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그리는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그토록 좋아했던 친구였건만, 흩날리는 낙엽 같다.

 

난, 어릴 적부터 유달리 친구를 좋아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듯이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정불화의 대부분이 친구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살다보니 가치관이나 생각도 달라졌다,

종교나 정치적 갈등도 생기고, 말 한마디에 상처도 받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전화기를 멀리 한지도 일 년이 넘었다.

속내를 털어 놓을 사람은 동지이며 친구인 딱 한 사람 남았다.

이제 사 철든 것 같다. 아니, 죽을 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먼저 떠난 친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술만 취하면 전화하던 정남규는 전화를 걸고 있고,

온 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하던 적음은 웃고 있다.

무게만 잡던 콧수염 김영수가 측은한 듯 바라본다.

'내 노래는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던 홍수진이 노래 부른다.

 

먼저 떠난 것을 서러워했지만, 살아남은 자가 불쌍하구나.

나도 갈 날 머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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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선 바삐 일만 해야 하는 건가?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니, 상념에 잠 못 이룬다.
눈을 떠보니 아직 새벽 세시.
어두워 일도 못하는 시간에 뭘 할까?
갑자기 적음의 시 ‘새벽녘’이 생각난다.
책꽂이에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잠 안 와 뒤척이는
새벽녘 그만
불을 켜고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읽을까(아니),
차나 한 잔 (아니),

木石처럼 앉아 있는
두 빰에
웬 일인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





갑자기 저승 간 적음이 보고 싶다.
외로움을 낄낄거림으로 위장한 땡초가 보고 싶다.
아직 ‘월간 빠’는 유효한 건가?

발문은 표성흠씨가, 그림은 신동여씨가, 사진은 내가 찍었다.










지난 달 26일부터 보름 가까이 더러 누워 낑낑거렸다.
창 너머로 유혹하는 봄바람도,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도 못들은 체, 매일같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처음엔 정선에서 몰고 온 감기몸살로만 알았으나, 숨을 쉴 수 없는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검사 해 보더니, 폐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언어장애는 있었으나, 담배 탓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병원에 가보라는 지인들의 충고를 묵살하였더니, 기어이 올 것이 찾아오고 만 것 같았다,

호흡기에 이상이 있어도 갑자기 이런 경우가 올 때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월부터 전시하기로 되어있는 ‘산골사람들’ 사진을 전해주고 오기 위해

천장 위에서 끄집어낸 액자 때문인 것 같았다.

14년 동안 부엌아궁이에서 나오는 끄름에 쌓여 있었는데, 마스크도 하지 않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하는 장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평소의 미련한 고집을 차마 자백할 수 없었다.

”숨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일만 반복하는 무료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일체 병실을 알리지 않은 채, 문병조차 사양했다.

티브이는 물론 핸드폰마저 꺼 버렸으니,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정영신씨가 노트북을 병실에 갖다 주었으나,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그냥 고통 없이 죽는 주사 한 방에 조용히 눈감고 싶었다.






별다르게 진행하는 치료도 없이 약만 받아먹는 처지라,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안고 퇴원해 버렸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지만, 술 생각과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니, 술도 한 번 마셔보고, 담배도 한 대 피워보자.

모든 것이 사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니, 콤펙트카메라만 호주머니에 넣고 인사동 나들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날은 박진화씨의 드로잉전이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날이지만, 숨이 차 4층까지 올라 갈 기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으로 들어갔는데, 조해인시인과 사진가 이수길씨가 먼저 보였다.

옆 자리에는 윤성광씨와 박혜영씨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눈에 꽂히는 그림 한 점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미 저승으로 떠난 적음선사의 ‘파적’이란 시에 신준식씨가 그린 그림이었다.

두 사람 다 끼가 있는 꾼이었지만,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한 사람은 암자에서 술이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한 사람은 술이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이 무슨 암시인가?

‘가을밤의 춤’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는데, 그 이글거리는 담배불의 유혹에 온 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뒤늦게 다인 최종선씨와 공윤희씨도 나타났고,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도예가 김정범, 터너 이동환씨 등 여러 명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가히 인사동 아지터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 자리잡은 조해인, 이수길씨와 조용하게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는데, 온 몸에 이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말 없이 술집을 나서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소관이라며...





몇 걸음 걷다 한 참을 쉬어 가야하는 인사동의 밤거리가 낯설어 보였다.

그 늦은 밤에도 땅을 파 뒤집고 있었고, 마치 조계사의 야경이 저승 풍경처럼 음산했다. 




적음의  '파적' 부분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다니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사진,글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지난 해에는 세명의 벗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사동에서 살던 사진가 김영수씨가 지병으로 먼저 떠났고,

뒤 이어 봉화에 살던 최영해씨도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적음의 갑작스런 부음을 받고 제일 가슴 아파했던 화가 신준식씨도 따라갔어요.

김영수씨는 지병에 의한 죽음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적음과 준식의 죽음은 인재라 더 가슴이 아파요.

봄이 오면 적음의 시비라도 만들어 떠난 벗들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합시다.

위의 사진은 작년 겨울, 아리랑에서 있었던 '후원의 밤'에 참석한 적음과 신준식의 모습입니다.

그 때부터 두 인간이 탈출작전을 공모한 것은 아닌지, 수사를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2.1.5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시집 '저녁에'에 쓴 시인 표성흠씨의 발문-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허허롭게 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인생살이의
고달픔도 욕심도 벗어 던지고 바람처럼 떠돌며 그야말로 운수납자 생활
을 했다.
그가 열 다섯 살때 출가해 어언 몇 해인가. 떠도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승가에서 이르기를 비구는 乞僧이라고 했다. '거지중'이란 말이고 중은
곧 거지이고 거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프면 물로 배를 채우고, 여비
없으면 걸어다닌다. 그의 삶을 여지껏 지탱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비구,
걸승의 정신 한 가지 때문이다.

찬 달이 뜨면
찬 달이 만산 가득히 떠올라 오면

나는 가리라
이 육신 다 벗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실려
둥둥 떠나가리라
서방정토에 눈이 오는가 비가 오는가
바람이 부는가

그의 산문집 '저문 날의 목판화"에 실린 한 귀절이다.
찬 달, 寒月.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그렇게 그는 오고 갔다.
그런 그가 이제 한 자리를 잡아 머물곳을 마련하였다.
소백산 자락의 '一笑唵'이 그 곳이다.
들며 나며 한 번씩 웃으며 살자는 것이고, 만사를 一笑한다
는 것이기도 하다.
적음이 일소암에 들어가 무슨 일을 했을까? 그는 거기 머물며
시를 썼다.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저녁에(전문)

순수무구, 그 자체다. 여기서는 시적 기교도 메타포어도 필요가 없다.
시인 중에는 시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 사람
이 있다. 시처럼 사는 사람에게는 일거수 일투족이, 혹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가되고, 시만 쓰는 사람은 억지로 기교를 부려야 시가 된다.

우리나라엔 시처럼 살다 간 시인들이 몇 있다. 그 중에서도 천상병시인
이 우리 곁에 있다가 간 시인이고, 풍문에 의하면 김관식 같은 시인도
그러 했다고 들었다.
나이 사십도 훌쩍 넘어, 뜨거운 여름날 그는 나를 찾아왔다. 형, 보고
싶어서 왓어. 하룻밤 내내 술을 마시면서 그는 울었다. 좀 편하게 살 수
없느냐고, 좀 이 기나긴 터널을 벗어나서 안녕할 수 없느냐고.
그는 빈 손이다. 그 빈 손의 시인이 또 이런 노래를 한다.

흘라가는 강물속으로 몸을 적셨다가
달은 이 산상에 고이 떠있다.
한 사내가 서서 허공을 향해 오른쪽 손을 내민다
달의 몸을 만져보려 한다
웃으면서 달은 구름속으로
몸을 숨긴다

-산상의 달(일부)

달과 하나가 되어 시인은 무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게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놀고 있다. 아마 강물속으로 뛰어든
이태백이 이랬을지 모른다.

숲에 가려서 달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서서
달을 보았다

-숲속의 달 (일부)

현대시의 기법상으로 본다면 이런 건 시가 될 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가슴 한 구석이 녹아 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무기교의 기교다. 시란 느낌을 주면 그만이다. 느낌을 주기 위하여
온갖 기교가 필요한 것이지 기교를 위한 기교가 필요한 건 아니다.
시에는 시의 몸인 형식이 있고 시의 정신인 시혼이 있다. 둘이 합일이
되면 더 좋겠지만 비록 몸이 늘씬하지 못해도 그 내면의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지성미가 있듯 시혼에서 우러 나오는 아름다움도 있게
마련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느낌은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느낌이다.
그는 자연의 일부로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냥 서 있기만 한다. 그런
데도 나무와 달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몰아일체가 되는 공감대를 형성
한다. 이 공감이 바로 시가 아니던가.

禪詩에 가까운 시들을 묶어 시집을 낸다기에 몇 자 부끄러운 소리를
보탠다. 적음이 이제 그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이름 그대로 조용한 소리
를 내고 있거나 그 소리조차도 침묵으로 다스리는 시 작업을 하고 있다
는 생각에서다.



(적음 최영해의 약력)

寂音은 법명이고 본명은 崔永海(1948-2011)다
경주에서 태어나 15세 때 含月山 기림사로 출가.
동화사 혜붕노사께 내전을 이수하고 전국을 떠돌다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소요집', '저녁에'가 있고
산문집으로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
'저문 날의 목판화','가을 밤의 춤' 등이 있다.
그동안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의 '일소암'에서 혼자 살다 열반했다.


봉화 일소암에 기거한 시인 적음(최영해)의 갑작스런 부음을 받고, 지난 24일 가까운 지인
들이 모였다. 영주 이종문씨의 가게에서 고인을 기리는 추모식을 가지고, 여관방에 차린 빈소에
모두들 참배했다. 이종문, 신동여씨 등 지역 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하여 이청운, 전활철, 강찬모,
김언경, 이종길, 임헌갑, 주승자, 신준식, 이수영씨 등 30여명이 모여 그를 추억하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봉화군 수식리에 위치한 '일소암'을 들린 일행들은 방바닥에 남긴 시신의 흔적에서 오열을 터
트렸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발가벗은 몸으로 전기장판 옆에 반드시 누워 있었는데, 목을 벽에
기댄 것으로 보아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높은 온도로 올린 정기장판
의 열기에 옷을 벗고 옆쪽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한다.

시신은 부검을 위해 대전 과학수사연구소에 옮겨지고, 가족의 반대로 모든 영결식이 생략된채
시신이 돌아오는대로 안동에서 화장하기로 했다. 적음선사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지
못해 지인들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신용카드는 물론 차도,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었고, '일소암' 누거도
등기를 하지않아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고 한다.
무소유로 살아 온 그의 삶이 외롭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고통없이 편한하게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적음선사께서 저승에서나마 뜻을 펼 수 있도록 모두들 그의 명복을 빌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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