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총 출동하셨다.
‘엉겅퀴 꽃’의 민영시인과 ‘한국의 아이들‘을 쓴 황명걸시인,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 시인, 문학평론가에서 서화가로 발 넓힌 구중서선생,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등
인사동을 주름잡던 터줏대감들이 여럿 나오신 것이다.






암으로 투병중인 신경림시인께서 나오지 못했지만,
원로 다섯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양평이나 용인 등 멀리 계시기도 하지만, 이제 연세가 많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열 몇살이나 작은 나도 빌빌거리는데, 다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들게 사신다.
이젠 작정하여 모시지 않으면, 한자리 모시기 힘들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 끼리 한데 뭉쳐 살수는 없을까?
별로 나눌 말씀이야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추억이 줄줄 하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는 경로잔치라도 자주 열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창예헌“이란 모임에서 모셨으나, 그마저 풍비박살 나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지난달, 영주의 신동여화백 왔을 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다.
그 날 ‘유목민’ 술자리에서 우연히 구중서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명성, 조준영시인이 한 번 모시자고 제안한 것이다.
29일로 정한 것은 조준영교수의 수업 없는 날로 택한 것이다.






그것도 양평 계시는 황명걸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조준영시인이 차로 모셔 와서는 끝난 후 다시 모셔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영시인은 차 때문에 반가운 자리에서 술 한 잔 못 마시는 징역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저만한 제자 둔 황명걸 선생은 진짜 복 많은 분이시다. 요즘 그런 제자 없다.






29일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오찬회를 갖기로 했으나, 갑자기 ‘툇마루’로 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전활철씨는 시장까지 보아두었는데, 친구 힘들까 바 김명성씨가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유목민’에서 만나 '툇마루'로 옮겨 간 것이다.
된장비빔밥과 북어찜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전활철씨는 꼬불쳐 둔 중국술 한 병을 내놓았다.






그 날 마주앉은 방동규선생께서 여러 가지 충고 말씀도 주셨다.
“네가 쪽방에 들어가므로 결국 쪽방 하나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숙자 탓도 하셨다.
방선생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박킹 끼우는 일을 받아 하신다고 했다.

한 개 끼우는데 3원씩이니 만개를 끼워야 삼 만원 벌지만, 손톱이 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노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다.
질병이나 신체장애로 일 못하는 노숙자도 있지만,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러니 늘 술에 취해 있는데,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나도 서서히 노숙자에 동화되어 간가는 점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 어울리다보니, 이제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노숙자들과의 술자리를 가능한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뜻밖의 중국술에 이게 왠 떡이냐며 두 잔 받아 마셨는데,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오후3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김경린시인 학술심포지움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술 취해 찍는 취사야 몸에 베였지만, 점잖은 분들 계시는데, 쫄랑대면 남사스럽지 않겠는가?






다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서야 했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운 판을 만들었는데, 나만 놀지 못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 날 모신 다섯 선생님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나왔다.
처음 말 꺼낸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 전활철씨 외에도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장경호, 고중록, 이상훈, 김영국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줄줄이 찾아왔다.
우짜든, 김명성씨가 잘 풀려야 이런 자리라도 자주 만들어질텐데...


부디, 선생님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원로시인 민영선생의 시집출판기념회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5월 ‘창비’에서 출판된 민영시전집을 뒤늦게 축하하는 자리같았다.
이 날은 일이 겹쳐 이 곳 저곳 세 탕이나 뛰다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오랫만에 뵌 민영선생님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김정헌, 장경호, 임태종,

정고암, 조해인, 박구경, 박 철, 오치우, 최명철, 박수영, 이명희, 정원도, 김명지, 송일봉, 정영신씨등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사람인지, 술집 손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열차시회' 시인들이 민영선생의 시전집출판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시집출판기념회라는 현수막은 안밖으로 두 군데나 걸렸지만, 시집은 구경 할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나온 책이라 다들 보았는지 모르지만, 한 권이라도 가져와 보여 주었으면 좋았겠다.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술판기념회였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도 올라 와 있었는데,

홀애비가 결혼했다며 낯선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반갑고 축하 할 일이나, 말도 없이 살았으니 도둑장가 간 셈이다.






저녁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으나, 밥은 커녕 술 한 잔 따라주는 사람 없었다.
다들 취해, 알아서 퇴주잔이라도 찾아 마셔야 했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가 방어회를 가져 왔다고 했으나,
눈치 보느라 남긴 한 두 점이 덩그러니 쟁반을 지킬 뿐이었다.





삼삼오오 나누어 앉은 술자리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남은 술을 거두어 마셨는데,
빈 속에 들어가니 술은 올랐으나,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통인가게'에서 받은 심한 모욕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지것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진자의 거지취급에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고 싶었으나, 정영신씨가 술자리에 남아있어 갈 수도 없었다.

뒤늦게 이인섭, 성기준, 김명성, 공윤희, 신현수, 윤승길씨 등 여러 명이 등장해

노닥거리다보니, 정영신씨마저 사라져 버렸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홍어집에 있다는 것이다.

평소 홍어를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한 밤중에 왠 홍어냐?'며 가보았는데, 

김명지, 정고암, 이도윤씨와 함께 있었다. 그 자리도 편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쓸쓸하게 돌아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하소연 할 곳이라도 있었다면 덜 무거울텐데...


17일의 인사동 밤은 잔뜩 흐렸다.


사진, 글 / 조문호




































































 


 민영, 시력 60년 맞아 ‘시 전집’ 펴내




“자네의 눈에 시의 빛이 내비치고 있네. 쉬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시게.” 미당 서정주는 그가 추천해 ‘현대문학’에 시를 실어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온 청년 민영(사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날로부터 60년이 흘렀고 청년은 83세 노인이 되었다. 시력(詩歷) 60년을 계기로 그는 그동안 펴낸 시집 9권에 수록된 시 409편에다 최근작 10편을 모아 ‘민영 시 전집’(창비)을 펴냈다. 이산의 그리움을 담은 절창 ‘엉겅퀴꽃’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단아하고 깊은 서정으로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한곳에 모인 셈이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 잃고/ 홀로 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잡고/ 머리 위에 수건 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부르느니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엉겅퀴꽃’)



그가 1980년대 후반 신경림 시인에 이어 회장을 맡기도 했던 ‘민요연구회’에서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재야 노래패들이 자주 부르곤 했다. 이 시에 거론된 철원은 그의 고향인데,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다시 광복과 전쟁을 거치면서 부산과 서울로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았다. 고향은 있지만 떠돌이의 숙명을 면치 못했기에 그의 시편들에는 늘 어딘가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편이다. 두 번째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용인 지나는 길에’ 시인은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면서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고 썼다. 한편으로는 “슬픔으로 얼룩진” 역사를 선명하게 음각하기도 했다.

“흘러가거라 등불이여,/ 밤이 지배하는 강물을 헤치고/ 저 끝없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흘러가거라 돛단배여,/ 슬픔으로 얼룩진 역사를 등에 싣고”(‘유등流燈’) 그는 시집으로 묶이지 않은 최근 시편 ‘바람 부는 날 영등포 역전에서’ “오늘은 여기까지 왔으나/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하나?/ 대책 없이 째깍꺼리는 시계탑을 쳐다보니// 부끄러워지는구나, 밥 한끼/ 담요 한 장 되어주지 못하는/ 詩를 쓴다는 것이!”라고 짐짓 자탄하지만, “전쟁 때문에 배우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쓴 글이기에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면서 “독자 여러분이 차분하게 읽어주기만을 바란다”고 ‘시인의 말’에 썼다. 



[스크랩]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해인 시인이 쓴 단독수행도서출판 해냄에서 나왔다.

지난 10일 오후5시부터 가진 인사동 유목민에서의 술판기념회에

민 영 원로시인을 모시고, 조해인, 배평모, 이명희, 송일봉, 박주서, 백남이, 전활철, 장경호,

최석태, 노광래, 임경숙, 이정아, 나재문, 유진오, 이영기씨 등이 베스트셀러를 바라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모운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만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양한 표정을 잡기 위해 바바리 맨 쇼를 벌였는데, 이 놈의 카메라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 카메라는 술에 절어 버린지 오래되어, 마누라 보조 카메라를 빌려 쓰는데,

이게 언제나 한 발 늦어 말썽을 부린다. 셔터가 떨어질 즈음엔 이미 내가 찍히고 있었다.

완전히 국 쏟고 뭐 데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진,글/ 조문호





























단독수행책소개



진리를 찾는 명상가 조해인의 마음수련법. 작가 자신의 경험담이 녹아들어 있어 어떻게 명상을 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그와 더불어 왜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20년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불교, 고대 명상에 대한 내용까지 두루 포괄하고 있다.

전체 27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마치 개인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명상의 개념과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조 선사나 달마 대사, 티베트의 설화 등을 불교와 라마교의 명상법과 함께 설명하면서 <금강경>을 주요 개념을 풀이한다. 세상사에 시달리며 고통의 파고를 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아를 찾아 내면을 발전시킬 것을 이야기한다.

 

  -저자 소개- 

 

단독 수행자. 무궁무진 명상원 회주(會主).
KBS MBC, TBS 등에서 10여 년간 방송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열차 시회(詩會)’를 창설하여, 민영 시인 등과 여행하며 시의 축제를 벌이기도 하였다. 1993년 스스로 명상에 입문하였고, 2002년부터는 외부 세계와의 왕래를 일체 중단하고, ()금강경공부에만 몰입하였다.
산문집으로 천재로 만드는 』 『부처를 살리는 부처를 죽이는 』 『공옥진 평전, 시집으로 관세음보살은 문둥이』 『대한 불교 조계종 원통암 1km』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 씨』 『나무와 해』 『어느 외롭고 슬픈 영혼에게』 『하늘지기꽃을 펴냈다. 소설로 쏭 사이공』 『희망동』 『아침 이혼』 『섬강에서 하늘까지』 『삘구』 『서울조조』 『별은 사다리를 내리지 않는다등을 발표했다.

 


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

 

강민 시인 시선집 ‘외포리의…’ 출간회서 해후

팔순의 벗들이 오랜만에 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박정희 서정란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등이 그들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팔십을 넘겼거나 팔순 언저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모두 한 세월 건너오며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라는 점도 같다. 벗 강민(81) 시인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 굽이굽이 80굽이/ 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 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 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 (중략) / 그 많던 동반들/ 아리고 아픈 내 사랑, 풀꽃 노을에 타버린/ 아리고 아픈 내 사랑/ 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 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 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


팔십이 넘은 연치에도 견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강민의 ‘산수령(傘壽嶺)’이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팔팔한 20대에 전후 황폐한 1950년대를 보냈다. 이어 4·19, 5·16,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미 그들 표현대로 ‘저 위로’ 떠나간 이들이 더 많다. 이날 인사동에 모인 이들은 지나온 세월 막역하게 부대껴온 몇 안 남은 벗들이다. 강민 시인은 모두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강민 시인의 새 시집을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모인 팔순의 벗들. 왼쪽부터 강민

신경림 박정희 시인, 극작가 신봉승, 민영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 다 먼저 가고 이만큼만 남았다”고 웃었다.


“중학교 6학년, 요즘 학제로는 고3 때 6·25를 만났습니다. 피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이여 안심하라고 방송하더니 자신은 대전 부산으로 도망가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습니다. 남은 이들은 발이 묶이고 무심히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살아온 세월은 늘 배멀미를 하듯 어질어질했는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대체 달라진 게 무언지 답답합니다.”

그는 1950년 8월 또래의 인민군을 만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을 밝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경안리’에서라는 시편에 적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나’는 철없이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경안리에서’)


강민 시인은 그때 이별의 인사말로 나누었던 “우리 죽지 말자”는 다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해 서럽다고 했다. 전후 폐허의 거리에 청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문인들의 무대는 그나마 얼기설기 엮은 폐허의 건물더미 사이에 자리 잡은 명동의 술집과 음악다방이었다. 이날 어렵사리 만난 벗들도 그 시절 명동을 누비던 추억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다.

민영(80) 시인이 시를 읊듯 말했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렸어. 강물을 지나서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서 없어지고 말았어. 여기 온 사람들 몇 명만 남았어.”

강민 시인은 그들이 명동 시대에 이어 인사동을 누비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내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린다/ 동서남북이 분별되지 않는다/ / 그이가 떠난 여기는/ 스산한 여기는/ 내 마음의 황무지// 가면을 쓰고/ 물구나무 선 이들이 다가온다/ 그리운 이들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황혼을 마신 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갈 길 잃은 내가 헤매고 있다”(‘인사동 아리랑 4-황무지’)

연전에 아내마저 떠나보낸 강민 시인은 그리운 이들이 모두 떠나간 곳은 ‘황무지’라고 썼다. 노경의 시인들이 실감하는 삶의 무게와 헛헛함이 생생한 자리였다. 이날 팔순의 벗들은 너나들이하며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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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들 “읽어도 이해안되면, 詩 아니다”

 

신경림 등 원로시인들 쓴소리

 

▲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강민(윗줄 왼쪽 첫 번째)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 기념회에서 신경림·민영·황명걸 시인, 신봉승 작가(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이 시 낭송을 듣고 있다. 서서 시를 낭송하는 이는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밤중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랑 같아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들은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9일 강민(81)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다.

이날 자리에 모인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서정란, 박정희 등 원로 시인들은 새 시집에 대한 얘기에 앞서 독자들과 멀어지고 있는 현 한국 시단의 흐름에 쓴소리를 했다.

신 시인은 “최근 나오는 시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시는 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시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일반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는 비평가들 때문에 영국프랑스의 시 경향이 지나치게 난해해졌고, 결국 독자와 호흡하지 못한 채 망가져 버렸다”며 “우리도 이들의 경향을 따라 해석이 안 되는 시들을 쓰려 하지만, 각 나라에 맞는 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은 통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강 시인 또한 “김수영 시인도 1950년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난해한 시를 썼던 ‘후반기’ 동인에 대해선 ‘그건 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며 “읽히는 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 시인은 “후배(시인)들이 정성이 담긴 시를 썼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시를 쓰면서 10번은 더 고치고, 잡지사에 보낸 후에도 다시 가서 고쳤던 기억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쓰더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자리에서 원로 시인들은 함께한 지 50년이 된 만큼 첫 만남, 동인 활동 등 추억도 자주 꺼내 이야기했다.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는 “6·25전쟁, 4·19혁명, 군사독재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온 원로 시인들의 경험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며 “문단에서 원로들과 현 활동 문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mail 유민환 기자 /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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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시]

 

그을린 도심의 빌딩 위로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다

피곤한 시민들의 우수가 떠 있다

분노가 떠 있다

 

-강민의 '만추' 중

 

 

 

 

숨막히게 더웠던 지난주 어느 날,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강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외포리 갈매기’가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소감을 말하라자 시인은 뜬금없이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동네 교회를 지킨답시고 피난 행렬에 끼지 않았다. “그때 (정부가)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얼마 후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단어가 주는 뚜렷한 기시감에 자리는 일순 침묵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물을 보며 뿜어냈던 분노와 다짐은 어느새 폭염 속에 녹아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백발의 시인은 여전히 파랗게 분노하고 있었다. 윗글은 ‘외포리 갈매기’에 수록된 첫 번째 시 ‘만추’의 마지막 연이다.

 

한국일보 /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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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인사동 아리랑 6 -세모(歲暮)

 

강 민

 

눈이 내릴 듯
우중충한 하늘이 겨울 햇살을 가린
인사동 뒷골목을
약속도 없이 배회하고 있다
섣달그믐이 내일인데
이제 곧 질곡의 경인년은 가고
새해가 온다는데
이 굽이에선 작은 꿈이라도 영글려나
흑룡(黑龍)의 임진년이 온다는 날

 

-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에서

 

[한겨레신문]

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지난 26일 오후3시부터 ‘아라아트’지하1층 커피숍에서 김명성씨 석방을 원하는 인사동 예술가들의 탄원서 서명 작업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민 영, 무세중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인식, 최백호, 기국서, 김신용, 배평모, 조문호, 정영신씨가 직접 탄원서를 작성해 왔고, 강 민 선생님을 비롯하여 조경석, 이명희, 무나미, 정기범, 최혁배, 이행자, 강선화, 김상현, 김완기, 이경숙, 전인경, 허미자, 황예숙, 김희갑, 노광래, 편근희, 윤재문, 전인미씨 등 많은 사람들의 서명이 이어졌다.

서명하러 직접 인사동으로 나 온 분들도 많았지만, 카톡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가르쳐 주어 위임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 김가배씨와 ‘아리랑 명품관’ 유재만 대표는 서명하러 왔다 성금을 내 놓기도 했다.
서명 하루 만에 무려 240여명이 탄원서에 서명해, 빠른 시일 안에 담당 변호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의 김명성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본 탄원서 서명에 동참해 주신 많은 분들께 거듭 감사 말씀드린다.

 

 

 

 

 

 

 

 

 

 

 






김용문 막사발전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지난 개막식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나 꼭 보여야 할 분들이 여럿 빠져 아쉬웠다.

그러나 봄바람 살랑거리는 이 꽃 시절에, 한꺼번에 만나 뵙기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민 영선생은 김명성씨를 위한 성금을 내놓으며 "큰 보탬이 되지 못해 어쩌냐"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셨고,

무세중선생은 모두가 쉽게 동참하도록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며, 스스로 만원을 내기도 하셨다.

만나는 분마다 김명성씨 걱정뿐이었는데, 하기야 김명성씨만 있었더라면 막사발 잔치도 더 풍성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물 만나듯, 반가운 분만 만나면 인사도 하기 전에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릇이 있어 

내심 싸가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좀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그래도 파파라치는 아니잖아...

 

오프닝에 차린 음식들은 맛깔스럽기는 한데 전시된 사발 개수에 비해 푸짐하지 않았다.

'노마드'에 50인분의 음식을 예약해 두었으나, 미처 알지 못한 분들은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대신 전시장에서 보지 못한 분들을 만나 늦은 시간까지 부어라 마시어라 즐길 수 있었는데,

결국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끙끙대야 했다. 

 

좌우지간 막사발 김두령 덕에 즐거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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