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동 쌈지길 앞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거리인 인사동의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 구하산방
▲ 통인화랑

●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 수도약국
▲ 카페 귀천
▲ 통문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 '이문설농탕
▲ 낙원떡집
▲ 낙원악기상가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서울신문 / 스크랩] 글 :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사진 : 김학영 연구위원




지난 초복 날, 인사동에서 사진동지 정영신씨와 삼계탕 미팅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몸보신하는 날로, 인사동 ‘무교 삼계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집 삼계탕만 찾는 것은 인사동의 오래된 맛집이기 때문이다.
맛은 변함없었지만, 작년에 비해 삼천원이나 올라 한 그릇에 만 오천원 했다.
분에 넘치는 밥 값을 물었지만, 너무 맛있어 살찌는 소리가 “뿌드득”하더라.





그런데,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인사동의 유서 깊은 회화나무를 만난 것이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중 하나가 ‘이율곡 집터‘ 자리에 있는 이 회화나무 고목이다. 
비록 은행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0년을 지켜 온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입구에는 흡연금지라는 큼직한 팻말이 있으나 인근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버렸는데,
회화나무가 담배연기에 절어 죽을 맛일 게다.





옛날에는 회화나무가 있는 이 곳을 독녀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녀혈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과부골에 율곡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탑산사’ 학암스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인데,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여인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으로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따른다. 
큰 구멍을 막으려 나무를 심는데, 이 회화나무도 그래서 심은 것이다.
율곡도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인사동에는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를 비롯하여 세도가 김좌근 집터도 있다.
민익두, 민영환, 박영효가 살았던 고가를 비롯하여,
책방이나 집필묵 가게, 표구점, 골동가게,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인사동 본래의 예스러운 모습이다.






인사동하면 뺄 수 없는 사람으로는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이 먼저 떠 오른다.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민화를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통인가게 김정환선생,
백자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도 기억할 수 있겠다.

 


 


이제 그러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은 점점 묻혀가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싸구려 거리로 변해 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돈에 묻혀가는 세월이지만, 이렇게라도 추억할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연휴를 맞은 인사동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날씨 덕택에 대여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밝은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러나 거리에 널린 잡화점에는 중국산 싸구려 상품들이 점령한지 오래고,
오래된 가게나 전시장들은 텅텅 비어있다.
아무도 길거리에 쏟아지는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일 생각조차 않았다.






2011년도엔 국내 선호관광지 5위였던 인사동이 지난해는 7위로 떨어졌다.
인사동의 매력은 점차 사라져 앞으로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인사동을 지켰던 고시계점 ‘용정’이 문을 닫았다.
그 뿐 아니라 필방, 표구, 골동상 등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인사동은 본래 ‘문방사우’의 거리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40여 곳의 크고 작은 필방들이 늘려 있었다.
문방사우와 표구, 골동가게들로 채우진 인사동이 관광 거리가 되면서
기념품과 화장품, 식당과 커피 가게 등으로 서서히 바뀐 것이다.
남아있는 오래된 점포란 ‘통문관’. ‘구하산방’ 등 손에 꼽을 정도지만, 이마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그 날도 그토록 사람들이 몰렸으나, '통문관'은 아예 문이 닫혀 있었고, 필방들도 파리 날렸다.






뒤늦게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상인들이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곧 열리게 될 박람회를 시작으로 인사동 골목길과 숨은 장인들을 알리고,
인사동 최고의 멋으로 뽑힌 인사10길을 집중 홍보할 예정이란다.
인사10길은 한옥갤러리와 도자기매장 등 전통매장이 많이 몰려있고,
한옥식당이 몰려있는 인사동14길과 홍보관이 있는 11길도 관심을 끌고 있다.



인사10길

인사14길

인사11길


아무리 노력해도, 잡화 장사에 재미 본 길가 상점들의 변화 없이는 어렵다.
긴 세월 보존되어 온 전통도 망가지려면 금방이지만, 다시 되돌리려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상인들보다 인사동에 애착을 가진 예술가들이 나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상인들의 개인적 욕심이 버티고 있는 한, 인사동 되찾기는 말짱 도루묵일 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시 老鋪 브랜드 네이밍 공모 결과 발표

노포 브랜드 네이밍 공모서 선정
오래된 가게+오래가라 의미
BI제작 관광자원으로 활용키로

구하산방ㆍ통문관ㆍ종로양복점 등
내달 말 30~40개 선정해 지원



서울시의 노포 발굴 사업 후보지 중 하나인 종로구 인사동의 전통 필방 '구하산방'. 1913년 문을 연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종, 순종이 이 집의 붓을 쓰면서 유명해져 당대의 서화가들은 모두 이 가게를 드나들었다. / 류효진기자



서울시가 오래된 가게를 의미하는 노포(老鋪)의 새 이름으로 ‘오래가게’를 선정했다.

시는 서점, 양복점, 이발소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오래가게를 발굴해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서울시는 21일 노포 발굴 사업의 일환인 노포 브랜드 네이밍 공모 결과 오래가게를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오래가게는 ‘오래된 가게’라는 뜻과 ‘오래 가라’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노포보다 부르기 쉬운 우리말이기도 하다.

시는 오래가게를 브랜드 아이덴티티(BI)로 제작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노포 관련 홍보에 활용할 계획이다.

공모전에서는 이외에도 ▦장수상점 ▦히스토어 ▦이어가게 ▦店店오래 ▦오고가고가 수상했다. 

  

서울은 오래된 가게를 찾기가 힘든 도시다. 짧은 기간에 식민지, 전쟁, 산업화로 인한 압축성장을 겪으며 옛 흔적은 빠르게 사라졌다.

오래된 가게라 해도 역사가 30~40년이다. 해방 전부터 이어져 온 가게는 손에 꼽는다.

반면 일본에서 시니세(老鋪)라고 불리는 노포는 단순히 오래된 가게가 아닌 가업을 이어 오는 가게라는 의미로,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다.

2017년 도쿄상공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1,000년 된 시니세는 7개, 100년 이상 된 곳은 3만3,000여개에 달한다.


국내의 노포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온 가게들도 시대상의 변화로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전통 필방 구하산방의 홍수희 사장은 “구경만 하다 그냥 가는 관광객이 태반”이라며 “사업을 접을 기로에 서 있다”고 토로했다.

고서점 통문관의 주인 이종운씨는 “사람들이 책 같은 활자 매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다 보니 운영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씨는 “우리는 ‘맛집’과 성격이 다르다”며 “오래된 가게를 보존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는 이런 세태에 맞서 노포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를 헤아리고 보존한다는 취지다.

노포에 새 이름을 지어준 것을 시작으로, 시민과 전문가가 추천한 후보 중 30~40개를 선정해 9월 말 발표한다.

단순 발굴 작업에 그치지 않고 가게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도 함께 알릴 예정이다.

종로구와 중구에 위치한 가게 중 요식업은 50년, 그 외 업종은 30년 이상 이어진 곳을 일차적 선정 기준으로 정했다.

요식업을 제외한 나머지 업종은 서울시내가 최근 100년 간 급격한 변화를 겪은 점을 감안해 영업 장소를 옮겼어도 후보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고종과 순종이 붓을 구입했다는 전통 필방 ‘구하산방’, 삼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서점의 대명사 ‘통문관’,

기성복의 등장에도 100년 넘게 옷을 지어 온 ‘종로양복점’ 등이 후보지다. 

 

서울시 사업 관계자는 “주인 분들이 ‘장사가 안 된다’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며

“관광 책자를 만들거나 투어 코스로 지정하는 등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하산방의 홍수희 사장은 "구경만 하다 그냥 가는 관광객이 태반"이라며 "사업을 접을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류효진기자



[한국일보]송옥진기자 click@hankookilbo.com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묵향이 그윽했던 그 골목, 기형도 노래하던 그 술집…야만의 시대 ‘낭만 1번지’

헌책방 ‘통문관’엔 천명이 한 자씩 쓴 천자문…화장실이 급해 들렀다가 붓 잡고 휘이 
탁자 서너개·촛불 뿐인 허름한 술집은 주머니 얇은 청춘·문인들 마음의 고향

한옥 뜰앞에 핀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저항의 불덩이 품은 가슴도 촉촉해졌네



▲ 지금은 외국 관광객들이 점령한 인사동은 1980년대 아직은 빈궁했고 아직은 어두웠던 시절,

많은 청춘들을 토닥여 주고 품어안아 준 어머니의 자궁 같은 동네였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두 평 남짓한 밥집 ‘작은뜨락’.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 시절 청춘들은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쉼터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나누며 같은 듯 다른 꿈들을 키웠다.


▲ 인사동길 어귀를 여든두 해째 고집스레 지키고 있는 고서점 ‘통문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스물다섯 나이의 청년 이겸로가 일본인에게 사들인 뒤 3대째 명맥을 이어온

이 책방엔 지금도 400만 권의 ‘헌책’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월인석보’와 ‘월인천강지곡’ 같은 수많은

국보급 보물들이 발굴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한 글자만 써 주고 가시게.” 

붓 한 자루를 건네주며 글자 한 자 써주기를 부탁해 왔다. 그는 통문관(通文官) 주인 고 이겸로(1909~2006)옹이었다. 나는 그가 제시한 글자 중 귀할 귀(貴) 한 자를 진땀 흘려 쓰고 빠져나왔다. 1980년대 초 화장실이 급해 들렀던 인사동 고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이옹은 자신의 손자를 위해 천인천자문을 제작하고 있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한 글자씩 받아 만든 책이다. 그러다 보니 글자마다 필체가 다르다. 이렇게 천 명의 정성으로 완성된 천자문은 첫돌 때 선물로 전해진다. 후손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내공이 경지에 이른 이옹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쟁쟁한 인사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쉬가 급해 들어왔노라”며 서너 차례 거절하는 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이옹은 끝끝내 손에 붓을 쥐여 주었다. 쉬 한번 하러 갔다가 졸지에 선생의 손자를 위한 천자문 한 글자를 메우게 된 것이다. 그 천자문을 받은 손자가 지금의 통문관 주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 당시 통문관을 단순한 헌책방으로 알았다. 고 이겸로 선생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문을 연 이래 고서 관련 문화유산 발굴의 중심에 있다는 거룩한 명성은 먼 훗날 알았다. 

80년대 서울 인사동은 그런 거리였다. 조악한 기념품 가게와 호떡 장사가 판치고 있는 지금과는 많이도 달랐다. 백만 년 전 그 시절 나는 황당한 꿈이나 꾸는 몽상가였다. 나는 당시 군대를 다녀와 놀고 있었다. 스몰이라 불리는 검은 물을 들인 미제 군복 바지를 입고 복학 일까지 허구한 날 주색잡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신세. 신촌과 종로통을 오가며 술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과외로 주머니가 얼마간 채워지면 여자를 만나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밤이 오면 신촌이나 이태원의 히피들이 모이는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는 데카당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허해지면 인사동에 들렀다. 그 시절 인사동은 고풍스러웠다. 요샛말로는 빈티지나는 동네였다. 신촌은 술집만 즐비해 무언가 허전했고 명동은 시골 출신인 내가 나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인사동은 묵향이 넘치던, 스물 몇 살의 청년이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였다. 거리 분위기가 유가풍에서 자란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도 부담 없는 동네였던 것이다. 그중 승동교회 안쪽 골목에 있던 티롤은 나의 단골 술집. 서너 개의 탁자가 전부이고 탁자마다 작은 촛불이 켜져 있던 소박한 술집이었다. 티롤이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방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이고 무식하게도 그 시절 난 그저 티눈의 사촌쯤으로 생각했다. 




▲ 천재시인 기형도가 삶을 내려놓기 2년 전인 1987년 유럽을 돌며 찍은 사진이다.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했던 그는 인사동의 카페 ‘평화 만들기’를 즐겨 찾았고, 그가 자리한 날엔

 ‘음유시인’으로까지 일컬어졌던 그의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80년대는 험악했다. 폭력과 야만이 넘치던 시대이자 어둠의 시대였다. 단언컨대 최루가스가 공기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불덩이를 서너 개씩 달고 다녔으며 감내하기 어려운 순간순간을 술로 버텼다. 그 중심에 티롤, 시인학교, 평화 만들기, 소설 같은 술집과 선천, 사천, 토방 등 밥집, 절 음식집 산촌,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꾸려 가던 귀천 등등이 있었다. 술집은 초라했고 밥집은 대개 네모꼴의 낡은 한옥이었다. 남루한 한옥에서 밥을 먹다가 뜰앞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마음까지 촉촉해지곤 했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던 고향의 꽃이 아니던가. 술집 밥집만 아니다. 당시 인사동에는 학고재 등 수많은 고미술 가게와 화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술집과 밥집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시절 술꾼들이란 대개 종로 관철동 ‘낭만’ 같은 술집에서 입가심으로 생고구마 조각을 곁들여 1차로 맥주 한잔 걸치고 인사동으로 옮겨 밤늦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임은 술과 엮여 있다. 같은 학교 졸업자들이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 동문회이고 산에 올랐다가 하산 후 술 먹는 모임이 산악회다. 새벽에 모여 공을 찬 뒤 해장술 한잔 걸치는 것이 조기 축구회이고 고향 사람끼리 모여 술 먹는 모임이 향우회가 아니던가. 초상집에서도 술을 같이 마셔야 성이 풀리는 사회가 한국사회다. 

많고 많은 술집 중 카페 ‘평화 만들기’도 떠오른다. 이십대 초반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이십대 후반까지 단골로 다녔다. 사실 인사동에 꽤 멋진 술집이 많았는데 유독 이 집만 유명했었다. 아마 일간지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는 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문학 하는 사람들이 뒤풀이 단골로 가는 곳인데, 나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작업 중인 여자 친구에게 뭔가있어 보이게 하기엔 딱인 술집이기 때문이다. 창가 말석에 앉아 저명 시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문인들, 예술가들은 원래 낙천적인가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인 고 기형도(1960~1989)가 있었다. 인간관계는 전혀 없었고 가끔 단골 술집에서 낯이 익어 눈인사만 나눌 정도였다. 80년대 후반 이미 그는 이름을 날리던 문화부 기자였다. 알려진 대로 그는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다. ‘평화 만들기’의 계단을 오를 때 맑고 고운 노래가 들리면 그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 고운 테너의 목소리로 ‘왓 이즈 어 유스, 임페추어스 파이어’(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를 부르면 술집 안은 순간 고요해진다. 영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그 옛날 긴 생머리의 올리비아 허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인사동 인근 안국동 로터리의 전설적인 술집도 추억해야 한다. 카페 ‘브람스’다. 75년 문을 연 신촌 미네르바, 동숭동 학림과 나란히 30년 넘게 로터리 귀퉁이 이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내가 서울에 온 갓 스물부터 지금까지 잊혀질 만하면 들르는 카페다. 바닥과 벽이 모두 나무로 치장되어 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유년 시절 초등학교 목재교실 같은 느낌이다. 주말에도 손님은 많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꾸려가는지 나와 같이 늙어가는 여주인에게 노하우라도 한 수 배우고 싶다. 살고 있는 곳이 멀고 또 지금 일하는 공장이 신촌이라 그저 1년에 한두 번 찾을까 말까 하는 카페다. 어쩌다가 지나는 길, 긴 구레나룻의 브람스 얼굴 간판이 차창 너머로 눈에 띄면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들렀다가 “꼭 1년 만에 오셨네요”라며 아는 체하는 여주인의 인사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 집에 가게 되면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를 청해 듣는다. 조르주 비제의 조개잡이 중에 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1925년 레코딩)이다. 모노로 듣는 질리의 음성은 애절하다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다. 당장 한번 들어 보시라. 언제 들어도 심쿵이다. 

우리들의 이십대는 이처럼 수많은 거리의 술집과 함께 갔다. 인사동 골목은 그 시절 내 인생의 ‘아타락시아’였다. 지금의 중년들이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으며 취해 돌아다녔던 추억의 거리다. 인사동은 아주 오래된 거리였고 그때 우리는 너무 젊었으며 세상은 그 무엇도 만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잔치는 오래전에 끝났다.

[서울신문] 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 지키고 있죠”


 

 

 

서울 인사동길 어귀에는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는 오래된 서점이 하나 있다. 1934년 문을 연 뒤 삼대째 고서적들을 다루고 있는 ‘통문관(通文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래된 책 향기와 함께 수만 권의 고서를 지키고 있는 이종운 관장을 만나 100년를 향한 통문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 보았다.


1934년 문 연 고서의 보물창고


매미 소리마저 사라지고 차량의 움직임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아이돌들의 음악 소리 가득한 인사동은 이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전통의 거리가 아닌 퓨전의 거리가 돼 가고 있다. 파릇한 차향보다 커피향이 번지고 거친 듯하지만 맛만큼은 최고였던 칼국수 대신 스파게티 가게가 생겨나는 그곳 인사동의 터줏대감인 ‘통문관’의 역사는 한국의 고서적과 국학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34년 당시 25세의 나이였던 고 이겸로 선생은 16세의 나이에 배가 고파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서점에 취직하게 된 지 9년여 만에 인사동의 고서점 금문당을 인수하고 상호를 금항당으로 바꿔 직접 고서점 운영과 수집에 나섰다. 이때부터 통문관의 역사가 시작됐다.

배고파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겸로 선생은 남다름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고서에 관한 그의 안목은 여느 학자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고서에 대한 정가제를 도입해 자칫 부르는 게 값일 수 있는 고서적에 정가를 매겨 통문관을 본궤도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하는 뛰어난 사업 수단도 지녔다.

그러나 무엇보다 통문관과 이겸로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수만 권에 이르는 고서의 장서량보다 통문관과 이 선생을 통한 국학의 발전과 고서와 관련한 국보와 보물급 문화유산의 발굴·보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통문관은 자연스럽게 국학자들의 사랑방이자 정보 교환의 장소가 됐다. 국어학자인 이희승 씨와 미술사학자 김원룡 씨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그리고 이곳 통문관을 통해 ‘월인석보’와 ‘월인천강지곡’ 등이 발굴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 밖에 많은 국보와 보물급 고서들이 통문관을 통해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 귀중한 자료로 남겨지게 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최근 조선 후기 시조 작가인 김천택 선생의 ‘청구영언’ 자필본이 한글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것 역시 통문관이 큰 역할을 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통문관은 출판에도 관심을 두고 1943년 처녀 출판물인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 김천택의 ‘청구영언’, ‘두시언해’ 초간본, 김민수의 ‘주해훈민정음’ 등 많은 대표 서적을 발간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가재도구 대신 ‘조선군서대계’ 80권을 지고 피란을 떠났던 이겸로 선생의 고서에 대한 애정은 광복 이후에 이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멈췄던 국학 연구에 불씨를 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통문관은 한국 고서의 보고로서 역할을 톡톡히 함은 물론 국학 연구에 속도를 더하는 원동력이 됐다.

2006년 이겸로 선생이 97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 지금의 통문관 주인은 이겸로 선생의 손자인 이종운 관장이 맡고 있다. 할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부터 통문관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는 이 관장은 할아버지가 25세에 금문당을 인수해 고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보다 4년 늦은 29세의 나이에 통문관의 주인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고서와 함께 자란 때문에 커다란 부담감 없이 미래의 통문관을 책임지는 사명을 안게 됐다. 더욱이 국문학도였던 이 관장에게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라 온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드나들던 기억과 거부감 없이 고서와 접했던 추억과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서 자부심과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났다.

“지금 이곳에는 고려 말부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의 각종 학술서 등이 가득하고 근현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주요 서적들 또한 많습니다. 예전 할아버지 때는 국학 원로들의 사랑방이자 전화가 귀한 시절 연락 창구로 활기를 띠던 통문관이 이젠 전통과 추억의 장소로만 회자되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죠. 통문관은 단순히 고서를 다루는 서점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활자로 남겨진 역사의 결집체이자 역사 해석의 올바른 해독소와 같은 곳입니다. 일반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통신 기술의 발달로 통문관 역시 점점 찾는 발길이 줄고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발자취에 대한, 기록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곳 주인인 저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서는 단순히 오래된 책으로 정의할 수 없다. 역사적 가치로서 고서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예술 등을 엿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자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고서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기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불합리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인쇄물에 대한 가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서의 가치는 요즘의 인쇄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값어치가 아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쌓임인 역사가 기록된 데 따른 값어치인 때문이다.


시간의 쌓임이 낳은 역사적 가치 봐야


“사실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희귀 서적이나 고서적들 중 몇몇 책은 거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이 되다 보니 높은 가치의 고서 한 권보다 수십 권의 책을 구매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 때문에 고서에 대한 평가나 가치 판단이 크게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처럼 고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들과 점점 설 자리조차 잃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국학을 연구하는 교수님들이나 학생들,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어 통문관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통문관은 고려시대 역어교육(譯語敎育)과 통역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관장이 맡고 있는 통문관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세대와 세대 간을 서로 통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러기에 통문관의 미래는, 아니 역사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겠다면 물려주겠지만 사실 통문관 주인의 삶은 매우 정적이고 인내와 기다림의 삶입니다. 강요하지 않겠지만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통문관이 100년이 되는 때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백년을 향한 통문관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의 일환으로 경매 등을 통해 가치 있는 고서들이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갈 데 가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고서의 매력과 고서만이 지닌 역사의 진한 향기에 취한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찾을 수 있는 고서점으로 남길 기대합니다.”


한국경제매거진 / 조범진 객원기자 cbj68@naver.com

인사동에서 아주 오래된 서울을 찾아냈다. 3대를 이어 내려오는 고서점과 고종황제가 이용하던 지필묵방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주말이면 인사동은 수많은 인파로 붐빈다. 안국역에서 탑골공원 사이 골목길은 엄마 손을 잡은 아이며 느리게 걷는 연인들,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로 꽉 차서 그 사이로 비집고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 우리가 일본에 가서 아사쿠사 거리를 걸을 때나 상하이의 위위안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 기대하는 것을 그들도 인사동에서 찾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서울, 전통적인 면모를 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큰 길만 따라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모습에 금방 실망하고 만다. 스타벅스 하나뿐이었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어느새 큰길가를 차지해 다방을 밀어냈고 대기업의 화장품 가게가 화랑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처음 방문했던 인사동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과거를 더듬다보니 태초의 인사동마저 그리워졌다. 종로구청에 의하면 예전의 인사동길은 종로에서 인사동네거리까지였다고 한다. 이 길은 태화관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길이 지나는 곳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이 있던 데서 유래한다. 옛 인사동길을 가로지르며 수직으로 놓인 지금의 인사동길은 원래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관훈동, 인사동, 광통교를 통과해 흐르는 물길을 따라 생긴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댓절골, 향우물골, 이문동, 원골 등 고관대작이 사는 마을이 있었으며 댓절골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원각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들은 1915년 일제에 의해 인사동이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정리된다.

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지만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가 된 직접적인 연유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떠나는 길에 수집했던 골동품과 고서화를 인사동에 내다 팔면서 처음 골동품 거리가 형성된 것이 발단. 1970년대 중반 가짜 고서화 사건과 정부의 중과세 조치 등으로 200여 개의 골동품 상점이 청계천, 장안동 등지로 떠났고 빈자리에 화랑과 도자기 상점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전개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업 화랑인 현대화랑을 시작으로 여러 화랑들이 골동품 상점의 빈자리를 채웠으며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전통 차문화 붐이 일면서 다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자기 상점도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굵직한 화랑들은 한강을 넘어 청담동과 신사동으로 이사 가고 골동품 상점, 고미술점, 고가구점, 화방, 민속공예품 판매점 등이 뒤엉켜 서울에서 전통문화예술의 색이 가장 짙은 지역이 된다. 화랑과 화방 근처에 모여든 예술인들은 골목마다 찾아들어 술잔을 채우고 시를 읊었다.

어느덧 남대문표 기념품과 국적불명의 먹거리에 잠식당한 인사동을 지키려는 노력은 내부에서부터 일고 있다. 20~40년 동안 고미술점을 운영하며 인사동을 지키던 상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인사동10길, 수도약국에서 라이온스 빌딩까지 전통 골동품상과 화랑이 밀집된 거리를 인사동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표본 골목으로 선정했다는 소식. 그들은 여기에 녹색 공간을 조성하고 이야기가 있는 길로 꾸며가고 있다. "아이고. 인사동은 너무 많이 변해서" 하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다시 인사동을 찾는 이유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포들이 있기 때문이다. 1913년부터 지필묵을 팔아온 101년 된 가게와 장인이 손으로 두드려 만든 방짜유기를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노포를 찾아 오래된 서울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었다. 길이 좁아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히는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인사동의 옛 얼굴들이 그 자리에 있어만 준다면.


 

 

 

 

 

레아

10년 동안 인사동길을 굽어본 터줏대감 레아. 처음 문 열었을 때만 해도 표구상과 화랑이 즐비한 이 일대의 유일한 모던 카페였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던 시절, 고서점 건물 2층 창고를 카페로 개조해 인사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문인과 작가 손님들의 아지트로 자리매김 했다. 레아만의 독특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몇 점의 그림들과 아기자기한 장신구들은 아티스트 손님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벽장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은 모두 손때가 올라 반들반들한 고서적들. 절판되거나 판형이 바뀌어 품귀 현상을 빚은 도서들이 태연자약하게 꽂혀 있다. 이 집에서만큼은 전통차와 한과가 아닌, 레아 블렌드 커피와 피칸 파이를 즐기면 좋겠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55-12 TEL 02-735-9407


 

 

 

 

 

 

납청놋전

예로부터 남한에는 안성유기, 북한에는 방짜유기가 유명하다.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읍은 방짜유기의 원산지로 납청놋전도 여기서 이름을 빌려왔다.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놋빛의 방짜유기는 구리 78퍼센트, 주석 22퍼센트의 황금비율로 만들어지는 것이 특징. 방짜라는 말은 '맘미다', '후려치다'라는 뜻으로 유기를 만드는 기술 중 하나인데 합금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 문헌까지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곳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와 전수자인 큰아들 이형근이 만든 방짜유기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유기는 전통적으로 사계절 사용하는 수저로, 겨울에 사용하는 식기로 반가의 식탁에 올랐다. 납청놋전에서는 방짜 기법으로 만든 전통 제기부터 5첩 반상기, 악기, 수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혼수로 가져가 대대로 물려가며 쓰는 귀한 그릇이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TEL 02-736-5492

 

 

 

 

 

빈 컬렉션

'빈'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아내를 뜻하던 세자빈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세자빈이 환생한다면 이번 생에 사용했을 법한 고운 조각 이불보와 무릎이불 등이 빈 컬렉션의 대표작이다.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어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한 제품들은 디자이너 강금성의 손에서 탄생했다.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에서 자란 강금성은 친가와 외가의 할머니로부터 명문가 여인들에게 전해지던 삶의 지혜와 예술 안목을 배운 연유로 2002년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다.

전통 공예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만든 잣 방석과 팔각 쿠션 등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하다. 목베개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옛 어른들의 지혜를 빌렸다. 불면증에 효과가 있는 녹나무, 열을 식혀주고 머리를 차게 하는 메밀, 통풍에 좋고 지압 효과가 있는 누에고치 중 선택할 수 있다. 시집가는 누이에게 들려 보내면 좋겠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39 TEL 02-735-5760

 

 

차가방

'장황'은 일본에서 유입된 '표구'의 우리식 표현으로, 서화를 장정, 염색, 테두리하는 일련의 작업을 말한다. '장황문화재연구소 차가방'은 30년 동안 풀솔 하나로 자리를 버텨온 업계의 명가다. 생존을 위해 기념품 좌판을 벌이는 화랑과 액자집이 넘쳐나는 때, 장황 외길을 걸어온 정찬정 대표의 뚝심은 차가방의 존재를 더 빛나게한다. 그의 손길은 곧 인공호흡이다. 소위 '대가'들의 작품부터 나라의 귀중한 유물들까지, 지난한 배접과 복원 작업을 통해 되살아난 종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올 초부터 이곳엔 심상찮은 청년이 들어와 손을 돕고 있다. 인사동 바닥의 최연소 도제 김남혁은 스포츠, 미술,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다 차가방에 정착했다. 스냅 백, 피어싱에 팔찌까지 야무지게 장착했지만, '문화재 복원사'를 꿈꾸는 눈빛만은 제법 진지하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37 TEL 02-732-7240

 

 

 

 

 

 

용정

인사동길의 허리께를 걷다 보면 1920년대 경성에 있었을 법한 고풍스러운 시계점을 만날 수 있다. 앤티크한 이름에 걸맞게 반백년에 달하는 역사를 간직한 용정이다. 짙은 올리브색 패널 위에 한자를 달아 올린 간판, 쇼윈도 너머 빛바랜 고시계들은 마치 절간에 들어앉은 불상처럼 그 기품이 은은하다. 15분마다 흐르는 신비로운 음악은 바로 시계 종소리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선지 마음이 경건해진다. 1965년 개업 당시만 해도 인사동의 여느 가게처럼 다양한 골동품을 취급했던 이곳은 2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김문정 대표가 시계만을 다루는 데 집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뤘다.

앤티크 롤렉스 회중시계, 이탈리아산 수동 탁상시계, '파텍필립'이 되기 이전의 1900년대 파텍 손목시계, 1천만원을 호가하는 1950년대 콘스탄틴, 사냥할 때 본체를 보호하기 위해 케이스를 닫아도 시침을 확인할 수 있는 엘진의 클래식 헌터까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컬렉션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면 시계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시간이 어찌 흐르는 줄 모른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 TEL 02-735-2700

 

 

구하산방

1913년 명동 진고개에서 처음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붓과 먹을 판 지 101년이 된다. 3대째 집안 사람들 손에 물려 내려와 지금은 홍수희 대표가 인사동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를 지키고 있다. 벽에 걸린 편액의 유려한 글씨는 고순어용高純御用. 전서체의 대가였던 정향 조병호 선생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여기서 문방사우를 이용했다'는 뜻을 새겨 선물한 것이다. 이 101년 된 가게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품질의 붓, 먹, 벼루, 화선지, 전각 등 화구 1000여 가지를 갖춘 서화 재료 전문점이며 그간 조병호 선생의 스승이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오세창 선생에서 이응노, 김기창, 박노수 화백까지 수없이 많은 서화가들이 거쳐간 사랑방이었다. 특히 붓의 명가로 이름이 높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79-2 TEL 02-732-9895


 

 

 

 

 

 

경인미술관 전통 다원

번잡한 인사동길을 뒤로하고 가로 난 골목에 접어들면 딴 세상처럼 한적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경인미술관 전통 다원의 고요와 정취는 도심의 것이기에 더 진귀하다. 1983년 개관한 경인미술관은 고택과 현대식 가옥을 한데 어우른 독특한 공간이다. 한옥 별채는 다원으로, 양옥 두 동은 5개로 구획해 전시실과 아틀리에로 쓴다.

2011년 <미슐랭 가이드> 한국 편에 등재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명소가 됐지만, 러시아워를 피해 시간을 맞춰 가면 그 옛날의 운치가 여전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처마 끝 풍경을 건드리고 싸리비질 소리가 드문드문 리듬을 만드는 가을날 아침. 툇마루에 앉아 대추차 한 모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30-1 TEL 02-733-4448


 

 

 

 

 

통문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통문관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100년이 훌쩍 넘는 책들과 조선시대 목판인쇄본 책들 사이에서 근대 한글 소설은 어린 축에 속한다. 1934년에 이겸로가 개점한 금항당이 통문관의 전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통문관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아들의 손으로, 다시 손자의 손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 미술사학자 김원룡 박사,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등이 자주 출입했으며 셀 수 없이 귀한 장서들이 통문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 한국어학자가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진 <월인석보>,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김천택의 친필인 <청구영언> 등도 이곳에서 발견된 보물이다. 해방 후에는 출판에도 관심을 가져 <청구영언>, <금오신화>, <주해훈민정음> 등 통문관 이름으로 출판한 서적이 100여 종에 달한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47 TEL 02-734-4092

[출처 / 더 트래블러 | 에디터 김윤정]

                                                                                                       -관훈고서방- 

북인사마당에서 인사사거리 방향으로 200미터 전방 오른편에 있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33 / 전화 02-735-2772

 

 

 

                                                                                                        -통문관-

북인사마당에서 인사동사거리 방향으로 100미터 전방 오른편에 있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7 / 전화 : 02-734-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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