 앞에 멈춰섰다.

길에다 차를 버려두고 현장에 달려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제일 먼저 신학철선생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 길 노제는 박래군 상임집행위원장 사회로 시작되었다.

김세균 상임장레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선생님은 평생을 노동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삼고” 살았다고 회고하며 고인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뒤이어 박석운 상임장례위원장도 “백기완 선생은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로 이어지는

재야의 마지막 어른이셨다”고 회상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형숙 대표 또한 백기완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애인의 친구와 동지로 살아온 고인을 추억했다.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김수억 대표는 비정규직 없는 노동해방을 꿈꾼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위에는 사회 각계 인사와 562개 단체 및 시민 6천104명이 참여 했다는데,

‘노나메기 세상’이라 새겨진 마스크를 쓴 장례위원 머리에는

선생께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머리띠를 둘렀다.

가슴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 '남김없이'라 쓰인 리본을 달았다.

 

노제가 끝나고야 운구행렬을 따라 갈 수 있었는데,

왜 가까운 주차장에 주차할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거리 행진은 물론 장례식 조차 제대로 찍지 못했는데,

운구행렬을 따르는 조문객의 차량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온 종일 백기완 선생만 생각하며 추모하는 시간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시청 가까이 당도해서야 차를 '프레스센터'에 주차할 수 있었다.

일단 갈증과 허기부터 메우기 위해 물과 빵부터 사들고 영결식장 주변을 맴돌았는데,

최명철씨와 딸 보라양, 박재동, 곽대원, 양시영, 김가영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났다.

 

영결식장은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라 출입자 방명록 작성과 체온 측정을 한 후

99명만 띄엄띄엄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종로와 광화문을 거치는 사이 추모객 수가 점차 불어나

영결식이 거행되는 '서울광장'에 천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이 광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거리두기가 지켜질 수 없었다.

 

 운구행렬은 11시 20분경 광장에 도착했는데,

김소연씨의 사회로 신학철, 신철영씨의 초 밝히기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416합창단,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 합창단 등 연합합창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과 함께 불렀다.

이어 양기환 대변인의 고 백기완 선생의 약력 보고가 있었다.

 

약력 보고 후 문정현 신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송경동 시인,

김미숙 김용균 재단이사장, 명진 스님 등의 조사가 이어졌다.

백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 옆자리가 내 자리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 내 자리가 없어졌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앞서서 나아갔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다시 만나 뵐 그 날까지 선생님 자리를 지키겠다"며 다짐했다.

 

'서울광장' 영결식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조사를 맡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이었다"며 마지막까지 노동자의 삶을

걱정해주신 선생님의 격려에 부끄럽지 않은 '민주노총'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에서 가수 정태춘씨가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영결식에 함께한 시민들은 백기완선생께서 생전에 좋아한 '민중의 노래'를 함께 합창했다.

 

백기완선생의 딸 백원담씨는 영결식 말미에 진행된 유족 인사에서 "어머니가 오시지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쓴 마지막 편지를 대독했다.

 

백기완 선생님,

봄이 지나가기 전에 '불러보세, 우리의 봄노래'를 함께 부르려 했는데

이제 부를 수가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같이 불러요.

언제나 기억할 거 같은 우리 남편 만나 나는 행복했어요.

멋진 목도리 휘날리며 바위고개 그 언덕에서 기다리세요.

잘잘(백기완 선생이 생전에 만든 말, 잘있어요 잘가요 줄임말), 우리 신랑 백기완씨"

-아내 김정숙-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이 끝날 무렵 장지로 먼저 출발했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알아 볼 수 없었으나 박불똥, 장순향, 류연복, 임정희,

강제욱, 김봉규, 곽명우, 손병주, 정영철, 성기준씨 등 일부만 알아 볼수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운구행렬은 오후 3시 20분 무렵에야 장지에 도착했다.

'모란공원'에는 오후 2시부터 자리를 지킨 추모객 100여 명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하자던 백기완 선생님의 외침을 기억합니다‘ 

적힌 현수막으로 고인을 맞이했다.

운구행렬에는 김세균, 이수호, 임진택, 양기환씨도 보였다.

 

운구 행렬이 전태일 열사의 묘지 옆에 마련된 묘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이성호씨의 풍물패가 소리굿으로 백 소장을 잃은 유족과 추모객의 마음을 위로했다.

하관식이 시작되자 유족들은 잠시 '아버님'을 외치며 흐느끼기도 했다.

큰 아들 백일씨는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이라며

추모객과 노동해방, 해방통일, 노나메기를 세번 외쳤다.

 

신학철 상임장례위원장은 추모사에서 ‘백기완선생께서 앞길을 잘 닦아 놓아

우리가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며 고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백기완 선생님은 권력과 유혹 앞에서

초심을 버리지 않는 분이셨다.”며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직한 진정성이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정재안, 박세라, 박불똥, 김윤기씨등

반가운 분을 한꺼번에 여럿 만났다.

급히 언덕을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카메라까지 메모리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며 작동되지 않았다.

사진 그만 찍고 빨리 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싸우며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 애쓰신

백기완 선생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또 하나의 별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진보운동의 초석을 다진 불굴의 혁명가 백기완 선생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긴 세월 민주화운동은 물론 민중의 생존을 다투는 싸움터 앞자리는 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항상 앞장서 실천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지요.

이제 누가 선생님의 그 자리를 대신하겠습니까?

 

선생님! 그토록 그리던 북녘 땅 한 번 돌아보시지 못하고 가시면 어쩝니까?

선생님을 따르는 그 많은 분들의 비통함은 또 어쩌라고요.

 

선생님께서 나오시면 다들 기념사진 찍으려고 추근댔으나, 언제나 웃으시며 반겼지요.

나라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물러나 있었더니,

애석하게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오래 전에는 사진하는 김영수씨의 소변 색깔을 보시더니,

당장 술을 끊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 말을 듣지 않던 김영수는 결국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토록 건강에 해박하신 선생님은 왜 못 챙기셨나요?

 

선생님의 이름자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어, 나 역시 하나를 고르자니 망설여집니다.

진보운동의 거목,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 불굴의 투사, 웅변가,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

조선의 삼대구라, 우리말 구사의 대가. 시인, 문필가, 사상가, 진보진영의 큰 어른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저는 민중해방의 혁명가로 기억하겠습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등을

주도한 혐의로 여러차례 수감되어 선생의 몸은 혹독한 고문으로 반쪽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깡마른 몸에서 나오는 쩌렁쩌렁한 기백은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 같았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었지요.

결국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지만,

그 날 대학로에서 가진 선생의 유세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 찍은 선생님 사진이 몇 장남아 그 날을 추억해 봅니다.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쓴 시 ‘묏비나리’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이 되어,

5.18에서부터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힘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

독재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요.

 

 그 뿐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셨지요.

‘달동네나 새내기, 동아리 등의 순수 우리말이 정착하도록 노력 하셨지요.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출판을 통해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실천하였고,

1999년에는 계간지 '노나메기'를 창간하여 시민운동을 이끌었지요,

민중해방이 실현된 새 세상을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 되,

함께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노나메기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생님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음을 선생님의 부재로 알게 되었답니다.

비록 선생님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뜨거운 영혼만큼은 대대로 영원할 것으로 믿습니다.

 

선생님!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 없이 따르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선생의 시를

소설가 황석영씨가 다듬고, 작곡가 김종률씨가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 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장례는 19일 오전8시에 서울대병원에서 발인하여, 오전9시에 대학로에서 노제를 지낸다.

오전11시에는 시청 앞에서 영결식을 갖고, 하관식은 오후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다.

 




‘한국민예총’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한국민예총)의 창립이 어언 30주년을 맞았다.

한국민예총은 예술인들의 공동실천으로 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기여하고,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할 목적으로 19881223일 창립한 예술단체다.

현재는 지역별로 분권화한 형태지만, 가닥을 잡아 갈 본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민예총30년 동안 민주화와 문예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해 왔으나,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다,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오랜 부채를 해결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해 역대 이사장단을 비롯하여

신학철, 이철수, 유순웅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사재를 털어  재기하려 노력해왔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이었다.



   



창립 때부터 인간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 했는지 모르지만,

많은 회원을 대표하는 단체 운영에 그런 사심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무총장 뜻에 따라 이사장이 추대되는 모순이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다는데 있다,

그러니 자신을 내 세워 준 실세더러 누가 감히 메스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사무총장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올 2월부터 화가 박불똥씨가 이사장을 맡으며,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사무총장을 해임하여 새 집행부를 구성했으나 당사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일부 장부까지 움켜 지고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데,

더 웃기는 것은 일부 지역 민예총을 조종하여 내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발 그만하라.

회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뭉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적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

단체를 끌어 가는대는 절대 인간적인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선례를 들어 보겠다.

오래전 민예총산하단체인 민족사진가회’(민사협) 창립에 사진가 김영수씨를 도운 적이 있다.

그 단체가 주저앉게 된 원인이, 바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재에 의한 것이라는데 있다.

초대 이사장으로 작고하신 홍순태선생을 로봇 이사장으로 앉혔으나,

이사회나 회계절차도 형식일 뿐, 모든 게 한 개인의 뜻대로 움직여졌다.



 


창립시 내가 사무국장 직책을 맡았으나 그것도 이름 뿐이었다.

인사동에 사무실을 내려는데, 보증금이 없어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홍순태 이사장 명의의 차용서를 써 주고 빌려와 입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만 바보가 되었다.

뒤늦게 민예총본부 사무실로 이전했으면 보증금은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가까운 친구라고 덮어주고 변명해 주다보니, 결국 단체 자체가 문을 닫도록 만든 것이다.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독재로 좌지우지 했으니, 어느 회원이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유령 회원을 이끌고 가내수공업 식으로 끌어가다, 본인이 죽고 나니 결국 문을 닫더라.



 


문제는 박불똥이사장이 정영신씨를 조직국장으로 내 세워 조직을 다시 복원시키려 했으나,

그 불신의 골이 깊어 대개의 사진가들이 머리를 흔든다는데 있다.

이제 민족이란 자도 단체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조직에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두 화합하여 잘 못된 것을 과감히 개혁하여 우리나라 문화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개혁에 나선 박불똥 이사장을 믿는다.

원칙주의자인 그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사협에 진저리를 내어 오래 동안 방관하고 살았기에, 민예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차 몰랐다,

마침 사무국장을 맡은 서인형씨와 정영신씨가 쥐꼬리만큼의 보수로 일한다기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유순웅 부이사장 도움으로 사무실을 얻어 어렵사리 꾸려가지만 살얼음 판 같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렵기야 하지만, 그러나 희망이 보이더라.

이제 단합하여 협력하는 일만 남았다.



 


일반인들에게 받는 CMS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기금 마련전에도 많은 작가들이 발 벗고 나섰다.

기금마련전도 여지 것 해 왔던 것처럼 무조건 작품을 내 놓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국과 작가와의 계약서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품작가의 뜻에 따라 판매대금 분배와, 끝난 후의 작품반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출품 작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몰랐던, 그 전의 주먹구구식 기금마련전이 아니라

작가와 단체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획전이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마련전에는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김정헌, 민정기, 김진열씨 등 내 노라 하는 작가 4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미 작품이 팔려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지난 19일 오후5시 인사동 관훈갤러리전관에서 개막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

기금 마련전에는 200여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개막 행사는 유순웅 부이사장의 사회로 이성호 경기민예총이사장의 비나리 공연에서

장순향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의 북춤으로 신명을 일으켰다.

박불똥 이사장의 인사와 백기완선생의 축사, 그리고 유홍준씨의 격려사로 이어졌다.



 


이어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의 무언극은 마치 민예총의 아픔을 대변하듯 절절했다.

손병휘 서울민예총이사장의 노래에 이어

임진택 명창의 김구선생 탈출기를 담은 창작 판소리가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수 정태춘씨가 나왔는데,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늙어가는 모습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소리는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관훈갤러리가 생겨난 이후 최고의 관객이 몰렸다.

3층 공연장에 다 들어 올 수 없어, 입구에서 지켜보는 분들도 많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2층에 마련된 조촐한 다과로 환담을 나누었고,

낭만에 마련된 뒤풀이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판화가 김준권씨 100만원, 박종관 한국문예진흥위원장 100만원, 화가 김정헌씨 50만원 등,

독지가들이 줄을 이어 민예총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다음해 16일까지 열리는 민예총기금마련전은 꼭 볼만한 전시다.

유명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민중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신학철씨가 88년에 제작한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으로 민중미술을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구입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금액의 CMS 한 구좌라도 적어주길 바란다.

작은 물방울이 내를 이루듯, 작은 힘이 모여 민예총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참여 작가는 다음과 같다.

 

작고작가) 박생광 김영수 문영태 김구한

 

강연균 강요배 김영진 김재홍 김정헌 김진열 김천일 김현철 나규환 노원희 두시영 민정기

모노리 박불똥 박재동 박흥순 변승훈 손장섭 송 창 성낙중 신학철 심정수 안경진 안창홍

양형규 여태명 이영선 이명복 이원석 이종구 이종희 이철수 이태호 임옥상 장경호 정비파

조문호 주재환 최병수 황재형

 

사진, / 조문호





































































 





박근혜는 구속되었으나, 바로 잡아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돌아가는 대선 판을 보니 자칫하면 죽 쑤어 개 줄 판국이다.


요즘 김진태와 홍준표가 보여주는 꼴은 완전 개그 수준이다.
한 동안 무기력증에 시달려왔는데, 이제 웃을 힘도 없다.


아직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
대선주자에게 적폐를 청산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도록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지난24일 밤에는 연남동에 있는 실험가게 ‘요기가’에서 ‘옳’퍼포먼스를 마무리하는 파티가 열렸다. 

그동안 공연한 ‘옳’ 퍼포먼스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며 다양한 퍼포먼스를 즐기는 파티였는데,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어울려 정말 잘 놀더라.


나이가 아니라 생각 이 같으니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 김광석씨가 보여 준 광대끼 넘치는 연주도 죽였다.

나중에 총알이 떨어져 못 찍었지만...




































































































































그 자리에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씨를 비롯하여 이정훈, 박미루, 황현성, 홍윤경, 최현중, 꼬꼬닭, 김아란, 권음미,

장명훈, 반은기, 정공자, 문성식, 김발렌티노, 기타리스트 김광석, 바이얼리스트 박순영, 서화가 김기상,

화가 전형근, 사진가 하형우, 정영신씨 등 20여명이 함께했다.






그 이튿날인 25일은 ‘광화문광장’에서 21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날 전주에서 올라온 깃발놀이꾼 여현수씨의 대형 깃발이 성공적인 예술행동의 피날레를 날렸다.

시민나팔부대와 풍물패들의 신나는 풍악까지 등달아 ‘광화문광장‘을 들썩였다.






이 날 ‘옳’ 퍼포먼스의 메시지는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였다.
그동안 유진규씨를 비롯한 비주류예술가들은 광화문광장에서 열 네 차례에 걸쳐 ‘옳’퍼포먼서를 보여줬다.

현 정국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몸짓으로 촛불시민들의 결기를 다지는 예술행동을 펼친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며, 박근혜가 막 내릴 때까지 매번 다른 주제로 퍼포먼스를 벌여왔다.

그들의 예술행동이 유달리 돋보이는 것은 세대를 초월한 예술가들이 행위 자체를 즐겼다는 점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을 예술의 난장으로 꽃 피울 수 있었다.

여기에 이르기 까지는 유진규씨의 리더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름 같은 건 다 던져버리고, 항상 겸손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후배들의 의견을 존중해 준 것이다.

























































































































이날 ‘광화문광장’에서는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이수호, 신학철, 장경호, 류연복,

정덕수, 손병주, 장순향, 김진하, 성기준, 채원희, 권양수씨 등 많은 분을 만났다.

공연 팀과 점심 먹으며 한 잔, 신학철선생 만나 한 잔, 기분좋아 한 잔, 술도 어지간히 마셨다.
























































‘옳’ 뒤풀이에서는 유진규, 김기상, 안현정, 오민정, 나비, 이정훈씨가 함께 했다.

옆 자리에 있던 수원 풍물잽이 이상호씨가 소리에다 술 값까지 보태주었다.

나비소녀의 환한 웃음에 술 맛 나는 자리였는데, 맥주집이라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재미 없어 졸다 보니 소주가 있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최후의 순간까지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노는 패거리였다.







































돌아오는 길의 ‘광화문광장’은 대미를 장식하는 흥겨운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윤엽, 박재동, 송경동, 신유아, 양혜경씨등 여러명이 풍물패와 어울렸다.

촛불시민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마무리 춤판이었다.

'박근혜가 끌려 들어가니 드디어 봄은 오는구나'



사진, 글 / 조문호


















박근혜 파면에 따라 ‘광화문미술행동’이 해산하며 보여주는 마무리 기획전 ‘촛불역사’전이

지난14일 오후4시 광화문광장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개막되었다.

그동안 광화문광장의 시민혁명을 기록해 온 다큐사진가들과 시인, 화가, 춤꾼을 비롯한

촛불시민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그 날 개막식에는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김준권(광화문미술행동 대표), 송경민(광화문캠핑촌 촌장),

신유아(궁핍현대미술관장), 화가 신학철, 장경호, 류연복, 김진하, 이윤엽, 김 구, 박불똥씨,

시인 정덕수, 양문규, 김이하, 김명지씨, 사진가 하형우, 정영신, 양시영, 박영환, 곽명우, 이정환씨

춤꾼 양혜경씨와 가수 김가영, 홍가혜, 김남선, 차광호씨 등 참여 작가들과 관계인들이 참석하여

간단한 열림식을 가졌는데, 다들 백기완선생과 기념사진 찍느라 바빴다.







그동안 촛불시민들이 광화문광장으로 몰려 나와 박근헤 퇴진을 외쳤고,

예술가들도 다양한 예술행동으로 시민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세상을 원했다.


그 위대한 시민혁명을 기록한 열세 명 다큐사진가들의 각기 다른 색깔의 기록에서 부터

화가나 시인 그리고 촛불시민들이 바라 본 순수한 시선들도 흥미롭다.

여러가지 코스프레에서 부터 대머리에 ‘탄핵’이라 쓴 스티커를 붙인 코믹한 사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기록 사진이란 잘 찍는 것 보다 현장성이 더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없으면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화문광장’ 텐트촌에서 노숙하는 정덕수시인은 다 물러나고 없는 한가한 캠핑촌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 잔잔한 뒷이야기들은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펼친 ‘광화문미술행동’의 기록들도 의미가 크다.

매주 토요일마다 펼쳐온 예술행동 면면의 기록들은 예술이 대중 속에 녹아드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 몇 장의 사진을 보며 살까? 신문이나 인터넷을 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게 사진이다.

전 국민이 사진기록자이고 증언자이다. 또 다른 눈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사진가 곽명우, 권 홍, 김문호, 노숙택, 박영환, 양시영, 엄상빈, 정영신, 조문호, 채원희, 하형우, 홍윤하씨를 비롯하여

시인 강 민, 정덕수, 김명지, 김이하, 화가 김진하, 이재민, 최연택, 부은정, 춤꾼 양혜경씨

그리고 촛불시민들이 기록한 사진까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





전시는 오는 21일까지다. 어렵게 찾아 온 봄 맞으러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자.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일을 준비하자.



사진, 글 / 조문호











































































설날인 28일은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를 갖지 않기로 했지만, ‘광화문 미술행동’은 잠깐도 고삐를 늦추어서 안 된다며,

새해맞이 ‘촛불시민만복래’ 한마당을 열었다.
캠핑촌 예술위원회와 함께 한 이날 행사는 촛불집회 대신 우리고유의 민속 문화를 향유하는 시간을 가져,

광장을 찾은 시민들에게 명절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사진 / 김준권 페북에서 스크랩]

[사진 / 김준권 페북에서 스크랩]

[사진 / 김준권 페북에서 스크랩]

[사진 / 김준권 페북에서 스크랩]



동자동에서 합동차례가 끝나는 즉시 광화문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서예퍼포먼스와 백기완선생께 드리는 새배는 끝나버렸다.

여태명선생의 서예 퍼포먼스는 ‘촛불시민 새아침’이란 글귀가 광장바닥을 장식하고 있었고,

양혜경씨의 복전춤에 이어 백기완선생의 ‘비나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백 선생께서 촛불집회에 참석하시면서 쓰신 말씀을

판화가 류연복씨가 서화로 옮겨 선물하였는데, 비나리는 축원의 한 형태로 사물가락 위에 사설을 곁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날의 비나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길' 바라는 '소원성취 발원’이었다.







오후의 광화문광장은 '경기민예총'의 신명난 풍물한마당으로 시민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풍물잽이 이상호씨는 타락한 오늘의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 서민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춤꾼 김미선의 새해맞이 신바람 춤과 이상헌씨의 지전춤이 이어지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한 ‘광화문미술행동’에서는 정유년 세화 목판화를 찍어주었다.

판화가 김준권, 류연복, 윤여걸씨가 직접 세화를 찍어 서명해 주었는데, 어린이들이 직접 롤러를 굴려 판화를 찍어보는 등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개막된 광장 목판화전에는 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여지 것 여러 전시장을 다녔지만, 이렇게 많은 관람객을 동원한 전시는 흔치 않았다.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김동인, 김봉준, 김준권, 김 억, 류우종, 류연복, 박구환, 박홍규, 서인희, 손기환, 안혜자, 유대수,

윤여걸, 이언정, 홍익종, 홍진숙, 홍선웅씨 등 내노라 하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전시라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전 작가들이 참여하는 작가와의 대화는 1일 오후3시에 열리고, 전시는 2월14일까지 이어진다.
주말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나와 다양한 예술행동으로 부패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그리고 4월16일을 뜻하는 오후 4시 16분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합동제례도 있었다.
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합동제례에는 원불교 교무들의 추모예불을 시작으로, 416가족협의회 전명선 위원장 등

유가족을 비롯하여 백기완 통일문화연구소 소장,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이재명 성남시장이 참석했고,

분향소에 모여든 많은 추모객들은 희생자들의 영전에 국화꽃을 바치며 넋을 기렸다.

또한 봉사단체 ‘집밥’에서는 떡국 500인분을 나누어 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참여작가 외에도 장경호, 손기환, 장진영, 정세학, 정영신, 정복수, 김가영, 정영철, 이재민, 배인석,

정덕수. 정인숙, 곽명우, 이도윤씨 등 많은 작가들이 함께했다.


이 날은 광화문 일대 식당들이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아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로 허기를 메웠는데,

장경호, 정복수, 이재민, 정영신씨는 인사동 ‘유목민’까지 쳐들어가 전활철씨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오는 2월4일 열리게 될 14차 촛불집회의 ‘광화문미술행동’ 여섯 번째 프로젝트 ‘차벽을 넘어 광장으로’의 주제는

立春大吉 建陽多慶 ‘새로운 나라로!’다. ‘광장목판화전’과 ‘서울민미협’의 ‘깃발전’에 이어,

화가 김봉준, 김진하, 김억, 김준권, 류연복, 박홍규,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정비파, 이철수, 홍선웅, 홍진숙씨가

참여하는 광장갤러리 설치전도 있다. 그리고 서예가 여태명, 박수훈씨가 펼치는 서예퍼포먼스와

사진가 조문호, 정영신씨의 촛불시민 인증샷 찍어주기, 시민과 작가가 참여하는 그림, 글쓰기 등 다양한 미술행동이 진행된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0일 오후5시, 광화문광장에서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이 열렸다.
24일 문을 열었지만, 열림식은 뒤늦게 가졌는데 전시장은 미어 터졌다.
워낙 궁핍하다보니, 자리가 좁아 다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찾아오신 분들도 한 눈에 다 알아볼 수 있는 분이었다.
백발투사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원로화가 손장섭, 주재환선생, 민중미술의 거목 신학철화백,

그리고 박불똥, 류연복, 장경호, 이인철, 정영철, 양혜경씨등 많은 분들이 자리하여 궁핍한 정치의 멱살을 잡았다.

사람만 많은 게 아니라 작품들도 빼곡했다. 회화, 판화, 사진, 시, 포스터, 신문 등이 골고루 벽면을 장식했다.
입구 정면에는 송경동시인 의 시 ‘폴리스라인'이 걸려있다.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작은 사람들의 작은 테이블로 이 광장이 꽉 찰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 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백만 개의 천만 개의 작은 마이크들이 켜질 수 있게'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판화가 이윤엽씨의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결의를 다지게 하는 주먹과 절규하는 모습, 다양한 풍자로 보는 이의 분발심을 일으켰다.

한쪽 벽면에는 시민예술가들이 벌여 온 다양한 광장의 기록을 담은 정태용씨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노순택씨의 대형 사진 한 장은 공권력의 가혹함을 해부하고 있었다.

‘박근혜 전격구속’, ’박근혜 옥중편지 단독입수‘ 등 한 발 앞서 가는 광장신문 호외판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군데군데 최병수씨의 날카로운 철제 작품들도 세워져 있었다.

결의를 다지게 하는 백기완, 신학철선생의 말씀에 이어 송경동, 이윤엽, 노순택, 최병수씨 등

참여 작가들이 차례로 나와 인사말을 했는데, 사진가 노순택씨의 절규에 가까운 사연도 들었다.

‘타임’표지를 풍자한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을 담은 작품을 전시장 외벽에 붙였는데,

어느 날 새벽, 누군가의 예리한 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만들지 않고 언 손을 녹여가며 한 땀 한 땀 꿰맸다고 한다.

그 따위 비겁한 탄압에 굴복할 전사로 아직까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관전인‘내가 왜’란 설명문의 마지막 글귀가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왜 서 계신가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왜 서 있을까요.”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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