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화백의 부인 김태순여사가 지난 18일 오후3시 30분, 소천하셨다.
파킨슨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려 13년 동안 고생하시다 운명하신 것이다.

장경호씨로부터 전해들은 비보에 가슴이 아팠지만,
고통스러운 삶의 끈을 놓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셔서 이승에서 못다 한 행복을 오래 오래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했다.

왕십리에 있는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나섰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 이틀 동안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병원 주변에 핀 철쭉이 눈부셨다.
비에 젖은 처연한 자태에서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본다.

장례장을 들어서다 양평에서 온 민정기화백 내외를 만났고, 

서양화가 장경호, 조신호, 이인철, 박홍순씨를 만나는 등 반가움의 연속이었다.

접객실에는 딸 신목원, 신세원, 신전원, 신윤원씨가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영안실에는 사위 김우원, 최정열, 배정암, 윤호석씨가 예를 올리고 있었다.

항상 그랬지만, 문상객을 맞는 신학철화백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저 얼굴의 그늘을 언제 거두어 드릴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

사진,글 / 조문호

 

 

 

 

 

 

 

 

 

 

 

 

 

 

 

 

 

 

 

 

 

 

 

 

 

 

 

 

 

 

 

 

 

 

 

 

 

 

 

 




 

 

간밤에, 죽은 사진기자 김종구씨를 만났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대뜸 “조 선배! 강촌에는 언제 올 거요?”라고

물었다. “응 시간 맞춰, 근일 간에 한 번 갈게”라며 헤어졌으나, 꿈이었다.

“왜, 갑자기 죽은 종구씨가 꿈에 나타났을까?” 옛 생각에 잠시 빠졌다.

강촌은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곳이지만 한 번도 못 가봐,

늘 마음의 빚이 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김종구씨는 인사동에서 청춘, 아니 인생을 불사른 사진기자다.

인사동과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류탄 가루에 범벅이 된 몸으로 ‘귀천’에 앉아 진토닉 한 잔으로 울분을 삼킨 그다.

인사동 좋아하고 친구 좋아 해, 틈만 나면 인사동에 나와 마셔댔다.

하기야! 그 암울한 시대에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기도 힘들었다.

 

술에 절은 까만 얼굴에 큰 입으로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근무하는 중학동의 ‘한국일보’사가 인사동 지척에 있었으니,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인사동 거지 예술가들에게 김종구씨는 영원한 호구며 구세주였다.

대개 ‘실비집’에서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죽은 적음시인은 늘 목을 매고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마셔대더니, 결국 둘 다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술 만 얻어먹은 것이 아니라 필름도 얻어 썼다.

사진기자들은 필름에 구애받지 않아, 사진하는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꼬불쳐 둔 필름을 한 두통씩 건네주곤 했는데, 너무 고마웠다.

특히 시위현장에서 필름이 떨어지면, 그를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87년도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 수정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진들을 수정하다 종구씨의 취재장면이 담긴 모습을 만난 것이다.

명동성당 입구에서 박종철 추모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취재진 속에 섞여있었다.

육교 위의 나에게 카메라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이 사진을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개의 사진기자들이 별도의 카메라로 자기가 필요한 대상도 찍지만, 그는 고지식했다.

그 사진하기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한 눈 팔지 않았고, 남는 시간은 술 마시는데 소진했다.

‘한국일보’ 사진부 소속으로 ‘주간한국‘의 오지 촬영을 했을땐, 별도의 작업도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후 아까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필름이 늘 궁금했다.

몇 년 전 두번째 부인으로 부터 '유카리화랑'의 노광래씨에게 전달되었다기에,

마침 천상병선생 20주기를 맞아 사진집 출판을 준비하던 즈음이라 찾아 나섰다.

특히 인상적인 그의 사진은 ‘귀천’에서 천상병선생 옆에 앉아 목여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었다.

그 필름을 비롯한 천상병선생 관련 자료들은 찾아 몇 장 빌려 쓸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인터뷰 때 찍은 포트레이트사진들이 어수선하게 화일에 꽂혀 있었다.

 

사진기자로서 한국일보사에 남긴 기록적 사진자료들은 많겠지만,

사진으로 20여년을 살아 온 한 사진가의 자료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래, 죽으면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데 남겨봤자 뭐하겠느냐“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간 밤에 꿈에서 한 그의 말이 영 찜찜했다.

“강촌에 언제 올거냐?”가 아니라 “저승에 언제 올거냐?”란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이! 술 귀신아~ 그거는 저승사자인 니가 더 잘 알지, 살아있는 놈이 우째 아노“

 

사진,글 / 조문호

 

일요일 오후,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급히 마무리하다 컴퓨터가 탈이 나, 짜증스러웠다.  
오랜만에 찾은 손님 앞의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손님은 담배와 막걸리를 사왔다.
평소 담배를 사지 않아,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담배 향이 좋다며, 안 피우는 아내까지 합세해

모두들 피워대니 좁은 방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담배에 대한 아내의 은근한 압력이 느껴졌다.

 

막걸리를 마시며, 그 날 작업은 포기했다.  

날더러 쉬라고, 귀신이 손님을 보낸 걸로 생각하며

 앞뒤 없는 잡담들을 노래삼아, 낄낄거리고 웃었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매번 시간에 쫓겨 허급지급 인사동에 나온다.
하던 일을 일찍 끝내면 될 텐데, 그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더구나 어르신과의 약속에서 늦을 땐, 민망스럽다.
바삐 나오다 보면 핸드폰이나 중요한 것을 빠뜨릴 경우도 많다,
요즘 길거리에 벚꽃이 만발하지만, 곁 눈질 할 새도 없다.

지난 10일에는 모처럼 느긋하게 집을 나왔다.
평소 다니던 지름길로 가지 않고 외곽으로 돌아갔다.
따스한 봄볕이 내려 쬐이는 교회당 길은 너무 평온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벽돌 틈바구니에 민들레가 돋아나 있었다.
단단한 벽돌 틈을 어떻게 비집고 나왔는지 신기했다.
곧 사라질지라도, 사는 동안은 꽃을 피우며 웃고 있었다.
가로수의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철쭉도 금방 터질 것만 같다.

잠깐의 여유에서 맡을 수 있는, 이 삶의 향기!
때로는 체 바퀴 도는 삶의 틀에서 한 발자욱 벗어나 보자,

애들처럼 옆길로 빠져, 말썽이라도 한 번 부려보자.

 

사진, 글 / 조문호 

 

 

 

 

 

 



 

 

내일 모래면 70을 바라보는 늙은이 주제에, 일 생각 밖에 없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찍고 또 찍는다.

이젠 찍는 것 보다 사진 정리에 더 많은 시간을 쓰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그 버릇의 첫째는 필카에서 디카로 바뀌면서 부터다.

언제 우리가 필름 걱정 안 하며 이렇게 마음대로 찍은 적이 있었던가?

둘째는 다큐사진가 정영신을 아내로 맞고 부터다.

조가 잘 맞아, 오늘에 만족하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나이 탓에 마음의 조급함도 있을게다.

하기야! 젊은 시절 친구들을 좋아해 너무 많이 놀았다.

늦게 철이 난 건지, 망령이 든 건지 나도 모르겠다.

 

서양화가 장경호씨가 술만 취하면 주문처럼 외는 말이 생각난다.

“대충 삽시다,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월28일, 동강할미꽃 축제장에서 뜻밖의 조각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귤암리 사는 지동진씨 소개로 만난 김영철씨는 이웃마을 비룡동에 산다고 했다.
이주 한지가 3년이 넘었다지만 여지 것 모르고 있었는데, 새로운 동지를 만난 것 처럼 반가웠다.

그의 작업들이 궁금해 곧 바로 비룡동 작업실에 처들어 갔다.
'불교미술조각연구소'란 작업실 외곽에는 불상들과 현대조각품들이 앉거나, 서 있었고,
작업실 두 칸에는 불교조각들과 공구들이 늘렸는데, 한 작가의 깊은 내공이 엿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조각가 김영철씨는 혼자 살고 있었다.
산골에서 혼자 살면 외롭지만, 한편으론 자유롭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외로움 보다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실 한 켠의 서재에 낮익은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일곱권으로 만들어진 도록 '한국불교미술대전'인데, 책에 실린 사진들을 필자가 찍었다.

94년 무렵, 몇 년에 걸쳐 찍은 전국 사찰 원고를 ‘한국색채문화사’로 넘겼으나,

출판사가 부도나 천만 원이 넘는 사진 원고료를 받지 못한, 사연 깊은 책이다.

동네 주민들과의 협조는 잘 이루어지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물을 내려 보내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관청의 무관심이 더 의욕을 잃게 한다고 말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깊은 산속에서 살아 온 정선사람들의 오랜 배타적 습성이라며 위안했으나,

오랫동안 겪어 봤기에 그 고충이 이해 되었다.

이제 정선 비룡마을의 김영철씨 외에도 ‘그림바위’마을의 이재욱씨와

북평면 문곡리 남평분교에 작업실을 둔 이영학씨 등 정선에 거주하는 조각가가 세 사람이나 된다.
나전에 있는 ‘인형의 집’, 신동의 ‘추억의 박물관’에 이어 조각가들의 조각공원도 만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작가들의 작업과 연관된 장터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작업공방들도 만들었으면 한다.

장승공방, 솟대공방, 사진방, 음악방, 문학방 등 다양한 작업실을 오픈하여

관광객들이 또 다른 정선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정선, 작가의 방 투어'라는 관광코스라도 만들면 어떨까?

사진,글 / 조문호

 

 

 

 

 

 

 

 

 

 

 

 

 

 

 

 

 

 

 

 

좌로부터 제주 환경원예조경연구소 김희주 소장 내외와 조각가 김영철씨 그리고 화가 정봉길씨




1980년대 중반 이태원의 밤 문화를 기록한 사진가 김남진(58)씨의 “이태원의 밤” 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12집으로 출간됐다.

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사진전은 4월 3일부터 14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린다.


 

 

28년이란 시간을 간직한 빛바랜 사진들이 눈빛출판사의 열정어린 집념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사진들은 87년도 ‘파인힐 화랑’에서 전시를 했지만, 그 이후 안타깝게도 필름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한다.

사진집 “이태원의 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87년 전시회 때 인화해 두었던 사진을 스캔해서 만든 것이란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은 지구상에서 단 한 장뿐인 오리지널 프린트라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

지난 3일 개최된 사진전 개막식에는 김남진씨를 비롯하여 윤주영, 주명덕, 구자호, 이규상, 이갑철, 엄상빈, 김보섭,

안미숙, 제이 안, 이규철, 남 준, 이광수, 곽윤섭, 곽명우, 박중하, 강재욱, 양시영, 나떠구, 윤은숙, 서지영, 박신흥,

안해룡, 이한구, 장 숙, 최재균씨 등 많은 사진인들이 참석해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글 / 조문호

 

 

 

 

 

 

 

 

 

 

 

 

 

 

 

 

 

 

 

 

 

 

 

 

 

 

 

 

 

 

 

 

 

 

 

 

 

 

 

 

 

 

 

 

 

 

 

 

 

 




 

다큐사진가 이갑철씨 '제주 1980’

한국인의 역동적인 신명과 삶의 기운을 포착해온 다큐사진가 이갑철(56)씨가 1980년대초 찍었던 제주 작업을 처음 대중 앞에 내놓았다. 서울 강남의 사진대안공간 스페이 22에서 1일 막을 올린 <바람의 풍경, 제주 천구백팔십>이란 제목의 개인전이다.

84년 첫 개인전 <거리의 양키들>로 데뷔하기 전인 79~84년 그가 제주에서 찍은 사진 48장을 선보인다. 뭍의 관광객들이 막 몰려들던 그 시절 제주의 여러 빛바랜 풍광들이 눈에 감기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섬의 풍광과 사람들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의 흔적들까지 포착했다. 언덕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옷을 휘날리며 기원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과 잔디밭을 걷는 아녀자의 너풀거리는 옷자락 등이 바람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2002년 사진계를 뒤흔든 전시 <충돌과 반동> 이래 작가의 등록상표가 된 흔들리는 화면과 기울어진 사선 구도, 초점 없이 흩어지는 대상 등의 특징이 초창기 사진 속에 이미 엿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씨는 “제주에서 마음을 강하게 끌었던 게 바람”이라며 작가노트에 썼다. “바람은 끌고 당기는 힘의 역항을 이루며 제주섬 어디에나 내재되어 있었다. 그 긴장감이 좋았다…이 사진들은 삼십여년 전 내가 바라본 바람의 풍경들이다.”


서울 청량리 588 사창가의 80년대 풍경과 삶을 담은 조문호씨, 84~86년 찍었던 이태원 유흥가 작업을 풀어낸 김남진씨의 전시에 이은 80년대 재조명 흐름의 하나다. 이씨는 지난달부터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1년간의 부산 작업을 모은 <침묵과 낭만> 전시도 하고 있다. 열화당에서 이번 전시와 같은 제목의 사진집(80쪽)도 나왔다. 전시는 24일까지. (02)3469-0822.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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