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준씨 자당 임화녀씨(83세)가 지난 10월31일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한 후, 속이 매스꺼워 체한 줄 알았다고 한다.

날이 밝으면 병원 갈 작정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병원 가려다 심경경색으로 운명하셨단다.

 

처음 119를 불렀더라면 회생하실 수 있었을텐데, 얼마나 애석하겠는가?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통탄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보를 받은 상주 고영준씨가 태국에서 돌아오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 비행기를 어렵사리 탔으나, 검역으로 공항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 장례식장을 찾아오니, 발인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람 모이는 곳은 잘 가지 않지만, 고영준씨 상가에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영준씨는 오래 전부터 동생처럼 지낸 가까운 지기인데다, 자상한 모친을 두 차례나 뵌 적이 있었다.

 

부음을 받은 지난 1일 오후 일곱시 무렵에서야 장례식장이 있는 상계백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상주 역시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해 염하러 갔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고영준씨 부친이 살아계신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평소 가족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홀어머니 슬하에 자란 줄만 알았다.

장례장식장에서 아버님 고동석씨를 처음 뵙게 되었는데,

갑자기 당한 사연에 기가 막히는 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즉각 병원에 못 데려간 것이 얼마나 한이 되며,

혼자 여생을 보낼 일은 또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더구나 아버님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유골이 다른 묘역에서 기다려야 된단다.

돌아가신 어머님보다 살아계신 아버님의 여생이 더 가슴 아팠다.

 

부디 어머님의 극락왕생과 함께 아버님의 편안한 여생을 빕니다.

 

발인 ; 2020년 11월 2일 오전8시

장소 : 수원연화장

 

배우자 : 고동석,

아들 : 고영준, 고영재, 고영기

며느리 : 한선혜, 이유영

손 : 고병수, 고병욱, 고수연

 

장례식장에는 오래전에 함께 했던 사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인사동에 있던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를 매개로 어지간히 어울려 다닌 벗들이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하상일,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는데,

옛날에는 ‘진우회’가 아니라 ‘진로회’라 부를 만큼 애주가들이 많은 사진모임이기도 했다.

 

그런데 독신녀로 살아 온 이혜순씨가 몇 년 전부터 사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얼마나 사진에 대한 한이 많았으면, 남아 있는 사진은 물론 필름까지 모두 불태웠겟는가?

그 긴 세월 동안 기록해 온 숱한 자료들이 전문가의 검증 한번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이혜순씨만의 일이겠는가?

천덕꾸러기로 처 박혀 있던 필름들이 당사자가 죽으면 대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사료들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기구가 협력하는 사진아카이빙기구 설립이 절실하다.

 

김종신씨는 캠핑카를 마련하여 전국 유랑에 나섰다고 했다.

숙식을 해결해 주는 캠핑카는 대개의 사진가들이 꿈꾸던 선망의 차가 아니던가?

장례식장 밖에 세워두었다기에, 문상이 끝 난 후 차 구경하러 갔다.

 

6천만원이라는 차 값에 비해 편의성이 좀 떨어지는데, 

침대를 줄여서라도 일할 수 있는 집무공간을 늘렸으면 좋겠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진가들에게 꼭 필요한 차였다.

 

80년대 초반 ‘진우회’에서 활동하던 맴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난 분도 더러 있고,

소식 끊긴 사우가 많았다. 연락되는 사우들도 이제 퇴역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났다.

다들 건강을 잘 지켜 최후의 일각까지 세상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신랑 고병수가 엄청 잘 생겼더라.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노래도 가수 빰 치데.
예쁜 소라 양을 만나 입이 찢어지는데, 솔직히 사랑 좀 받겠더라.
‘병수야!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런데, 병수보다 아버지 고영준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겠다.
병수야 어린 시절 한두 번 본 게 전부지만, 고영준은 40년 지기다.
79년 쯤 만났는데,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사협’의 반세기를 지켜 본 증인이다.






‘사협’의 총무라면 하나의 권력라인이다.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바꾸어가며 이사장을 좌지우지했던
웃기는 사협의 세월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감방까지 오가며..






세상에! 이사장 바뀌었다고, 먹고 사는 총무 목을 자르는 놈이 어디 있노?

이명복과 이명박이 비슷한 과다.
오죽하면, 옆 사무실에 있던 ‘예총’소속 ‘연예인협회’ 사무국에서 일했겠는가?






고영준은 천성이 못된 짓을 못한다. 그러니 못된 패거리들과 조가 맞을 수 없다.
대신 너무 착해 빠져, 아내 한선혜씨 고생깨나 시켰다.
서울예전 사진과를 나온 아내 한선혜씨는 사랑 때문에 하던 일을 포기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초창기에 본 한선혜씨의 사진은, 솔직히 고영준 사진보다 한 수 위였는데 말이다.






고영준씨는 일찍부터 ‘사협’에서 총무 일을 오래 한 덕에,
‘환경사진가회’나 ‘현대사진가회’의 총무 일도 도맡아 했다.
사람 좋은 덕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몰린다.





당시에는 ‘예총’에 소속된 ‘사협’ 사무실도,
신희순씨가 운영한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도 모두 인사동에 있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사진동아리도 만들었는데,
이름 하여 ‘眞友會’라고 했으나 대개 ‘진로회’라 불렀다. 




 


돌아가신 양은환, 신회순씨를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하상일, 고영준, 정영신씨
등 10여명 남짓 되었으나, 뒤늦게 들어 온 분들은 헷갈려 정리가 잘 안 된다.
그 중 사진으로 돈 번 친구는 강남에서 폐션 사진 한 정용선씨가 유일하다.






어떤 특정한 색깔 없는 친목단체였기에, 사진 기억보다 술 마신 기억이 더 많다.
그 모임의 중심에도 언제든 고영준씨가 있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털고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빨간 불에,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 헌신짝처럼 버려 버렸다.
고생만 죽도록 한 사진판을 뒤로하고, 태국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82년 서울 올라 왔을 때,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 있다.
취직하기 위해 면접 보러 간다니까, 면접 볼 사람이 그 꼴로 어떻게 가냐며
카드를 빌려 준, 그런 위인이다. 






본래부터 정장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 따뜻한 마음에 촌놈처럼 빼입고, 면접 보러 간일도 있다.
그러나 매사가 쉽지 않았다. 사진 때문에 잘 나가던 장사도 날린 놈인데,
차라리 거지로 살며 마음대로 사진 찍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꼴리는 대로 살았으니, 아무 여한은 없다.






고병수 장가가는 날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것은 고영준과의 만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그날 결혼식장에 모인 분들이 대개 ‘진우회’와 관련 된 오래된 사우였다.
하상일 선생의 오붓한 가족을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
정철균, 배창완, 우숙자, 최성규, 정영신, 김흥묵씨 등 많은 분들이 어울렸다.
옛날 ‘한국일보’자리의 ‘무드블랑’ 예식장에서 한 잔 했으나, 이차는 인사동이었다.






옛날 ‘꽃나라’ 자리에 가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더 하려 했으나, 생각을 잘 못했다.
주말의 인사동은 관광객에게 뺏긴지 오래라, 단골집 모두가 문을 닫아 버렸다.
골목은 텅텅 비어 허허로웠고, 큰 거리만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그들은 밥도 술도 먹지 않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먹을 것을 싸들고 다닐까?






사람이 많으니 한 사람 찾고 나면, 한 사람 잃어버리는 돼지 가족처럼 돌아다니다
간신히 자리 잡은 곳이 인사동 ‘마중’이었다.





정용선씨가 ‘화요’를 비롯한 기똥 찬 술로 한 턱 쏜다지만,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사실은 축의금을 부탁하고, 전 날 강진 가기로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결혼식이라 한선혜씨 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결혼식만 끝나면, 출발할 작정으로 차를 끌고 나온 것이다.






‘진로회’답게 삼차를 간다기에 도망쳤지만, 주차비 문제로 또 씨름했다.
요즘은 카드가 없으면, 주차도 못하는 지랄 같은 세상이다.

하기야! 카드 내지 않고 현금 내니, 탈세 조장한다는 양반도 있더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오후6시 무렵, 충무로에서 옛 사우들을 만났다.

고영준, 김종신, 목길순, 정용선, 하상일씨와 술 자리를 가진 후, 
모처럼 목길순씨의 사무실로 옮겨 고스톱 판을 벌였다.
20여 년 만에 만져보는 화투로, 마치 초보와 프로가 붙은 형국이었다.

이 것 저 것 계산하지 않고 짝만 맞으면 집어가고,
내 놓아서는 안 될 패를 내 놓으니, 상대방에서 헷갈렸던 모양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처럼, 의외로 반전의 기회가 많았다. 

때로는 단순하게 계산하는 초보의 막패도 먹힐 때가 있더라.

 

 

사진,글/조문호

 

 

 

 

 

 

 

 

 

 





지난 15일 저녁, 오랫만에 옛 사우들을 충무로에서 만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사동에 있었던 흑백현상소 "꽃나라"에서 만난 친구들인데,
그 뒤 '진우회'란 이름의 사진모임을 만들어 함께 다니기도 했다.
모두 허물없이 지낸 사이였으나 세월이 흘러 각자 바쁜 삶을 살다보니 잘 만나지지 않아

이혜순씨가 나서서, 한 달에 한 번씩 소주 한 잔하는 시간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매번 연락 올 때마다 촬영 스케줄과 겹쳐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나가지 못했다.
이번엔 태국에서 나온 고영준씨 때문에 모임을 좀 빨리 갖는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다행히 전라도에서 사진 찍고 돌아 온 날이라 일정이 비어 있었다.
안 나온다고 투덜대는 벗들의 욕지거리에 귀가 간지러웠던 터라 만사를 제켜 놓고 나섰다.
약속장소에는 고영준, 정용선, 유성준, 하상일, 김종신, 이혜순, 정철균, 조규선, 선우인영,

목길순씨 등 열 한명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지글거리는 삼겹살에다 먹는 소주 맛은 반가움이 더해져서인지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이런 저런 지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중, 한 사우가 걱정스런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조형! 이젠 마누라 매니저 노릇 그만 하고 조형 사진 좀 찍어소"
얼마 전에도 가까운 친구들로 부터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적이 있어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잘 못된 생각임을 여러사람들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누라 메니저 노릇이면 어때? 그래도 내가 사진 해 온 35년 동안, 이처럼 앞 뒤 안가리고

치열하게 사진을 해 본 적은 없었네. 마누라따라 다니는 게 아니라 내 사진 찍으러 다닌다"고 

어눌한 말투로 변명했다.

그랬더니 "장에 가서 같이 찍으면 그 사진이 그 사진 아니요."란 답이 나와 기가 막혔다.
사진가의 목적의식에 따라 대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일까?
아내가 찍은 장터사진들에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 장터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이 담겨있고,
내가 찍은 사진들에는 부정적인 시선에 의해 암울한 그림자가 깔려 있다는 것을 말했지만 수긍치 않는 눈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 올 해 중에 사진집으로 보여주겠다며 말을 끝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노래방에 가서 한 잔 더하자며 모두들 일어섰다.
이차는 강남에서 패션 스튜디오 하는 정용선씨가 쏜다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들 개털들만 모였는데, 그가 유일하게 사진으로 돈 번 친구이기 때문이다.
황송스럽게도 도우미양까지 불러 주었는데, 늙은 놈 마른 가슴에 불을 지펴 마음 깊숙이 숨어있던 잡끼가 슬슬 발동하였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여색에  허우적거리다, 결국 지갑 깊숙이 숨겨놓은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 주고 말았는데, 택시비가 없어 걱정이었다.
쪽 팔리는 일이지만, 쪽 팔리는 자체가 내 인생이라며 위안했다.

 

 

 

 

 

 

 

 

 

 

 

 

 

27일 오후, 마산의 이강용씨가 '아트 온'을 방문하였습니다.
서양화 개인 레슨으로 서울을 자주 오간다는데, 대체 수강료를 얼마나 받는지 궁금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몇일 전만 해도 인사동 거리를 광란의 사운드로 휩쓸었던 젊은이가
무슨 사연인지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되어 조용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드럼 치던 그 당찬 소녀는 부모님에게 덜미를 잡혔을까? 아니면 다투었을까?

인사동 거리에서 사진을 찍다 전활철씨를 만났고, 골목길에서 하상일씨도 만났습니다.
안영상씨가 자리한 '포도나무'집에서 하상일, 정해광, 이강용씨와 어울려 막걸리 한 잔 나누었고,
'노마드'에서 정기영, 김대웅, 최일순, 이지연, 현장스님도 만났답니다.

2012.8.28


 

 

 

 

 

 

 

 

 

 

 

 

 

 

 

 

 

 



산이 좋아 산을 떠 도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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