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40여 년 전에 진주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부산에서 최민식선생 인간사진집에 빠져 카메라 장만한지 얼마 안 된 무렵이다.

사실 그땐 사진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던 때라,

음악 찾아가는 여행길에 카메라가 따라 붙었을 뿐이다.

 

, 어릴 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독을 잘 씹었다.

왕따 같은 버릇을 고치려 친구들을 유별나게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다 술만 마시면 백팔십도로 바뀌는 괴짜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 술 마시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에겐 말도 못 꺼내는 쑥맥이다.

 

사진을 찍게 되면서 부터 여행을 자주 떠났다.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대로 갔는데,

그중 자주 갔던 곳이 서울 아니면 진주 진양호였다.

 

서울은 이태원에 레코드 사러 가며 신촌의 옥스라는 음악실에 들리는 일이 전부였다.

시커먼 공간에 쳐박혀, 시끄러운 하드락에 고막이 너덜너덜 하도록 개기는 것이 큰 낙이었다.

진양호는 까따리나라는 카페 때문이다.

고방자씨가 운영한 그 카페는 음악뿐 아니라, 대마초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


대마초 이야기가 나왔으니, 대개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적해야겠다.

마약이라는 누명도 당치 않지만, 대개가 그걸 피우면 심각한 환각에 빠진다고 착각한다.

단지, 오감이 예민해져 평소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음이나 맛, 생각이 깊어지는 것 뿐이다.

조용한 베이스음까지 세밀하게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느낌 때문에 음악인들이 자주 피운다.

제발 대마초 피우면 홍콩 간다는 헛된 생각이랑 버려라.

 

까따리나에서 음악 들으며 석양의 호수를 내려다보는 감상은 귀가 막힌다.

사실 음악이야 휴대용 녹음기인 워크맨으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지만,

좋은 오디오의 중량감있는 음악에다, 생각이 같은 벗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다. 

가끔은 혼자 진양호 주변을 산책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날, 대마초 한 대 피우고 인적 없는 진양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는데,

그 때 헤드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킹 크림슨의 아일랜드였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에 빠져, 마치 무인도에 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옆쪽 포구에 없던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낑낑거리며 물 길어 오르는 소년과 그걸 쳐다보는 여인인데,

돕지도 그냥 두지도 못하는 여인의 어정쩡한 자세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 뒤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말자 불심검문에 걸려버렸다.

장발에 헤드폰을 낀데다, 한쪽 알은 노란색이고 한쪽 알은 파란색인 선 그라스를 꼈으니

의심 받을 만도 했다. 그 때 둘러 맨 카메라는 니콘 FM이었.

옆구리엔 권총처럼 워크맨을 차고, 한 쪽엔 탄창처럼 생긴 필름 통까지 달았으니 궁금했을거다.


꼴 볼견이라 가끔 쳐다보긴 하지만, 대개 코메리칸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는데,

이 날은 좀 별난 세파트에 걸려 버렸다. 한사코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결국 파출소로 끌려 갔는데, 장발이야 개기면 되지만, 휴대한 대마초에 바짝 얼어붙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지품검사를 하겠단다.


탄창처럼 생긴 케이스부터 열어보라기에 필름 세통 꽂힌 것 중에

첫 통에 든 트리이액스 필름을 꺼내 보였더니, 대마초가 든 필름 통은 그냥 통과되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굴색이 완전 똥색이었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가라지만, 못 자른다고 버텼으니,

다음 날 즉결재판 때 까지 구치소에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치소화장실에 대마초 버리느라 007작전 버금가는 신경전을 펼쳤다.

 

그 이틀 날 집에 돌아와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부터 현상해 보았다.

별 것 없는 서정적 포구풍경이지만, 여인의 감정이 읽혀져 마음에 끌렸다.

부산의 원로 사진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해보고 싶었으나,

대개 트리밍 자나 들이대는 수준이라 싫었다.

나 혼자 별 것도 아닌 사진에 꽂혀 여기 저기 공모전에 출품도 해보았지만,

보내는 곳마다 미끄러졌다.


왜? 그 사진 한 장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같은 생각인 분이 있을 것 같아, 조그만 견본사진까지 갖고 다녔다.

한참 후 서울에서 언론인 출신의 평론가 서상덕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선생께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조형! 뜬 구름 잡는 예술사진은 하지 마세요.

사람을 찍을 생각이라면, 카메라를 그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드세요.”

사실, 평론하는 자신도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솔직한 선생의 충언에 할 말을 잃었다.

 

말씀을 새겨들었으나, 과연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건, 자신을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비우는 작업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진 아직까지 못 이루었으니, 사진이란 끝없는 고행이다.

아마,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그토록 못 잊어 한 것도,

그 깨우침을 두고 두고 새기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오는 20일까지, '스페이스22'에서 사진책 450여권 선보여

2018년 11월 11일 (일) 23:32:30정영신기자 press@sctoday.co.kr

우리시대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다루는 사진들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사장되기도 빛을 보기도 한다. 고통 받는 현실을 기록하며, 한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이 순간에도 그 누군가는 사진으로 시대를 증명하고 있다.


30년 동안 오롯이 한국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출판해온 ‘눈빛’이 지난 7일 대안공간 ‘스페이스22’(지하철 강남역 1번출구)에서 창립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와 북페어, 강연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선 눈빛출판사가 출간한 사진책전종과 사진가들의 원판사진, 눈빛아카이브가 수집한 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정태원, 권주훈, 엄상빈, 전민조, 장숙, 변순철씨등 20명의 ‘눈빛’사진집 표지로 쓰인 사진과 미 군정기 외국인이 찍은 코닥크롬 컬러사진 10점도 전시 되었다.




▲ 눈빛출판사대표 이규상, 편집장 안미숙 Ⓒ정영신


그리고 혼신의 힘으로 한길을 걸어온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가 한국사진의 개요를 정리한

‘지금까지의 사진 –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도 출간했다.

이 책은 현대사진의 경향과 흐름, 역사적 맥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80여명의 사진가 작품과 작가소개 등의 리뷰를 정리했다.


▲ '눈빛,한국사진의작은역사 1988-2018'이규상엮음 책표지 (사진제공:눈빛)


1988년 사진전문출판사로 시작한 ‘눈빛’은 지금까지 700여종의 책을 출판했다.

눈빛출판사는 미술평론가 정진국선생의 제의로 이규상씨가 편집장,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가 사장 겸 편집인,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유명한 여균동 감독이 주간을 맡아 1988년 설립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발간한 책은 프랑스 사진가 크리스 마커가 1958년 북한사회를 기록한 <북녘 사람들> 사진집이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이규상 대표와 부인인 안미숙 편집장, 그의 딸 이솔과 성윤미씨가 직원의 전부다.



▲ 눈빛출판사 자료모음중에서 Ⓒ정영신   


▲ 눈빛출판사 자료모음 Ⓒ정영신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고 새로운 사진과 숨은 사진가를 쉬지 않고 발굴해 온 ‘눈빛출판사’는 가난한 사진가들의 든든한 언덕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검증된 사진가의 책을 내기보다는 이름 없이 묻혀 작업하는 사진가들의 사진을 찾아내 책을 만들어왔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초심으로, 한권 팔아 다음 책을 준비하는 어려운 여건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안미숙 편집장은 “사진집은 사진가의 의도를 집약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출판의 꽃이다”고 말하며 “이미지로 읽은 책이 사진집인데, 우리나라는 활자위주의 교육에 치우쳐, 이미지를 해석하거나 읽어내는 훈련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700권의 책은 80%이상이 사진 관련이고, 나머지는 미술이나 문화 관련 책들이다.

안미숙 편집장이 추천한 책은 8.15해방부터 여수. 순천사건, 6.25전쟁까지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집으로,

외세와 남북한 냉전으로 이어진 해방직후의 역사적 민족사를 기록한 이경모선생의 <격동기의 현장>이다.

그리고 골목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과

한 평생 서민들의 모습을 담아 온 최민식선생의 <휴먼 선집>도 꼽았다.

지금은 세 분 다 고인이 되셨는데, 작가와의 인간적인 교류 속에 책을 만들어 행복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는 사진기술서가 전부였던 사진출판 분야에 현대사진의 이론을 소개하고,

30년 동안 역량 있는 새로운 작가를 배출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의 부흥을 일으킨 장 본인이다.

작가주의로 치닫는 사진가의 권위나 형식주의 사진에 선을 그으며,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선별해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평균 한 달에 두 권의 사진 책을 펴내며, 지속적으로 숨은 사진을 찾아낸 것이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특히 눈빛출판사가 시리즈로 선보인 ‘눈빛사진가選’은 잃어버린 풍경을 기록한 사진을 중점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59권을 펴낸 ‘눈빛사진가선選’은 한국사진의 대표시리즈로 발돋움시킬 야심찬 계획이다.

시대적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책임감이 큰데, 언젠가 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 ‘눈빛사진가선善’사진책전시 Ⓒ정영신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사 1919-2019’ 자료수집에 몰두하고 있는 이규상대표는

“사진 책으로 멋진 사옥을 짓는 꿈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며,

‘눈빛출판사’가 걸어온 지난 30년을 디딤돌 삼아 앞으로 30년, 300년이 번창할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말했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창립30주년 기념전은 강남역 1번 출구 미진프라자빌딩 22층 대안공간 스페이스22에서 오는 20일까지 열린다.

한국현대사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사진집을 모두 만날 수 있는데, 전시 기간에는 최고50%에서 20%까지 활인 판매 한다고 한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그리고 아래는 전시기간 중 대안미술 공간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강연 일정이다.


11월 10일(토)

오후 2시- 3시 30분 / '대항매체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 / 김성민 경주대 교수

오후 4시- 5시 30분 / 내가 바라본 격동한국 반세기 /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11월 13일(화)

오후 4시- 4시 50분 / 나와 아바이 마을 30년 / 사진가 엄상빈

오후 5시- 5시 50분 / 세계 속의 한국 사진 / 사진평론가 최연하

11월 15일(목)

오후 4시- 4시 20분 / 전AP통신 사진기자 김천길선생 추모행사

오후 4시 30분- 5시 20분 / 역사의 현장에 선 사진가 / 사진가 정태원

오후 5시 30분- 6시 20분 / 오늘의 기념사진 / 사진가 전민조

11월 17일(토)

오후 2시- 3시 30분 / 눈빛과 한국현대사진 30년 / 사진평론가 진동선

오후 4시- 5시 30분 / 인문학으로서의 한국사진의 지평 / 사진평론가 이광수


전시문의 : 대안공간 스페이스22 (02-3469-0822)


▲ 사진과 책이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곽명우)








김진열씨의 목판화전 ‘이웃’과 ‘모심’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열린 지난 17일 오후6시 무렵, 전시장에는 전시작가인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

미술평론가 이태호, 최석태씨, 화가 김 구, 손기환, 이인철, 이흥덕, 나종희씨 등 여러 명이 작품을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움을 뒤로하고 작품부터 돌아보니, 몇 년 전 그 장소에서 보았던 작품의 대상과 소재만 달랐지 작가가 말하는 메시지는 일맥상통했다.

철판을 주워 모아 시뻘겋게 녹 슨 금속의 질감으로 담아내었던 그 때 작품이나,

한 스린 민초들의 삶을 통해 우리민족의 아픔을 나타내는 시대정신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거친 노동의 투박한 질감이 주는 동질감이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전시된 김진열씨의 목판화에서 한 평생 인간에 초점을 맞추다 세상을 떠난 휴머니스트 사진가 최민식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그의 작품이 소외된 서민을 통해 인간애를 담아내고 동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려 했던 최민식선생의 작업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자신의 미학을 구현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서민들의 초상으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년에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꼭 받아야 할 작가라고 여겼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정신세계에 가장 적합한 작가가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그림만 그려내는 화가가 아니다. 그 생각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작가다.

오랫동안 원주에서 환경 운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해 왔는데, 지금은 대학 총장 직책까지 맡아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다.

학교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접하며, 진짜 그 학교는 복 받은 학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썩어 빠진 교육 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민중미술 경향의 칙칙하고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강한 소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사람중심의 작품에서 생명존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작품의 대상을 머리나 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공간인 원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찾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스쳐 가는 사람 모습을 스케치하며 사실적인 현장감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 온 것이다.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서성이거나 기다리는 모습에서,

서민적인 인간애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며, 그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과 착취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케 하는 것이다.






전시 제목에 붙은 이웃과 모심(母心)은 그 모심을 통해 생명존중과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보여 준 목판화도 처음 보았지만, 드로잉과 사진들을 나란히 배치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왼쪽에 배치한 흑백사진의 버려진 황량함과, 오가다 만난 사람을 드로잉한 그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자세와 표정이 다양했다.

많은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준 그 작품으로 작가가 이야기하려 한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소외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성 상실을 질책하는 것은 아닐까 유추해 본다.






아무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자신만의 특유한 기법으로 구현하는 김진열씨의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쓰레기 같은 작가가 넘쳐나는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가도 있다는 것이 살아야 할 한 줄기 빛이고 유일한 위안이다.


미술평론가들은 "김진열은 삶의 체험적 질료를 중시하는 작가"라고 규정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우리 시대의 인간적 꿈, 우리 자신이 간과하고 상실해온 꿈이 끈적끈적하게 깃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벌거벗겨진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







작가 김진열씨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전시장에서 내려와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사동 ‘평화만들기’ 옆에 있는 ‘자미향’은 숨은 가게라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민예총 관련 인사들이 자주 찾는 술집이다.

술 안주가 깔끔하고, 조용해서 좋다. 열 명 남짓 이층에 자리 잡았는데, 독방이라 술 마시며 놀기 안성마춤이었다.

뒤늦게 화가 정복수씨와 한겨레 임종업 기자가 들어오니 자리가 꽉 찼다.

 




그런데, 간장게장에 밥 비벼 맛있게 소주 한 잔 하는데, 개 한 마리가 들어왔다.

개도 개 나름인지라, 보기 싫어 고개도 들지 않고 뒷자리로 옮겼으나, 영 맘이 편치 않았다.

사람 될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진열씨가 곧 잘 하는 판소리 한 자락 못 듣고 와 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최민식사진상과 관련된 논란의 요지는 바로 예술지상주의 사진가들과

사진 고유의 기록성을 지키려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의 한 판 싸움이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결론부터 내놓고 싶다.
주관적인 사고로 작업하는 예술지상주의사진가들은 사진부문보다 미술부문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미발표작이 아니라는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에 다름 아니다.    최민식상 운영위원회나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선생의 이름으로 받은 수혜지만, 최민식선생을 뛰어넘는 사진예술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지 것 최민식선생의 작품을 아마추어 사진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민식사진상은 시작부터 잘 못 된 것이다.
최민식선생의 인본주의 정신을 이어받는 사진가들이 주축이 되어 집을 지어야 반석위에 세울 수 있는데,

선생을 허수아비로 세워 자기들만의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싶었으니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설계가 잘 못된 집은 완성되기 전에 허물어야 한다.
나중에 넘어지면 낭비되는 재물도 재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새로운 최민식선생의 집을 한 번 설계해 보자.
최민식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훌륭한 사진가가 있으면 힘 모아 그들의 전시와 출판을 도와주어

인본주의 다큐멘터리를 부흥시키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새로운 스폰서가 생겨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위의 사진은 78년도 무렵, 부산 초량의 한 모퉁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배고파 잠든 엄마와 울다 지친 아기의 모습을 보며 전생에 무슨 죄로 저렇게 고통 받을까 생각하며 찍었다.

당장 일으켜 세워 식당부터 데려가야 할 텐데 말이다.

잠든 머리맡에 천원짜리 지폐 한 장 눌러 놓고 스스로 위안했으니, 늘 마음의 빚으로 여기며 살아 왔다.

그래서 최민식선생을 따르는 사진방식은 버렸다. 그러한 큰 그릇이 되지 못했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선생님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그 사람을 알아야 찍었고, 눈을 마주쳐가며 찍어왔다. 사진은 딱딱하지만...

그리고 사진으로 말아먹고 서울로 야반도주해 30여년을 힘들게 살아왔으나

한 번도 사진을 시작하게 된 최민식선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선생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바로잡아

선생의 이름을 기리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도움받아 온 선생들까지 싸잡아, 가까운 후배들에게 막말 한 것이다.

 

널리 양해 바란다.

조문호



[최원호의 美美하우스] 최민식의 (휴먼선집)

비평가 이영준은 2008년 출간한 <비평의 눈초리>(눈빛 펴냄) 서문에서 '사진의 본질' 같은 것은 이제 개념 없는 지도교수들조차 쓰지 않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한물갔다는 뜻이다. 본질이니 정수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후기 구조주의를 받아들인 사진 비평계에서 방을 뺏긴 지 오래였다.

사진가 최민식은 2009년 출간한 <사진은 사상이다>(눈빛 지음)에서 끝없이 사진의 본질과 정수에 대해 말했다.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은 리얼리즘 사진을 위한 프로파간다 텍스트라 할 만하다. '인간', '메시지', '감동', '사회', '삶-인생', '가치', '깊이' 등의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해 등장한다.

그리고 이영준은 2012년에 출간된 최민식의 사진집 <휴먼 선집>(눈빛 펴냄)의 서문을 썼다. 재미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서문에서 이름을 막 발견했을 때는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서문은 예상대로 (이제 와 비평적 요소로 삼기에는 곤란한) 최민식의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열망 이외의, 동시대에 비평적으로 적용 가능한 특성을 찾았다. 동시에 최민식의 사진들이 사진가 본인의 의도대로 작용하기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쉬움을 전한다.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 알아봤다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범주적으로 늦은 것이다. 즉 그의 사진이 한참 시대의 결을 거스르고 빛을 발할 때는 못 본 척하다가 시절이 좋아지고, 뭐든지 표상 가능하고, 따라서 그의 사진의 힘이 상대화하여 흐물흐물해지고 나서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은 너무 일찍 나타났거나 너무 늦게 나타났다."


사진가가 세상을 뜨고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서문은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운 헌사처럼 보였다. 최민식의 사진이 소비될 수는 있으되 작동하기는 어려운 상황. 나는 거기에 대해 부연하고자 한다. '사진가 최민식'이 위대한 인간임을 증언하는 말들은 이미 많으므로, 그의 유일한 유산인 사진들의 작동 여부에 대해 말함으로써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리고 싶다.

▲ <휴먼 선집>(최민식 지음, 눈빛 펴냄). ⓒ눈빛

최민식이 사진을 찍기 시작할 전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최민식 사진의 지류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 가족전' 사진들이며, 또 하나는 화가 밀레다.

'인간 가족전'은 20세기 중반에 사진가이자 기획자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이 기획한 대규모 전시회였다. 많은 사진가들의 작품들 중에서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선택되었다. 사진이 찍힌 조건은 다양했다.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후진국, 핵가족과 대가족…. 사진 속의 사람들이 처한 환경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모두 공통된 태도, 즉 가족을 위시한 국지적 소집단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인간 가족전'은 반복되는 '훈훈한 휴머니즘'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인류라는 하나의 대가족을 느끼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대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어떤 위기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촛불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가족전'의 주제는 이토록 노골적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류의 보편적인 미덕, 사랑 말이다.

최민식은 이 사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들 중에서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 가족전'적으로 기능한다. 고난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인생의 희로애락.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는 최민식의 사진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 가족전'이 비평가들에게 비판받았던 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전시회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사회경제적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보편적인 애정을 통해 하나로 묶이면서, 그들은 단일한 인류처럼 보인다.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뒤로 숨겨지고 '인류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 가족전'이 순회 전시되던 세계 대도시의 관람객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열악한 환경의 드라마틱한 피사체들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인류 보편이라는 감수성은 사진 속의 사람들을 자신들(관람객들)과 같은 위치로 손쉽게 끌어올려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미국 중산층의 가정과 아프리카의 험난한 상황 속에서 지은 웃음이 같은 것일까? 한 번 웃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고통의 양은 동일한가? '인간 가족전'은 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진들 속의 웃음은 그런 질문을 거부한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인간 가족전'과 똑같은 약점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참담한 민중의 삶을 보여주려던 작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와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 인터넷 서점의 어떤 최민식 사진집에는 철암 출신의 한 독자가 쓴 리뷰가 있다. 그는 타지 사람들이 철암을 찍은 사진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구경거리화하는 대중적 사진 소비 방식 때문이다.

 

▲ '인간 가족전'에 포함되었던 작품 '플룻 연주자'. ⓒ유진 해리스(Eugene Harris)

 


 

 

최민식의 사진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상 '인간 가족전' 유의 인류 동조화 시스템은 언제든지 동작 가능하다. 게다가 그 시스템의 동작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최민식이 사진을 찍은 시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가족전'이 공간적(선택된 대도시)으로 사진 소비자들을 비극적 현실과 격리시켰다면, 최민식의 사진들은 시간적으로 사진 소비자들로부터 서서히 격리된다. 최민식의 사진들은 정말로 너무 늦게 다가온 것이다.

사진이 동시대에서 벗어나 노스탤지어로 진입하는 순간, 사진의 고발은 '그때는 그랬었지'라는 회고의 형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일'로 타자화된다. 이 두 가지 반응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해함은 '우리(시공간을 넘어선 희로애락의 공동체)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 가족전'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는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고발한다는 최민식 사진이 맞닥뜨리는 커다란 딜레마다. 특정 시공간에서 벗어나 보편성 속으로 던져진 고발은 작동 가능한가?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발은 이미지 속의 인간-피해자를 사물화된(인간성을 박탈당한)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왜 인간이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반대의 방향을, 낮은 곳에서의 역설적인 존엄을, 폭력 또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고 우는, 신성불가침의 휴머니즘을 선택했다.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밀레의 대표작들은 주로 노동하는 농민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다. 이 노동들은 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그 엄숙함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노동을 노동 이상의 행위로 치환함으로써 노동과 농민의 삶에 대한 질문을 차단시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의 농민 그림들은 열렬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노동을 감동과 숭고함으로 치환하면서 불안의 그림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인텔리였던 밀레와는 달리 민중을 삶 속에 직접 품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밀레처럼 노동자를 엄숙화한 미적 사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밀레의 그림처럼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 최민식의 '부산, 1965'. ⓒ눈빛출판사

저널리즘 사진의 한 분야인 피처(feature) 사진은 어떤 사실의 전달보다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통해 간접적인 정보 전달과 감정적인 자극을 목표로 하는 분야다. 최민식의 능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피처 촬영 능력이다. 때로 구도 등에 아랑곳 않고 완전히 피사체 자체에 집중해 결정적인 제스처를 잡아내는 그의 능력은 단연 눈에 띈다. 민중의 희로애락을 포착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인상 깊은 표정을 잡아내는 과정을 통해 피사체를 어떤 특별한 위치로 이끈다. 그런 사진들 속에서 가난한 민중들은 빛이 난다. 위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화면 전체를 장악한 피사체가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를 뿜어내는 순간, 사진이 주는 이야기는 완결되어 버린다. 사진 속의 표정과 몸짓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 뒤에 자신이 표출하는 감정을 이야기의 종결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피사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작은 세계의 의미계를 장악하는 순간에 그 피사체는 그 사진 속의 신이 된다. 이것은 어떤 숭고함, 즉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일거에 상쇄시키는 편리한 숭고함이다. 던져질 수도 있었던 질문과 불편함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인간성인가)이라는 편리한 형태로 번역되어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보는 이는 마음 편히 감동에 임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사진은 고발할 힘을 잃어버린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이라고 불리는 순간, 휴머니즘은 고발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동의 형태로 번역된 휴머니즘은 민중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그의 삶은 완전히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맞추었던 초점이 그가 지향하던 곳을 정말로 향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최민식은 2007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바로가기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 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 아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야.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했어.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적 의미보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기도 해."

그러나 그 존엄성이 사진을 향해 던져졌어야 할 물음을 차단하지는 않았는가? 폭력적인 비극에 인간미와 숭고함을 덧붙였을 때, 그리하여 사진이 스스로 답을 던져주었을 때 누가 사진을 향해 질문할 것인가?

3년쯤 전에 후배와 저녁을 먹었다. 후배는 최민식 사진가를 얼마 전에 만났다고 했다. 후배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더니 그는 '아주 열심히 할 게 아니면 얼른 그만 두라'고 답했다 한다. 최민식 사진가는 워낙 힘들게 작업을 해 오신 분이니 그런 고생쯤 각오하라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별다른 조언은 아니어서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다 얼마 전 선생의 추모 웹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지나간 기사들을 뒤지던 중에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래 부분을 볼 때였다.

"내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없이 천착해온 인간이란 주제가 정말로 정직한 것이었던가 그는 이 책에서 되풀이해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라고 따졌을 때, "딸아이가 나에게 던졌던 말이 수도꼭지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나를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한겨레> 2006/12/15 기사)(☞바로가기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

 

사진가 최민식(1928~2013). ⓒ눈빛출판사


나는 후배가 조언으로 구해 들었던 '열심히'라는 말이 단지 외부적인 고난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호도 인간을 위한 리얼리즘을 의심한 적 없다는 그가, 의심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과 얼마만큼 싸워야 했을까 싶어서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잦아드는 회의와 의심을 평생 동안 '아주 열심히' 막아내며 살아야 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자기 확신의 과정이 최민식의 사진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그 힘이 도리어 원래의 의도를 벗어나게끔 조장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게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달리 어쩌겠는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토록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닌 척하고 두 발짝 물러나 사진을 찍고 빈 공간을 통해 질문을 던지겠는가 말이다. 이제 나는 <휴먼 선집>을 타협할 수 없는 인민에의 사랑으로 살아 온 한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읽는다. 아니, 그렇게 읽혀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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