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예총을 후원하는 일일 맛집이 지난 25일 인사동 코트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강욱천씨가 운영을 총괄한 이번 후원 모임에는 류연복씨의 서예퍼포먼스를 비롯하여

김민정, 송희태, 이광석, 손현숙, 송병휘, 레드로우, 고이, 박인호, 라오니엘 등 많은 분의 공연이 이어졌다.

 

늦게 들려 류연복씨 서예 퍼포먼스는 보지 못했으나

장경호, 곽대원, 김이하, 임동은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술단체인 한국민예총이 아직도 보금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셋방살이를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 없이 가난한 예술인의 힘으로 단체를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자를 내건 단체지만,

최소한 일할 수 있는 공간은 정부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날씨가 갑자기 추워 그런지, 년 말이 되어도 인사동이 별로 흥청대지 않았다.
구세군의 종소리를 뒤로하고, 뭐가 바쁜지 다들 종종 걸음만 친다.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로는 ‘민예총’ 기금마련전이 열리는 ‘관훈갤러리’가

그 중 볼거리가 많은 전시라, 보았지만 다시 들렸다.






이층에는 이재일씨와 서인형, 정영신씨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관람객도 띄엄 띄엄 있었다.
그런데, 전시작의 배치도 바뀌었지만, 처음 보는 작품에 눈이 번쩍 띄었다.






개막식에 없었던 신학철선생의 사진 콜라주 작품이 한 점 나온 것이다,
알아보았더니, 돌아가신 김윤수선생 사모님께서 ‘민예총’에 기증한 작품이라 했다.
그 작품은 민중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가격도 적지 않아, 고마운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리고, 고인이 된 김영수씨 사진도 두 점이 더 걸려있었다.
사진가 정인숙씨가 추가로 가져왔다는데,

한 점은 갯벌이 펼쳐진 을씨년스러운 포구 풍경이고, 한 점은 주재환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이젠, 주재환선생께서 ‘미투’작품 판 돈으로, 그 작품을 사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군데군데 빨간 딱지가 붙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신학철선생 판화를 비롯하여, 주재환, 민정기, 박홍순,
이원식, 이태호, 강요배, 박재동씨등 여러 점에 붙어 있었는데,
한 작가의 작품이 두 점 팔린 것은 세 작품이나 되고,
이태호씨의 판화는 네 사람이 딱지를 붙였더라. 



 


이 정도면 불경기에 괜찮은 전시로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몇몇 컬렉터가 찜해 놓은 작품이 있다니,
‘민예총’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은 마련할 것 같았다.






이 전시가 끝나는 1월6일에는 모두 나와 신명난 황금돼지의 꿀꿀이 잔치한 번 벌이자.
‘민예총’사람이던, ‘인사동 사람들’이건, ‘사진쟁이’건, 모두들 꼬인 것이 있으면,

그 날 액을 풀며, 새로운 한 해를 맞자,





나쁜 놈인 이승만의 말이지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 생각난다.

“뭉치면 살고, 흩어 치면 죽는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위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 마련전이 인사동 ‘관훈갤러리’ 전관에서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이 전시에는 신학철화백을 비롯한 민중작가 4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19일에는 민예총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기 몇 일전부터 카메라가 고장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 날은 강민시인과 신학철화백,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못 찍어 안절부절 했다.






전시 디스플레이 등 준비 상황도 기록하지 못했다.

뒤늦게 카메라를 빌려 개막식과 다과회, 그리고 뒤풀이에서 많은 분들을 찍었다.

사진이 너무 많지만,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반가운 사람은 물론, 인사동 꼴통들도 많이 나오셨다.





그 날 만난 분들을 기억나는 대로 거명해 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빠진 분들께 죄송할 뿐이다.






백기환선생을 비롯하여 손장섭, 김정헌, 유홍준, 성완경, 이애주, 임옥상, 정복수, 김태서, 천호석, 이종구, 김천일, 박종관, 이수호, 이부영, 임진택, 유진규, 장순향, 정태춘, 임정희, 조경숙, 박불똥, 유순웅, 최석태, 정영신, 서인형, 이성호, 손병휘, 박세라, 조경연, 박홍순, 김영진, 김진열, 두시영, 심정수, 이명복, 이태호, 장경호, 최병수, 이광군, 최효준, 손기환, 양상용, 정세학, 나종희, 곽대훈, 김명지, 박 철, 김이하, 김도수, 최명철, 이양재, 손병주, 하태웅, 이재민, 정재안, 김 구, 신상철, 이미례, 이 반, 정영철, 김명성, 조준영, 김수길, 이명희. 공윤희, 민영기, 노광래, 임경일, 강선화, 박윤호, 권양수, 이희종, 박영애, 김보영, 최옥경, 김미진, 손영익, 안만욱, 김덕철, 김도수, 황의범, 이경란, 김다솜, 안광택, 이태환, 성기준, 고재열, 강영민, 유인택, 이승곤, 이성희, 양형규, 임영선, 정필주씨 등이다.






이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이어진다.
오전 10시 30분에 문을 열며, 매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 진보미술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신 김윤수 초대 한국민예총 이사장께서 지난 29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업씨와 동생 김익수(영남대 명예교수), 김두해(재미음악가)씨가 있다.






지난 1일 오후5시에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갖고,

그 이틀 날 오전 9시30분 발인하여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위원장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맡았고,

집행위원장에 박불똥(민예총이사장), 이종헌, 강일우, 이영욱씨,
장례위원에 백낙청, 백기완, 신학철, 김정헌, 임옥상, 김상철, 윤범모, 채희완, 김민기, 심광현,

강성원, 강요배, 김봉준, 홍성담, 박진화, 고세현씨 등 많은 미술계 인사들로 구성했다.






고인은 경북 영일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영남대 교수를 역임했다.
1980년대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

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등을 거쳐 2003부터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오피시에)을 받았으며,

‘민족미술과 리얼리즘’,‘한국현대회화사’,‘한국미술 100년’ 등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냈다.





선생께서는 70년대부터 반 유신운동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진보적인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이론가로서,
특히 당시 국내 제도권 화단을 주도했던 추상주의 미술 사조에 맞서 현실 참여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국내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으로 정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선생의 부음을 전해들은 날은 통인가게에서 배일동명창의 판소리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심봉사 통곡 대목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는데, 배일동씨의 절절한 소리가 마음을 울렸기도 하지만,

어쩌면 김윤수선생 생각에 울었는지도 모른다.



 


뒤풀이에서 대취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민예총 식구들이 총 출동해 있었다.

빈소는 미망인 김정업 여사가 지켰고,

민예총박불똥 이사장, 서인형 사무국장, 정영신 조직국장, 박세라 총무팀장이 손님을 맞았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니 슬픔도 잠깐이었다.

주재환선생을 비롯하여 유홍준 장례위원장, 박종관 문화예술위원장, 박현수, 심정수, 임정희, 장순향,

박흥순, 곽대원, 김영중씨 등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추모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공교롭게도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와 겹쳤다.

이흥덕, 조신호, 이민종씨 전시 오프닝과 시간이 같아 어느 한 곳을 포기해야 했으나 양다리 걸친 것이다.

전시된 작품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류연복씨가 서둘러야 한단다.

많은 분들을 남겨두고 정복수, 류연복씨와 먼저 나왔는데, 추모식장에 도착하니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마산에서 온 고승하씨, 경주에서 온 정비파씨 내외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장지에 가는 그 다음날 아침엔 약속이 있어 나설 형편이 못되지만,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장에 갔다.

민미협회원들은 가까운 곳에서 잤는지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신학철선생도 계셨다.

선생께서는 집안에 우환이 있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타까웠는데,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더라.







시대의 스승이신 고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민예총' 페북에 올라 온 정영신씨 사진을 스크랩했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1월16일

▲조문호 사진가



요즘 어처구니없는 일을 너무 많이 본다.

하루가 다르게 터져 나오는 박근혜 정권의 갖가지 부정과 비리에 차마 입을 다물 수 없다. 그중 문화예술인을 탄압한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문화예술계가 일파만파 들끓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은 군사정권 때부터 내려 온 오래된 짓거리다. ‘예술인총연합회’란 단체가 태어날 무렵, 배후에서 조종한 세력이 있었던 것도, 그 조직을 통해 예술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아부 잘 하는 예술가는 승승장구했고, 입바른 예술가들은 사정없이 밀려났다. 그 독재에 저항해 온 예술가들이 ‘민족예술인총연합회’를 만들었다. 민중미술과 더불어 탄생한 ‘현실과 발언’ 동인들의 직설적인 표현은 매서웠다. 바꾸어 생각하면 군사정권이 우리나라 민중미술을 꽃 피웠다 할 수도 있겠다.

69년에는 신상옥감독의 ‘내시’란 영화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입건되기도 했고, 1970년에는 김지하시인이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 75년에는 공연 정화대책이란 걸 발표하면서 수백 곡의 대중가요를 금지시킨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별 것도 아닌 가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책임전가로,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이라는 이유로, 한 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이유라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던가?

그리고 87년에는 신학철화백의 ‘모내기’그림이 북한 찬양죄로 압수, 입건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터져 나온 블랙리스트 명단 역시, 그처럼 슬픈 코메디에 다름 아니다. 블랙리스트란 독일 히틀러나 일본제국주의에선 학살예비자명단이 아니던가. 과거 군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치졸한 예술인 탄압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기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례들이 쏟아져 나온 걸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예술에 대한 각종 지원 사례를 보며 진작부터 낌새는 차렸으나, 설마 그렇게 몰상식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위안도 마음 한구석에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로 드러나며, 모든 예술인들이 충격 받고 말았다.

그 뿐 아니었다. 부당한 예술 검열 사례도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문체부의 치욕적인 인사 조치와 주요 문화정책사업의 예산 몰아주기 등 문화행정의 갖가지 파행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강남아줌마란 여성이나 더럽혀진 이름의 운동선수와 CF감독, 최순실, 차은택, 김종 문체부 차관의 인맥으로 분탕질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 없이 진행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제 입맛에 따라 예술인을 낙인찍어 문체부로 내려 보냈으나, 예술인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차관이 날아갔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문체부 전·현직 공무원의 증언으로는 “청와대에서 재작년 중반부터 문화계 인사들을 분류한 명단을 문체부 예술국에 내려 보내 좌파 인사에 대한 지원을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지난 10월12일 공개된 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으로 예술인들은 분노해 일어났고, 18일에는 ‘예술행동위원회’에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란 기자회견을 열며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어 11월 4일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시국선언에 나서며, 광화문광장을 캠핑촌으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블랙리스트 페스티벌’과 시국 좌담회를 열며, ‘허수아비 박근혜를 풍자한 그림들을 그리는 등 갖가지 행위예술로 저항하지만, 알고도 모른 채, 묵묵부답이다.

문화융성이란 기치를 문화파탄으로 이끈 박 정권은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모리배들의 농간에 문화융성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지만, 농단에 의해 중단될 성질이 결코 아니다. 관련자 처벌과 함께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 개혁해야 할 우리의 당면 과제이고, 기회이기도 하다.

더 이상 광화문 캠핑촌에 웅크려 자는 예술가들과 거리에서 퇴진을 외치는 예술가들의 외침을 외면하지마라. 그만 고생시켜라, 문화파탄의 주체인 조윤선 문체부장관과 정관주 국민소통비서관을 처벌하고, 그 중심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동시 출마’로 야권이 분열되자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안의 하나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을 추대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고 김용태 선생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87년 12월12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 대통령 후보 사퇴 발표를 앞둔 연단에 설치된 백기완·장준하·김구 선생의 대형 걸개그림. 사진 류연복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⑧

1987년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의 집권 연장책인 대통령 간선제와 유신잔재 헌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전국민적 저항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이른바 ‘6월항쟁’을 일구어낸 해였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군사반란 동업자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선언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끓어오르던 국민의 독재타도 열망을 일단 무마하였으니 ‘6·29선언’이 그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일단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아예 ‘6·29 항복선언’이라 규정하기도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누구인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 아닌가? 그들 독재자들이 행한 통치방식은 ‘정치’라기보다는 줄곧 국민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거나 ‘정보공작’ 아니었던가? 대통령 직선제 전격 수용이 위기탈출용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라 항복을 가장한 기만적인 깜짝쇼였음을, 그만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해 7·8·9월,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면서 한국 사회 진보논쟁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으나,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대담한 투쟁과 협력을 함께 해온 야권 지도자 김대중·김영삼, ‘양김’이 각기 독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대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서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동안 그토록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싸워왔던 재야 운동권이 ‘양김 동시 출마’라는 뜻밖의 사태 앞에서 균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쪽은 ‘디제이’가 경륜이 높고 좀더 진보적이므로 그를 ‘비판적으로 지지’(비지)하여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와이에스’가 당선 가능성이 더 높으며 정권교체의 반작용이 덜할 수 있으므로 그가 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디제이를 지지하는 쪽은 이른바 ‘4자필승론’(노태우·김종필·김대중·김영삼 4자가 출마하면 호남과 민주진영의 합세로 디제이가 필승한다는 선거공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독자출마 주장을 편 것에 비해,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쪽은 독자출마를 내세우기보다는 두 분이 어떻게든 합의해 단일후보를 내는 것이 좋다는 ‘단일화’ 명분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지’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단일화론은 디제이보다는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었고 만약 두 분 중 누구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진보적 시각에서 당연히 선택지점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양김이 따로 출마하면 반드시 패할 것으로 예측했기에, 누가 되든 반드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당시 재야 민주운동권의 총결집체라 할 수 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공식 결의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에는 내가 속해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민통련의 일원으로 ‘비판적 지지’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민문협 실행위원회에서는 대선 방침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용태 형’에게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했더니, 형 역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그런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며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국본’은 그해 5월 재야운동권의 민통련과 당시 ‘양김’이 속해 있던 통일민주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결합한 범국민운동기구로서, 용태 형이 자신의 역량과 인맥을 만들어가게 된 장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 ‘형’이라 부르던 민문협 김종철 상임대표에게 정중하게 연락을 해 언론에 보도된 연유를 여쭙고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민문협 실행위원회 긴급소집을 요구했다. 당시 민통련 대변인도 겸하고 있던 종철 형은,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의에 민문협이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실행위원회의 표결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실행위원회에서 ‘비판적 지지’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예기치 않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만 했다. 민문협의 의결 결과를 민통련 본부로 보내어 ‘비판적 지지’ 방침에 대한 철회를 전달하되, 이것이 재야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종철 형은 자신의 곤란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 감당하고 어김없이 처리해 주었다.


‘양김’의 독자 출마 선언에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졌고
민문협서 ‘비판적 지지’안이 부결되자
용태형은 ‘특급지령’을 내렸다


문익환·백기완…독자후보 준비하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서
백 선생은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박용일·이애주·김용태·최열…
선대본 핵심에 정치인은 없었다

대학로 유세는 선거축제의 절정
수만명의 열망이 출렁거렸다
6월항쟁 ‘민중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한국정치사 첫 정치문화운동이었다


■ 용태형의 특급지령과 민중후보 공작
용태 형과 나는 민문협의 문건이 민통련의 기존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러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용태 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선을 두어달 앞둔 그해 가을 어느 날, 용태 형은 나를 불러 ‘특급지령’(?)을 내렸다. “양김이 단일화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다.” “재야 운동권에서 독자 후보를 내세워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준비를 해라.” 독자 후보라고? 파천황(破天荒)적인 발상이었다. 독자 후보로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 목사님은 ‘비판적 지지’에 앞장선 분이라 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는 했으나, 우리 힘으로 대통령 후보를 독자 추대한다는 게 가능할지 사실 좀 막연했다.


그러던 10월31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 장내에 뜻밖의 정치선동 전단이 뿌려졌다. 읽어보니 “난관에 부딪친 대선 국면을 보수 후보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백기완 선생을 민중의 독자 후보로 추대하여 돌파하자”는 내용이었다. 재야 인사가 거의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돌연 행사와 무관한 민중후보 추대 전단이 뿌려졌으니 아연 술렁거렸다. 마침 백 선생이 새 신문 창간을 독려하는 축사를 할 차례였는데, 연단에 오른 백 선생은 천하의 굿쟁이(광대)답게 판을 대번에 휘어잡았다. “여러분, 지금 여기 살포된 전단은 분명 누군가의 공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기관의 간교한 공작이 아니라 궁지에 내몰린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요구하는 민중의 공작입니다.” 백 선생은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민중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한 셈이었다. 나중에야 그 전단을 뿌린 이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후배 송운학이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합(인민노련)인가 하는 단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본)가 전격 발족했다. 선대본부장에 변호사 박용일, 명예선대본부장에 춤꾼 이애주, 비서실장에 화가 김용태, 사무총장에 환경운동가 최열, 특별보좌관에 판소리꾼 임진택, 대변인에 문학평론가 김도연…. 선대본 핵심 간부에 정치인은 한 명도 끼지 않았고, 거의 다 민주인사와 문화예술인들로 꾸며졌다. 나는 영광스럽게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요즘 대선판처럼 도나캐나 수백명씩 명함 찍어 돌리는 흔한 특보가 아니라 백 후보의 단 한명뿐인 특보였다. 게다가 나는 후보 전용 승용차 운전기사도 겸했다. 백본 진영에서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 김정헌 형이 딱한 사정을 알고 자신의 중고차를 내주어 겨우 두 대가 되었지만, 후보를 직접 수행하는 임무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 한판 문화축제였던 민중후보 선거운동


나는 19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은 정치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핵심들의 면모가 춤꾼·소리꾼·글쟁이·그림쟁이는 물론이요 변호사·환경운동가 등 넓은 의미의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것 자체가 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대통령 후보 자신부터 비나리꾼(시인)이면서 민족문화에 달통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아닌가. 이들 가운데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다행히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특히 대학로 유세는 민중(시민)에 의한 선거축제의 절정이었다. 커다란 걸개그림에는 백범 김구와 장준하 선생, 그리고 백기완 후보의 얼굴 모습이 ‘시간적 원근법’에 바탕해 형상화되었다. 분열을 극복해서 기필코 대선을 승리로 이끌어 독재타도를 완결짓고자 하는 염원 하나로 수만명 청중이 운집하여 출렁거렸다. 재정에서 기획까지, 무대 설비에서 집객까지 모든 준비는 비서실장 용태 형과 사무총장 최열의 몫이었고, 현장 진행사회는 특별보좌관인 내 몫이었다. “여러분, 민중 대통령 후보가 돌연 등장하니까 유신잔재 군사독재세력이 잔뜩 겁을 먹고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난폭한 버스기사가 갑자기 핸들을 우측으로 확 틀면 승객들이 어떻게 됩니까? 승객들은 모두 좌경하게 되지요. 여러분, 우리는 똑바로 서 있고 싶습니다. 우측으로 고개가 돌아간 저 난폭한 운전사를 이제 반드시 갈아치워야 합니다.” 수만 청중들이 함성과 환호로 응답하더니 이어 모두 함께 구호를 외쳤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물론 백본의 누구도 민중후보의 당선을 믿고 뛰어든 이는 없었다. 다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6월항쟁의 승리가 정치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결국 대선 실패로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후보 단일화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 힘으로 민주진영 대선 후보를 단일화해서 6월항쟁의 승리를 국민의 승리, 민중의 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정치문화운동이었다.


백 후보는 ‘양김’의 단일화가 끝내 불가능해지자 대선 이틀 전 눈물을 머금고 사퇴를 했다. 그럼에도 대선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 ‘합법적’ 결과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의 수명 연장뿐 아니라 수구세력이 끈질기게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이 보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김 분열로 인한 영호남의 지역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운동! 이 어려운 일을 결단하고 추진해 낸 주역을 꼽는다면, 용태 형과 최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훗날 그들이 해낸 일을 보면 안다. 용태 형은 대선의 좌절을 딛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고, 최열은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재단을 꾸려 새로운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2000년 총선 때 부패하고 고질적인 선거판에 큰 충격을 준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참여연대의 박원순과 환경연합의 최열, 민예총의 김용태, 문화연대의 김정헌이 함께 기획하고 추진한 정치문화 혁신운동, 다시 말해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그에 앞서 87년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했던 민중후보 운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치문화 혁신운동,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스크랩/한겨레신문]

 

1990년대 들어 민예총은 빠르게 번져가던 노래운동을 조직 확산과 연대 강화의 매개체로 활용하고자 대학가와 노동권의 노래패들을 참여시킨 대규모 민중가요 공연 기획을 주도했다. 사진은 90년 3월24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첫번째 공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⑬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번째로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민예총 결성과 남북 예술교류 활동과 일화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심광현, 이종률,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대선 패배 뒤 문예운동 대중화 절감
용태 형이 살림 맡은 민예총 출범
전교조·전노협 기금전에도
그가 나서면 놀랄 만한 수익 올려
90년대 대형공연 흥행 일궈
93년 문민정부 들어서자 법인 전환
문예아카데미 등으로 기반 넓혀
남북·재일동포 예술교류 눈돌려
94년 ‘코리아통일예술제’ 합의
반말투 친밀감·단도직입의 발언
지루한 공전 무너뜨리며 우의 다져

 


■ 87년 대선 패배의 역설적 산물, 민예총


내가 ‘용태 형’과 문화운동의 장에서 처음 함께한 것은 1985년 형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84년 창립) 실행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였다. 그때는 ‘부산 사투리를 몹시 심하게 쓰는 미술 쪽 선배’로만 여겼다.


민문협(민문연)을 비롯해 문학·미술·언론·출판·교육 등의 문화 6단체는 87년 6월 항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운동의 문화부문을 담당했는데, 용태 형은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그해 여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정치적 역동성을 크게 강화해 갔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 오자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론, 김영삼 중심의 후보단일화론, 백기완 민중후보론 등으로 진영은 분열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용태 형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민문연 실행위원들도 각기 처지와 견해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어부지리 당선이었다.


이른바 ‘민민’ 진영은 뼈를 깎는 각성의 아픔을 안은 채 이듬해 봄 총선에서는 여소야대를 이루었고, 일상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확산되는 기반을 조성했다. 대선 기간 동안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던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도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들을 좀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통합적 조직 건설이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88년 9월30일 서울 신촌역 근처 예술극장 한마당에 모인 여러 장르 대표들은 새로운 예술인 조직 결성에 의견 일치를 보았고, 조직·규약(김용태), 인선(황석영), 재정(오종우), 지역 연락(채희완), 대회 준비(임진택) 등 5개 소위를 구성해 민예총 건설에 나섰다.


그리하여 88년 12월23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


용태 형은 ‘조직’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맡았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 이전에 문예조직 건설에 늘 바람잡이 노릇을 했던 황석영 선배와도 호흡을 잘 맞추었다. 한 사람은 백 후보 비서실장, 또 한 사람은 디제이 지지 방송 연설원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통합의 기운이 매우 강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이날 조성국(영산줄다리기보존회 회장), 고은(시인), 김윤수(미술평론가) 세 사람의 공동의장에 신경림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고, 용태 형은 조직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90년도부터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용태 형은 민예총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에 ‘묶였다’. 조직의 회계는 회비로 충당하도록 했지만, 실제 모아지는 총액은 크지 않았다. 그러니 독지가들의 후원금을 모아야 했고, 적자가 누적되면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자신은 늘 쪼들리더라도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였다. 89년 ‘전교조 기금마련전’과 90년 ‘전노협 기금전’이 그러했다. 당시 전교조와 전노협의 담당자였던 이상호 선생은 전교조 기금마련전에서 “1억원 이상의 수익금을 올렸는데 이 기금으로 유통업체인 참교육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금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민예총의 김용태 사무총장, 큐레이터 구실을 해준 유홍준 교수, 독특한 한글서예작품을 처음으로 공개 전시회에 출품해준 신영복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다”고 회고한다. 이듬해 ‘전노협 기금전’은 3억원 가까운 수익금을 올려 인사동 화랑가에서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전노협이었지만 조합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 모두에게서 큰 애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용태 형의 또 다른 이바지였다.

 

 

1987년 대선 패배의 시련을 겪은 뒤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는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통합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김용태 선생은 누구보다 앞장서 갈라진 세력들을 한데 모았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 앞줄 왼쪽부터 작가 황석영, 영화감독 이장호, 한 사람 건너 계훈제·백기완 선생, 그 뒷줄에 리영희·김진균 교수 등이 자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대형 집회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의 제작자

 

용태 형에게 기금마련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장르 전문성을 활용하는 사업이었기에 부담이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90년도를 맞이하면서 가장 빠르게 부상하는 장르는 노래운동이었다. 집회에서 다 같이 노래부르기를 할 수 있는 노동가요, 민중가요들이 속속 창작되었고, 이를 보급하는 노래테이프들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90년 봄, 용태 형은 이런 흐름을 빠르게 살려 3월2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을 열었다. 노래패들로서는 새로 창작된 노래를 선보이는 자리이자, 학생운동권에서는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이 운동가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조직적으로 동원을 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은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 공연은 92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해 연말 대선 때는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공연을 했다.

 

하지만 총제작자 격인 용태 형은 공연을 보면서도 속이 탔다. 입장료로 제작비가 충당되면 다행이겠지만 적자라도 나면 또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민예총은 90년 3월 낙원상가 골목 안쪽으로 이사를 해 공간을 조금씩 넓히면서 각 장르들의 협의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3층에 들어갔던 본부 사무실에 이어 2층에 민미협이 오고, 다음번에는 본부 사무실이 4층으로 올라가고, 3층에 민족음악협의회가 자리를 잡고 민족미학연구소, 민족극연구회 등이 모임방을 같이 썼다.

 

덧붙여, 용태 형은 문예아카데미 강의실로 사용하겠다며 5층까지 확보해놓았다. 요즘말로 일단 질러놓은 것이었다. 염무웅 선생의 민족미학연구소가 90년 여름에 개설했던 ‘민족미학 여름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몰리자, 용태 형은 이를 상설로 개설하기로 했다.

 

■ 민예총 법인화 이후 남북 예술교류의 길로

 

93년 민예총은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문민정부라 이름했다. 청와대 교문수석에 임명된 김정남 선배와 용태 형이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 민예총의 법인화는 별 어려움 없이 추진되었다. 법인이 되면서 ‘자, 손을 잡자’ 공연, 문예아카데미 등을 통해서 확보된 대중적 기반을 좀더 안정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고, 94년부터 지역 민예총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전국조직화의 토대가 되었다.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과 남북의 미술작가들이 공동전시회를 열고 작가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민미협 식구들은 출품작 준비 등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김용태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필요한 비용 마련 대책이 막막했다. 그때 통일부 장관이었던 한완상 부총리가 ‘미징’(微徵)이라고 쓰여진 금일봉을 주고 격려해주었는데 액수로는 그야말로 미미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업 자체는 인정한다는 표시였고, 김정남 수석의 주선으로 기업체 협찬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 민예총 건설은 지역의 자율성을 강조한 까닭에 해당 지역 문예운동의 역량에 따라 10여년 가까운 시기의 편차를 가지고 서서히 확장되었다. 용태 형은 그때부터 남북 예술교류 사업에 매진했다.

 

일본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계기로 남북을 오가며 통일미술전을 포함한 ‘코리아통일예술제’를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94년 베이징에서 3자간 회합까지 있었으나 그해 여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 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93년 통일미술전에서 친분을 쌓은 김용태·홍영우(재일본 문예동맹 미술부장)·최계근(북한 화가)·송석환(북한 작곡가·이후 문화성 부상 역임)·김정수(문예동 위원장) 등의 우정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인 베이징 회담 등으로 이어졌다. 매번 용태 형을 수행하고 베이징이나 도쿄로 다녔던 나로서는 그의 반말투 친밀감이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가까워지게 하는가를 보았고, 단도직입의 발언들이 협상장의 지루한 공전 분위기를 허물어뜨리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은 지금도 남과 북을 오가며 “거 쫌 잘해 보시오” 하면서 남북 예술인들의 교류사업을 부추기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전 민예총 기획실장

 


[스크랩 / 한겨레신문]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의 주인공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김용태(그림·박재동) 선생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아니다. 올해 들어 투병 중에도 회고록 구술을 해오던 그는 지난 5월4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기꺼이 그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나섰다.
지난해 12월 8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투병을 응원하고자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47명은 지난 3월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형>을 펴냈고, 화가 43명은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어 후원했다.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이들 가운데 20여명이 필자로 참여해 1970~90년대에 걸쳐 민주화운동의 큰 축으로 자리한 민중문화운동사의 주요 마디를 되짚어줄 예정이다. 또 그 마디마디를 술과 차비를 챙겨주며 ‘접착제’처럼 이어준 ‘인간 용태 형’의 일화도 들려준다.
첫번째 필자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2회에 걸쳐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적 의미와 ‘용태 형’이 차지한 자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윤범모,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씨 등이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린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에는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한 80여명의 문화예술인을 비롯해 여러 지인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민중문화운동 세대의 잔치판이 됐다. 앞줄 왼쪽부터 부인 박영애씨와 김용태 선생, 황석영 작가, 박현수 교수,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부영 전 의원, 이재오 의원, 원경 스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신경림 시인, 임재경 선생,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강연균 전 민예총 공동의장, 문재인 의원 등이다. 사진 장성하 사진가 제공


 문화라곤 ‘시낭송’ 고작이던 시절
‘현실과 발언’ 창립하면서
민중의 삶 예술로 담기로 작심했다


광주학살 뒤에도 용공조작…
재야 투쟁대열 서서히 정비돼
시·노래·춤·걸개 등 문화예술투쟁
그 중심에 용태 형이 있었다


 82년 인제 내린천 여행 계기로
문화·언론·학계·청년층 등
민주화 주력부대 벽 허물어져


용태 형이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그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보는 연재 기획의 총론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왜 하필 나일까 생각해봤다. 용태에게 정을 느끼는 후배들, 용태에게 신세진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용태에게 술도 많이 얻어 마시고 바둑내기 돈도 얻어 쓴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징역산다고 정치한다고 용태와 살갑게 자주 만나지도 못한 필자에게 왜 총론을 맡기느냐 말이다.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거니 하고 믿는 처지였으니 내 몫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받아들였다.


필자가 용태를 만난 것은 1977년 연말이 아니었나 싶다. 유신시대 말기 숨막히는 암흑기, 두셋만 모여도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붙던 시절, 대화는 산이나 들로 나가 산개 들개처럼 떠돌면서 나눠야 했다. 잠행의 시대였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불같은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일망타진당하자 한편으로는 낙담을, 한편으로는 더 굳은 다짐들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돌려보고 김남주·조태일·양성우의 시를 읽으면서, 때로는 문익환 어른의 ‘꿈을 비는 마음’을 성래운 선생의 낭송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행사도 드물었거니와 문화를 곁들인다고 해도 시낭송이 고작이었다. 뒤돌아보면 엄혹하기는 했어도 그때 시대정신은 시와 소설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강만길 선생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77년 말 필자가 2년6개월 징역 만기를 채우고 나왔을 때 함께 모이자고들 해서 동아투위에서 송년회를 열었다. 태화관이라는 중국집에서 모였는데 반유신 인사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민족-민주선언’ 같은 성명서도 낭독하고 술도 어지간히들 마셨다. 백기완·고은 선생을 앞세우고 동아투위 동료들과 김용태·김학민·이신범 등이 9평 청운아파트 우리집에 들이닥쳤다. 용태의 선동으로 고은 선생의 흰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지금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된 네살배기 딸아이가 “왜 신발에다 물 마셔?”라고 물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용태와 인연을 맺었다. 폭압은 질식할 듯 심했지만 그 대응은 아직 떠들썩한 시적 낭만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 후반을 미술잡지 편집실을 어정거리던 용태는 유신군부독재의 정치적 폭압, 비대해져가는 재벌, 거기에 짓눌린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79년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하면서 불온한 저강도 문화 비정규전을 시작했다.


시대의 담금질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79년 ‘10·26 사건’ 이후 군부 내의 대립 갈등을 예상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가 그처럼 전광석화처럼 감행될지는 몰랐다. 필자는 10·26 직후 계엄령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80년 ‘서울의 봄’도 5·18 광주학살도 감옥에서 겪었다. 살인적인 삼청교육도 대구교도소에서 받았다. 81년 3월 삼청교육을 이수해 ‘순화’되었다고 해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분명한 것은 ‘광주’ 이전과 이후는 다른 시대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도피중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만남도 줄어들었으며 떠들썩한 술자리도 별로 없었다. 늘어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등산 모임이었다. 이름들이 이상했다. 거시기, 머사니, 무명, 바가지 등등. 거시기 산악회에는 이돈명·리영희·송건호·강만길·백낙청·박현채·박중기·김정남·조태일 등 당시 재야의 중심에 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무명에는 신경림 시인을 좌장으로 정희성·안종관 등 문인, 김종철 등 동아투위 해직언론인들과 김학민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바가지에는 홍성우 변호사를 좌장으로 정태기·신홍범·최병선 등 조선투위 해직언론인과 소장 변호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들은 산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바가지를 캠프로 삼고 여기저기 비정규 회원으로 기웃거렸다.

그런가 하면 ‘기파’(棋派)가 있었다. 산에 가기 싫어 주로 관철동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진 치고 앉아 바둑을 벗삼고 저녁이면 인사동 대폿집을 전전하는 인사들이었다. 당시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성유보가 한국기원 발행 월간지 <바둑>의 편집을 맡고 있던 연유도 있었다. 여기서 단연 중심 인물은 용태였다. 임재경 선생과 황명걸 시인 그리고 박종태 전 국회의원도 단골이었다. 산파들도 산행을 끝내고 저녁에는 기파들과 한자리에 어울리곤 했다. 값도 싸고 자리도 널찍한 ‘이모집’이 단골이었다.


82년 여름 “우리도 여름이니 남들 간다는 바캉스 좀 가자”는 공론이 돌더니 7월 하순 강원도 인제 내린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문인, 화가,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제적학생 등 시대와 불화하던 인물군이 어지간히 모였다. 무슨 토론이 되겠는가. 처음부터 술로 시작해서 밤새 술로 지새웠다. 내린천 깊은 골에서 발가벗고 밝은 달밤에 밤새 요즘 말로 하면 캠프파이어를 했다. 고은·조태일·송기원·여운의 광태가 빛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몫이 용태의 할 일이었다. 어디서든 용태의 메마르고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슨 대단한 결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풀고 온 뒤에는 모이라면 잘 모이고 얘기하면 합의도 잘됐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임을 계기로 문화계·학계·언론계·청년층 등 민주화운동 주력부대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듯싶다.


점차 용태의 그 비범한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할 시간과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시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학교 옥상에서 밧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다가 추락해서 죽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분신을 하고 투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적학생 그룹을 학림·무림·부림 등 무협소설의 ‘강호제현’ 같은 이름을 붙여서 용공 사건들을 조작해내고 있었다. 이제 80년 광주학살 이래 납덩이 같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휘장을 찢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했고 재야에서는 청년들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부문별 지역별 조직으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조직되었다. 야권과 재야의 투쟁 대열이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민민협에는 민청련이 함께 회원단체로 들어와 있었고 용태가 사무처장을 맡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구성단체가 되어 있었다.


 민문협에는 청년문인·놀이패·노래패·화가들이 운동 현장과 결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와 노래와 춤 그리고 걸개그림 등 문화예술이 투쟁의 주요 부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총참모장이 바로 용태였다. 거기에 지금은 세상 떠난 지 20년도 넘은 김도연이 있었다. 민청련과 민민협, 그리고 민문협의 고리로 용태와 함께 움직인 김도연·박인배·정희섭의 활약이 컸다. 용태는 회의를 하러 민민협에 들르면 조그만 짬을 내서라도 민민협의 사무처장 박계동과 어울려 바둑을 뒀다. 김도연까지 어울려 뒀다. 필자는 일하는 사무실에서 바둑 두는 것에 질색했다. 한번은 바둑판을 문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부영 해직언론인 전 국회의원 -

 

 

1980년대 초 서울 서대문 봉원사 근처에 있던 ‘용태 형’의 집들이에서 김용태(왼쪽) 선생이 특유의 몸짓과 함께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부르 자 후배 화가인 민정기(오른쪽)씨가 옆에서 기타 연주 춤으로 흥을 돋우고 있다.

 

술자리 무르익으면 바지춤 추어올리고 ‘산포도~’

 

백기완 선생도 “용태 형” 불러
노래 열창할 땐 다들 배꼽 잡아
헌정문집 표지도 그 모습 담아

 

 

‘산포도 익어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 떠날 때 소매 잡고/ 뒤따라 서던/ 흙묻은 그 가슴에/ 순정을 남긴/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잊겠네.’

헌정 문집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의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제목은 그의 애창곡 ‘산포도 처녀’(1966년, 남상규 노래, 이인권 작곡, 월견초 작사)에서 따왔다. 또 김용태를 아는 모든 이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용태 형”이라고 불렀다. 1987년 대선 때 그가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모셨던 백기완 선생도 그렇게 부른다. 워낙 감투나 직함 같은 허식을 싫어하던 그가 그렇게 불러주길 원해서였다.

문화예술인 47명이 글품을 모아 펴낸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표지.

 

 

“용태 형의 ‘산포도 처녀’를 언제부터 듣게 되었는지는 기억하기 어렵다. 나름 상당한 훈련을 쌓으시고 이 정도면 ‘현실과 발언’(현발) 모임에서 발표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데뷔하신 것 같다. 어느 날, 음식점 방 안에서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서 마치 무대에 오르는 것같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산포도~’를 부르는데,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지춤을 배꼽 상당히 위까지 걸치는 아주 촌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하셨다.”

화가이자 후배인 민정기가 책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산포도 처녀’의 기원에 대한 일화를 보면, ‘현발’을 결성한 1979년 무렵부터 ‘십팔번’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현발 모임은 학연, 지연, 작가, 평론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그룹 운동이다. 토론이 시작되면 얼마나 말씀들이 풍부한지 언변과 지식이 너무도 모자란 나는 그저 아무 소리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최민,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오윤, 김정헌, 임옥상, 노원희, 김건희 등 여러 분들이 포진하여 앉은 술자리가 아닌가. 나는 그저 소주잔만 기울이다가 ‘민정기도 한마디 해봐’ 하면 그땐 취한 김에 용감하게 일어서서 ‘노래라도 한 곡조 불러보겠습니다’ 하면서 ‘첫사랑’을 부르는데 그때쯤이면 대개 무거운 주제를 잠시 멀리하고 재치와 재기, 노래, 입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여흥시간에는 각자 재미있는 것을 개발해서 발표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는데 … 용태 형의 ‘산포도~’도 이때쯤으로 어슴푸레 기억된다.”

이처럼 ‘용태 형’은 술자리가 무르익거나 토론이 뜨거워지다 못해 싸늘해지면 스스로 벌떡 일어나 오직 이 노래만을 불렀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도 “(용태 형은) 오로지 ‘산포도 처녀’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며 “작은 키에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챔피언벨트를 찬 권투선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창할 때는 다들 박수를 치기보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헌정 문집의 표지로 쓰인 그림도 바로 화가 강요배가 ‘산포도~’를 부르는 용태 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한겨레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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