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눈빛출판사' 창립 30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강남 ‘스페이스22’에서,

두달 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전 AP통신 기자 김천길(1929-2018)선생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김천길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부터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카메라에 기록해 왔다.

평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민주항쟁 촬영 현장에서 몇 번 뵙고 인사드린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사진기자들이 제일 부러웠다. 생활이나 필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신 사진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천길선생의 명성은 익히 들었던지라, 멀리서 보아도 찾아가 인사드릴 정도로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 뒤 흐르는 세월 속에 서서히 기억에서 멀어져 갔는데, 갑작스런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부고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한 것이다.






마침 '눈빛출판사' 창립30주년에 맞추어 선생의 추모식을 갖는다기에 찾아 갔다.

그 날 따라 가야 할 전시오프닝과 겹쳐, 추모식만 참석하려 했으나,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씨 이야기까지 듣느라 바쁜 걸음 쳐야 했다.






그날 오후4시에 열린 김천길 선생 추모식에는 이규상대표를 비롯하여 고인의 차남인 김구철씨,

전 사진기자 정태원, 이창성, 전민조씨와, 현 사진기자로는 한겨레 김봉규씨만 찾아왔다.

눈빛의 안미숙 편집장, 사진가 엄상빈, 양시영, 곽명우씨 등

10여명이 모여 고인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빌었다.






고인의 차남 김구철씨의 장례 보고와 후배 사진기자들의 고인에 대한 회고가 있었다.

김천길 선생의 사진집 ‘서울발 사진종합’이 20여년 전에 '눈빛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아쉽게도 절판되어버려 유족과 재출간을 협의 중이라고 한다.






추모행사 후에는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해 온 전 로이터통신 정태원 기자의

‘역사 현장과 삶의 기록’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 그 이한열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흥미진진한 비화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으나, 시간이 지체되어 안절부절 했다.

아쉽게도, 전 동아일보 전민조기자의 ‘오늘의 기념사진’ 강연은 듣지 못했다.






귀중한 사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주신 김천길선생께 다시 한 번 머리숙여 추모한다.
먼 이국 땅이지만, 편안히 영면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서, 사진집 출판기념전


2017년 07월 28일 (금) 16:59:01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한계레’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 간 후,

40여 차례 넘게 팽목항과 동거차도를 방문 기거하며 기록했다. 기자로서의 냉철한 시각보다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심정으로 찍었다.

객관성을 우선하는 신문사진과 주관을 우선하는 사진가로서의 갈등도 보였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사진가.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마치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 더 아팠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그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눈빛사진가선 50. 팽목항에서 표지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동거차도 앞바다를 찾은 단원고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혜 씨_2016년 4월 22일 오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으로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했다.



▲동거차도_2017년 3월 22일 오후



세월호가 침몰하는 평목항에 달려가 처음 맞은 동거차도의 밤은 적막감과 긴박감이 뒤섞여 있었다. 사진집 표지에 실린 사진처럼,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딱뜨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인양되는 세월호_동거차도 사고해역_2017년 3월 24일 오후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며,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 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중요한 것은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오후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써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써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오후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 낸 사진가 김봉규씨의 집념과 열정에 대해 몇 가지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90년대 초반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어내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로 작업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평소 관심 가진 ‘시사저널’주간지를 택했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기의 포부를 밝혀 특채가 되었다.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전혀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이었다.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오후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오후


세월호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인재가 삼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양작업을 시작한 후 하루 만에 올라 온 세월호가 인양하는데 왜 3년씩이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세월호가 인양된 것은 정말 우연일까?

특검도 밝히지 못한 박근혜 7시간의 행방이며, 세월호 수사를 방해했다는 우병우 구속신청기각도 석연치 않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범죄 집단 같았던 기득권의 뿌리가 여전히 깊다는 이야기다.



▲팽목항에 설치된 분향소. 2015년 12월 20일 오후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전시문의:‘류가헌’(02)720-2010

*사진제공=눈빛출판사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7월25일 오후6시경 '류가헌'을 가기위해 경복궁역에서 걸어 갔더니 너무 더웠다.

가는 도중 전람회를 다녀오던  엄상빈씨를 만났고, 전시장에는 사진가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이상엽,

한금선, 곽명우, 이규철, 강제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반가운 분들 만나 이야기 나누며 곡차도 한 잔했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첫 눈에 보인 사진은 작가가 평목항을 처음 찾은 동거차도의 밤이었다.

사진집 표지에 소개되었듯이,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 한 장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닥트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대상 속에서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김봉규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표지 (가격 : 12,000원)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보아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한다.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닥아 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기까지 하여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그리고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서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서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이 작업을 이루어 낸 김봉규씨의 사진가로서 집념과 열정에 대해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전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를 겸해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사진기자인데, 그가 평소 관심 가져 온 ‘시사저널’ 사무실을 찾아 간 것이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은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포부를 밝혀 관철시켰다.

그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뿐이었다.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내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전시 열림식에 다녀 간 분들의 모습이다]



























지난 7일 정오 무렵, 박노철씨의 “폐광, 그 흔적을 묻다”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류가헌‘을 찾았다.
폐탄광의 환경오염을 오년 동안 기록한 전시였는데, 여지 것 붉은색의 황변현상은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하얀색으로 나타나는 백화현상은 처음 보았다.

마치 물감을 뿌린 듯 아름답게 채색되어, 환경오염이 아름답게 보이는 아이러니도 엿보았다.

비록 폐광에서 흘러나오는 침출수만이 아니라 이미 환경오염은 지구 전반에 걸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폐광의 환경오염을 안타까워하며 현장을 누비고 다닌 작가의 집념어린 노고가 사진 속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태백은 산업 고도화에 발맞춰 수십 년 동안 자원개발을 통해 국민들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주었으나,

광부들의 목숨을 위협하며, 주변 환경의 수질 및 토양에 심각한 오염현상을 유발하였다.

‘청정지역을 오염시키는 폐탄광 중금속 오염원을 제거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며 작가의 문제의식을 표출하기도 했다.

카드뮴, 비소 등 중금속에 오염된 폐탄광의 폐수는 물에 녹아 있는 탄산칼슘이 고체 상태로 석출되어

흰색으로 나타나는 백화현상과, 엽록소 생성에 필요한 원소의 결핍으로 황변화현상이 발생한다는데,

흐르는 하천만이 아니라 지하수의 오염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작가는 환경오염을 고발하거나 미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기록했으며,

이번 사진집 출판과 사진전도 끝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환경오염을 개선하는 학술적 자료로서의 작업도 병행할 것이라 했다.

박노철씨를 처음 만난 지는 20여 년 전 ‘동아국제사진전’ 태백 순회전 때, 이석필씨를 통해서다.

그 뒤 정선에서도 만난 적이 있으나, 세월의 흘러 그를 잊어버렸는데, 아직도 젊은 그대로였다.

지금은 ‘사협’ 태백지부장을 맡아, 자기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대개 공모전 위주의 사진을 선호하는 ‘사협’회원들을 제대로 된 사진가로 여기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작업에 열성인 작가가 있다는 것도 박노철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미 태백에는 탄광전문 사진가가 여럿 나왔다. 오래전에 찍은 주동호, 이석필씨를 비롯하여 김재영, 박종호씨,

그리고 이번에 전시를 연 박노철씨, ‘아버지는 광부였다’로 유명세를 떨친 박병문씨,

현역광부로서 탄광을 찍고 있는 전제훈씨 등 많은 탄광 전문가를 배출했다.

오래전에는 태백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모여 탄광에 대한 기획전도 열었다는데, 그 전시도 궁금했다.

태백은 작은 소도시지만, 사진 열기만은 뜨거운 지역이다.

전시를 관람하며 반가운 분들도 만났다. 작가를 인터뷰하러 온 ‘서울문화투데이’기자 정영신씨와

대전의 김은환씨, 그리고 90년도 초반 ‘사진집단 사실’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인들도 여럿 만났다.

이석필씨와 김문호씨,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김봉규씨를 한꺼번에 만났다.


이석필씨는 그동안 찍은 수많은 필름들을 모조리 불태웠다는데,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사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풍수지리에 관한 사진에 전념한단다.

좌우지간 그의 삶은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지만, 깨우칠 점도 많은 사람이다.

지붕 위에 깃대만 꽂으면 영락없는 도사인데, 상대방의 사주팔자까지 꽤고있다. 


다들, 흐르는 세월 따라 늙어가고 있지만,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진가들이다.

늦은 오찬을 함께 하고 나오는 길에 사진가 엄상빈씨도 만나는 반가운 하루였다.






이 전시는 서울 ‘류가헌’ 전시에 이어 7월15일부터 18일까지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도 열린다.

또한 ‘눈빛출판사’에서 오늘의 다큐5집’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 박노철 사진집(25,000원)도 펴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동짓날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 추모제'가 열렸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다.
해마다 이맘때면 홀로 세상을 떠난 이름 없는 민초들을 추모하는 자리가 열린다.

올해 12월 21일의 동짓날은 눈 대신 비가 내렸다.

한겨울 치고는 덜 추웠지만, 빈민들의 삶은 일년 내내 혹한의 겨울이다.

매년, 죽어가는 거리의 노숙자나 쪽방 촌 빈민들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욱 절실하지만,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장례라도 제대로 치루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고독사’나 시체를 포기하는 각서, 사망신고를 할 수 없어, 죽어도 죽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죽는 것을 미리 걱정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은, 사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노숙인이나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을 대신해 43개의 민간단체가 나섰다.

한 해동안 세상을 떠난 빈민들을 추모하며, 살아 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죽어서나마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올 한 해 동안 동자동 쪽방 촌에서만 돌아가신 분이 25명이고, 무연고자는 40명에 달했다.

대부분 영정사진이 없어 얼굴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대통령이란 년은 마약주사나 맞으며, 멀쩡한 상판대기와 변기나 뜯어 고치는 지랄을 하는데,

무슨 놈의 팔자가 그렇게 기구하여, 죽어가며 자기 얼굴 한 장 못 남겼는지 모르겠다.

이제 국민들 세금 도적질하는 정치꾼들, 없는 사람 착취하는 재벌, 눈치보는 공무원들은 말끔히 쓸어내야 한다.


이 날 추모제에 내린 비는, 비가 아니라 원혼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죽는 무연고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힘 모아 싸워야 한다.






추모제에서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노숙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한 무료 증명사진 촬영 등의 행사도 진행됐다.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장례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엽서에 담은 ‘1000인의 우체통 프로젝트’ 이벤트도 열었다.

노숙을 탈출하는 윷놀이도 진행되었고, 따끈한 동지팥죽도 한 그릇씩 나누어 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굵어졌으나,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현의씨의 추모사, 민중가수 박준의 노래, 안상호씨와 '희망공간 거리의 아빠들' 합창단 공연도 이어졌다.

이정훈씨의 연대발언과 동자동주민을 대표한 차재설씨의 투쟁발언도 있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라지만, 홈리스의 평균수명은 48세라는 걸 잊지 말자.
죽음을 방치하면 천벌 받는다.





이 날 추모제에는 '동자동사랑방'의 박정아 대표와 공제조합 우건일 조합장을 비롯한 동자동주민들이 대거 몰려나와 행사를 도우며,

팥죽을 나누어 주었다. 반가운 사진가로는 ‘한겨레’ 김봉규기자,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 기자, 김 원, 최인기씨를 만났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있었던 2차 민중총궐기 집회는 차벽과 물대포 대신 꽃과 복면이 등장했다.
과잉진압이나 폭력시위, 무력충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축제장을 방불 게 했다.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여가며 거리행렬도 질서정연하게 잘 해냈다.
최대한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애 써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몸이 불편한 백기완선생께서는 이 날도 일찍부터 나오셨는데,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의 부축을 받으며, 몇 시간이나 힘들게 선두를 지켰다.

'서울광장'에는 김세균, 심상정, 이수호씨 등 정치인들의 모습도 더러 보였고,

시인 강 민, 장봉숙, 서양화가 김정헌, 임옥상, 김준권, 장순향, 곽대원, 박불똥, 이태호,

김봉규씨 등 예술인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으나 군중 속에 파 묻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난 후, 술집에서 모두들 만날 수 있었다.

태평로 ‘맛나호프’에서는 신학철, 이도흠, 장경호, 하태웅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인사동 ‘푸른별 주막“으로 옮기니, 정선의 강기희씨를 비롯하여 이승철, 김명지, 이지상, 김이하씨가,

‘유목민’에는 오전에 헤어졌던 아내를 비롯하여 주 은, 김경원, 김은영, 배성일, 김영복, 이희종, 오미영씨가 있었다.


온 종일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 그런지, 막걸리 한 잔에 짜리리 기별이 왔다.
여기 저기 다니며 술을 마셨으나, 마음의 상처에 독만 될 뿐이었다.
술 취해 집에 돌아 왔으나, 금기사항인 컴퓨터부터 먼저 켰다.

"죽어서도 컴퓨터부터 켤거다"는 아내의 투정도 못 들은 채 했다.
메주알 고주알 쓰 놓고는, 댓글에다 사진을 올려놓은 채, 잠들어 버렸다.

새벽에 잠을 깨니, 몸살이 났는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몸도 몸이지만, 어제 밤에 올린 음주 포스팅이 마음에 걸려, 아내부터 깨워야했다.
“야! 페북에 올린 기, 맘에 걸리니, 한 바라!”
눈을 부비고 일어 난 아내가 핸드폰을 찾아보더니, 괜찮다는 것이었다.

안도하였으나, 그 때부터 무려 30시간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음의 병만 깊은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길로 가버리면 좋으련만, 마음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해 컴퓨터를 켜 보니, 그저께 올려 논 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살아오며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던 이야기를 까발려 놓은 것이다.
단지 보수파들이 돌아서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게, 너무 오버한 것이다.

급하게 글은 내렸으나,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보아버렸으니 어쩌랴?
괜히, 죄 없는 아내에게 짜증 부린다.
“지워라 캤는데, 와 나뚜노?”

사진, 글 / 조문호






































































‘장에 가자’ 전시에 이어 ‘청량리588’ 사진전을 또 열었다.

돈이 없는 게 결정적인 탈이지만, 너무 다급하다 보니 일은 뒤죽박죽이었다.
오픈을 하루 남기고 프린트를 시작했는데, 늦은 밤 기계마저 고장 나는 바람에 새벽4시경에야 간신이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잘 못된 프린트도 더러 보였으나 손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정오 무렵에서야 아슬아슬하게  디스플레이를 끝내니, 아는 손님들이 한 분 두 분 찾아들기 시작했다.

연이은 전시라 오프닝 파티는 생략했으나, 전시장 찾은 분들과 와인 한잔 나누며 정담 나누는 시간은 가졌다.

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강송림, 김승환, 방동규, 심우성선생, 만화가 박재동씨, 서양화가 정복수, 전강호씨, 연극배우 이명희씨, 시인 조준영, 조해인, 공윤희, 김명성씨를 만났고, 90년도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했던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김봉규 씨 그리고 눈빛출판사의 이규상씨를 비롯하여 이주영씨,'한겨레신문'의 곽윤섭, 노형석 기자등과 어울려 ‘부산식당’에서 소주 꽤나 땄다.

 

술이 취해 ‘노래방’까지 갔다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안국동거리는 택시잡는 취객들만  바빴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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