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짬] '시력 50년' 기념문집 헌정받는 서정춘 시인


선후배 동료 문인들이 지은 ‘서정춘 시’만 40편에 이르는 서정춘 시인은

그 자신 누구보다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지난 봄 인사동에서

소산 박대성 화백 전시회 때 모습. 김경애 기자


                                   

“그라이 그거시 참 황당한 현상이라…, (내가) 말실수를 많이 하니께 동물원 원숭이 보듯 재미있는지, (나를) 내려놓으니 밀가루 반죽하듯 맘대로 편하게 자기들 식으로 빚는 것도 같고… 이유가 나도 궁금하다니께요.”


그는 내내 부끄럽다면서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자의 반 타의 반’ 동의를 했다고 덧붙였다. 바로 ‘시력 50년’ 기념으로 특별한 자료집을 헌정받는 <시인 서정춘>(가제)의 주인공 서정춘(77) 시인이다.


일찍이 문단에서 그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대표작인 ‘죽편1―여행’은 가객 장사익이 노래로 부를 정도로 예술인들의 애송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주제나 소재로 삼은 작품’을 모은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선후배 문인들을 비롯해 예술인들이 ‘한 시인’에게 영감을 얻어 창작을 한 것을 두고, 30일 전화로 만난 서 시인은 ‘왜냐’고 되물었다.


1968년 서정주 심사한 신춘문예 당선
정년퇴직때 등단 28년만에야 첫 시집
지금껏 시집 5편…과작으로도 유명


등단 50돌 맞아 자료집 ‘시인 서정춘’
문인들이 노래한 ‘서정춘 시’ 38편 모아
엮은이들 “시적 엄격함에 대한 존경”


‘시 공부 10여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꼬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 할게 너는 능금 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메 징한 사랑아!!’ 서정춘 시인은 2017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기념일’에서 일본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서울 청계천변’(1965년작)에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을 털어놓았다.


“수년 전부터 책으로 남겨두면 좋겠다고, 권유를 했는데 그때마다 한사코 마다하셨어요. 올해는 마침 등단 50돌이시니 더는 미룰 수 없어, 밀어붙였지요.”


<시인 서정춘>의 공동 엮은이이자 역시 시인인 도서출판 비(B)의 조기조 대표는 “현재까지 나온 ‘서정춘’을 노래한 시 40편을 찾아냈고, 이 가운데 38편을 1부에 실었다”고 소개했다. 책의 2부에는 ‘서정춘 시인의 시에 대한 짧은 단평’을 정리하고 수많은 평론들은 목록만 넣었다. 3부에는 서 시인의 가족을 포함한 사진과 연보를 담았다. 지난 2015년 <봄, 파르티잔> 시집 출간 기념으로 열린 시화전 ‘시와 그림, 결혼하다’ 때 이제하, 마광수, 박불똥, 마광수 등 29명의 예술인들이 그려준 작품도 일부 곁들일 예정이다.


‘서정춘 시’를 가장 먼저 쓴 이는 고 박정만 시인이다. 서 시인과 같은 1968년 ‘등단 동기’인 그는 81년 ‘한수산 필화사건’ 때 고문 후유증을 술로 달래다 88년 40대 초반에 세상을 떴다. 작고 직전 3개월 사이 무려 300편의 시를 쏟아낸 그는 서 시인에게 보내는 ‘그리운 형에게’ 등 2편을 유작처럼 남겼다. 서 시인 역시 술중독에 빠진 동기를 일으켜 세우고자 ‘명태―박정만에게’로 화답했다.


서 시인의 글은 비교적 최근에야 공개된 ‘등단 뒷얘기’ 딱 한편이 들어갔다.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잠자리 날다'를 뽑아준 심사위원 서정주를 서울 공덕동 자택으로 찾아간 자리에서,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권하며 칭찬하는 대선배 미당에게 “전날 밤 황룡 꿈 꾸고 당선됐습니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다.


2012년 사진작가 육명심의 <예술가의 초상> 출간기념 사진전 때
위아래로 나란히 내걸린 서정춘(위)·서정주(아래) 시인의 모습.
미당은 서정춘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잠자리 날다’를 뽑은 심사위원이다.
           


‘서정춘 시’는 위로는 60년 등단한 선배인 고 정진규 시인부터 아래로는 2000년 등단한 후배 장이지 시인까지 ‘서정춘’을 지었다. 69년 등단한 동년배인 이시영 시인(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은 3편이나 썼다.


가장 최근작으로는 맹문제 시인의 ‘그해 봄 서정춘 만세가 있었네’가 나왔다. ‘대통령 탄핵 다음날 우리는 광화문광장에 모여 한바탕 만세를 부른 뒤 골목 식당에 들어갔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한국작가회의 만세! 자유실천위원회 만세!/ 함께한 얼굴들도 서로 부르며 만세! 만세!/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한바탕 더 부른 뒤 서정춘 시인에게 〈부용산〉을 청했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랫말은 슬펐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광장을 울릴 만큼 크고 당당해 우리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불렀네/ 서정춘 만세!’(<시인동네> 2018년 9월호)


책 출간을 가장 먼저 제안하고 공동 엮은이로 나선 하종오 시인은 “김수영 시인을 비롯해 작고 문인에게 바치는 추모나 헌정시는 적지 않지만, 당대에 이처럼 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된 인물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두 엮은이를 비롯해 시적 성향이 전혀 다른 시인들이 모두 ‘서정춘’을 좋아하는 현상도 이채롭다. “서 시인은 ‘구두쇠’라 부를 만큼 과작이고, 단문이면서, 서정적이죠. 다작에 장문이고 참여적인 저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죠.”(하종오) “우리 둘 다 개인적으로 서 시인과 사적으로 인연이 없는 ‘의외의 후배’라는 점에서 더 뜻깊은 작업이죠.”(조기조)


서 시인이 등단 28년 만에야 첫 시집을 펴낸 연유도 지금과 비슷하다. 그는 동향 문인 김승옥 작가의 소개로 입사한 동화출판공사에서 고졸 학력의 한계를 딛고 28년 봉직하고 정년퇴직한 날에 맞춰 <죽편>(1996년·동학사)을 펴냈다. “퇴직하고 나면 쓸쓸해질 것 같아, 한번 묶어 본 것이다. 20년 전부터 시집을 내자고 보채온 유재영(동학사 대표) 시인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지금껏 그는 5편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그처럼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서 시인에게 수많은 예술인들이 끌리는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 하 시인은 “아마도 작품의 엄격성에 대한 공감과 존경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정작 서 시인은 “이달 말께 책이 나오면 조촐한 자리를 만들어,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싶다”며 웃었다.


한겨레 : 김경애 기자ccandori@hani.co.kr


      






















지난 6일 인사동 ‘툇마루’에서 ‘인사모’ 모임이 있었다.

‘인사모’는 ‘통인가게’ 김완규씨를 주축으로 하여,
원로 변호사 민건식씨가 회장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모인지가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요즘은 모임이 좀 뜸하다.
예전엔 매월 만났지만, 작년 망년회 후로 처음이다.






그 날 모임에는 민건식 회장을 비롯하여 김완규, 박일환, 조균석, 박원식, 강윤구,
전국찬, 윤경원, 김길선씨 등 열 명이 자리했는데, 안 나온 분이 많았다.
다들 건강한 모습이라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첫인사가 이번 여름 탈 없이 잘 보냈냐는 말이었다.






이 모임의 특징은 법조인과 사업가, 예술가가 어울린 모임인데,
요즘은 예술가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는 게 바쁠까? 아니면 모임에 큰 의미가 없어서일까?
아마 끈적한 연대감이 없어서 일게다.






사람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인데,
바빠서 라기 보다 사는 게 가족중심으로 치우치다보니,
주변에 관심이 멀어진 것일 게다.
그러니 만나도 정겨운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사치례의 말들만 나누다 노래방으로 옮겨간다.
그 날도 여섯시에 만나 식사가 끝난 시간까지 정확하게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어나기 직전에 윤경원씨가 나타나 20여분 더 지체했지만...






인사동 ‘선화랑’ 맞은편에 노래방이 생겼다는 관우선생의 정보에 따라갔다.
노래방으로 옮겨 노래백과를 들추기 시작하는데, 다들 한 참을 헤 멘다.
법관 출신들이라 육법전서는 잡았다 하면 바로 나오는데 말이다.






박원식씨의 노래 ‘삼각관계’가 테이프를 끊었다.
친구냐 애인이냐의 다소 신파적인 노래였다.
민건식회장의 ‘나그네 슬음’을 비롯하여 십팔 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다들 가수 빰 칠 정도로 잘 불렀다. 연이어 100점이 터졌다.






나더러 ‘봄날은 간다’를 부르라고 충동질했으나 손을 내저었다.
왜냐면 오늘 틀니를 끼고 나왔기 때문이다.
음식 맛도 제대로 모르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해 좀처럼 끼지 않으나,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점잖은 모임이라 점잖게 끼고 나왔는데, 영 죽을 맛이었다.






노래도 부르지 않으면서 노래방은 왜 따라 갔냐하면,
혹시 더 이상 못 만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오늘 일기를 살찌우기 위해서다.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를 한곡씩만 감상한 후,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진 것이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노래는 박일환씨가 부른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다.
음정은 따라가지 못했지만, 가사에 묻어나는 감정이 진득했다.
마지막 대목에선 마치 '인사모'의 이야기처럼 애절했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사진, 글 / 조문호


























맹위를 떨치던 더위도 순식간에 물러나고, 어깨를 짓눌렀던 아들 결혼식도 잘 마쳤다.
하늘을 날 듯 홀가분해야 하는데, 왠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허롭다.






지난 3일 오후 여섯시 무렵에는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가야했다.
정영신씨가 결혼식에 오신 분들을 모셔서 술 한 잔 대접해야 한다는 채근에서다. 
비오는 날 술 마시러 나오라는 자체가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데다, 
스스로 술자리 만드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정영신씨가 술값은 걱정 말랬으나, 연락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누군 하고 누군 하지 않으면 욕먹을 수 있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전화번호를 모르는 페친도 있는데 말이다.






불편한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날씨마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러나 ‘유목민’에 나온 인사동 사람들을 만나니, 불편했던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그 분들 얼굴만 쳐다봐도 술이 땡기더라.






김명성, 오세필, 임태종, 전활철, 장경호, 김태서, 임헌갑, 임경일씨가 먼저 자리 잡았고,
뒤이어 김 구, 이정환, 김효성, 김종신, 이인섭, 공윤희, 이상훈, 이태규씨가 나타났다.
인사해야 할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런 구분조차 무의미했다.
다 반가웠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하다 보니 슬슬 취하기 시작했는데, 
내일이 내 생일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공윤희씨가 케익 하나를 사 온 것이다.
하루 당겨 생일파티도 하자는 배려였지만, 내가 제일 거북하게 여기는 일이 아니던가.

생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관심도 없지만, 축하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예전에는 모르게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요즘은 폐북 때문에 인사받기 바빠,

생일만 되면 페북에서 탈퇴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모두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난 왜 이리 생각이 비뚤어졌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나무라며 홀짝홀짝 마셨더니, 손님보다 내가 먼저 취해 버렸다.






술 취한 핑계로 모든 뒷 일은 정영신씨에게 떠넘긴 채, 혼자 동자동으로 도망쳤다.
택시비까지 얻어 왔으나, 사람 차별하는지 택시조차 나를 피해 다녔다.
결국 서울역 가는 버스를 탔는데, 제발 주제 파악 좀 하라는 것 같았다.





굳은 택시비로 노숙하는 친구들과 한 잔 더하려고 서울역사 방향으로 갔는데,
아는 자들은 모두 취해 뻗어 있었다.
꾸물꾸물한 이 날씨에 어찌 취하지 않고 견딜소냐?





마침 술이 덜 취한 유한수씨가 나를 보더니 반색 했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내고 방으로 기어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날 술 값을 김효성씨가 먼저 계산해 버렸다는 것이다.
혹 때려다 붙인 격인라, 제발 쓸데없는 일 좀 만들지 말라며 죄 없는 정영신씨께 신경질을 부렸다.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아, 서울을 잠시 떠나려고 작정했다.
내일 정선으로 떠나 심신을 추스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엔 연극배우 이명희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시가연’으로 오라는데,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와 버렸다.
지난 밤 과음해 술은 마시지 않을 작정으로 찾아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나리는 인사동 밤 거리가 술을 불렀으나, 이를 어쩌랴!
‘시가연’에는 이명희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강경석, 박경룡씨가 나왔다.
‘시가연’의 김영희씨로 부터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후 여덟시부터 김선범씨 무대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선범씨는 울산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올라 온 분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 홍수진과 가까워 나도 잘 아는 분이라 했다.
그러나 만나보니,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엊그제 만난 분도 잊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필름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동아리를 30년 동안 지도했다고 한다.






좌우지간 김선범씨의 노래가 시작되었는데, 첫 곡이 그 날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님이 오시나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이장희의 ‘비의 나그네’였다.
‘쟈니기타’를 비롯하여 80년대 시절 노래들이 지난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들였다.
이명희씨는 김현승시인의 ‘가을의 기도’를 구성지게 낭송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기도와 사랑과 고독이 삼위일체가 되어 자연에 동화하는 아름다운 시였다.






‘시가연’을 찾은 손님들도 틈틈이 불려나가 노래 한곡씩 불렀는데, 다들 가수 빰 치는 솜씨였다.
난, 술 마시지 않으면 노래는 커녕 말도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 아니던가.
오후 일곱 시부터 자정까지 장장 다섯 시간을 눈앞에 술을 두고도 못 먹는 고문을 당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주여! 다시는 이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아트가이드 9월호 스크랩]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이런 저런 관습에 따른 저항에 부딪힌다.

가난한 형편에 엄청난 돈을 예식비용에 쏟아 붙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놈의 쓸데없는 격식은 그리도 많은지...



 


결혼식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더러워진 몸의 때보다 마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다.

탕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저런 불편한 마음을 닦아내며, 아들의 행복을 축원했다.

그 불편한 마음들은 모두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좋은 말도 잘 못 전달되면 욕이 될 수 있고, 별 것 아닌 말도 오해하면 독이될 수 있는 것이다.

더러는 선입견이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말보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 불편함을 유발시킬 때가 더 많다.

잘못된 일을 알게 되면 아무리 가까워도 지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일도 감추지 않아 가족으로 부터 원망을 들을 때도 있다.



 


그리고 종교는 잡종이다. 기독교에서 천주교, 불교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은 토속적인 무속을 좋아하나, 사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불쑥 종교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깥사돈 남선우씨와 친구 배평모씨,

그리고 내가 천주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돈이 된 남선우씨는 16년 전에 우연히 한 번 만난 적 있는 분인데,

상견례 자리에서 혹시 배평모씨를 모르냐?“고 물어 온 것이다.

자신이 배평모씨의 천주교 대부라는 것이다.

배평모씨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한 때 내 대부 역할을 한 적이 있어, 

그 별난 인연에 놀랐다.



 


배평모씨에게 전화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연락처를 몰라 끊어진 사돈과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 같았다.

오지랖 넓은 친구라 걱정은 되었으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에게 전화해 블로그에 올린 글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자식 놈이 속도위반해 손자 가졌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자랑이지 욕일 수 있나?

싸가지 없는 말버릇에 더 울화가 치밀어 니 걱정이나 하라”는 말이 튀어 나왔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혼식에 참석한 다음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안부 전화로 알고 잘 내려갔냐?‘며 인사부터 했는데다시 신경 건드리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의 사돈과 통화를 했는데..“라는 말에 갑자기 불쾌했던 그 날이 생각났다.

데없이 사돈에게 전화질 해 말 물어 나르지 말라며 끊어 버렸다.



 


또 다른 일은 정영신씨에게 일어 난 이야기다.

그동안 햇님이를 친자식처럼 여겨 물심양면으로 애를 많이 써왔다.

결혼식에도 나가서 인사동 축하객을 맞기로 약속했는데,

당일엔 전화를 꺼 놓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이 찾았지만 감감소식이었.



 


결국 결혼식이 끝난 밤 늦게서야 만났는데, 그 사연을 들으니 귀가 찼다.

어느 지인의 전화질에 마음이 상해 하루 종일 돌아 다니며 방황했다는 것이다.

“네무슨 자격으로 예식장에 가냐?”며 가서는 안 될 자리라고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햇님이 친모도 니 색시는 안 왔냐?”며 걱정했는데 말이다.

사람 관계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다들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참견해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 뿐 아니다. 혼주가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안 되고,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단다.

별의 별 관습이 나를 다 불편하게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양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사진찍는 것은 반가운 사람 만났을 때 하는 나의 인사법이다.

사람 찍는 사진쟁이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길들어 온 민족성 때문인지, 관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난리 나는 줄 안다.

자기에게 조그만 덕이 되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난 24일 밤은 결혼식 전야제를 하자는데, 술 마실 핑계도 다양했다.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김명성, 최백호, 이상훈씨도 인사동에 나와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부터 찾았으나, 태풍소식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여자만부산식당을 거쳐 결국 '툇마루'에 자리 잡은 것이다.



 


김명성, 최백호씨는 결혼식 날 선약이 있어 축의금만 보냈단다.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지만, 예의가 아닌 말을 뱉고 말았다.

한 사람 식대가 오 만원씩 들어가니, 안 오면 더 좋아





'유담'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유목민에 장경호, 김상현, 이한성씨도 있었다.

지나가던 이정황감독까지 합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제작에 관심 많은 최백호씨가 은근히 걱정되더라.



 


결혼식을 끝낸 그 이튿날은 유목민에서 착복식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불편한 양복을 입어 착복식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방에서 올라 온 벗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만든 핑계거리였다.

옛날 시골에서 결혼하면 이웃이나 친구들이 어울려 하루 종일 놀았는데,

요즘의 결혼 풍속도는 너무 야박해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집부터 들려 편치 않은 양복부터 벗어버렸다. 그리고 불편한 틀니도 뽑아버렸다.

결혼식 때문에 틀니를 끼웠더니, 음식 맛도 모르겠고 발음까지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광대처럼 차려입은 불편한 것들을 모조리 해체하니 속이 후련했다.



 


유목민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김용문, 박상희, 전강호, 임태종,

유진오, 이명희, 전활철,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고,

툇마루에는 장경호, 헨리윤, 김진두, 배성일, 신상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목민으로 합류한 뒤에는 이인섭, 신명덕, 한상진,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착복식 한다며 큰소리치고 나갔는데, 지갑에 돈이 십만 원 밖에 없었다.

정영신씨를 만나지 못해 생긴 일로, 돈도 없으면서 혼자 큰 소리 친 셈이다.

처음엔 임태종씨가 계산하고, 나중에는 조준영씨가 부족분을 메웠으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자식 핑계로 즐겁게 놀긴 놀았는데, 너무 취해 버스 종점까지 가버렸다.


어차피 내 인생은 좌충우돌 연착이다.

 

사진, / 조문호

































 



넋전 춤에서 절규하는 심우성선생



인사동,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
우리 전통문화와 인사동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심우성선생께서 지난 23일 오후1시 숙환으로 소천하셨다.




인사동 '신궁장여관' 계실 때의 모습



심우성선생께서 '공주요양원'으로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었다.
몇 달 전에 전화 드렸더니, 목소리에 외로움이 절절했다.
“한 번 내려와”를 반복하셨는데, 미루다 기어이 가지 못했다.
철천지한을 남기고 말았다.



인사동 '푸른별이야기'구석방을 사용했던 집필실에 계시는 모습


심우성선생은 인사동을 짝 사랑하여 상사병 난 분이시다.
다들 변심한 풍정에 고개 돌리지만, 인사동을 그토록 못 잊어 했다.
한 때 인사동 벽치기 골목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을 집필실로 삼아,
밥은 '화목식당'에서, 잠은 신궁장여관에서 주무셨지만,
그 때가 선생께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민시인의 생신을 맞아 많은 친구분들이 모였다.


"무정한 세월아! 제발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다 데려가면 남은 사람 어찌 살란 말인가?”


어쩌면,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게 사람인지 모른다.
잘 나갈 땐 파리떼 처럼 들끓어도, 기력 쇄하면 금세 사라진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까지도...






얼마나 외로움의 한이 컸으면, 태풍까지 몰고 오셨겠는가?
부디 노여움 거두시고, 넋전 춤으로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장례식장 : 공주장례식장 101호 (041-854-1122)
발인 : 2018년 8월25일 오전9시
장지 : 의당면 율정리 향원
상주 : 심하용, 심가용




민속학자이며 연행예술가인 남천(南泉)심우성(沈雨晟 :1934.6.28~2018.8.23)선생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였으며,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위원과 공주민속박물관장(1996∼2010)을 역임했다.
민속 문화를 연구 계승하는 데 평생을 바치며, 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와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도 지냈다.
1959년 ‘꼭두각시놀음’을 재연하여 민속놀이 1인극에 큰 족적을 남겼고, '민속문화론 서설'등 10권의 저서와 2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작으로는 "심우성일인극장", "문", "장안산조", "무등산조", "남도들노래", "판문점별신굿", "넋이야 넋이로구나", "새야새야" "결혼굿",

“넋전 아리랑” 등의 공연활동을 이어오며, 서울시 문화상, 향토문학예술상 수상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아래사진은 살아 생전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선생의 삶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란다. 












































































심우성선생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던, 두 살무렵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최명철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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