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질퍽한 술자리가 인사동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난 수요일은 나무화랑에서 이명복의 어멍전이 시작되었고,

인사아트프라자에서는 박옥수의 시간여행이 열리는 날이었다.

 

코로나 규제까지 풀려 모처럼의 해방감에 많은 분과 어울려 바쁜 잔치 판을 오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항상 많이 마셔 탈이다.

 

술 취해 사진은 얼마나 찍었는지, 메모리카드가 찼더라.

요즘 몸도 비실거리지만, 하던 일도 귀찮아 게으름을 피운다.

미루고 미루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뒷북치는 것이다.

 

전시가 열리던 날, 안국역에서 가까운나무화랑부터 갔더니

작가 이명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박흥순, 이재민, 김구, 홍성미, 김양훈, 양상철, 김성명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주 사는 이명복씨는 4.3의 한 맺힌 응어리를 형상화하는 작가다.

전시된 어멍전에는 어머니의 초상과 일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한 사람의 인물을 그렸지만, 그 속에 우리 민중의 한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눈빛에서 지난한 세월의 아픔도 읽을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하고 강인한 제주 어멍의 모습이었다,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지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다

 

같은 시간에 개막된 박옥수씨의 시간여행‘ 사진전도 보러 갔다.

전시를 기획한 지승룡씨가 개막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박옥수씨 내외를 비롯하여

사진가 김문호, 김녕만, 곽명우, 정영신, 가수 장사익,

연출가 김혜련씨 등 많은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사익씨가 축가를 구성지게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사진들을 돌아보니, 아파트가 즐비한 배경으로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킨 청계천 판자촌에서 부터 물지게를 지고 가는 어린 소녀들,

창경원에서 휴대 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진가 박옥수씨는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아래지만, 사진은 한참 선배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 활동을 해, 전시하는 사진들도 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이다.

사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근현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그날 박옥수씨 부인도 처음 뵈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를 숨겨 둔지 미처 몰랐다.

더구나 연출가 김혜련씨와 절친이라는데, 세상은 넓고도 참 좁았다.

 

뒤풀이가 있는 사동집에도 반가운 분들이 있었다.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사진가 정장식, 심보겸, 성유나, 조명환씨를 비롯하여

김구, 김이하, 이만주,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이 어울린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사동집 주인 송점순씨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았더니, 주방에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일손을 줄여 쉴 틈도 없다며 바쁘시다.

 

안쪽 자리에는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일행이 마시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떼거리 술판이던가?

반가운 자리지만 다른 뒤풀이가 궁금해 급하게 마셨더니,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이명복씨 뒤풀이를 찾아갔다.

 

유목민으로 가다 보니, 길목 사랑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에 이명복, 장경호, 이재민, 박흥순씨가 나와 있었고,

안에는 손기환, 김진하, 김재홍, 고옥룡, 나종희, 송 창, 류연복씨 등 민중미술가들 판이었다.

 

장경호씨와 유목민‘으로 가보니, 그곳도 북적였다.

 

박성남씨를 비롯하여 임헌갑, 임동은, 이경희, 주홍수, 유준 씨 등 성함이 오락가락하는 많은 분들이 있었다.

 

뒤따라 사동집에 있던 김문호, 정장식, 정영신, 노광래, 김이하씨가 차례로 나타났고,

사랑채에 있던 이재민, 김 구, 김재홍씨도 합류했다

 

김명성, 김상현, 이상훈, 안원규씨 등 줄줄이 사탕이다.

 

! 이 얼마만의 이산가족 만남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냐 마는 다들 시간이 늦어 몸 사린다.

 

인사동에서 좋은 전시 있으면 작품보러 나오는 길에 자주 만나자.

 

 다시 뭉쳐 인사동에 봄바람 날리자.

 

사진, / 조문호

 

이명복 '어멍'전시장 사진 / 나무화랑

 

박옥수 '시간여행' 개막식 사진 / 인사아트프라자2층

 

박옥수 '시간여행' 뒤풀이 사진 / 사동집

 

  이명복 '어멍'전 뒤풀이 사진/ 사랑채

 

'유목민'에서 만난 사진 

 

포토존 앞에 선 사진가 박옥수

박옥수의 ‘시간여행 이 지난 5월4일부터 9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전시작은 1965년부터 80년까지의 박옥수 초창기 사진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근현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도 지녔다.

 

뚝섬 , 서울 , 1970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박옥수는 고교시절 부터 사진가로 두각을 드러냈고, 대학 시절에는 고 이형록 선생이 이끄는 '현대사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사진사에서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 그룹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새로운 사진 이념이 생성된 중요한 시기였다.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 기라성 같은 사진가들이 활동한 '현대사진연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고) 이경모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사진가 문선호선생 휘하에 들어가며 광고사진가로 변신한 후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동성고 , 서울 , 1975 / 70cm x 100cm 장정 디아섹

그는 개인전을 하지 않았다. 가끔 단체전에 내놓은 작품도 리얼리즘 사진보다 서정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작품으로는 83년 문선호씨가 주도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전에 내놓은 미사에서 지휘하는 장면과, 2005민사협에서 주최한 시대와 사람들전에 내놓은 국립묘지에서 통곡하는 유족들 모습이 박옥수 초창기 작품을 본 전부였다.

 

수색부근 서울 . 1969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2009민사협에서 주최한 한국현대사진60전을 비롯한 여타 단체전에 발표한 작품은 조형적이거나 서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기에 리얼리즘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은 사실은 전혀 몰랐다. 2017년 토탈스튜디오를 그만둔 후 페이스북에 올라온 6-70년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난지도, 서울 . 1969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그 소중한 자료를 반세기 동안 깔아뭉갠 이유가 궁금했다. 상업사진에 전념하느라 정리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스튜디오를 그만두기 전에는 할 일 없이 시간 보내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이경모선생도 역사적인 여순사건의 중요한 필름 원판을 긴 세월 묻어 둔 사실이 있지않은가. 1994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먼지 쌓인 필름을 끌어내어 격동기의 현장이란 사진집을 출간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뚝섬 , 서울 , 1970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어쩌면 객관적인 기록보다 작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인지도 모르겠다. 추측 컨데, 그 사진들을 찍을 당시에는 고 임응식선생이 내세운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주도할 시기였다. 한국사진의 주류로 급부상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작가의 자기모순과 공모전용 걸작사진 위주의 획일화라는 부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그러나 이형록 선생을 필두로 한 현대사진연구회에서는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형식적 한계를 벗어나 조형성을 강화한 사진도 더러 나왔는데, 그런 영향을 받은 건 아닐지 모르겠다.

 

사근동 청계천 서울 . 1967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그리고 한국사진사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게 공모전으로 평가받던 시기였다. 사진가의 주관은 둘째 문제고 오로지 눈에 튀는 사진이 우선이었다. 원근감과 안정감을 주는 사진 구도같은 것을 따지기도 했고,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공모전 사진의 길을 걷지 않은 원로 사진가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나? 망원렌즈를 낀 고등학생 시절 모습을 보니, 마치 이미지 사냥꾼 같은 공모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대상과 부딪혀야 하고, 잘못된 사회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허망한 이치를 아직도 버리지 못했지만...

 

뚝섬 , 서울 . 1968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대부분의 공모전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주관했는데, 세월이 반세기가 흐른 아직까지 공모전으로 장사하며 회원 늘리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젠 사진작가라 불리는 회원이 만 명을 넘는 공룡집단이 되었지만, 제 돈 쓰며 취미생활 한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원로 사진가 중 주명덕, 강운구, 황규태 등 몇몇 사진가만 사진 협회에 가담하지 않았지, 대부분의 원로들이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거쳤다.

87년 '민족사진가협회'가 창립되면서 대학교수를 비롯한 프로 사진가들은 대부분 빠져나왔지만, 그 구태는 여태 바뀌지 않았다. 희대의 살인마 이동식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 이발사에게 독약을 먹인 사건도 그러한 공모전이 원인이었다.

 

뚝섬 ,서울 , 1974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하기야! 공모전만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을 듣거나 고르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시간여행사진집을 출판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진 원고에서 골라낸 출판사 편집자가 있었고, 출판사에서 골라낸 수많은 사진 중에 전시작으로 선택한 것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여수, 전남 . 1975; / 70cm x 100cm 장정 디아섹

1991년 무렵,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교류하며 ''을 소재로 열었던 전시 외는 개인전도 하지 않았고, 개인 사진집도 출판한 적이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눈빛출판사’에서는 시간여행’과 ‘개마서원에서는 뚝섬이라는 사진집을 각각 출판하며 대규모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동대문운동장 ,서울. 1971 / 70cm x 100cm /장정 디아섹

새 아파트가 즐비한 배경으로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킨 청계천 판자촌, 물지게를 지고 위태롭게 물을 건너가는 어린 소녀들, 창경원에서 휴대 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 남녀들, 우산을 쓰고 물 구경 하는 가족의 정겨운 모습, 파월용사 묘역에서 울부짖는 여인들, 논두렁을 걷는 어린이의 기막힌 동작 포착  수많은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뚝섬; 서울 . 1968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박옥수의 시간여행은 기자들이 찍는 현장 사진과 달리 평범한 일상을 포착하여, 그 시기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60년대는 전통으로 지켜 온 우리의 문화가 서서히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시기로, 서민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박옥수의 눈을 통해 기록된 풍속의 리얼리티가 현실감 있게 드러난 사진에는 절망 속에서 살아온 우리 삶의 흔적이 질퍽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안정적이고 단순한 앵글로 주제를 부각시킨 그의 사진은 한국사진의 전통적 형식에 다름아니다. 아마 전통적 사진을 배우고 익힌 마지막 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선거유세장의 청중들 . 1971 / 70cm x 100cm / 장정 디아섹

박옥수의 시간여행을 보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다.

힘들어도 그때가 그립다.

 

글 / 조문호

 

박옥수사진집 '시간여행' / 눈빛출판사 / 239X252mm양장/ 228페이지 / 가격 50,000

 

박옥수사진집 뚝섬’ / 개마서원 / 235X253mm양장 / 160페이지 / 가격 40.000

 

 

 

 

 

 

 

시간여행 1965-1980

 

박옥수 사진집

눈빛 / 228쪽 / 값50,000원

ISBN 978-89-7409-431-7

 

이 사진집은 사진가 박옥수의 사진입문 초중반기인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촬영한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인 제3공화국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산업사회로의 진입, 전통의 퇴조 내지는 소멸, 일상을 지배했던 집단주의 등이 박옥수의 사진에서 보인다. 뉴스 현장보다 일상의 순간이며, 1960-70년대의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박옥수는 1967년 현대사진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한 한국사진의 전통을 이어온 마지막 주자다. 한국사진사에서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가 그룹의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자생적 사진이념이 묻어 있는 한국사진의 소중한 준령이다. 이때 이 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진가들로는 이형록,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이창환, 백남식,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진가가 거리에 나가 관찰하고 오래 기다렸다 찍은 사진은 그 시기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보여준다. 사진에서 “‘리얼한 사진’이라는 말은 현실 그대로의 사진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재창조되어 보다 현실감 있게 표현된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한정식) 그러니 이 사진집이 보여주는 1960-70년대의 현실은 사진가 박옥수에 의해 ‘재창조되어’ 그 시절이 보다 ‘현실감 있게 표현된 것’이다. 박옥수 사진의 시간여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60-70년대 사람들이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애써 지우거나 잊으려 했던 전통이라는 이름의 잔재가 있고, 누군가는 희망 속에서, 또 누군가는 절망 속에서 살아간 삶의 흔적이 있다. 장충단공원에서의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유세장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서울의 봄’의 그 유명한 학생들의 서울역 회군, 창경원에서 휴대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 남녀들, 산업화에서 소외된 군상들, 집단체조에 동원된 무표정한 여학생들, 하나둘 주검으로 돌아와 묻히는 파월용사 묘역에서 울부짖는 여인들…. 현재를 구성하는 퍼즐의 하나인 과거가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2022년 1월  / 눈빛출판사

 

박옥수 약력

 

박옥수는 1967년 현대사진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한 한국사진의 맥을 이어온 마지막 주자다. 한국사진사에서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가 그룹의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자생적 사진이념이 묻어 있는 준령이다.

박옥수는 1964년(광주일고 1학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미술부 활동을 한 그는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큰형님의 카메라(니콘 S-2)를 들고 다니며 일본 카메라 잡지에서 본 사진들을 흉내 내 찍는다. 그는 고교생 신분으로 전국사진촬영대회에서 수차례 입선하는 등 광주의 ‘학생 사진가’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대학 진학(한양대)과 동시에 서울로 상경한 그는 이형록이 이끌던 현대사진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사진가로서 일취월장한다.

군제대 후에는 문선호사진연구소에 근무(1974-1976)하면서 광고사진에 입문하고 이후 현대자동차 홍보실(1976-1979)에서 사진담당으로 일하며, 1978년 1월에는 유럽을 배경으로 포니 자동차 홍보사진을 촬영했다. 1983년 충무로에 광고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토탈스튜디오를 운영하다 2017년에 문을 닫았다.

2021.9.27

사진 찍는 일보다 사진을 떠벌리는 일이 더 힘들다.

두 번 다시 전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어렵사리 책 만들어 준 출판사를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전시를 해야 책이라도 한 권 팔 것 아니겠는가?

 

며칠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이 열리는 인사동 ‘나무아트’와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 전을 하는 ‘유목민’ 담벼락을 오가느라 곤죽이 되었다.

허리 협착증이 도져 4층까지 오르내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 전시가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빌빌거려 걱정이 태산 같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술집 앞에 전을 펼쳐 놓았으니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못 본 척하겠는가?

전시가 시작된 첫날부터 고주망태가 되었으니 그다음 날은 보나 마나다.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쩌랴!

 

골목 전시장엔 퍼져 앉기만 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난, 알콜 중독자는 아니라고 큰소리치지만

남이 마시는 술을 못 본채하지 못하니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장은 좋아도 그다음 날은 더 죽어나지만 어짜겠는가?

 

지난 24일도 서둘러 나갔으나 손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 하신 신신자씨는 ‘나무 아트’에서 기다리고,

이강산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다들 멀리서 오신 분들인데,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은 이강산씨를 비롯하여 신신자, 권 홍, 김이하,

장우원, 이영숙, 박옥수, 한공주, 안현수, 정성진, 오진향,

음현정, 이현정, 정재원, 임춘희씨가 찾아 주셨다.

양쪽을 오가느라 길이 엇갈려 이민씨와 김창주씨는 보지도 못했다.

 

다들 마스크를 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은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은 적어 놓은 방명록을 보고 뒤늦게 결례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둘째 날은 첫 날 마신 후유증으로 아예 골목 전시장엔 앉지를 않았다.

김이하씨 일행은 일찍부터 ‘유목민’에 자리 잡은 걸 알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앉기만 하면 술잔에 손이 갈 것이고, 한 잔만 마셔도 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잘 참아냈으나, 다음 날은 온종일 마셔야 했다.

토요일은 ‘노숙인, 길에서 살다’ 사인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이숲’출판사 김문영대표와 이나무씨가 책을 가져오셨다.

 

그날은 양산에서 올라 온 공윤희씨를 비롯하여 박찬원, 강경구, 김남진, 김영호,

양재문, 노광래, 김명성, 이 성, 오현경, 이한복, 나매례, 이재민, 유순영, 온새미,

정세학, 김상배, 이오연, 홍현구, 박상문, 홍유경씨 등 많은 분이 찾아 주셨고,

부산에서 상경한 정남준씨를 비롯하여 손은영, 최인기, 김수길, 이봉희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전강호씨와 시작한 술자리는 사인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이어졌으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찝쩍거려 실수라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는 김상현씨 초대 파티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일곱 시 무렵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이태원 ‘뮤아트’로 찾아갔다.

재즈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힌 ‘뮤아트’에는 김상현, 임성익, 하양수씨가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어회와 전어회를 준비해 두었더라.

너무 과분한 접대에 미안했으나 어쩌겠는가?

 

취기에 고마운 마음도 감추고 축하 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초빙한 연주팀은 처음 본 젊은이었다.

보컬에 유혜린, 드럼에 김소희, 콘트라베이스에 김민욱, 피아노에 박종현씨로,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잘하더라.

 

잘 모르는 곡이지만, 유혜린씨의 음색에 깜짝 놀란 것이다.

앳된 소녀의 목에서 어쩌면 저렇게 농익은 소리가 나는지...

마치 수십 년 동안 알콜과 담배에 절은 베테랑 재즈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아무튼, 축하의 자리를 만들어 준 김상현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제발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라도 목숨을 보존하여 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촛불이 광장을 뒤덮을 때마다 앞장서서 축제의 마당으로 이끄는 예술가들이 있다.

바로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된 ‘광화문미술행동’이다.



‘시민나팔부대’가 나팔과 풍물로 신명을 끌어 낸다면,
‘광화문미술행동’은 예술 행위로 집회의 격을 높이며 시민 행동에 자긍심을 심어준다.



시민들에게 찍어 주는 판화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 사료로 자리 할 것이고,

예술가들의 다양한 퍼포먼스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며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다.




3년 전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시작된 ‘광화문미술행동’은 참가 작가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정치적 논쟁만 터지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사태가 마무리되면 흩어진다.

회비도 회칙도 없는 자생조직이다.



핵심적인 일은 판화가 김준권씨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맡지만.
80년대 민주항쟁 시절부터 온 몸으로 싸워 온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1980년대 미술을 통해 현실에 저항해 온 노력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괘를 같이한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민중미술은 역동적이라 온 몸에 피가 솟구친다.
삶의 현실과 직결된 그들의 작품들은 기존의 심미적 작품과는 격이 다르다.




지난 12일 열린 제9차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평소보다 빨리 나갔다.
광화문과는 달리 장소가 협소하여 군중 속에 파묻히면 찿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전1시 무렵 서초역에 도착하여 2번 출구로 나가는데, 뜻 밖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 방동규선생께서 사모님과 계셨는데, 첫 일진이 좋았다.

며칠 전 과도한 중량의 역도를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걱정스러운 말씀도 하셨다.


정영신 사진


방동규선생은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아직까지 일하러 다니며 근육운동까지 하는 강골이시다.

백기환, 황석영씨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구라로 꼽히는 협객이다.
존경하는 선생을 촛불현장에서 만났는데, 어찌 인증 샷이 없을소냐.




서초 사거리 중앙에는 ‘광화문미술행동’ 팀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붓글 퍼포먼스를 벌일 대형 현수막 외에도 많은 깃발과 그림 현수막까지 준비해 두었다.

김준권, 김진하, 김 구, 김 억, 이광군, 송용민, 김영배씨가 이른 시간 부터 나와 있었고,

뒤이어 정복수, 김진열, 이흥덕, 김건희씨 등 많은 분들이 나타났다.



여지것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류연복씨는 진천에서 열린 개인전 때문에 나오지 못했지만,

장경호씨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살기에 다들 아파 누웠을까 걱정하더라.



참여 작가들 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검찰개혁을 향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후통첩’, ‘악질검사 대청소’, ‘다음은 없다’ 등 다양한 글귀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독수리들이 처절하게 싸우는 경주 정비파씨의 판화를 바탕으로

김 구, 김진하, 송용민씨가 덧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림막 뒤편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아니라 김진열 대학총장이 판화를 찍어주었다.

그 판화 작품들은 역사적 무게까지 더하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판화를 얻으려는 시민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이 날 사진가들도 여럿 참여하였다.

정영신, 하형우, 양시영, 박윤호, 권 홍, 성유나, 임헌수, 김대희씨가 차례대로 나왔고,

뒤늦게는 전민조, 박옥수, 김문호씨도 나왔다. 다들 서초대첩의 종군기자들이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준비한 김밥 한 줄 얻어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구씨 따라 갔더니, 다들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통풍에는 맥주가 쥐약이라 콜라나 마셨는데, 마침 김문호씨 연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가 김문호, 박윤호, 정영신, 하형우씨와 어울려 지난 주 식사했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막걸리를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는데, 밥 값을 하형우씨가 계산해 버렸다.



덕분에 다른 분이 사는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나니, 촛불광장은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총알이 떨어져버렸다.

보조 건전지가 깡통이라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기 없는 병사는 시체나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기관총을 가져 올 각오였지만, 이 날이 최후통첩 보내는 마지막 집회가 아니던가?



대전에서 온 이석필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함께한 동지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도 어두운데다 귀 까지 어두워 핸드폰도 무용지물이었다.

인파를 헤집고 다니며 얼마나 헤맸는지, 진이 빠져 버렸다.

자리잡고 앉아 검찰개혁이나 외쳤으면 좋으련만, 돌아다니는 찍사의 팔자 아닌 습관을 어쩌랴!



최후통첩 날린 검찰개혁은 이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후통첩도 종료가 아니라 잠정중단으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납득할 만큼의 검찰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검찰이 저항하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언론개혁과 정치개혁에 이르기 까지 적폐청산의 길은 아직 멀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 ‘광화문미술행동’은 함께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사람이 그리우면 인사동에 나간다.

어디엔들 사람이야 없을까마는 그곳에 가면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생각에서다.

그리운 사람들은 대개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 있어도 소식조차 없다.

사라져 그리운 것인가? 그리워라 사라지는 것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누군가가 그 자리를 다시 채울 것이다.

나 역시 다시 채워질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그리움의 보따리가 더 크지만...


 

그래도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인사동이라 눈에 익은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잘 모르는 사이라도 마음이 쉽게 통할 뿐더러, 전시가 열리는 구석구석에 예술가들이 박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인사동 나들이는 꼭 보아야 할 전시가 여럿 있어 작정하고 나온 것이다.


 

새로 개관한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초대전이 대표적이고,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과 마루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지난 6월에 개관한 베를린미술관이었다.


 

전시관보다 무슨 전시인지가 더 중요해 미루기도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잘 맞않았다.

마루지하에 자리 잡은 베를린 미술관은 본래 계절밥상’이 있던 자리로 엄청 넓은 공간이 아니던가?


 

그 자리에 돈 안 되는 미술관이 들어섰다는 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운영하는 지승룡씨를 만나 속내를 들어보고 싶었다.

돈에 중독된 야박한 세상에 예술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100여 평이 넘는 7개 층 전관을 갤러리로 만들어 운영하다

몇 년 만에 빈손 들고 나 앉은 아라아트의 김명성씨가 어찌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재기의 몸부림에 한 가닥 기대는 걸지만...



가끔은 돈만 마약이 아니라 예술 자체도 마약이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마약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바늘구멍보다 작은 희망에 온 몸을 태울 수가 있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떠 올리며 인사동에 들어섰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뜻밖에 만난 활로였는데, 마치 저승사자가 날 잡으러 온 것 같았다.

귀신같은 망또를 휘날리며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신창영씨가 무슨 바람이 불어 지리산에서 인사동으로 날아왔을까?

서각에 달마영혼을 불어넣는 그는 잡귀에 능한 양반인데,

지난 번 페북에서 실연의 애절함을 솔직하게 보여주어, 그 어울리지 않는 순정에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저녁에 술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병원의 금주령이 걸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 초대전을 열고있는 금보성씨와 심철민 관장을 만났고,

마루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도씨의 전시를 본 후, 베를린미술관에도 들렸다.



전시장을 내려다보니 누군가 손을 흔들었는데,

초점 맞지 않는 안경을 치켜세워 보았더니, 사진가 박옥수씨 였다.

베를린 미술관지승룡대표와 제주에서 활동하는 양상철작가도 함께 있었다.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각각의 전시관에 부스 전처럼 열리고 있었는데,

먼저 입구에 전시된 양상철씨의 작품을 돌아보며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 전시장은 실험정신을 실천하는 기획전 위주로 운영한다는데,
곳곳에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좋았다.

작품들을 감상하며 사람도 만날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니겠는가?


 


박옥수씨와 함께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통인화랑이었다.

전시작가인 김정선씨는 자리에 없었으나, 이계선 통인화랑관장을 만났다.


 

박옥수씨가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저녁식사라도 하자고 했다.

가까이 있는 툇마루에서 된장비빔밥에 빈대떡까지 시켰으나, 술은 마실 수가 없었다.

내가 병원 의사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니라, 박옥수씨가 평생 술과 담을 쌓고 사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사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돌아가신 심우성선생과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 강민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심우성선생과는 살아 생전 각별한 사이기도 했지만, 강민선생은 주부생활편집장으로 계실 때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고 한다.


 

인사동 터줏대감이 한 분 두 분 떠나가는 빈자리의 쓸쓸함이 밀려왔다.

마침 오늘의 인사동을 대변하는듯한 작품이 떠올랐다.



베를린미술관에서 보았던 양상철씨의 오구동행이란 작품이었다.

가까웠던 친구들이 떠나버려 빈자리가 많아졌다는 그 쓸쓸한 식탁이

오늘의 인사동을 말하는 시어처럼 머리에 내려 꽂혔다.

 

사진, / 조문호




















 

 

 





이윤기씨의 빛 그림 사진전 ‘시간을 담다’가 지난 2일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전시된 사진들은 그림처럼 아득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싱그러움이 느껴져, 젊디 젊은 사진가의 작업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은 이윤기씨는 칠순을 훌쩍 넘긴 노사진가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유수같이 빠르다.
그의 사진에는 인생무상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이 배어있다.
이윤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흘러가는 그리움의 시간이고 세월이었다.
연분홍 빛 아름다웠던 사랑의 시간도 담겨있고, 힘겹고 암울한 고난의 시간도 담겨있다.
돌이킬 수 없는 억겁의 세월은, 장면 장면마다 그리움이 절절했다.






이윤기씨는 바람에 날려가는 시간과 세월을 붙들어 인화지에 뿌려 놓았다.
얼핏 보면 느린 셔터로 쉽게 찍을 수 있는 이미지로 볼 수도 있으나,
그의 사진에는 깊은 내공이 쌓여있다.
어쩌다 한 두 장이라면 우연성에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형상화하기 위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찾아낸 기억이다.





그리움의 시간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리움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그렇게, 봄날은 가는 것이다.






사진 평론가 최연하씨는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작가가 붙잡고 싶은 십 분의 일초는 그가 사진에서 되찾고 싶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근거인 풍경-세계 속으로 들어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겹쳐 운동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무엇이 어떻게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풍경이지만, 시간의 눈들이 분명하게 포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매 순간 세계가 선사하는 빛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작가의 눈빛도 반짝인다. 자유롭고 귀한 몸짓이다.

작가는 아마도 작가 속으로 들어 온 바람과 더불어 ‘바깥’의 바람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바깥(피사체)이 사진가의 내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이윤기의 빗금 그어진 풍경을 보며 생각한다."






이 전시는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15일까지 열린다.






지난 6일 정오 무렵 ‘갤러리 브레송’을 찾았다.
누구 전시인지 어떤 사진인지도 모른 체, 김남진관장의 부름에 따른 것이다.
마침 밥 먹으러 갔는지, 김남진씨도 전시작가도 없었다.
사진을 돌아보며, 작가 이윤기씨가 누군지 궁금했다.




아름다운 풍경만 찾아다니며 복제하듯 찍어대는
아마추어 사진들에 진저리를 내 온 터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많은 생각을 끌어내는 사진에서 어렴풋이 작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젊은 감성이 묻어났다.
전시장에 들어오는 작가를 만나보니, 성함만 기억 못했지, 잘 아는 분이었다.
전시 오프닝마다 숱하게 만나왔고, 술잔도 여러 차례 나누었던 분이 아니던가.
그 분의 사진도 처음 보았는데, 사진으로 이윤기씨를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전시를 돌아 본 후, 사무실에 들어가 김남진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진가 박옥수씨가 들어왔다.

충무로에서 숱한 세월을 보낸 분이라,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젊은 시절에는 문선호선생 스튜디오에서 일한 적도 있다며,
문선호선생의 세심한 성격과 사업적 수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성출판사’와 손잡고 현대미술가100인선 화집을 만들어 돈도 많이 벌었단다.
어느 날 스튜디오에서 누드 모델을 촬영하신 후, 그 이틑 날 갑자기 돌아가셔서
복상사하셨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사실이 아니란다.






한 때는 제일 행복한 죽음이 복상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차피 죽을 것, 황홀하게 마감하고 싶지만 살아남은 사람 생각에 안 될 것 같았다.
이윤기씨 사진처럼, 아름다운 꽃비를 날리고 싶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고가공원에서 박옥수 선생을 만났다.

지난 26일 박사모 집회를 찍기 위해 고가에 올라갔더니,
뒤에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사진가 박옥수 선생이었다.

2년 전에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홈리스 추모식‘에서 만난 적이 있으나,
그 땐 사진 찍느라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박옥수선생은 나보다 두 살 적은 49년생이지만, 20대부터 찍어 사진으로는 한참 선배다.
일찍부터 이형록선생의 ‘신선회’와 ‘싸롱 아루스’에 이어져 결성되었던,
‘현대사진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원로 사진가다.

차 한잔하기 위해 서울역사에 있는 커피체인점을 찾아갔다.
한 끼 밥값에 버금가는 찻값이지만, 자릿세로 생각하고 들어간 것이다.
요즘 박선생께서 페이스 북에 자주 올리는 70년대 사진이 궁금해서다.

박선생은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토탈스튜디오’를 운영한 상업사진가다.
탈에 관한 사진이나 풍경사진은 더러 보았지만,
사회기록에 관한 사진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페북에 올린 사진 밖에 보지 못했지만, 뚜렷한 주제 없는 포괄적인 기록이었다.
더러는 세월에 숙성된 귀중한 사진들도 있었는데,
그토록 열심히 찍은 사진을 왜 묻어두었는지 궁금했다.

차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모르는 사실도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차정환씨가 근무한 것은 알았지만, 박선생이 근무한 것은 전혀 몰랐다.

제일 먼저 미국 이민 간 이창진씨가 했고, 그 후임으로 박선생께서 맡았다는데,
차정환씨는 박선생 후임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파리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니’ 자동차 광고사진을 찍던 추억담도 들려주었다.

요즘 페북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사진이 현대자동차에 근무했던 시기였다.
추측컨대, 상업사진을 하다 보니 순수사진에 대한 갈증으로
틈틈이 기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충무로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일거리가 없어 집세를 내지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추석이나 설날 전에 몰려오는 상품 사진을 찍어, 밀린 집세를 내기도 했단다.

나도 한 때 박선생 스튜디오에서 신세 진 적이 있다.
‘동아일보사진동우회’ 일을 할 때인데,
‘동아국제사진살롱’ 도록에 들어갈 입상작을 급히 찍을 일이 생겨,
박선생이 운영한 ‘토탈스튜디오’로 가져가 도움을 받은 것이다.

갑자기 잊혀 진 시절의 오래된 사진들을 내놓은 것은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나서야 짬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후배의 도움으로 많은 필름을 스캔 받았다는 데,
그 사진 원고를 몽땅 출판사에 넘긴지도 한참 되었다고 한다.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확답을 듣지 못해 초조해 했으나,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기가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쪼록 좋은 결실 맺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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