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옛날에는 요즘처럼 몰려 다니며 피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난화에 의한 찜통 같은 날씨도 아니겠지만,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 아니던가?

찬물에 발 담그는 탁족에 부채질하며, 죽부인이나 껴안고 딩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음식물은 깊은 우물 속에 걸어두거나, 소쿠리에 담아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했다.

밤이 되어도 점 잖은 사람은 냇가에 나가 목욕할 처지도 못되어,

대문 걸어 잠그고 아내가 밀어주는 등밀이에 "어푸~어푸~"를 연발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은 정선 조양강에도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난, 사람들이 몰리는 강변을 피해 만지산 중턱에 살고 있지만,

피서객들의 차량이 좁은 산길까지 가로막아 바야흐로 피서철 임을 절감한다.






옛 귤암분교 터에 자리 잡은 캠핑장에는 야영객들로 넘쳐나고,

강가에는 가족들 끼리 낚시나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20여년 넘게 들락거렸으나, 강변에서 한 번도 더위를 피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물가 찾아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이 곳 귤암리 강변은 그늘이 없어 무지 덥기 때문이다.

간혹 아는 분들이 밤 낚시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그마저 나서지 않는다.






현지에 사는 원주민들의 피서 법은 따로 있다.

이열치열이라 듯 부지런히 일하여 땀 흘린 후, 찬 지하수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축 늘어진 불알이 착 달라붙는 그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푸! 하하~
밤에는 고기 구워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죽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허리를 다쳐 옥수수 밭을 매지 않았더니, 옥수수 밭이 풀 밭이 되어버렸다.

풀 밭이던 옥수수 밭이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옥수수가 비쩍 말라 이빨 빠진 내 강냉이를 닮았더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멧돼지가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이다.

강냉이가 부실해 봐주었는지 모르지만, 멧돼지들도 그렇게 얌체는 아니다.

오랜 세월 지켜 본 바로는 한 해 쑥대밭을 만들었으면 그 다음해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물며 짐승도 상대를 배려하는데, 어찌 전기 철망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피서나 농사나 자연의 섭리대로 따를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동강할미꽃보존연구회'가 주최한 제10회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4월1일부터 3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조촐하게 열렸다.

행사장에는 서덕웅 보존회장을 비롯하여 전정환 정선군수, 차주영 정선군의회의장,

한종수 정선읍장, 김수복 정선군 문화예술과장 등 많은 인사들과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높은 벼랑에 핀 동강할미꽃의 처연한 자태를 감상하며 정선의 봄을 맞이했다.

이제 동강할미꽃축제는 어린이들이 즐겨 찾는 축제로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동강할미꽃들과 함께 열리는 사생대회나 백일장이 크게 기여한 듯 했다.

이 날 떡메 치는 재미도 솔솔 했지만, 어디 이웃과 함께하는 재미에 비할소냐.

귤암리 부녀회에서 마련한 음식과 막걸리를 마시며 봄의 여흥을 마음껏 즐긴 것이다.

이처럼 마을축제란 주민들이 화합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잘 안 된다.

농사철에 접어들면 쉴 겨를이 없지만, 이 날 만큼은 만사를 재쳐두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정선 문화예술인들이 그렇게 많지만, 모습을 드러낸 분은 김우영씨 한 분 뿐이었다.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그러니, 농사일에 바쁜 주민들만 탓할 일도 아닌듯 싶다.

내가 사는 만지골은 지하수를 둘러싼 원주민들과 이주민의 분쟁이 극에 달하고 있다.
지하수 펌프나 배관을 보수하는데 따른 비용분담으로 발생한 사건이란다.
축제장에서 만난  전정환 군수께 지하수 관리비용을 군에서 부담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즉석에서 한종수 읍장을 불러 해결방법을 모색하자며 걱정해주셨다.

한종수 읍장은 앞으로의 유지보수비를 주민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문제는 그 갈등의 골이 한계를 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웃 간에 내용증명이 오가는 등 소송까지 불사할 감정싸움으로 비화해,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의 분쟁은 이제 귤암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이들이 산골로 몰려들며 생긴 일인데,

대개들 '가까히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거였다.

도심에서 이웃과 교류 없이 살아 온 이들이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축제라도 나와 얼굴을 부딪쳐야 하는 것 아닌가?

더욱이 강원도 정선지역은 예로부터 산골에 갇혀 살아,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습성이 몸에 배어있다.

난, 정선 들어온 지 20년차지만 외지에 나돌아다녀 그런지, 아직까지 데리고 온 서자 취급이다.

그렇지만 함께 어울려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마을의 정서보다 원칙을 따지는 분들이 늘어나며 이런 분쟁이 터진 것이다.

싸우는 양측에서 서로 협력을 요구해 더욱 난처하게 만든다.

이미 내집에 대한 관리와 의결권은 이웃 최종대씨에게 위임한 상태라 뒤늦게 개입할 문제도 아니지만,

편 가르기로 비화된 흙탕물에 휘말리기는 더 더욱 싫기 때문이다.

부디 서로 양보하여 평화로운 마을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진,글 / 조문호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동강 변 뼝대(벼랑)에 석회암 바위를 뚫고 피어난 동강할미꽃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연분홍, 청보라, 붉은 자주색 꽃이 하늘을 향해 초롱초롱 빛을 낸다.
 


 ‘동강할미꽃’의 고장 강원도 정선 기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알려진 ‘동강(東江)’은 강원도 정선의 주강이다. 동강 물길 51㎞ 중 태백이 5㎞, 영월이 14㎞인데 정선은 32㎞다. 동강에서 봄철에 유난히 주목받는 것이 있다. 암벽 틈 사이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동강할미꽃’이다. 고개를 숙이는 여느 할미꽃과 달리 깎아지른 기암괴석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신비스럽게 꽃을 피워 보석 같은 꽃향기를 뿜어낸다. 강인한 생명력이 경이롭다.


동강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15㎝ 정도의 꽃을 피운다. 꽃대 전체에 흰 털이 많다. 잎은 뿌리에서 나는 깃꼴겹 잎으로 작은 잎 7∼8장으로 이뤄진다. 동강 주변의 정선, 영월, 평창의 석회암 바위틈에서 자라는 한국의 자생 야생화다. 1997년 한 식물사진가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2000년 6월 ‘동강할미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가장 늦게 봄이 드는 강원도 땅에 살지만 3월말부터 4월 초순에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현란하게 화려하지 않지만 잔잔한 잔영을 남기는 아름다움이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우리 꽃이다.


할아버지 수염을 한 동강고랭이. 정선 동강변에 동강할미꽃과 함께 자란다.


처음 동강할미꽃이 발견된 곳은 정선군 귤암마을이었다. 수직 절벽이 동강할미꽃의 자생지다. 이름은 할미꽃이지만 전혀 할머니 같지 않다. 수줍은 새색시 마냥 가냘프고 고운 미녀 같은 꽃이다. 연분홍, 청보라, 붉은 자주색 꽃이 하늘을 향해 초롱초롱 빛을 낸다. 동강을 붉게 물들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동강할미꽃도 활짝 열었던 꽃잎을 서서히 닫는다.  

동강할미꽃을 맞이하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꼬불꼬불한 동강변 도로를 한참 달려야 한다. 길 한 켠에 ‘낙석주의’ 표지판이 긴장감을 준다. 그렇게 가는 길에 만나는 ‘동강할미꽃 군락지’라는 표지판이 반갑다. 동강할미꽃은 장미나 튤립처럼 흐드러지게 피지 않는다. 군락지라고 해서 빠르게 지나치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바위벽을 찬찬히 살펴야 그 틈에서 손을 들고 있는 보랏빛 꽃을 마주할 수 있다. 그 빛은 장미의 붉은색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병방치 스카이워크.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반도 지형과

휘돌아가는 동강의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귤암리는 53가구에 138명이 사는 마을이다. 정선에서 유일하게 온대식물인 감나무가 재배 되는 곳으로 예부터 감꽃이 만발해 귤화리라고 칭하던 ‘귤’자와 의암이라는 자연부락 이름에서 ‘암’자를 따왔다. 주민들은 세계 유일종이며 한국특산종인 동강할미꽃을 보존하기 위해 2005년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를 창립했다.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 및 동강 유역에서 4월 1일부터 3일까지 제10회 동강할미꽃축제가 개최된다. 동강할미꽃 분재 및 사진전시, 마을풍경 그림전시, 동강할미꽃 10년사 자료 전시, 한반도지형 및 수리봉 포토존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 서덕웅 회장은 “동강할미꽃축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라기 보다 자연의 고마움을 자연 속에서 느끼고 아름다운 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라며 “척박한 환경 극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동강할미꽃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귤암리 동강생태체험공원에서 올려다보면 병방산(兵防山·861m)이 웅장하게 서 있다. 위로는 천층 절벽이요,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강물이라 한 사람만 지켜도 천군만마가 근접하지 못할 요새지여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그 산 중턱에 병방치라는 옛길이 있다. 1974년 강변으로 통행할 수 있는 호박길(동강로)이 생기기 전까지는 산 아래 귤암리 주민들이 정선 5일장터에서 생필품과 비료, 시멘트 등을 운반했던 생명의 길이었다. 병방산의 허리를 가로질러 오르는 고갯길의 경사를 낮추기 위하여 36굽이 뱅글뱅글 돌아 통행했기에 뱅뱅이재라고 불린다. 다람쥐도 한숨짓고 나는 새도 쉬어가는 길이다. 

병방치에 서면 굽이치는 동강의 아름다움이 가슴 뻥 뚫리는 청량감을 준다. 깎아지른 듯한 산세를 따라 뱅뱅 돌아가는 옛길을 따라 가면 동강변 할미꽃마을에 이르게 된다. 약 3㎞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정선에서 요즘 ‘뜨는’ 곳이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송중기·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인 고한읍 ‘삼탄아트마인’이다. 함백산 자락에 위치한 옛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폐광시설을 이용해 시간의 흔적과 예술의 희망을 캐는 콘셉트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예술광산으로, 지난해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됐다. 1964년부터 2001년 10월 폐광되기 전까지 3000명이 넘는 광부가 석탄을 캐던 삶의 터전이었다. 갱도로 내려가는 승강기와 석탄을 나르던 레일 등이 모두 보존돼 있다.


여행메모 
영동고속도·42번 국도 이용 3시간 소요… 곤드레나물밥 별미
 


곤드레나물밥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나와 42번 국도를 타고 평창읍을 지나 비행기재터널을 통과한 뒤 7㎞가량 가면 광하교다. 이 다리를 지나 강변을 타고 4㎞ 정도 더 가면 ‘동강 할미꽃 축제’가 열리는 정선 귤암마을이다. 약 3시간 걸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시외버스가 있다. 

정선읍내에서 59번 국도를 따라 가다 남면에서 38번 국도로 갈아타고 고한읍을 지나면 삼탄아트마인에 다다른다. 지난해 한국관광100선에 포함된 삼탄아트마인은 탄광 문화와 예술이 결합된 공간으로 문 닫은 뒤 멈춘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4층부터 전시 공간 10여 곳을 둘러보면 석탄을 캐서 모으던 시설에 미술 작품을 가미한 레일바이뮤지엄을 거쳐 기억의 정원 등이 있는 야외 공간으로 나온다.

정선은 곤드레나물의 고장이다. 정선읍내의 싸리골식당(033-562-4554)은 곤드레나물밥(사진)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아라리촌주막(033-563-0055), 동박골식당(033-563-2211), 동광식당(033-563-3100), 짐포리식당(033-562-2479) 등도 맛집이다. 

[스크랩/ 국민일보] 정선=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저는 물을 좋아해 물 흐르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물방울과 사물이 마주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 행복하거든요.
돌과 만나는 소리, 바위와 만나는 소리, 달과 만나는 소리, 나무뿌리와 만나는 소리, 물끼리 몸을 비비며 만나는 소리가
어떤사물과 만나 어떤소리로 응답하는지 관찰하다보면 시간이 정지되어 온통 제세상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시간을 사각틀안에 집어넣을때도 있고 마음안으로 고스란히 담아놓을때도 있습니다.
나중에 사진을 바라보면 그때의 그감정으로 되돌아갈수 있어 사진의 힘이 크다는것도 알게 되구요.
강은교의 “물길의 소리” 라는 시를 읽은후라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어요.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 마주치는 물방울들의 길, 사람과 사람의 마주침, 다정히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할까요.

“미세지각이론”을 이야기한 라이프니츠가 폭포소리는 “무수히 많은 물방울의 미세한 소리들이 합쳐져서 나는 소리” 라고 했어요.
교향곡을 들을 때 늘 이양반의 폭포떨어지는 소리와 연결해서 듣다보면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어 좋습니다.
모든 것은 마주침에서 나온다는 것이겠죠. 사람과 사람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생기(生氣)는 무엇일까요.
그래서 전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참좋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우리창예헌식구들의 얼굴들을 자주 바라봅니다.
2010년 동강물줄기 봄의 끝자락입니다. 조선생님이 열심히 일하는데 저만 이렇게 신선놀음에 빠져 몇시간을 걷다가 찍은 사진입니다.
정선에 있는 "한국사진굿당" 방문하고 싶지 않으세요? 언제나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얼굴을 마주보는 시간을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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