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의 WHY YOU

▲ 박수근,  벚꽃, 종이에 유채, 26x119센티미터, 1961년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기는 물론 물감이 칠해진 느낌도 박수근의 여늬 그림과는 다르다. 방금 흰색의 회를 바른 것 같은 화면이다. 화강암 같은 재질감과 색감이 아니라, 밝은 바탕 위에 이 바탕칠이 마르기도 전에 붓이 아니라, 분명 연필로 윤곽선 긋기를 감행했다.

 

그런 뒤 충분히 마르기를 기다려 꽃과 잎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기 어울리는 색깔을 발랐다. 그랬기에 색깔들은 반들반들한 바탕 위에 미끄러지는듯 발라졌다. 이 색깔들은 상당히 묽다.

 

이 그림은 1961년에 그려졌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꽃이,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 꽃인데 모양은 다르다. 서로 종류가 다른 벚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봄에 그려진 것이리라. 분홍 벚꽃을 그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던 화투패에 그려진 벚꽃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같기도 하다.

 

▲ 박수근,&nbsp;&nbsp;벛꽃의 부분화
 

박수근은 곧 있을 쿠데타를 모른 채, 지난 해 봄부터 펼쳐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4.19 공간이라고 하자. 1960년 봄, 이 벅찬 국면을 맞은 시인 김수영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밑씻개로 쓰자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이때로부터 10년 뒤인 1970년에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잊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인물로 그려낸 소설 <나목>을 써낸 박완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에서, 1960년 4월 이래 기쁨에 차 날마다 거리를 거닐며 쏘다녔다고 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태어난 나에게는 박정희가 죽은 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시기가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하였기는 해도, 1919년 3월 만세 혁명의 다음에도 이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한 시기, 전주성을 접수하여 해방했을 때도 그랬으리라.

 

일본의 강제 점령하에서 태어나 살았던 박수근의 삶에서는 광복의 시기에 잠시 그랬을 것이다. 10년도 더 지나 지긋지긋했던 이승만 독재의 그늘에서 살았던 박수근이기에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는 북한 치하에서 중학교 교사이면서 기초 단위 대의원이기도 했으므로, 초등학교만 나온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상을 내세워 침묵하고 지내왔다.

 

▲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생전의 박수근 화백.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1960년 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 봄의 분위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려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날이 갈수록 정갈해져 가는 화강암 같은 재질감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였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좀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이 빠른 이 기법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다른 면모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가 사망하는 1965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대략 20점 정도이다. 그런데 그 20점은 박수근의 그림들 가운데 꽤 소외되어 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화풍으로 인해 박수근의 그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못해 박수근의 작품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록에 제대로 싣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판로를 찾기 어려워 잘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에는 태작이 없다. 새로운 화풍의 20점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화법에 회화적 요소를 좀 더 많이 가미해 조화롭게 적용한 수작이다. 희망과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화풍의 박수근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귀로, 귀가, 고목과 세 여인 등 다양한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
배경, 구도, 서명 위치까지 어머니의 길을 향해 배치

▲ 박수근 귀로, 나무와 세 여인, 천에 유채, 41. 5x 79.5센티미터, 1962, 개인 소장. 흔히 '귀로'라고 하지만, '귀가' 혹은 '고목과 세 여인'이라고 붙인 곳도 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면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헐벗은 나무 뒤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땅도 하늘도 구분이 되지 않을뿐더러 온통 뿌옇다.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 달리 이 나무는 그림의 아랫변을 땅으로 삼아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아랫부분 밑둥과 가지의 윗부분은 박수근이 잡아낸 장면의 바깥으로 뻗어 있다.

 

나무 뒤로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세 여인이 걷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은 지쳐 보인다. 여인네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함지 같은 것을 머리에 얹었으나 위가 볼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 것을 다 팔아 거의 비어버린 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루가 저물 무렵, 눈이 약간 오는 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

 

▲ 부분화. 나무의 주기둥 한가운데 앞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모두 잘려 있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가지들이 나뉘어 뻗어간다. 그런데 앞부분에 가지들이 조금만 남은 상태로 잘려져 있다. 굵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잘려진 것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람 잦아지라고 위로 뻗는 가지 세 개만 남겼을까?

 

나무의 전체 모습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순탄하게 자랐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 곁을 지나가는 아낙네들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해를 맞으려 왼쪽으로 향한 가지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낙들은 해를 등지고 걷고 있다. 눈 내리는 흐린 날이 아니었다면 앞쪽으로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나무를 가운데 두고, 공간이 넓은 왼쪽에 두 사람 오른쪽에 한 사람을 배치했다. 왼쪽부터 각각 노랑, 빨강 그리고 검정 저고리를 입혔는데, 이 저고리 색들만이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색깔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부분화. 열 번쯤 덧그려 입체감을 만든 화면 사이로 다양한 색이 보인다
.

거의 회갈색인 전체 화면에서 검다시피 한 나무와 세 사람의 옷 빛깔 만이 조금 눈에 띄는 담담한 색조의 그림이다. 이를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배경을 색채의 장식으로 메꾸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보는 사람의 상상속에서 넓게넓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색을 볼 수 있다. 박수근은 이 많은 색이 전체 색조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수천 번 붓 작업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둡지만 밝고, 보일 듯 말듯 수많은 색깔만큼이나 많은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차분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수천 번의 붓 작업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있기 때문이다.

 

간격을 달리하였지만 세 사람을 마치 줄 세우듯 배치했고, 화면 아랫변에서는 약간 올려 그렸다. 수근의 다른 그림과 달리, 발이 닿는 부분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고 배경과 균질하게 처리하였다.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는 나무를 지나, 눈 내리는 으스름에 세 사람이 가는 길이 끝없이 적막해 보이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길은 이미 지나온 길을 포함하여 앞으로 더 멀리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균질하게 처리함으로써 생긴 심리적 공간이다.

 

▲ 부분화, 나무의 주 기둥 바로 왼쪽에 박수근 화백의 서명(흰색 화살표)이 보인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 그림에만 있는 특징이라 할 조처를 덧붙였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써넣는 이름은, 보통 그림의 아래이거나 어느 쪽이든 귀퉁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툭, 채일 수도 있는 위치에 적어놓았다. 아주 드문 예다. 이 그림의 전체 구도는 이 이름쓰기(서명)의 위치와 더불어 특이한 모습이다.

 

박수근은 1960년에 일어난 학생혁명 이후, 전에 없던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시기인 1962년에 그려졌다. 하지만 칠하고 말리고 그 위에 다시 칠하고 말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박수근 특유의 화법에서 나오는 질감과 색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결과는 흔히 화강암이라고 부르는 쑥돌의 느낌이다.

 

▲ 수석 전문가인 설화취선님의 탐석(探石) 블로그(m.blog.naver.com/wlstnddjs)에서 제공한 다양한 쑥돌 사진. 좌상단의 쑥돌은 이끼가 많이 낀 상태이다.
 

화가는 아들에게, 아비가 추구하는 색감과 질감은 이런 것이다 하며 쑥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근에게는 구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었고, 이를 한평생 추구했던 것이다.

 

박수근의  이 그림에 대한 평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 작품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 여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이 이제는 그쳤겠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하염없이 길게 이어졌을까! 아이들과 지아비를 먹여살리기 위해 그렇게 이어진 애씀이 그들의 일상을 위험에서 건져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80센티미터이다. 박수근의 작품들 가운데 꽤 큰 편이다.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려면 양손의 손바닥을 펴서 손목을 굽히지 않고 서로 붙여보자. 그 길이와 비슷하다. 수근은 길고 긴 어머니의 길을 작품의 크기, 색, 구도, 심지어 자신의 서명 위치까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 그림을 비롯해 박수근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인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광복 직전에 정신대를 피하려고 16살의 나이에 노총각이던 내 큰 외삼촌과 맺어졌다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폐해져 늘 아팠던 남편을 대신해 물고기를 사다 새벽부터 온 산중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렸던 키 크고 고우셨던 나의 큰 외숙모님이다. 내 주변 친지들 가운데 가장 많이 고생하신 그 분을 어찌 잊으랴.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김진열씨의 목판화전 ‘이웃’과 ‘모심’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열린 지난 17일 오후6시 무렵, 전시장에는 전시작가인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

미술평론가 이태호, 최석태씨, 화가 김 구, 손기환, 이인철, 이흥덕, 나종희씨 등 여러 명이 작품을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움을 뒤로하고 작품부터 돌아보니, 몇 년 전 그 장소에서 보았던 작품의 대상과 소재만 달랐지 작가가 말하는 메시지는 일맥상통했다.

철판을 주워 모아 시뻘겋게 녹 슨 금속의 질감으로 담아내었던 그 때 작품이나,

한 스린 민초들의 삶을 통해 우리민족의 아픔을 나타내는 시대정신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거친 노동의 투박한 질감이 주는 동질감이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전시된 김진열씨의 목판화에서 한 평생 인간에 초점을 맞추다 세상을 떠난 휴머니스트 사진가 최민식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그의 작품이 소외된 서민을 통해 인간애를 담아내고 동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려 했던 최민식선생의 작업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자신의 미학을 구현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서민들의 초상으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년에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꼭 받아야 할 작가라고 여겼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정신세계에 가장 적합한 작가가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그림만 그려내는 화가가 아니다. 그 생각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작가다.

오랫동안 원주에서 환경 운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해 왔는데, 지금은 대학 총장 직책까지 맡아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다.

학교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접하며, 진짜 그 학교는 복 받은 학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썩어 빠진 교육 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민중미술 경향의 칙칙하고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강한 소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사람중심의 작품에서 생명존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작품의 대상을 머리나 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공간인 원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찾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스쳐 가는 사람 모습을 스케치하며 사실적인 현장감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 온 것이다.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서성이거나 기다리는 모습에서,

서민적인 인간애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며, 그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과 착취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케 하는 것이다.






전시 제목에 붙은 이웃과 모심(母心)은 그 모심을 통해 생명존중과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보여 준 목판화도 처음 보았지만, 드로잉과 사진들을 나란히 배치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왼쪽에 배치한 흑백사진의 버려진 황량함과, 오가다 만난 사람을 드로잉한 그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자세와 표정이 다양했다.

많은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준 그 작품으로 작가가 이야기하려 한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소외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성 상실을 질책하는 것은 아닐까 유추해 본다.






아무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자신만의 특유한 기법으로 구현하는 김진열씨의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쓰레기 같은 작가가 넘쳐나는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가도 있다는 것이 살아야 할 한 줄기 빛이고 유일한 위안이다.


미술평론가들은 "김진열은 삶의 체험적 질료를 중시하는 작가"라고 규정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우리 시대의 인간적 꿈, 우리 자신이 간과하고 상실해온 꿈이 끈적끈적하게 깃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벌거벗겨진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







작가 김진열씨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전시장에서 내려와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사동 ‘평화만들기’ 옆에 있는 ‘자미향’은 숨은 가게라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민예총 관련 인사들이 자주 찾는 술집이다.

술 안주가 깔끔하고, 조용해서 좋다. 열 명 남짓 이층에 자리 잡았는데, 독방이라 술 마시며 놀기 안성마춤이었다.

뒤늦게 화가 정복수씨와 한겨레 임종업 기자가 들어오니 자리가 꽉 찼다.

 




그런데, 간장게장에 밥 비벼 맛있게 소주 한 잔 하는데, 개 한 마리가 들어왔다.

개도 개 나름인지라, 보기 싫어 고개도 들지 않고 뒷자리로 옮겼으나, 영 맘이 편치 않았다.

사람 될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진열씨가 곧 잘 하는 판소리 한 자락 못 듣고 와 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박성남씨 초대전이 지난 12일 수송동 ‘갤러리 고도’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너무 늦게 전시장을 찾아 때 늦은 소식이 되고 말았지만...

박성남씨의 작품은 아버지 박수근화백의 잔영이 너무 짙게 깔려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작업해온 전반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박성남은 “전쟁으로 몇 번의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한 후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아직 그 작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토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이 많아 아버지가 그린 대상과 표현방법마저 동경해 왔는지도 모른다.

전시를 하루 남겨두고 전시장에 들렸더니, 여러 사람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처럼 서민들의 애환을 박성남씨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한 입김 때문인지, 그보다 더한 감흥은 끌어낼 수 없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주요 작고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대형 특별전이 풍성하게 열리고 있다.

명작은 향기가 나는 살아있는 꽃과 같아 많은 사람을 부른다.


향기 나는 꽃을 보기 위해 대형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여러 번 찾았다. 어떤 때는 덕수궁에서 시작해서 인사동으로 오고, 어떤 때는 인사동에서 시작해서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또 어떤 때는 가족, 지인들과 한 곳만 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좋은 사람은 자꾸 보고 싶고, 재미있는 곳은 자꾸 가고 싶은 법이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20년~1970년대에 한국 근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주역 57명의 주요 작품 100점을 전시한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이 열리고 있고, 인사동에서는 가나아트센터가 기획한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덕수궁에서 5개월간 계속되는 근현대 명화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100점에 담긴 내용과 작가 스토리를 접하며 큰 안복을 누리고 돌아간다. 주요 작품 위주로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도슨트의 설명이 끝나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오디오 기기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반나절을 홀딱 보낸다. 신식 남자로 불리던 모던 보이 작가와 신여성으로 불리던 시대를 앞선 작가, 순수 토종 작가와 유학파 작가 57명이 화폭에 쏟아낸 시대상과 개인사, 그리고 한국적 미술을 구축하기 위해 예술혼을 불태웠던 천재들을 만나며 무한한 행복감에 젖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회도서관,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미술관, 서울대미술관, 홍익대박물관, 연세대박물관 등 국내의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걸작이 총동원되었다. 많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 역시 경매시장을 주도하는 박수근(최고가 ‘빨래터’, 45억2,000만 원), 이중섭(최고가 ‘소’, 36억 원), 김환기(최고가 ‘꽃과 항아리’, 30억 5,000만 원) 등 빅3 작가의 작품은 전시 작품의 수도 많고, 작품에서 뿜어 나오는 힘도 강하여 전시장을 압도했다.

유영국, 오지호, 이인성, 장욱진, 남관, 도상봉, 김흥수, 박고석, 이대원 등의 서양화는 다시 한 번 미술사와 미술시장을 연결하는 통로를 확장시켰고, 운보 김기창,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과 천경자의 한국화는 서양화에 더 익숙한 현대인에게 전통회화의 가치를 당당히 되묻고 있었다. 미술관 전시답게 시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조병덕, 박상옥, 이달주, 김종태, 박성환, 배운성, 이마동, 안상철 등 근대미술사에 자리매김된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출품되어 학습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었다.

이중섭 부스에 걸린 개인소장품과 서울미술관 소장의 소 두 마리를 보며 홍익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나머지 한 마리까지 모두 전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전시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머지 소가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 중요한 작가와 대표작들을 미술관이 지속적으로 조명해주는 것은 시장을 키우고 활성화시키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전시가 해외 평론가와 아트페어에 참석하는 미술계 관계자들이 많이 방문하는 시기에도 계속 열려 우리 작가들을 알리는 전략으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인사동에서 열리는 박수근전은 김환기, 이우환과 함께 경매시장 톱 3작가의 특별전이어서 눈에 익은 작품도 많지만 새로운 작품이 더 많아 안복의 극치를 누릴 수 있다. 박수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패션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는데, 박수근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옷,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과 시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의 한국 그 자체이다.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유난히 여인들이 작품에 많이 등장하고, 앉아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여인과 노인들은 모두 맥이 빠져 있고, 나무조차 벗고 있어 시대상이 그대로 읽혀진다. 박수근의 작품을 보며 관람자는 자신의 삶, 그리고 지금의 풍요와 활력에 감사하게 된다.

박수근전은 한 작가의 전시로서는 대단히 큰 전시이다. 91점의 유화와 25점의 수채화와 드로잉 등 총 116점의 대표작이 대거 전시됐다. 이 중 34점은 경매를 통해 판매된 작품으로 프리뷰와 경매를 통해 공개되었던 친숙한 작품들이고, 다른 작품 중에는 갤러리현대의 2010년 박수근전과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된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서울옥션과 K옥션의 양대 경매시장에서 1998년부터 2013년까지 낙찰된 총액을 보면 김환기 588억 원, 이우환 579억 원, 박수근 491억 원이다. 박수근의 34점 낙찰총액이 224억 원에 달하여 전시된 116점의 총액은 대략 이 경매 총액의 3배 정도로 추정된다.

경매로 거래된 작품 중 최고가는 미술시장이 초호황을 누리던 2007년 5월에 서울옥션에서 45억2,000 만 원에 낙찰된 ‘빨래터’이고, 다음은 ‘시장의 사람들’이 25억 원, ‘농악’이 20억 원, ‘아기 업은 소녀와 아이들’이 15억2,000 만 원, ‘목련’이 15억 원, ‘노상의 사람들’이 12억 원 순이다. 박수근 작품이 비싼 이유는 지나간 시간인 1950~60년대 풍경을 세트로 만들 수도 없고, 어떤 패션 큐레이터도 그의 작품과 똑 같은 연출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박수근의 ‘빨래터’가 덕수궁에 한 점, 인사동에 두 점으로 모두 전시중이다. 여기에 1934년 종이에 연필로 그린 빨래터의 스케치(홍익대박물관 소장, 18.8x26㎝)만 추가로 전시된다면 박수근 빨래터가 모두 우리 눈앞에 나타나 디테일을 비교해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빨래터는 박수근이 부인을 처음 만난 추억의 장소이다. 박수근은 그러한 의미 있는 공간을 여러 점의 작품으로 남겼다. 구도와 색채의 변화를 보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빨래터를 얼마나 많이 찾았을까, 연분홍 빛깔의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부인일까, 자기 부인의 옷은 실제 색깔과 같게 그렸을까 더 고운 색으로 바꿨을까, 두 그림은 여섯 명을 그리고 한 그림은 다섯 명만 그렸는데 왜 그랬을까, 여인들이 옷을 빨며 가족을 생각하게 된다는 뭔가를 표현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의 대표로 빨래터를 선정했는데 그것이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것일까 등 온갖 상상이 발동한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유명한 화가의 전시나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면 더 없이 행복해진다. 행복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쏟은 정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만족이다. 시간만 나면 작품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작품 감상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아트홀릭이다. 작품 앞에 섰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감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진수 교수는 …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2002년부터 미술시장연구소를 개소해 운영하고 있다. 또 아시아미술시장연구연맹(AAMRU)의 공동창설자이자 한국 대표로 아시아 미술시장의 공동발전과 체계적 연구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문화경제의 이해’ 등이 있다.

이번 시즌에 주목할 전시로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2013.10.29-3.3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박수근전’(1.17-3.16, 가나인사아트센터),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2.5-3.9,갤러리현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부터 열린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현재(2월 12일 자)로 23만명이란 관중을 동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열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박수근전’,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에도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반세기 전에 창작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획전들로 어떤 점으로 보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은 20년대에서 70년에 걸친 반세기에 창작된 회화며 ‘박수근전’도 50년대, 6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30년을 상회하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세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두고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의 근, 현대란 시간의 개념이 보편적 기준에서 다소 벗어난 압축된 것이고 보면 더욱 현대의 고전이란 에피세트가 결코 과장은 아니리라 본다.


고전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전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전범은 하나의 모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야 할 준거틀, 가치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근, 현대미술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느냐는 역사적 맥락을 추구할 수 있으며 종내에는 우리미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미학적 탐구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이들 전시에 많은 관중이 밀려온다는 것은 단순한 흥미 본위의 차원을 떠나 우리 것에 대한 목마름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통해서 외국의 고전이나 명화들을 대할 기회는 많아졌으며 흥행 위주의 해외명작전들이 수없이 많이 열린 반면 막상 우리미술에 대한 보다 집중된 전시가 없었다는 데 대한 반사작용이라고나 할까. 외국 것에 대해 식상할 즈음에 나타난 우리 것에 대한 보상심리의 단면이라고나 할까. 국립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에서 가끔 열린 우리 고전에 대한 기획전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점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 Oil on canvas, 65×53cm



우리의 아름다움 다시 찾기

우리 것이 좋다,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국수적 발상이 아니라 우리 것이 결코 외국 것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각현상, 우리 독특한 아름다움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야 말로 감상적, 편파적 국수풍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우리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 남 것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보인다는 데서 진정한 미술감상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우리의 근, 현대미술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획이다. 시대별 경향의 추이, 방법의 다양한 모색, 그 속에서 가꾸어진 개별성을 점검해볼 수 있으려면 이만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모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박수근전’은 박수근의 전체 유화작품이 대개 300점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추론되고 있는데 이 전시에 유화작품이 100점이 나왔다는 것은 그의 전체 작품의 약 3분의 1이 출품되었다는 계산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각기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이 한자리에 대량으로 진열되었을 때는 또 다른 감동의 열기로 다가온다. 개별에서 못 느끼는 무게라고나 할까. 파워라고나 할까. 우렁찬 합창을 듣는 기분이다. 그래서 한자리에 대량의 작품들이 진열되는 회고전이 유달리 감동을 자아내는 이유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5월에 열리게 될 박수근 탄생 100주기 기념전(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인간적인 면모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하게 한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은 종이란 매체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만을 모았다는 데서 또 다른 기획의 묘미를 발견한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 종이는 각별한 데가 있다. 종이로 에워싸인 공간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에게 종이란 매체는 단순한 지지체에서 벗어난 정서로서의 그 엇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인과 육화된 어떤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조형의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데서 이 전시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나 본다.

 [내일을 열며-이광형]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국민화가 박수근을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생몰연도가 ‘1914년 2월 21일∼1965년 5월 6일’로 나온다. 태어난 날을 2월 21일로 기록한 것은 박 화백의 친필 이력서와 아내 김복순 여사의 회고록을 토대로 했다. 이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4년 1월 27일이 된다. 하지만 박 화백의 실제 음력 생일은 1월 28일이다.

아내는 남편의 일생기에서 “나도 그이 생일날이면 손수 뜨개질을 해서 보내곤 하였다. 그이의 생일은 음력 정월 28일이었다”고 적었다. 또 아직 생존해 있는 박 화백 제수씨도 음력 1월 28일 박 화백의 생일잔치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박 화백이 태어난 날은 양력 2월 21일이 아니라 22일이 맞는다.

그럼에도 2월 21일로 돼 있는 것은 박 화백과 아내가 음력을 양력으로 계산하면서 하루 빠른 날짜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양력보다 음력이 보편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은 지난 27일(음력 1월 28일) 오전 11시30분 미술관 근처의 박 화백 부부 묘소에서 박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행사에는 아버지를 이어 화가로 활동 중인 장녀 박인숙(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씨와 장남 박성남씨, 손자·손녀와 친인척 등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박 화백이 평소 좋아하던 백합을 묘소에 헌화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 화백 부부에 대한 추도예배로 진행됐다. 미술관은 앞으로 음력 1월 28일을 박 화백의 정식 생신기념일로 삼기로 했다.

박 화백은 1남3녀 중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위로 딸만 셋이 있어 간절했던 아들이었기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목숨 수(壽) 뿌리 근(根)’으로 지었다. 일곱 살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밀레의 ‘만종’을 도판으로 처음 보고 “하나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18세가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한 것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빨래터’ ‘시장 여인들’ ‘농악’ ‘노상의 사람들’ 등 300여점을 남겼다. 지병인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된 그는 65년 5월 6일 새벽 1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일구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 이웃과 가족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풍경이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평가다.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3월 16일까지 열리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박 화백은 자신의 작품 진위 논란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한 ‘빨래터’의 경우 “위작으로 볼 수 없다”는 법정 판결이 나왔으나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 목판화도 박 화백 사후에 찍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작을 진품으로 속이는 것도 나쁘지만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더 나쁘기 때문에 위작 제기는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내에는 공인된 미술품감정기구가 없어 진위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주장이 난무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일 날짜를 바로잡고 행사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연구하는 작업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








가나아트,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직장인 등 북적
한경갤러리의 판화전에도 관람객·문의전화 이어져

서울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23일 국내

경매사상 최고가 작품 ‘빨래터’를 감상하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박수근이 미술학교를 나왔으면 이런 작품이 안 나왔을 거야. 파리에 유학 가기 전에 그를 자주 만났지. 파리에서 돌아와 그의 집으로 찾아가니 미술 도구도 없이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더군. 생전에 개인전은커녕 제대로 된 화실조차 없이 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던 불우한 예술가였지.”(서양화가 김흥수)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3월16일까지)과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의 판화전(28일까지)에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나아트갤러리의 ‘박수근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는 지난달 17일 개막 이후 한 달간 4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가나 측은 평일에는 하루 1000여명이 전시장을 찾았고, 주말에는 2000~3000명이 관람했다고 밝혔다.

국내 미술시장의 ‘대표주’가 펼쳐놓은 ‘상상력의 보고’인 이번 전시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장년층을 비롯해 젊은 층, 노년층, 주부, 직장인, 학생까지 다양한 관람객이 다녀갔다. 기업인과 미술 전공자, 외국인 관광객, 자녀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가족들도 찾아왔다. 향토적인 민족 정서를 그림에 담아낸 박 화백이 한국 현대미술 문화에 끼친 영향 때문에 전시장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정우현 MPK(옛 미스터피자)그룹 회장은 “박 화백이 단순하면서도 민족적인 화풍을 살려내려 평생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며 “1950~60년대 일상 속 노인, 부녀자, 소녀 등의 이미지들을 작은 화면 속에 정감 있게 그린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정서가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전시장을 두 번 찾았다는 한수정 갤러리 이즈 대표(46)는 “박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며 “한쪽 눈에 백내장을 앓으며 여인들을 그린 작품에는 숱한 세월을 견뎌온 마애불 같은 질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관람객들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3층에 전시된 1952년작 ‘빨래터’.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던 이 작품은 이보다 가라앉은 색채의 또 다른 1.1m 크기의 ‘빨래터’와 함께 걸려 꼼꼼히 대조하는 관람객이 많았다.

정주성 삼성물산 전무(53)는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면 개울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며 “새봄과 새날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포근한 애정이 감지된다”고 감탄했다.

소설가 박완서의 처녀작이자 출세작 ‘나목(裸木)’에 영향을 미친 1956년작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품 앞에도 관람객이 북적거린다. 나목이 자리잡고 그 아래 두 여인이 배치된 아주 단순한 설정이지만 박수근이 다룬 모든 여인들을 집약했다는 점에서 박 화백 미학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귀가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황토색 짙은 미감으로 묘사한 1962년작 ‘귀로’, 1950년대작 ‘시장 사람들’, ‘노인과 소녀’(1959년), ‘고목과 행인’(1960년대) 앞에도 줄지어 있다. 


이옥경 가나아트갤러리 대표는 “출품작은 모두 개인 소장자에게 빌려온 것으로 한국 미술 거장의 작품을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며 “전시에 자주 안 보였고 사연이 있는 작품들을 연대별로 선별해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한경갤러리의 ‘박수근 판화전’에는 저렴한 가격의 판화를 소장하고 싶어하는 애호가들이 몰려오고 있다. 한경갤러리는 1954년 국전 입선작인 ‘절구질하는 여인’를 비롯해 ‘귀로’ ‘아기업은 소녀’ ‘독서’ ’젖먹이는 여인’ ‘노상’ ‘골목안’ 등 20여점을 점당 30만~40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유화전 문의 (02)2287-3500.판화전 (02)360-421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