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복고바람

연초 미술가에 박수근, 이중섭 등 ‘국민화가’ 중심의 복고바람이 거세다.그동안 연말연시 기획으로 해외 유명미술관의 소장품전이 큰 흐름을 이뤘으나 올해엔 우리나라 근현대명화전이 강세다. 겨울방학용 해외명화전 위주에서 벗어나 ‘국민화가 작품전’이 새롭게 호응을 얻고 있다. 친근한 국내 작가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우리 미술이 재조명되면서 학생, 가족 단위의 미술애호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으로 관람객층이 확산되는 추세다.


▲  가나인사아트센터의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관람객들이 대표작 ‘빨래터’를 감상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미술가 복고 열기를 이끄는 대표적인 기획전은 가나인사아트센터의 박수근 회고전(3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3월 30일까지) 및 갤러리현대의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3월 9일까지) 등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을 비롯해 대형 화랑들이 진행하는 이들 전시장으로 주말이면 하루 2000∼3000명의 관람객이 몰리는 등 국내 미술거장과 대표작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 전시를 중심으로 기발한 실험과 도전의 난해한 현대미술과는 또 다르게, 전통 장르의 회화, 드로잉 중심의 근현대미술전이 미술가에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다.

◆중·장년층 문화마인드가 반영된 친근한 우리미술 =‘근현대작가전 열기’와 관련해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해외 유명미술관 소장품전이 경비 부담 등을 이유로 주춤한 반면, 국민화가 기획전이 새로운 문화소비층으로 부상한 중·장년층의 회귀적 감성과 맞물려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  이중섭의 ‘세사람’


 

자본 부담이 덜한 국내기획으로 연초 세시풍속형 고미술전과 더불어 우리 미술을 돌아보는 기획전이 정례화하고 있는 것. 전시기획자들은 은퇴 전후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중·장년세대들이 추구하는 문화마인드가, 대중음악의 ‘세시봉 열풍’의 연장선에서 우리 근현대미술로 연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젊은 층에서도 해외여행 중 유명미술관 나들이를 통해 접한 미술 경험이 자연스럽게 우리 미술과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오후 2시 박수근 회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는 서너 명씩 무리지어 다니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등산복 차림의 주부 이경인(50·서울 서초구 효령로 68길) 씨는 “박수근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어 반갑다”며 “지난 1월 17일 개막 직후 혼자 둘러봤고 오늘 북한산 등산길에 친구들과 또 찾았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3층 전시작 중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인 45억2000만 원에 낙찰됐던 가로 72㎝의 ‘빨래터’와 이보다 크고 가라앉은 색채의 1.1m 크기의 제2 ‘빨래터’를 꼼꼼히 대조해보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박 화백이 자신의 장남을 그린 1952년작 유화를 한동안 지켜보더니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듯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최윤이 가나인사아트센터 팀장은 “전시가 입소문을 타면서 일부 소장자가 미공개 소장품을 전시에 제공하고 있다”며 “22일 박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앞서 전시작이 보강됐다”고 밝혔다. 전시도록 표지화 ‘노상의 사람들’을 닮은 드로잉, 1950년대 유화 ‘절구질하는 사람들’이 설 직전 전시작으로 추가됐다.

◆이중섭 소그림 3점 동시 전시 등 전시작 업그레이드= 지난해 10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막 올린 ‘명화를 만나다-근현대회화 100선’은 90일 만인 지난 토요일 유료관람객 25만 명을 넘어섰다. 무료관람을 포함해 일평균 관람객이 2900여 명에 이른다. 1920∼1970년대 한국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근현대화가 57명의 대표작 100점을 한데 모은 기획이다.

전시기획자 임병준 씨는 “40∼60대를 중심으로 관람 열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시작의 업그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  천경자의 ‘길례언니


현재 이중섭의 소그림 중 서울미술관과 개인의 소장품 2점이 걸려 있는 전시장에는 오는 18일부터 홍익대 박물관의 소장품이 더해져 이중섭의 소그림 걸작 3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서울미술관과 개인의 소그림은 제목이 ‘황소’이고, 홍익대 소장품은 ‘흰소’다. 서울미술관 ‘황소’와 홍익대 ‘흰소’는 이미지가 비슷해도 자세히 보면 고개를 숙인 서울미술관 ‘황소’가 보다 동적이며, 머리가 수평인 홍익대 ‘흰소’는 움직임이 덜하다. 반면 전시 중인 개인 소장의 ‘황소’는 ‘머리’만의 소그림이다.

관람객 대상의 설문조사 등을 토대로 근현대 대표작 100점 중 특히 관람객의 관심을 모으는 작품으로 이중섭의 소그림 외에 천경자의 ‘길례언니’,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이 지목됐다.

서울전 폐막 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4월 8일부터 시작하는 ‘명화를 만나다’ 부산전에는 서울전에 나오지 못했던 김인승의 ‘봄의 가락’이 소장처인 한국은행 2월 자체 기획전 후 추가될 예정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도 1층에 전시 중인 이중섭의 종이드로잉 ‘세사람’과 은박지 그림 등에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문화일보 / 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

 


23일 인사동서 100주년전 관람…"국민에 다가가고 싶어"


조병현 서울고등법원장(두루마기 차림)을 비롯한 판사 25명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린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참석해 박 화백 아들인 박성남 씨(오른쪽)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박상선 기자>

지난 23일 오후 6시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무채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 갤러리에 하나 둘씩 모여든다.
그 숫자는 이내 열명을 넘어 스물다섯명이 된다. 오랜만에 `강`을 건너 인사동에 온 서울고등법원 판사들이다.
이날 조병현 법원장(59)을 필두로 특별한 강북 인사동 나들이를 감행한 것은 `박수근 탄생 100주년`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전시를 기획한 이옥경 가나아트갤러리 대표가 미술 애호가인 조 법원장에게 "정말 많은 노력을 들여 유화 90점을 모았다"고 권했다.

법원장은 "갤러리 제안도 있었지만 `국민화가`라는 칭호에 많이 끌렸다"며 "법원의 고유 임무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인데, 요즘은 법원 판결을 신뢰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대세인 것처럼 비춰진다. 무엇보다 국민 모두에게 다가가 신뢰를 획득하고 싶다"고 밝혔다.

숨죽여 전시를 보던 판사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1ㆍ2층을 관람하고 3층에 올라갔을 때다. 3층에서는 박수근의 대표작 `빨래터` 두 점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이 정말 45억원이야?" "와 덧칠을 몇번한건가" 입이 무거운 판사들 목소리가 커졌다.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는 7개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두 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두 점 중 하나는 위작 시비를 겪었던 작품.

2007년 5월 국내 작가로는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빨래터`는 위작 논란으로 2009년 서울중앙지법에까지 갔고 결국 진품 판결을 받았다.

법정 스캔들을 몰랐을 리 없는 이들은 "화면 질감이 화강암처럼 두터워 흉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름의 추정도 내놓았다.

박수근 화백의 장남인 박성남 씨는 "빨래터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봤던 뜻깊은 공간"이라며 "아버지는 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박수근 작품 120여 점을 모두 본 뒤 판사들은 소회를 꺼냈다. 이태종 부장 판사는 "그림을 보면서 그 때(1950~60년대)는 전쟁 후인데도 서로가 위로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박수근 화백이 추구했던 `선함`이 아닐까"라고 감상에 젖었다. 전시는 3월 16일까지.

[이향휘 기자]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展···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17일 개막

 

 

박수근 '고목과 행인',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53x4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괜찮아, 괜찮아"
박수근 화백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말이란다. 그의 장남 박성남씨(67·서양화가)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괜찮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다"고 했다.

1950년대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는 서민들의 정서를 그렇게 보듬었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도 몸 녹일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화우들과 낱개 물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대다수의 동네사람들이 인정하듯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라 불려도 괜찮았다. 당시 누가 그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겠나.

올해로 박수근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1914년 그가 태어난 때는 우리 근대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에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그 시절 태어난 박수근이 성장해 이룬 업적은 곧 우리 근대미술의 성과인 셈이다. 그의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기 위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오는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그가 남긴 유화 작품 90여점과 수채화·드로잉 30여점 등 모두 1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다.  

 

박수근 '빨래터', 1959, 캔버스에 유채, 50.5x111.5cm /사진제공=가나아트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故 박수근 화백)

'국민화가'로 칭송받기 이전 박수근 화백은 '서민화가'로 일컬어진다. 남루하고 가난했던 그의 삶도 서민 그 자체였고,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서민의 일상이다. 골목길 풍경,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기름장수 여인, 아기를 업은 소녀,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

그는 남자보다는 여인과 소녀들을 주로 그렸다. 당시 억척스러움으로 시대를 버텨내야 했던 것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연약하지만 지혜롭고 어진 마음으로 가정을 돌보며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주체인 아낙들의 모습에서 민족의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을 화려한 색감이나 화사한 꽃, 인물들의 밝은 표정으로 담아내진 않았다.

대표작 '빨래터'(1960년대 초)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다. 바위 질감의 재료가 주는 무게감도 있지만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결코 화기애애하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심지어 물소리도 멈춘 듯하다. 하지만 묵묵히 빨래하는 모습에서 얼룩지고 때 묻은 시대의 고난을 깨끗이 지우고픈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은 더 뜨겁게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 표현에도 인색했고 꽃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모란꽃'과 '목련'을 남겼지만 두 작품 모두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고단한 삶을 받아들인 채 조용히 새 봄을 기다리는 서민들의 간절한 희망을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박수근 '책가방', 수채화, 25x31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면 독특하고 매력적인 유화 작품이 크게 주목받지만, 수채화 역시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그의 수채화 작품 '고무신' '책가방' '과일쟁반' '복숭아' 등은 그 시절 서민들의 일상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정겹고 서정적인 소품들이다. 고무신은 아내가 새로 사온 꽃신이었고, 책가방은 동덕여고 다니던 딸의 가방이었다.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사상이나 논리가 아닌 평범한 인물과 사물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표현했기에 '서민화가'이지만 그림 값은 가장 비싼 화가로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소박하고 남루했던 그의 삶,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들여다보게 할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은 일상에 쫓겨 각박해진 우리네 마음도 다시 한 번 챙겨보게 한다.

전시는 오는 3월16일까지 59일간 휴관 없이 열리며, 매주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개관한다. 무료 특별강연도 열린다. △1월 19일 오후 2~4시 유홍준 △1월 24일 오후 2~4시 박성남 △2월 22일 오후 2~4시 윤범모 (사전신청 없이 현장에서 선착순 50명). 티켓은 일반 1만원, 초등학생 6000원. 문의 (02)736-1020. 


 

박수근 '과일쟁반', 1962, 수채화, 25x31cm (왼쪽). '청색 고무신', 1962, 수채화, 20.5x3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앞서 부친 회고
1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관훈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빨래터' 등 희귀작 포함 120여점 전시
총 작품가만 약 1000억원

박성남 화가가 부친 박수근 화백이 그린 자신의 어릴 적 초상화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가나아트센터)

[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아버지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가장 한국적인 화가였다.”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리는 기념전에 앞서 박 화백의 아들이자 화가인 박성남(66)씨가 부친을 회고했다. 박씨는 7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부친의 그림과 거기에 얽힌 사연을 하나 하나 소개했다.

박씨는 “아버지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을 갖고 있었다”며 “그래서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즐겨 그리는 등 예술관을 그림으로 실천했다”고 말했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관훈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평창동 본사 전시장 대신 관훈동을 택한 건 이옥경 가나아트센터 대표의 의지였다. 평창동보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인사동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

전시되는 작품은 근래 들어 가장 많은 120여점. 주로 개인 소장가들에게 빌렸으며 총 작품가만 1000억원을 넘는다. 특히 위작 의혹이 제기됐던 ‘빨래터’를 비롯해 그동안 화집으로만 접했던 ‘시장 사람들’(1950), ‘노인과 소녀’(1959), ‘귀로’(1964) 등을 볼 수 있다.

박씨는 “평생 개인 화실 하나 없이 창신동 집 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상에 빠지곤 한다. 그런 그림들을 모아 이번에 다시 서민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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