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람들은 대개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많은 분들에게 여쭈어보았으나, 추정한 나이보다 훨씬 젊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빨리 늙어 버렸다.
삶 자체가 힘들고 고달프니, 몸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일 게다.






지난 4일 동자동의 ‘식도락’에 갔더니, 이인자할머니가 식사를 하고 계셨다.
허미라씨가 마주앉아 이 것 저 것 물어보고 있었는데,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오실 때 짚고 온 워커를 김호태, 우건일씨가 수선하는 것으로 보아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사랑방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셨다.
연세가 아흔은 되어 보였지만, 이제 일흔이란다.
나와 동갑내기인데, 어쩌다 이처럼 폭삭 늙어 버렸을까?
당뇨에다 관절까지 망가져 혼자 살기가 힘든 것 같았다.
아들은 죽고 딸이 하나 있지만, 7년 전부터 동자동에서 혼자 사신다고 했다.






하기야! 내 몰골도 크게 나을 바 없지만, 몸 쓰는 대는 지장 없으니 다행이다 싶다.


이제 6학년에 불과한 유한수씨는 골목 구석에 앉아 혼자 깡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금주령이 내려 진 상태라고 한다.
마침 우건일씨에게 적발되어 남은 술병을 빼앗겨야 했는데,
아쉬운 듯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니 ‘식도락’으로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식도락’에서 두 번째로 마련한 노란리본 공작소를 찾은 것이다.
주민들이 세월호 리본을 만드는 것은 그 끔찍한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웃끼리 오손도손 둘러앉아 세월호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누기도 하고
인양된 선박에서 실종자 찾기를 염원하며 리본을 만들었다.


 




힘든 이웃을 돕고 서로 정 나누며 사는 ‘동자동사랑방’은
각박한 서울 한 복판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마지막 달동네다.
돈으로 망가진 인간성회복을 위한 ‘희망공작소’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사랑방 ‘식도락’은 알콩 달콩, 콩 볶는 사랑 솥이다.

밥 때만 되면 반가운 분들이 웃음 물고 나오신다. 말 없는 표정 속엔 따뜻한 정으로 진득하다.


다들 콩 볶는 재주가 없어 밥만 드시지만, 재주도 없으며 손 발 걷어 부치는 사람이 있다.

달마승 처럼 눈꼬리가 휘어진 김정호님이다. 썰렁한 우스게지만, 정감이 잔득 묻어난다.

난순 주모께 감놔라 콩놔라 하는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콩 볶는 재주라면 재주다.

‘식도락’ 구석에 큼직한 화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직 덜 된 그림이지만, 한 번 봐달란다.

스케치에 그친 미완성이지만 자랑할 만 한데, 그려보지 않은 초짜 그림치고는 괜찮아 보였다.

말하려는 내용이나 화면 구도가 꽉 짜여있었다. 한 그루의 고목은 동자동 사랑방 가족을 의미했다.

그는 부지런하기도 하다. 이웃 선반 짜주는 일에서 부터 못하는 게 없다.

그 날도 버려진 고물 핸드폰을 장사치에게 팔아넘겨, 사랑방조합에 건네주었다.

사무실 폐품 정리하는 박정아님을 도와주다 우건일님이 호두과자 한 상자를 내놓으니,

몇 알 챙겨들고는 쏜살같이 ‘식도락’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계신 분들을 먹이기 위해서다.

몇 일전 퇴원하신 김원호님이 뒤늦게 ‘식도락’에 나오셨다.

아직 몸이 불편해 애기 밥처럼 조그만 공기에 담아 드시어, 다들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약 챙겨 드리는 허미라님의 손길이 따스하게 전해졌다.

그러다 이웃에 짐 내려야 한다는 우건일님 전갈에 우루루 몰려갔다. 이게 동자동사랑방의 사랑법이다.

콩 볶는 구수한 냄새가 동자동 골목에 진동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간 심한 감기증세로 꼼짝않고 방에서만 지냈다.
일단 사진을 찍지 않으니, 일 할 게 없어 편했다.
컴퓨터도 켜지 않은 채, 들어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천장에 붙여 둔 천상병선생의 윙크하는 사진이 위안했으나,
점점 고립감이 엄습해 온다. 죽음에 대한 연습인가?

쪽방은 방문을 닫으면 옆방에 사람이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철저한 고립만 남는다.

그렇지만 그 고립을 은근히 즐겨온 게 사실인데, 몸이 아프니 도리가 없다.
엊저녁엔 장경호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찾아 와 병원가자고 난리를 피웠지만,

그마저 귀찮은 것이다. 사람이 싫어지면, 사진도 찍을 필요가 없고,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 봄이 올 때까지 한 번 기다려보자.

곧 입춘이니, 광화문광장에서 한 판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이틀 만에 밥을 먹기 위해, ‘식도락’으로 내려갔다.
그마저 늦은 시간이라, 밥은 일인분만 남아 있었다.
발알 하나 남기지 않고 밥솥을 비웠으나,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입맛이 없어 살기위해 먹는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지더라.

아마, 나 혼자 먹었더라면, 밥 숱 가락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렵게 남을 돕는 공간이라 밥 한 톨 남길 수 없었다.
다 먹은 후, 맛있게 먹었다는 난에 스티커를 한 장 붙였다.
허미라씨가 매일 오후1시부터 주민들과 정 나누는 티타임을 갖는단다.
허마담이 타주는 다방커피가 그리웠으나, 커피만 안 된다니 정이나 나눠야지...

내가 모르는 '서울역쪽방촌상담소'에 대해, 최남선씨에게 많은 것을 물어 보았다.
쪽방촌상담소는 관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단체에 하청을 주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겨 김정호씨 에게도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사랑방조합’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단다.

관의 도움이나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게 위해서다.

 

줄 세우는 거지취급도 싫다지만, 그건 주민들이 바꾸어 가야 할 일이다.
피난민들을 위해 한국전쟁 때나 있었던, 줄 세우는 짓은 이제 끝내야 한다.
주민들에게 지급하는 물품도 날자를 정해, 시간 나는 데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고,
소량의 후원 물품도 돌아가며 나누는 방법으로 바꾸면 된다.
빈민들을 구제한다는 가시적인 효과를 노리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좀 더 합리적인 여러 방안을 마련하여, 협상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저녁에는 안승룡씨 전시 오픈이 있어, 강남 ‘스페이스22’에 가야했다.
반가운 분들 만났으니, 어찌 술잔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지러워 일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길의 서울역 지하도엔 웅크려 자는 노숙자가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저렇게도 살아가는데, 어찌 힘내지 않을소냐?

사진, 글 / 조문호



























나이가 들수록 보폭을 좁히라고 했으나, 그게 잘 안 된다.
독하게 마음먹고 동자동에 살라고 왔으면,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놀아야하는데,
맨날 천방지축 돌아다닌다. 아니 끌려 다닌다.
어디 세상 연을 끊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던가?
인사동이나 사진판에 대한 연도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연도 마찬가지다.

요즘 나를 더욱 바쁘게 하는 것은 바로 박근혜다.
내가 무슨 투사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열 받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신경을 끊은 것이다.
티비나 신문 한 장 보지 않았으니 가능했으나, SNS에 접하며 달라졌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개인적이고 방임적인 처신으로, 여지 것 하나도 바뀐 게 없다는 자책 때문이다.

나야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자식들에게는 이런 세상을 물려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함께 사는 빈민들을 위해서라도,
싸울 수 있는데 까지 싸워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쁘다는 이야기 한다는 게, 박근혜만 나오면 말이 길어진다.

지난 연말에는 동자동사랑방 공제협동조합 홍보위원회의에 참석했다.
홍보위원 김정호씨가 홍보위원으로 같이 일하자며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나야 하는 일이 홍보하는 일이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승낙했는데,
할 바에는 제대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대외적인 홍보도 홍보지만, 그보다는 세상과 단절해 사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더 중요한 홍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200여명 중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조합원 수만 보더라도,
폐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벗이 되어주어 함께 어울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날 ‘동자동사랑방’ 사무실에서 가진 홍보위원 회의에는 차재설 홍보이사를 비롯하여

김정호, 허미라 홍보위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우리가 할 일은 홍보물이나 소식지를 제작하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후원자를 늘리고, 잘 모르는 분을 설득하여 함께 하는 것이었다.

결의를 다지는 식사자리도 만들어, 다 같이 소주 한 잔했다.

그리고 한정민씨도 꼽사리 끼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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