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 유행가 자락이다.
술꾼들은 예수님 말씀을 너무 잘 듣는다.
원수라는 술을 그토록 사랑하니까...






술 때문에 먼저 간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닌데다,
더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질 못한다.
사랑이 아무리 진하다지만, 목숨 바치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술자리를 피해 인사동도 한 낮에 가지만, 며칠 가질 못한다.
저녁 먹자는 김명성씨의 뻔한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봐야 할 전시도 있어, 서둘러 인사동으로 달려갔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깊숙이 박혀있는 유담 커피집에는
김명성, 김용국씨와 함께, 제주에 사는 이용철씨도 와 있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술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요즘 김명성씨 패거리는 술도 인사동에서 마시지 않고, 연신내에서 마신다.
그 곳은 불러 낼 술꾼도 많은데다, 음식이 맛있고 싸기 때문이다.
연서시장 안에 있는 ‘똑순내’집이 단골인데, 주모의 넉살도 죽인다.
여럿이 간장게장에 병어 찜을 안주로 실 컨 마셔도, 오만원이면 떡을 친다.





삼청동 '이노갤러리'에 들려, 전시장 지키던 강찬모화백 까지 데리고 갔다.
데모대 막는 경찰에 막혀, 택시 안에서 돈만 버리다, 결국 지하철을 타야 했다.
먼저 간 김병국씨가 술상 차려놓고 기다렸는데, 술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해인, 이만주. 서길헌씨가 왔고, 늦게는 최벽호씨 영화 찍는데 갔던 오세필씨도 등장했다.






그 날의 화제는, 오래전 인사동 ‘실비집’이나 '시인통신'에서 퍼 마시던 이야기였다.
추접 떨기로는 사진기자 김종구를 당할 자가 없었는데, 

막걸리 주전자에다 여름철 꼬랑내 나는 양말을 휘휘저어 짤아 마시지를 않나,
어떤 놈은 한 술 더 떠, 똥딱지 묻은 빤스까지 벗어, 술에 짤아 쳐 마셨다.
벌주로나, 기 싸움으로 마시는 호기도 천태만상이었다.






그 지긋 지긋하던 일들도, 이제 아련한 전설이 되었는데,
강찬모씨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었다.
지금에야 술을 멀리하여 부처같이 살지만, 그도 예전엔 꼴통이었다.





어느 놈이 커다란 막걸리 주전자에다, 남자변기에 붙은 누런 찌꺼기를 끌어 넣었다고 한다.
한 참을 마시다 주전자에 덜거덕 덜거덕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변기 찌꺼기를 걸러주는 마게였다고 한다.






아무리 더러워도 모르고 마시면 약이겠으나, 알고 나면 속이 뒤집힐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위생을 따지는 요즘 잣대라면, 다들 병 걸려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 목숨이 생각보다 질긴 것이다.






서울역에 사는 노숙자들을 보면 알 수있다.
그들은 물을 겁내는 족속이라, 목욕은 커녕 손도 씻는 일이 없다.
항상 더러운 손으로 상한 음식을 먹어도 배탈도 나지 않는다.
몸은 길들이기 따라 내성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자리의 객기는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옛날 꼬맹이 시절에 아버지 친구들이 어울려 벌이는 기행을 엿 본적도 있다.
소리꾼 정상수씨가 운영하는 기방에, 울 엄마 정탐꾼으로 아버지를 찾아 갔는데,
기녀 고무신에다 술을 따라 마시고 계셨다.
다들 알만한 점잖은 분들이라, 기가 막혔다.






그 후 어른이 되어, 그 때의 기행이 풍류로 느껴지며 나도 서서히 물든 것 같다.
술이 취하면 객기를 부리는 것이 다 그 때 영향이 아닐까?
아니면 부전자전이던지...






그 다음에는 죽은 술꾼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쪽방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사람은 다 술꾼이다.

진짜 술이 원수다.



인사동에서 갤러리하던 김용철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 날 처음 들었고,
배불둑이 박진관씨도 몇일 전 혼자 객사했다.

그저께는, 술 취해 가던 김수길씨가 쓰러져 119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해인씨가 ‘인사동 유목민’이란 소설을 쓰며, 그동안 죽은 술꾼을 헤아려보니, 4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술 마시던 김명성씨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먼저 일어나야겠다는 것이다.

놀란 오세필씨가 데려다 주었는데, 지금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수 십 년을 같이 마셨지만, 그런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켰던, 그마저 간다면 이제 끝나는 것인가?

다들 술 때문에 죽을 판이지만, 그래도 악을 쓰며 마신다.


“그래 죽자.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아트가이드 11월호 스크랩]











흐르는 세월에 인사동 혼이 다 달아난다.

두 달 전에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심우성선생께서 이승을 떠나셨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신봉승선생 등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 뒤 따라 가신 것이다.



 


인사동엔 여러 층의 예술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무엇보다 문인들의 텃밭이었다.

70년대 관철동에서 인사동으로 건너와 인사동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시인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살아계시지만,

기력이 쇠진하여 인사동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강 민시인의 외로움만 깊어져 간다.

틈만 나면 노구를 끌고 인사동을 기웃거리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지팡이에 의지한 모습을 보니, 이년 전의 심우성선생 모습이 연상된다,



 


더 걱정인 것은 한 가닥 인사동 정서나마, 이어받을 후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렇게 인사동 영혼은 빠져나가고, 인사동의 낭만도 사라지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 24일에는 모처럼 강민선생님과 점심 약속을 했다.

페북에서 간간히 인사는 드리지만, 뵌 지가 오래되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꾸물대는 습관으로 또 늦어버렸는데, 그 자리에는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선생,

'답게출판사' 장소임 대표, 사진가 정영신씨가 먼저 와 식사하고 있었다.



 


강민 선생께선 눈도 침침, 귀도 가물가물하다는데,

곰탕에 든 고기를 끄집어내, 술 안주하라며 접시에 담아주었다.

김승환선생께선 벌주로 술병을 든 채, 잔 비우기만을 기다리시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 단숨에 마시는 원 샷은 한 잔에 맛이 가버려, 잘 마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상머리 화제는 강민선생과 장소임씨의 인연으로 옮겨졌다.

30년 전 강민선생께서 금성출판사상무로 재직할 무렵,

장소임씨가 강민선생의 자문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출판사 차릴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강민선생께서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출판사 차려 오늘에 이르렀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신 때마다 오찬을 베풀어 드리는 등, 강 민선생을 각별히 챙겨왔다.



 


장소임씨는 올 해로 답게 출판사창립이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도 가질 것이라 했다.

출판사 이름도 사람답게로 바꿀 생각이라며,

답게 라는 여러 종류의 상호를 등록하여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등 출판사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는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며,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강 민선생께 드린 것이다.



 


물론, 가난한 시인의 용돈을 챙겨주는 일이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 건 도리가 아니다.

드리려면 봉투에 넣어 정중히 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모르게 드리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걸 모를 분이 아니잖은가?

그걸 보니, ‘답게 출판사와의 오랜 악연이 되살아났다.



 


약 십 오년 쯤 된 일이다.

'답게 출판사'에서 천상병선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내 사진을 사용하였지만, 원고료는 커녕 작가의 승인이나 사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 전재한 것이다.





내가 찍은 천상병선생 사진은 8X10규격으로 뽑아 서명까지 하여 목여사께 드렸는데,

그 사진을 출판사 임의로 사용한 것이다.

물론 목여사는 저작권에 관한 관례를 몰라 주었겠지만, 출판사는 당연히 챙겨야 할 문제다.

더구나 사진에 서명까지 되어있는데도 무단 전재한 것은 상식을 넘어 양심 불량인 것이다.

그 당시는 '답게 출판사'나 장소임 대표를 전혀 모를 때였으나,

전해 준 천상병선생 사모님 얼굴보고 참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넘겼더니, 한참 후 또 문제를 만들었다.

일간신문에 책 광고를 내면서 내 사진을 그대로 게재한 것이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어 출판사대표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당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목여사를 시켜 원고료 10만원으로 깔아 뭉갰다.

신문광고용 사진원고료가 얼마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목여사가 아니라그 누가 부탁해도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매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



 


몇 년 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천상병을 말한다는 책을 만든다며 글 쓰 달라는 원고 청탁을 해 왔다.

천상병선생 이야기라 흔쾌히 쓰 주었는데,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그것도 답게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광래씨가 글 쓴 원고료라며 십 만원을 전해 주었으나, 그 책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진이 두장이나 실려 있었다.

사진 원고료는 물론 한 마디 양해도 없었지만, 인사동 궂은 심부름 하는 노광래씨 안면으로 또 그냥 넘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출판사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스스로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 셈이고, 잘못을 그냥 넘겨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진가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시비를 가리는 것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요 모양 요꼴로 만들었다는 뒤늦은 자책에서다.



 


그 이후 천상병기념사업회이사회에서 답게 출판사대표와의 첫 상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는 커녕,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말이 저작권침해지 한마디로 도둑질인 것을 모를 리 없겠으나, 모른 채 하는 것이다.

가난한 다큐 사진가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지만, 돈이나 밝힌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다행히 인사동 터줏대감 강 민선생을 잘 모신다는, 고마움에 입 다물었던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식사하며 천상병선생의 책은 8쇄에 이른 책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니, 저작권을 침해한 잘 못도 잊은 것 같았다.

뒤늦게 나온 책에는 사진의 출처나 밝혔는지 모르겠다.

괜히 답게 출판사’ 일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일어나 김진열씨 목판화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옮겼다.

군중들에 휩싸여 걷는 두 선생의 어깨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4층까지 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 따라 갔더니, 김진하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고. 한 쪽엔 '문화연대' 임정희씨도 있었다.

오르느라 힘은 들어도 좋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 좋은 전시를 공짜로 보여 주는데도 안 오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다음엔 커피 한 잔하는 일만 남았는데, 선생님의 단골집이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벽치기 골목의 유담커피숍으로 갔으나, 그 놈의 개는 왜 그리 짖어댈까?

내가 개처럼 생겨서일까? 아니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낮 술에 주저리주저리 떠벌였는데, 선생님들께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이시여! 제발 세월에 휩쓸려 가지는 마십시요.

부디 건강을 지켜 오래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전시도 보고,
반가운 분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오래 된 인사동 사람은 너무 잘 알아 지겹기도 하겠지만, 인사동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사도 더러 있어, 나가지 않을 수도 없다.






지난 17일은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진열씨의 목판화전으로, 그런대로 많은 분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이태호, 최석태, 김 구, 손기환, 나종희, 이흥덕,
이인철씨를 만날 수 있었고, 뒤풀이집 ‘자미향’에서는 정복수, 김종업씨도 만났다.
그런데,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장경호씨가 나타나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더 슬픈 것은 사과는 커녕,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 듣고도, 술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간다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골목에서 이인섭씨와 노광래씨를 만났다.
다들 술이 고픈지, ‘평화만들기’에 한 잔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조해인 시인과 남해의 진공선사와 함께 있었으나,
반가운 설 주 한잔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페북을 열어보니, 귀가 찬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몇 일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만났던 박윤호씨가 이상한 표정의 내 사진을 올려놓고,
줄줄이 장난질의 댓글을 올려놓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도 너무 공격적으로 찍는다.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사진을 고른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명색이 변호사란 최혁배씨가 문호 꼴 보기 싫다는 등 작난 글을 올려 놓았는데,
내가 지 친구거나 후배라도 그 따위 말을 페북에 올릴 수 없다.






그보다, 미운 정이니 어쩌니 댓글 단 박윤호씨의 처사가 더 괘씸했다.
그것도 나에게 링크까지 해둔 걸 보니, 나 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어 졌지만, 지랄 떨다 내리겠지 생각하고 양양으로 촬영을 떠났다.
한 밤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의 처사를 나무라며, 지켜보겠다는 댓글만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 확인하니,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문제의 댓글만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도 사진 찍어 올리면서 사진 내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럴려면 나부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놓는 박윤호씨 사진은 모두 내려야 했다.





작심하고 컴퓨터에 눌러 붙어 박윤호씨 이름과 사진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으니, 그가 찍힌 사진이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때문에 함께 찍힌 다른 분들 사진까지 내려야 할 경우가 많았다,
온 종일 찾아 지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다 지우고 나서, 다시 페북에 들어가 당신의 사진과 글은 모두 삭제했으니, 내 사진을 내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한 참 후에야 사진을 내리고는 줄줄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이 따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단지 죄라면 30여년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웃기려 애썼던 것 뿐이다.
술자리에서 개똥철학이나 풀며 거룩한 표정 지어봤자, 피차 피곤하다.






씨잘 데 없는 소리지만, 술 자리에서 한 번 웃으려고 한 말을 두고,
그 자리에선 좋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웃고 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흑사리 쭉지로 알고, 몰캉하게 본 것 같다.

이젠 사람 좋다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다.






씨바!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막다른 길의 싸움꾼이다.
선배고 후배고 세상에 민폐 끼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도, 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한 번 지켜보라. 나쁜 놈들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은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충무로 '비움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사진전에 오래된 추억들이 떠올랐다.
유행가에 나오는 눈물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슬프기도, 우습기도 한 “희비쌍곡선”이다.






고등학생 시절 영화에 미쳐, 미아리 있었던 ‘서라벌예대’에 들어가려 안달한 적 있었다.

울 아부지는 “줄만서면 들어가는 딴따라대학 들어가 딴따라 될끼가?”며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 할부 책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눌한 주변머리에 책 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팔았다 하면 망하는 회사에 풀어, 돌려받느라 혼 줄 난적도 여러 차례다.






친구 자취방에서 잠은 끼어 잤지만,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모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미아리 학교 주변을 기웃거렸다,

고갯길의 중국집에서 공갈빵 하나 사서 간신히 허기를 메웠는데, 그 공갈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공갈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사서 고생 하다 결국 집으로 잡혀 갔지만, 몇 달 동안 미아리 주변을 맴돌았던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다른 추억 하나는 20여년 후, 사진에 미쳐 두 번째 야반도주했던 때 이야기다.

인사동 친구들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시다, 단체로 미아리 택사스에 몰려 간 것이다.

박ㅇ수 시인 덕에 누린 호사였는데, 정말 죽이더라. 그때 난생 처음 계곡 주를 맛 보았다.

그래서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열 명이 넘는 사내와 계집이 발가벗고 술 마신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난다.

이정환씨의 ‘미아리 이야기’가 그만 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정환씨의 전시가 열리는 ‘비움갤러리’가 충무로 대한극장 주변에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진 한다는 놈이 사진전문 갤러리 위치를 모른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대한극장 주변을 맴돌다 결국은 이정환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시장이 마치 미아리 택사스 촌처럼 어두컴컴했다.

전시장에는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가 있었는데, 푸르스름한 조명이 좀 야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전시된 사진들은 그리 야하지 않았다.





이정환씨는 미아리에서 태어나 55년의 세월을 미아리에서 살아 누구보다 미아리를 잘 알고, 추억과 애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한 때 영화 전문가였다. 30대부터 컴퓨터 그래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각종 CFCG작업을 했다.

신 씨네와의 인연으로 국내 최초의 CG영화 구미호CG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늦게 사진을 시작해 옛날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사진을 했다면, 완전한 미아리 역사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사진마다 미아리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옥상 난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개를 찍어 추억을 상기 시키기도 했다.





점집 앞에 제수로 엎어 놓은 돼지가 비정한 오늘의 현실을 말했다.

아파트가 미아리를 잠식해가는 사진에서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했다. 

비닐 막을 통해 보이는 꽂집 풍경과 택사스촌 입구를 지키고 앉은 여인, 음습한 유흥가를 지나는 발길들,

가로등이 조는 밤늦은 뒷골목 등 하나같이, 오랜 기억을 불러들이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는 골목에 대한 애착도 대단하다.

그동안 '국제 골목사진전'과 '골목은 살아있다'에서 보여주었듯이 '골목'에 대한 그의 철학이 남다르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장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해 보여 준, '우연한 의도'전과 '미아리 이야기' 모두 장소에 대한 기억의 연장선상이다.





사진 속 공간 공간에는 사람 살아가는 끈적한 인간애가 배어있고, 변해 가는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이 묻어 있었지만,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사랑과 미움의 갈등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릴 때부터 살아 온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아파트 무리에 밀려나겠지만, 마지막 파수꾼처럼 묵묵히 지키며 기록하는 것이다.

예술 한다며 멋 부리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바라 본 것이다.
사진에서 만나는 것들은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늘 찾는 대상이었다.

그 미아리의 아픔을...






아래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 전시 서문 일부다.

"추석 즈음, 모 교수의 칼럼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걸 따라 하자면 나에게 "미아리는 무엇인가?"
나에게 미아리는 태어난 장소, 곧 자궁이요, 고향이다.
나에게 미아리는 놀이터요, 나에게 미아리는 삶의 터전이요,
나에게 미아리는 사회성을 키워준 공간이요,
그러고 보니 미아리는 내 삶 그 자체인 거다.
나는 미아리에서 태어나서 55년을 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큰 일 났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인사동으로 나오라는데, 부르는 사람이 거절 못할 사람이다.

낯에는 송추에서 밤에는 응암동에서 퍼 마신 터라 힘들었고, 술 취해 자다 받은 전화라 더 황당했다.

 





죽기보다 일어나기 싫었으나, 술 취해 혼자 갈 수 없다는 어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인사동으로 나갔으나, ‘유목민에는 없었다.

전활철, 박혜영, 장경호, 안원규씨가 있었으나, 다들 취해 있었다.





박혜영씨는 사진 찍어 달라하고, 장경호씨는 욕지껄이로 시비부터 걸었다.

전활철씨가 "형!"하며 반기니까, “어떤 놈은 좋아하고 어떤 놈은 싫어하냐?”

전활철씨 더러 씹할 놈이라는 등 쌍욕을 해댔다.

너 그렇게 싸가지 없이 지껄이고 살아남은 게 용하다 말을 남기고, 정영신씨 찾으러 큰 길로 나갔다.






전화를 걸었으나, 불통이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사동 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는데, 공휴일의 인사동이라 그런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인적 없는 인사동은 그리 흔치 않다. 가보지도 못한 북한의 밤이나, 아니면 난리 난 것 같았다.






다시 벽치기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좀 전에 없었던 낮 익은 사람이 보였다.

화가 한상진씨와 미술평론가 황정수씨가 와 있어, 반갑게 인사 나누었다.

유목민에 들어가보니, 그 때야 정영신씨가 와 있었다.





저런 인간하고 왜 살아? 버리고 나랑 연애나 하자는 말을 장경호가 정영신씨께 지껄였다.

남의 말이나 엿듣는 것 같아 못들은 척 참았으나, 들어 가 밟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말이면 다 말이냐? 선배가 아니라 친구라도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황정수씨 더러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산의 이광수교수 욕은 왜 해댈까?

나와 가깝다는 이유일까? 아니면 이런 사람도 안다는 가오 세우려 그럴까?

여지 것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피하는 게 불쌍해 아껴주었는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어디 있냐?






앞으로 그 인간이 다니는 술집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며,

그를 부추기거나, 술 권하는 사람까지 안 보기로 작정했다.



    


정영신씨를 데리고 나왔는데, 마치 지옥을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 인사동마저 징그러워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이 모처럼 서울 도심을 벗어나, 송추에서 뭉쳤다.

무슨 미련에 못 떠나는지, 인사동 주변을 기웃거리는 예술가들이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만나 대포 한잔하기로 한 것도,
위안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나 몇 나오지도 않는다.






지난 셋째 수요일 만남에서 송추로 소풍 한 번 오라는 화가 전강호씨의 초대가 있었다.
개천절인 3일 정오 무렵, 송추에서 만나자는 조준영시인의 연락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송추유원지 부근에 있는 전강호씨 자택에서 모처럼 자연과 벗이 어울린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전강호씨는 산을 눈앞에 두고 있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누리고 산다.
가 본지가 10년도 넘어 좀 헤맸는데, 주변이 많이 바뀌었더라.
처음 보는 건물들이 많아 낮 설었지만, 집에 들어가니 산을 정원처럼 끼고 앉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 날은 날씨마저 받혀주어. 따스한 햇살에 온몸이 노글노글 했다.
전강호, 이종순 내외는 물론 조준영, 박윤호, 김민경, 유진오씨가 먼저 와 있었고,
민영기씨 승용차에는 김수길, 공윤희씨가 도착해 내리고 있었다.






인삿말에 동네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더니, 땅값도 몇 배나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는 집값이 오르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지천에 늘린 밤도 줍고,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 모이를 주는 등,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뒤늦게 화가 정순겸씨 자매와 사진가 하형우씨도 왔고, 한 때 인사동의 ‘풍류사랑’을 운영했던 최동락씨도 오셨다.






이 반가운 술자리에 노래 한 자락 없어서야 되겠는가?
소리꾼 김민경씨 노래야 여러 차례 들어 잘 알지만, 유진오씨 노래는 처음들었다.
마치 “여자의 일생”을 살아 본 것처럼 처절하게 웃겼다.






그러나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다들 무세중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병문안이라도 가야 했지만, 다들 술 마신 상태라 들리기가 좀 그랬다.
요즘은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으로 간신히 사신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한 분야 획을 그은 예술가의 여생이 이러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화가 전강호씨는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가 어언 30여년이 넘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목발로 어지간히도 인사동 주막을 누비고 다녔다.
그동안 강용대, 김종구, 적음스님, 신원섭씨 등 술로 이승을 떠난 친구도 여러 명이다. 



 


유신시절에는 사마귀 작가로 불릴 만큼, 사마귀 그림에 집착하기도 했다.
곤충의 군림자 같은 사마귀 형상에서, 작가의 시대적 저항을 읽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버려진 폐자재를 활용하여 다양한 작업들을 했으나, 돈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힘겹게 주워 모은 폐자재들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번씩 술과 외출을 자제하고 수행하는 모습은 스님을 닮았다.





그는 한쪽 다리가 없지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다.
그림은 물론 집 주변의 조경이나 모든 것들이 그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다.
텃밭을 가꾸며 직장에 다니는 아내 뒷바라지까지 다 한다.
부지런한 생활에서 예술을 찾아내는, 삶 자체가 예술이다.






푸짐한 안주 덕인지, 아니면 가을 날씨 때문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가져 온 민영기씨 일행이 일어나, 나도 일어나야 했다.
버스타기 번거로워 끼어 탔으나, 많이 아쉬웠다.

술과 안주도 남았지만, 남아 있는 벗들이 더 눈에 밟혀서다.





아무튼, 전강호씨 내외 덕에 가을 소풍 잘 다녀왔다.
손님 맞느라 애쓴 두 내외분께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볼거리 풍성한 '인사동박람회'가 10월 6일부터 10일까지열려...





인사동이 오는 6일부터 10일까지 5일동안 청사초롱 축제 장으로 바뀐다.
'인사 전통문화 보존회'에서 주최하는 '2018 인사동 박람회'가 인사동 전 지역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인사동을 인사동답게'라는 취지로 열리는 "인사동 박람회'는 인사동 상인들 주체가 되어 전통문화 공연, 고미술 전시, 한복 퍼레이드, 전통음식 시식 등 다양한 행사들을 벌인다.

올해는 개막일인 6일과 7일 이틀간 저녁 6시30분부터 상인과 학생 200여명이 청사초롱으로인사동 밤길을 환히 밝힐 예정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국제 박람회로 성장한다는 목표로 국제전 '중국 장시성 징더전(景德鎭) 작가전'을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4층에서 연다. 아라아트센터 2층과 3층에서는 고미술 오방색전과 화랑 아트페어가 진행되며 행사가 진행되는 5일 동안 짚풀 공예, 표구·용기 시연, 도예·염색 체험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마련돼 있다.

이번 행사는 인사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젊은이들이 한국 전통문화와 함께 성장하자는 취지로 '꿈나무', '전통문화', '한복'이라는 세가지 테마로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서울관광고등학교와 백석예술대학교가 처음부터 행사 준비에 참여했다.

정용호 인사전통문화보존회 회장은 "인사동 내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며 싸구려 중국

상품들이 들어오는 등 전통성이 많이 무너졌다"면서 "이 때문에 박람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중국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국가 작가들을 초청하고,

2022년에는 국제문화엑스포로 성장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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