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김동리 소설 '역마(驛馬)' 중)

 


화개장터는 소설 '역마'의 주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조영남씨의 노래 '화계장터'가 인기를 끌며 더욱 유명해 졌다.

일단은 관광지나 장터는 유명해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부터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간 것이다.

갈 때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오래전의 화계장터 흔적들은 찾을 수 없었다.

장 모퉁이 한 쪽에 적혀 있는 다산 정약용의 '화계장' 시가 

옛날을 추억하게 할 뿐이다.


 
 

 

             

               화계장


          -다산 정약용-


조랑말 고개 늘여 골짜기 벗어나니,
나룻배 뜬 강에 봄물이 푸르구나.

따사로운 백사장에 이제 막 장이서니,
부엌마다 연기나고 술고기 벌려있네.

언덕엔 소와 말이 서로 얼려 희롱하고,
포구엔 돛배들이 엮은 듯이 총총하네,

송경. 중국비단이 거쳐서 들어오고,
울릉. 탐라의 생선도 이 곳으로 수입되네.

오고 가는 이 발길들 모두다 이익 때문,
그 누가 이를 말려 장사잇속 막을 손가.

돌아보니 지리산이 구름 속에 잠겨있고,
청학은 높이 날아 쫓아가기 어렵구나.



 

 

경남 하동장은 작년에 들려 일정에도 없는 코스였으나 네비게이션 조작 실수로 가게 되었다.

고금장을 떠나며 무주 설전면사무소로 찍었으나 난데없는 남해 설전면사무소가 찍혀 안내된 것이다.

두 시간 넘게 엉뚱한 길로 달리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과오도 있지만, 인간이 기계의 속물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분 나빴다.

없는 돈에 기름 값과 통행료 날린 속상함도 한몫해 괜히 옆 자석의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리고 하동장에 내리며 아내에게 한 말은,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웃겼다.

“본전 찾아야 하니 좋은 사진 찍기 전에는 갈 생각 말아라“

이미 파장이 된 장터에는 할머니들만 띄엄띄엄 지키고 있어 골목과 외진 구석들을 찾아 다녔다.
어느 한 골목을 들어서니 일전에는 본 적이 없는 개인 장옥 한 동이 눈에 띄었는데,
고색창연한 외양이 일단은 눈길을 끌었다.
창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아주머니 혼자 운영하는 뻥튀기집이었다.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진인들과 기자들한테 시달렸으면 사진쟁이 둘이나 침입했으나

미소로 반길 뿐이었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촬영해도 하던 일만 반복할 뿐이었다.

일하며서 간간이 묻는 말에 답은 했으나 이름과 나이 등의 인적사항은 노코멘트였다.
그 자리에서 4-50년을 장사했다는데, 집 구조나 집기들은 오랜 연륜을 보였지만
주인이 너무 젊어 보여 좀 믿기지 않았다.

붉은 백열등 불빛을 받은 뻥튀기 기계 두 대가 연이어 터져댔다.
재료에 따라 가열시간이 다른데도 쉼 없이 해내는 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여태껏 장터에 따라붙는 다양한 뻥튀기 행상들을 봤지만 이런 가게는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주로 난전에서 튀겼으나 지금은 대부분 차를 개조해 포터 위에서 튀긴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내키지 않아 그냥 지나쳐 왔던 터다.
그런데 이곳은 난전도 아닌 판자집 안인데다, 아주머니 혼자 억척스럽게 일해 구미가 당겼다.

판자집 구조도 뻥튀기 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문이라고는 입구문과 조그만 창 하나가 전부였으나, 터질 때마다 김이 쉽게 빠져 나갔다.

이름 없는 뻥튀기 집이지만 오래된 추억들과 함께 그 곳 사람들의 구수한 인정까지 골고루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밤을 튀겨 가는 한 아낙은 밤 세알을 내 손에 살짝 쥐어 주었고, 주인 아낙은 튀긴 메밀을 맛보라며 내놓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장마당의 인정이다.
그 집을 나오며 아내에게 말했다.

“본전 찾았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지난2월11일 전라북도 완주의 운주장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곳은 곶감으로 유명한 마을이지만 장터에 사람들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장꾼 몇 명이 모닥불을 쬐다 낯선 사람들의 출현에 관심을 보였다.
내 나이 또래 쯤 돼 보이는 박모씨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라?”
“서울서 왔심더”
“에이 공갈치지 말아요. 촌사람 같은데....”
“서울서 왔지만, 주소지는 정선이고요”
“그럼 그렇지! 서울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내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시골 노인 행색인데다,
신발마저 시골사람들이 신는 두툼한 장화였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게다.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저 사진 찍는 여자는 누구여?”
“내 마누라요”
“또 공갈치네! 딸 같은데..”
“진짜요. 나이가 내 보다 어려서 그렇지...”
“아따 아제 재주도 좋소이, 돈은 좀 있는가베?”
“한 푼 없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한지가 오래됐소.”
"에이~"
 신용불량자란 말도 거짓으로 들렸는지 고개를 흔들며 또 물었다.  

 

“운주장은 왜 찍는 당가?”
“운주 뿐 아니라 전국장터를 다 찍으러 댕기요”
“거기 드는 돈은 어디서 나는디, 나랏돈이여?”
빚내서 돌아다닌다면 또 믿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엔 거짓말을 했다.
“나라에서 큰 돈 받아, 새마누라까지 얻었지요”
좀 부러워하는 걸 보니 진짜 거짓말은 믿는 눈치였다.

진실은 거짓말로 들리고, 거짓말이 사실로 들리는 요지경 세상이다
불신이 만연한 세상 탓인가? 아니면 내 꼬락서니 탓인가? 




전국 면소재지에 남아있는 시골장들이 이제 존폐 위기에 처해있다.
군 단위의 읍소재지 장들은 살아남겠지만, 그외 시골 장들은 오래동안

장터를 지켜왔던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곧 사라질 장들이다.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없는데다, 교통수단마저 편리해져 좀 멀어도 읍소재지 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산물들을 농협에서 공동 수매하고,

장터마다 농협 하나로마트가 지키고 있으니 장의 필요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다. 
지자체에서 쓸데없는 장옥이나 지어 준다고 해서 살아 날 장은 별로 없다.


 

몇 일전 들린 완도의 노화장은 읍 소재지 장인데도 전형적인 시골장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노화도 바닷가 빈터에 근사한 장옥까지 만들어 주며, 할머니들을 내 보내려하지만 모두들 가지 않는다고 한다.

상권과는 거리가 먼 외곽에 장터를 만들었으니, 손님들이 없는 곳에 갈 리가 만무하다.

차라리 거대한 농협 하나로마트 옆에 빌붙어 뜨내기손님이라도 잡겠다는 식이다.
노화농협에 근무하는 김민경(55세)씨는 "아무리 쫓아도 가지 않아, 다시 쫓아 낼 것이라" 말했다.

외진 바닷가에 새로 만들어 놓은 노화장터는 외관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장터 할머니들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실패작으로 보였다.

할머니들은 근사한 장옥보다 골목 어귀에 옹기종기 모여 장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

티나지 않고, 실속있는...

 

이제 지자체들은 장옥 짓는 토목공사에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지역 토산물들을 할머니들이 직접 팔 수 있는 '할머니난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액수는 미미하다.

돈도 돈이지만 하닐없이 경노당을 오 가는 것보다 정들었던 장터에서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냥 비 바람만 피할 수 있는 곳에 닷새마다 잔치마당을 마련해 주면 된다.

 

농협도 시골장터의 급속한 폐장에 일조한데 따른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장터문화를 제대로 보존시키는데 적극 기여해야 할것이다.

 

 

 

보길교 위에서 내려다 본 노화읍, 전면에 있는 공터가 새로 조성된 장터다

 

장 날이지만 장터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노화농협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

 

농협 하나로마트의 상품광고가 대조적이다.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이용했던 장터 골목이었으나 지금은 사람 왕래조차 끊겼다.

 

 

전국 장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도 이제 막바지에 달해 잠시 열렸다 사라지는 오지나 드나들기 불편한 섬들만 남았다.

지난 11일 완주 운주장과 장성 사거리장을 촬영한 후, 노화장으로 가기 위해 완도로 향했다.

이 곳은 작년에도 선착장까지 간 적이 있으나 배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완도 읍내 여관에 여장을 풀고, 노화도 가는 첫 배를 타기 위해 새벽잠을 설쳐야 했다.

이틑날 오전 6시 30분 무렵 화흥포항에 도착했다. 노화가 있는 동천항까지는 약 30분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지만 차와 사람을 실어주는 도선료가 왕복 오만원이라 좀 부담스러웠다.

 

이른 아침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서서히 수평선 위로 타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웅크려 있을 수만 없었다.

일출은 매일 떠오르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반복되는 그냥 그림같은 풍경일 뿐이다.

평소 사진적 가치로만 따져 별로 반기지 않았으나 배 위에서 맞이하는 감회는 좀 달랐다.

그리고 오랜 세월 장돌뱅이들이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일출을 맞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해를 보고 소망하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고,

그 날 하루의 행운을 점치지 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노화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짝 들떠 있는 사이 배는 동천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10여분을 달려서야 장터가 있는 노화읍내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장돌뱅이는 한사람도 없었고,

이 지역의 할머니들만 나와 있었다. 하기야 그 비싼 도선료 물어가며 장사하러 올 사람은 없었을 게다.

이 곳 원주민 할머니들만 농협 하나로마트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직접 재배한 농작물이나

수산물들을 팔고 있었는데, 오히려 다른 장보다는 소박한 장터였다.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사라지게 될 시골장터의 전형이지만...

 

노화장 오가는 뱃길과 보길도에서 만난 풍경사진들을 올린다. 

 

 

 

 

 

 

 

 

바다위에 떠있는 것들이 전복양식장이다.

 

깨돌 사장으로 유명한 해수욕장

 

 

 

 

 

 

 

 

 

노화도와 보길도를 이어주는 보길교

 

2014년 1월12일  강원도 강릉장

 

 

 

 

 

 

 

 

 

 


“장 살린다고 지랄해도 이미 끝났어! 사람이 있어야제..”

지난 달, 설 대목장 촬영 길의 단양 영춘장에서 만난 장돌뱅이가 뱉은 말이다.
사실, 면소재지 장들은 곧 사라질 수밖에 없다.
몇 안 되는 노인들마저 점차 쇠진해가니 장을 지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모두 군단위의 읍소재지 장에 통폐합되거나, 면소재지 상권은 하나로마트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작업하는 동안 하나 둘 사라지는 시골장과 변해가는 풍정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전통시장에 관심을 가져 그곳에 카메라 초점을 맞춘지가 아내는 29년차, 나는 10년차지만, 

잘 알려진 장들만 찾아다녔던 한계가 늘 마음에 걸렸다.  

5년전, 600여개로 파악된 우리나라의 오일장을  모두 기록하자는 나의 무모한 제안에

아내가 흔쾌히 동의함으로 본격적인 장돌뱅이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촬영경비 마련이 가장 힘들었지만, 무리한 강행군으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가도 가도 못가 본 장터들이 더 많았으나 이제사 서서히 장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짜여 진 일정대로라면 3월 9일경 끝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국 장터를  돌아 본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사 장에 대해 뭔가를 알겠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시각적 언어가 자리를 잡아간다는 것이다.

이제 찍어 둔 각자의 원고들을 분류, 정리하며 눈여겨 보아 두었던 장을 찾아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면  

올 년말 쯤이면 서로 다른 사진집으로 엮여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또순이처럼 억척스럽게 해 낸, 아내의 덕이다.

그 많은 주변의 원망까지 뒤집어 써가며, 혼자 경비 조달하느라 마음 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모두들, 빈털털이 주제에 빚내어 돌아다니는 우리 내외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대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미치면 한 사람은 말리는 것이 정상인데, 둘 다 미쳤으니 어쩌겠는가...

남은 빚은 정선 집이라도 팔아 갚으면 되고, 사는데 까지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아내와 장돌뱅이처럼 떠 돈 시간들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난 대목장을 떠돌 때, 내 카메라에 잡힌 아내 정영신의 모습이다.]

 

        2014.1.14 충남 공주, 유구장에서

 

2014.1,19 전북 김제, 원평장에서

 

2014.1.28 강원도 인제, 신남장에서



-이 사람-

 

"장터에 인생을 건 이윤광씨"

 

 

 

 

사람이 살면서 한 곳에 꽂혀 이 것 저 것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인생을 거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학자나 예술인, 체육인들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데, 대개 각 지향점의 가치나 경제력을 포함한 주변 여건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어지기도 한다.  정선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회장 이윤광(54세)씨가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타고 난 장사꾼이다.
정선시장에서 장사 했던 부친(이석도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장돌뱅이들과 함께 자랐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다른 지방에서 물건을 구해 와 장사를 하기도 했고, 대학 가는 대신 중고화물차를 사달래서는 그 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남보다 일찍 세파에 부딪혔다. 대를 이어 장꾼으로 나선 그는 타고 난 부지런함에다 세상 잇속을 일찍 알아차려 재물도 꽤 모았다. 20대 후반부터 방범대장, 청년회장, 상인회 번영회장 등을 지내며 정선에 대한 애향심을 키워왔는데, 정선이 처한 현실과 다른 지역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정선아리랑시장이 나아가야 할 나름의 비전도 갖게 되었다 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 없이 일어 설 수 있는 자립형 시장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구매로 원가를 절감하거나 자체 개발상품으로 수익을 증대하는 등 시장살림살이에 푹 빠져 산다. 그리고 농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협업형 시장을 만드는 일이나 정선특산물을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진품(眞品)만을 위해, 그 감시하는 일만도 바쁘다. 지난 정선아리랑축제의 길놀이에서는 상인들로 구성한 보부상단을 만들었는데, 친근감과 더불어 다양한 재미를 이끌어내어 관람객들의 인기를 끌기도했다. 그의 기획력이나 추진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한 사례였는데, 보부상단의 엿장수로 분한 그의 광대적 연기력도 만만찮았다. 

 

이윤광씨는 협동조합 사무실이 아니면 늘 시장과 공연장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제 정선아리랑시장이 전국에서 성공한 시장으로 자리 잡아 이사장으로서 폼도 좀 잡을 만 하지만, 항상 작업복차림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시장에 공연이 있을 땐 직접 나서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문제점들을 파악하기도 한다.

“진짜만 살아남습니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주인이 먼저 변해야 한다며 상인들을 설득하고 함께 걱정해 주며, 상인들의 단합에도 지대한 공을 들인다. 그러한 친화력은 상인대학, 워크샵 등에 눈코 뜰 사이없이 바쁜 장사꾼들을 두 시간 동안이나 모이게 할 수 있는데서도 잘 드러났다.

정선시장에 있는 이윤광씨 과일가게는 늘 아내인 김금희(54세)가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은 내 놓은 사람이래요”라는 아내 김금희씨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몸 바치는 헌신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도 큰 고민이 하나 있다.
날로 늘어나는 관광객들을 수용하려면 시장을 늘리거나 별도의 할머니 난장을 마련해야 할 텐데, 상인들의 권익에 우선해야 하는 이사장 입장으로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선시장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중요한 문제점이기에 꼭 해내야 할 일이기도하다. 이대로는 정선시장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으며 성공한 오늘의 현실도 하나의 일장춘몽에 불과할지 모른다. 묘안을 찿아내 상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설득시켜야 하기에, 모두들 힘을 모아 그를 도와주어야한다. 

우리 모두 “정선아리랑시장의 미래와 이윤광씨의 헌신적인 외길 인생에 대하여 건배!”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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