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장터가 '정선아리랑시장'의 꽃이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젠 전문가들만 출연하는게 아니라 장터사람 모두가 주인공이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떡도 치고, 노래 부르며 춤도 춥니다.

지난 6월2일의 장날은 정선아리랑 공연에 이어 떡메치기, 노래자랑, 품바공연 등 재미있는 볼거리가 이어졌는데, 떡메치기에 꼬마 장정들이 나와 실력을 겨루기도 했답니다.
이젠 관광객들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어울려 참 좋습니다.

엿장수 최덕화씨의 품바공연에는 '더덕정과' 주인 이영화씨가 찬조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본 그녀였지만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노래부르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이젠 상인공연단 뿐만 아니라 상인 모두가 광대로 자처하고 나선 셈이지요.

최덕화씨의 품바공연은 북장단도 일품이지만, 그가 추는 가위춤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 없는 명품공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체를 학대하는 불쇼는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혐오감을 동반한 눈요기 거리보다는 신명을 푸는 즐거운 자리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문화장터에는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낯익은 정선 어르신들도 쉽게 뵐 수 있습니다.
십리길을 걸어서 장에 나오신 정선 북실리의 이용녀(85)씨는 문화장터의 단골이십니다.
옆 자리의 윤채은(82)씨도, 역전에 사시는 권수오(83)씨도 이젠 친구가 되었지요.
모두들 문화장터에서 어울리는 게 유일한 낙이랍니다.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는 장날마다 떡메치기를 합니다.

그것도 쫄깃쫄깃한 맛에다, 몸에도 좋은 수리취떡을 말입니다.
수리취떡은 단오날 절식으로 먹어 온 떡인데, 청열해독, 당뇨병, 각종 암 등
몸에 좋은 영양식임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정선아리랑시장의 떡 장사 민병만씨가 만드는 수리취떡 먹으러 갑시다.

​대게 남녀가 한 조가 되어 떡을 치는데, 모두들 그 힘이 보통이 아닙디다.
어떤 분들은 떡을 내려치고는 떡메로 비벼,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혹시 집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떡판에 푸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떡 먹고, ​잘만 치면 상품까지 받는, '도랑치고 게 잡는' 놀음이지요.

쿵덕~ 쿵덕~ 떡치러 가자. 정선아리랑시장으로....

​ (2014년 5월 22일,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시장조합의 임미순주임, 떡치려는 사람들이 몰려 바쁩니다.

 

떡치기 전, 워밍업하는 중입니다.

 

떡메치는 시범을 보여주는 수리취떡의 명인 민병만씨

철썩~ 드디어 떡메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아주머니 떡메잡은 폼보니, 떡 좀 칠 것 같습니다.

 

치기만 치지, 비비기는 왜 비벼~

 

떡메가 떡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문화장터 사회자 임춘경씨가 다음 타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이구! 떡 살려~

 

민병만씨가 떡을 가운데로 모우고 있습니다.

 

저 아저씨는 논메다 왔나, 바지는 왜 걷어 올렸지?

 

숙련된 조교로 부터 떡 자르는 시범이 있겠습니다

 

손님들에게 나누어 드릴 떡을 컵에 담고 있습니다.

 

사이좋게 나누어 드십시요

 

구석 구석까지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무리 맛있어도 천천히 드세요.



-이 사람-



마음의 상처를 북장단에 날리는 최덕화씨


정선시장에서 품바로 신명을 풀어내는 최덕화(63세)씨는 홀아비다.
역마살이 낀 그의 팔자는 30여 년 전, 가족과 헤어지며 떠돌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아들 둘이 장성하여 가끔 연락은 한다지만, 이산가족 신세일 뿐이다.

평택이 고향인 그는 전국의 장터를 떠돌다, 6년 전 정선에 안착했다.
지금은 정선을 거점으로 대화 등의 변두리 장에 원정을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신명 푸는 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시장 상인공연단의 일원으로 사물놀이 팀에 합류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나서다 보면, 그의 본업인 엿 장사는 잠시 접어야 하지만,
장사보다 신명을 풀어내는 시간이 훨씬 더 즐거운 것을 어쩌랴.
엿을 팔아 한 달에 150만원정도 번다지만, 돈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라 항상 빈털터리다.
장돌뱅이 아니 품바생활 15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북, 장구 등의 악기들과 신명뿐이다.

그러나 보람은 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가위질까지하는 일인다역의 광대놀음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의 신명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관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백발을 휘날리며 열광적으로 북에 몰입할 때는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얼~ 시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로 시작되는 품바들의 각설이타령은
들을 수 없지만, 그의 신바람 난 북장단이 정선아리랑시장을 흥건히 적신다.

지난 일들을 잊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북장단에 몰입하겠지만,
하루를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그 허전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거냐?
어차피 부초처럼 떠돌고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정선아리랑시장의 볼거리가 또 하나 늘었습니다.
바로 시장협동조합원으로 구성한, 상인 공연단이 불러주는 '정선아리랑'입니다.

기존 팀들이 불렀던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는 꾀꼬리처럼 감미롭긴 하지만 감정이 제대로 묻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이 구성한 상인공연단의 '정선아리랑'은 가사에서 드러나는 정선사람들의 한과 애환이 서린, 그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공연의 속성상 남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한 한계에 부딪치지만, 이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마치 삶의 현장에서 일하다 부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5월18일에 있었던 주말장 공연에 나온 사회자가 공연단이 결성 된지 오래지 않았다지만, 오래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오래되면 관성이 붙어, 매번 감정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안정자씨와 김갑순씨의 한 맺힌 노래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맛이고 최고 가치입니다. 상인공연단의 성공적인 출범을 축하드리며, 부디 초심을 잃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상인공연단 명단
안정자, 김갑순, 맹경숙, 최숙녀, 신옥화, 신애선, 안선자, 정정식, 유돈학, 변의애

 

 

 

 

 

 

 

 

 

 

 

 

 

 

 

 

 

 

 

 

 

 

 

 

 

 

 

경북 군위군 의흥면은 한 때 군소재지로서 우보, 산성, 고로, 의흥 등 4개면에서 모여드는 군위 동부권의 중심축인 장이었다.

1919년에는 3. 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힘입어 우보면에서 짚신을 만들던 70세노인 조성우옹이 의흥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꾼들의 궐기를 꾀하다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번성했던 의흥장의 명성도 이제 옛말이 된지 오래고, 한가로운 장터에는 장꾼들과 노인 몇몇이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자체에서 퇴락해가는 의흥장을 살리려고 2008년 새 장옥까지 지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사람이 없는데, 장옥 짓는다고 없는 사람이 생길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의흥장터의 명물인 병팔이네 소머리국밥은 아직도 그 맛을 지키고 있다.
대를 이어 장사한다는 박세훈(54세)씨는 장이 서기 전날 밤부터 소뼈를 우려낸다고 한다.

그 구수한 진국 맛을 보려고 장날이면 장보러 오기보다 소머리국밥 먹으러 나온 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장작을 미처 준비 못했는지 공사장에서 나온 폐자재들로 불을 지펴 장터주변이 온통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5일과 10일에 서는 의흥장은 마늘과 양파가 많이 나온다.

혹시 지나치는 길에 날자가 맞으면 병팔이네 소머리국밥을 꼭 맛보시길...


사진,글 / 조문호

 

 

 

 

 

 

 

 


 

                                         구한말 동래읍내장이 사람들로 가득찬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1682년 조선정부 '감동창' 설립
- 세곡 보관해 물류 집산지 되고
- 육해로 수송 유리 조건 힘입어
- 상인과 배 몰려오며 시장 발달

- 배고픈 각설이들도 기웃기웃
- 타령으로 흥겨움 만들면
- 상인들 곡물 한 움큼 주거나
- 구포국수 한 그릇 말아줘

- 1932년 강변서 現 장소 이전
- 야시장 개설로 큰 장터 발전
- 이윤 안따지고 주는 덤 등
- 훈훈한 인심 아직도 남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구포시장

부산에는 시장이 '천지삐까리'다. 비릿한 내음이 물씬한 자갈치시장부터 새로운 밤의 명소로 떠오른 부평시장까지 부산은 시장의 바다다. 요새 화두가 전통시장이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마트에 맞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운동이 부산에서도 한창이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단지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경제적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사회적 장소이자 놀이와 예술이 펼쳐지는 문화적 장터였다. 이는 전통시장이 거대 자본의 밀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반드시 되새김해야 할 교훈이다. 아울러 소비자를 위해 전통시장의 현대적 변용과 젊은 감각을 갖추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져 본보기가 될 만한 장터이다.

■각설이 장타령에 실린 구포장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진 장터다.
오랫동안 구포에서는 오일장이 열렸다. 닷새에 한 번씩, 즉 3일과 8일에 열리는 구포장을 찾는 사람은 장돌뱅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바가지와 숟가락을 들고 구포장에 온 그들은 바로 부산의 각설이다. 각설이는 '거지' 혹은 '동냥아치'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예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동냥하면서도 각설이 타령을 불러 시장을 흥겹게 할 수 있었다. '각설이 떼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속담은 각설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면서도 각설이의 정체성이 장타령에 있음을 일러준다.

장타령은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나 잘한다"로 시작하는 각설이 타령 중의 일부이다. 이 장타령에는 내로라하는 부산의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각설이가 부른 장타령에는 부산 오일장의 특징이 잘 담겨있다.

"샛바람 반지 하단장 엉덩이가 시러버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오고,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부산의 여러 시장 중에서 구포장이 최고였는지 끝은 이렇게 맺는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품 각설아 이장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각설이들

시장에 못 오고 못 본다는 각설이의 타령은 믿을 게 못 되는 역설이다. 언제나 오일장과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게 그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장타령에는 부산 각설이들이 찾아가는 시장의 노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엉덩이가 시리도록 바람 찬 하단장을 거쳐, 행상과 좌판으로 뒤범벅된 복잡한 부산장을 통과했다. 부산장에서 구포까지 제법 먼 길이므로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짐 때문에 허리도 아팠지만, 구포장을 놓칠 수 없었다. 다시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장에 가는 노정은 험하디험한 길로 팍팍한 발병쯤은 견뎌야 했다.

이처럼 각설이들이 유명한 시장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오일장 체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지방의 향시(鄕市)가 오일 간격으로 서지 않았다. 중기 이후로 장시가 많이 늘어나면서 서로 개시 일자가 겹치지 않도록 오일 주기를 갖게 되었고, 서로 30~40리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시장이 1000곳까지 늘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 오일장 체계가 잡혔다.

부산 지역에서는 동래 읍내장을 비롯해 부산장, 구포장, 하단장, 좌수영장, 독지장 등이 대표적 오일장으로 자리 잡았다. 오일장을 따라 움직이는 보부상들의 상업 관행과 각설이들의 걸립 풍속도 이렇게 생겨났다.

■구포는 포구다

구포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구포 나루터에는 물건을 선적한 상인들의 배들이 모여들었다. 그 시절,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가 돛단배에 실려 구포 나루터까지 흘러왔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조선시대 구포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1682년 조선 정부가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창고를 구포에 세우자 이곳은 곧 물류를 집산하는 근거지가 됐다. 이 창고를 '감동창(甘東倉)' 혹은 '남창(南倉)'이라 했다. 혹은 전세(田稅), 대동미, 군포 등 세 가지 조세를 징수하는 곳이라 하여 '삼세조창'이라 불렀다. 조선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영과 수영, 각 진포(鎭浦)의 사포량(射砲糧)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사포량은 수군 진영에서 근무하는 사수와 포수에게 나눠주는 식량이다. 감동창에 모인 세곡은 경상도 해안가의 수군에게 지급되는 봉급으로 주로 쓰였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구포는 양산과 동래, 김해에 이르는 교통의 결절점이자 남해로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수운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 감동창을 세웠다. 창고가 들어서고 뱃길이 열리자 구포에는 상인과 배들이 몰려들었으며, 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구포장터, 구시장에서 신시장으로

조선시대 구포장터는 바로 남창 주변 강변에서 시작돼 안쪽 동네의 큰 마당과 골목까지 이어졌다. 강변에는 생선전과 젓갈전이 있었고, 안쪽에는 짚신전, 포목전, 잡화전을 비롯해 우시장이 있었다. 이 장터에서는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구포장터는 현재 덕천역 건너편으로 옮겨왔다. 당시 구포 면장이던 장익원이 저습지를 매립한 뒤 공설시장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장터의 이전으로 명암이 엇갈렸다. 구시장 부근 상권은 몰락했고, 평당 20원씩 하던 땅값이 1원 밑으로 폭락했다. 신시장 일대 땅값은 수십 배 폭등했다.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시장번영회를 조직하고 시장 발전을 모색했다. 이때 신시장 홍보 이벤트가 야시장 개장이다. 1934년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경부선 선로 부근에서 장터까지 70여 개 전기등을 설치하고 야시장을 개설해 손님을 끌어모았다. 구포 신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40여 년이 지난 1972년, 구포시장 상인들은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을 취급하는 곡물구 등 2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점포 수는 100여 개였다.

현재 구포시장은 750여 개 점포가 있으며, 오일 장날에는 1500여 개로 늘어난다. 하루 5만여 명의 손님이 찾는다.

■삶의 희망을 주는 구포장터




어려운 일에 부딪혀 절망할 때면 장날에 맞춰 구포시장에 가보라. 구포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많은 물건 속에서 삶의 희망도 행복도 찾을 수 있다. 구포시장은 잡화, 야채, 과일, 생선을 파는 구포시장길 외에도 약초거리, 야채거리, 패션거리, 묵자거리, 가축거리 등 10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다. 이 거리마다 취급하는 상품이 다르다.

구포장터에서는 흥정과 덤도 볼 수 있다. 상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한편으로 이윤을 따지지 않고 모른 척 얹어주는 덤도 있다. 장터의 훈훈한 인심은 팍팍하고 어려운 삶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배고픈 각설이들이 구포시장을 비롯해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이유이다. '일자나 한자나 들구나 보니' 하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곡물 한 움큼을 주는 싸전 상인도, 구포국수 한 그릇을 말아주는 국숫집 주인도 있었다. 이 뜨거운 정은 부산의 장터를 다시 찾게 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1970년대의 탄광활황기엔 정선아리랑시장 만큼이나 문전성시를 이루던 철암장,

지금은 텅 빈 장옥에 단했던 삶의 흔적만 저탄장의 석탄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지난 10일, 강원도 오일장에서 유일하게 기록하지 못한 태백 철암장을 찾았다.

철암 천과 철암역을 끼고 있는 난장에는 장돌뱅이들이 펼친 천막 사이 사이로 

몇 명의 할머니들이 푸성귀와 어물을 팔고 있을 뿐,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철암장은 과거의 영화만 무성했고 앞으로의 대책은 막막했다.

삼방마을에서 내려다 본 철암장터와 판자집들, 철암천 좌측이 장터이고 윗쪽으로 저탄장도 보인다.

철암장을 찾아 나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

 

 

 

 

 

 

 

 

 

 

 

장옥 건너편 철로변으로 자리잡은 검은 선탄장에서는 탄가루를 잠 재우느라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맞은 편 산 중턱에는 판자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는데,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이란다.

삼척MBC에서 정영신씨 취재 나온 황지웅PD와 함께 삼방동을 찾아 나섰다.

 

마치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였다.

닭장처럼 붙은 판잣집 담벼락에 그린 벽화들은 통영 동피랑 마을을 연상케 하지만,

광부들이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과거로의 여행이 재밋다.

 

 

이 삼방동 마을은 서양화가 허강일(40세)씨의 고집어린 집념이 지켜낸 산물이다.

삼방동 촌장이나 다름없는 허씨를 만나 삼방동과 어린 시절의 철암장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태백황지고와 강릉대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도시재생사업에 관심을 가져 광산촌의 옛 추억을 담은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울한 폐광 마을에 활기찬 웃음을 그리며 고향마을 보존을 위해 열심이지만,

태백탄광역사촌을 조성하는 관료들의 생각이 허씨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삼방마을에서 내려다 본 선탄장 풍경

 

장터에서 올려다 본 고즈넉한 삼방마을 풍경

아직까지 삼방마을에는 연탄이 공급되고 있다.

철암시장 취재에 나선 삼척MBC 황지웅PD가 삼방마을을 오르고 있다.

 

삼방마을 지킴이인 허강일씨가 여러가지 문제점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선탄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겠다는 정영신씨

 

얼마나 지붕이 낮은지, 평상에서도 지붕에 오를 수 있겠다.

 

도처에 널린 폐가들을 보수하여 예술가들 작업장으로 제공하면 어떨까?

 

 

 

 

 

이 건물들이 까치발 건물이다.

 

 

광산촌 철암동의 호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는 석탄이 없었다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지금의 태백시 인구가 5만명이 채 못되지만,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고 한다.

대개 탄광촌에 발 들인 사람을 '막장 인생'이라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도시에서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이었던 '대구관'의 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광부에게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에 비견될 만큼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보존한다고 했다.

 

철암동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태백광산역사체험촌' 조성 사업은 1980대 말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폐허가 된 철암역 일대를 역사 속의 탄광마을로 재탄생시키는 사업이다.

태백시는 철암동을 그 옛날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지역으로 재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철암역 선탄장은 '살아 있는 석탄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등록문화재 21호로 지정돼 있다.

까치발 건물은 또 석탄 산업이 호황을 이루던 시절에 철암 시내의 번화했던 거리 모습이 어땠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이 건물들이 개발이 되고 나면, 철암역 일대도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광부들이 살았던 삼방마을이 제외되어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석탄산업에 찬바람이 몰아친 1989년부터 사람들은 떠나고 외지인의 발길마저 끊겼지만

지난해 백두대간 협곡 관광열차가 운행되면서 방문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 주인들은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호남수퍼 등 최근까지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오랜 추억을 되세기게 하는 과거로의 아날로그 여행을 한 번 떠나 보심이 어떨지...

 

 

 

완도 고금장은 너무 초라했다.
겨우 장꾼 두 사람이 나와 간신히 장터의 명맥만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 전국 오일장에서 가장 작은 장으로 손꼽힐 만한 곳이었다.
장터라기보다 오히려 마을 구멍가게가 문을 열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고금장을 찾은 날이 정월대보름장인데도 장을 찾는 사람들은 없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 듯한 넓은 장터에는 인근에 사시는 할머니 네 사람이 나와
무료한 장꾼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고금도 안내

 

고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의 중심인 섬으로 북위 34° 12′, 동경 126° 45′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강진만(康津灣)이 있고, 서쪽과 남쪽, 동남쪽에는 각각 완도・신지도・약산도[조약도]가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43.66㎢이고, 해안선 길이는 62.5㎞이다.
 
원래 고이도(古爾島)라고 불렸는데 점차 변하여 고이도(古你島)가 되었다. 그 뒤 고금도(古金島)로 바뀌어 불렸다가 고금도(古今島)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 고구마가 이곳에서 재배되고서 육지로 전래되었다고 하여 ‘고금도에서 나온 마’라는 뜻으로 ‘고구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섬의 북서쪽에는 덕암산(德巖山; 해발 246m)과 봉황산(鳳凰山; 해발 216m) 등의 산지가 있고, 남쪽에는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분포하며, 동쪽은 해안을 따라 개펄이 발달하였다. 서쪽의 회룡리 일대에도 비교적 넓은 간척지가 형성되어 있다. 덕암산 동쪽 경사면에서 발원한 청룡천(靑龍川)은 동쪽으로 흘러 해안에 이르는데 주변에는 평야와 함께 마을이 들어서 있다. 남쪽 해안 주변을 비롯하여 동북쪽와 서남쪽에도 간척 사업으로 조성된 넓은 평야가 있다. 연평균 기온은 14.3℃이고, 1월 평균 기온은 1.9℃이며, 8월 평균 기온은 25.1℃이다. 연강수량 1,282㎜로 팽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다.
 
고금도에는 1384년(우왕 10) 봉성리[독바위]에 천씨(千氏)가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덕동리에 고금진(古今鎭)이 설치되면서 강진군(康津郡)에 속하였고, 1896년에 완도 주변의 섬을 합하여 완도군(莞島郡)이 설치되었을 때, 고금도와 약산도의 사이에 위치한 덕동리에 소재지를 두면서 완도군에 속하였다. 1946년 약산도의 약산면(藥山面)을 분할하고서 농상리에 고금면 소재지를 두어 오늘에 이른다. 2007년 6월 29일에 강진군 마량면(馬良面)과 고금도를 연결하는 길이 760m의 고금∼마량 연륙교가 완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쪽으로는 약산면・금일읍(金日邑)・생일면(生日面)을 잇고, 남쪽으로는 신지면(薪智面)・완도읍(莞島邑)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마량면과 강진읍(康津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하였다.
 
2009년 현재 2,196세대 4,541명(남자 2,153명, 여자 2,388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주로 마량면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를 따라 분포하며, 면 소재지인 농상리에도 집중 분포한다. 토지 현황은 논 6.78㎢, 밭 9.32㎢, 임야 25.43㎢이다. 농산물은 주로 쌀・보리・콩・감자・유자 등이 생산되고, 유자・치자・김・미역 등은 특산물로 유명하다. 섬 주변의 어장은 산란장으로 적당한데 제주 난류의 북상에 따라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며, 굴・김・미역・전복 양식도 활발하다.
 
문화재로는 덕동리에 조개무지, 가교리에 돌로 쌓은 성터, 청룡리에 도요지와 고인돌 등이 있으며, 사찰로는 덕동리에 옥천사(玉泉寺)가 있다. 약산도 사이에는 약산 연도교가 놓여 두 섬 간의 교통과 수산물 유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섬 남쪽의 상정 선착장에는 신지도의 신지면으로 연결되는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고금초등학교, 고금중학교, 고금고등학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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