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

민중미술의 선구자

출생-사망 1936,2,11-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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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

민중미술이 유행하던 80년대 이전부터 미술계 전반에 걸쳐서 그 권위를 인정받으며 양심적 지식인으로 문화운동을 주도한 미술인 김윤수. [민족미술과 리얼리즘]이라는 평론집을 통해 민중미술의 이론적 틀을 만들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며 예술의 사회적 방향을 찾는 데 힘써온 그의 굴곡 깊은 인생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미술평론가 김윤수 인터뷰 영상

고등학생 시절의 김윤수 선생.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김윤수 선생은 중학생 때부터 문학에 심취해 있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인문학과 미술사에까지 관심을 넓혀갔다. 김 선생이 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존경하던 독일어 선생님으로부터 세계미술사에 대한 소개를 받으면서부터다.

   
 

제가 1936년생인데 어렵고 힘든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까지 치닫는 때였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일제의 후방 병참기지로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황이었죠.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군소재지 학교에서 근무하셨는데, 일본인 교장과의 잦은 마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야학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경북에서도 벽촌인 청도군 운문면에 위치한 사립학교 교사로 초빙되셨죠. 그래서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여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시고 여러 가지 책도 사다 주셨어요. 여름철에는 수영도 가르쳐주시고 냇물에서 같이 고기도 잡았죠. 그리고 밤이 되면 평상에 앉아 세계 명작을 들려주시곤 했어요.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다정다감하셨고 어머니께서는 상대적으로 엄하셨지만 그래도 두 분 다 자식들의 진로에 있어서는 다른 학부형들과 달리 본인의 적성을 존중해주셨어요. 제가 미학을 공부하게 되고, 동생들이 미대, 음대를 다니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죠.

힘들었던 기억도 있죠.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접수되자 아버지께서는 그곳 유지들과 반대운동을 하시다가 쫓겨나셨어요. 그러면서 징용 영장이 나오고 이를 피해 도망을 다니다 보니 집안 살림이 무척 어려워진 겁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께서는 저를 수백 리 떨어진 큰댁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하셨어요. 당장 생계가 어려운 탓도 있었겠지만 일찍부터 제가 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그 시간들이 저를 단련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기백이 그때 길러진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국어를 배우면서 점차 문학에 심취하게 됐는데 소설부터 시작해서 시, 그리고 번역소설까지 잡히는 대로 다 읽었어요. 집에도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 등 문학책이 꽤 많아서 방학 때면 열심히 읽었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인문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지식과 소양을 쌓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유섭 선생의 미술사와 관계된 책들을 접하고, 방학이 되면 경주에 가서 고적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제가 잘 따르고 존경하던 독일어 선생님 댁에 가서 미술사에 대해 여쭤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일본 사람이 쓴 [미학사요]라는 책을 주시며 읽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세계 미학사를 요약해서 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쭉 정리한 책이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미학이란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김 선생이 서울대에 출강하던 1968년부터 정국은 대통령 3선 개헌 저지투쟁으로 날마다 시위가 벌어졌고,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에 밀려들어 강의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은 민주화를 위해 나가서 싸우고 끌려가는데 지식인이랍시고 책만 보고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현실참여를 시작한다.

   
 

1968년부터 서울대학에 출강을 했습니다. 1969년 가을 학기였는데, 강의 도중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에 밀려들어와 도저히 강의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그런 일이 거의 매주 이어졌죠. 그때 학생들의 구호가 “대통령 3선 개헌 저지투쟁”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걸 보면서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의 길목에서 이건 아니다,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말도 있듯이, 학생들은 나가서 싸우고 끌려가는데 지식인이랍시고 책만 보고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3선 개헌으로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 취임을 했고, 1년 반쯤 지나자 유신헌법을 만들어 6년제 대통령에 취임하는 등 완전 독재로 치달았습니다. 그 유신체제에 반대해 맨 먼저 선봉에 나선 분이 장준하 선생이었습니다. 1973년 유신헌법을 개헌하자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출범시키고 운동본부 30인 명단을 발표했는데 저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어요. 그 일로 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르게 되었죠.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미 시작한 일을 멈추지 않았고, 이듬해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서 3개월 넘게 고문 조사를 받았고, 검찰로 넘겨져 수감되는 등 1년 가까이 고문과 탄압, 감옥생활을 하고 결국 대학에서도 면직됐습니다. 10ㆍ26사태 이후 서울의 봄이 와서 대학에 복직을 하게 되었지만, 다시 신군부에 의해 숙청대상으로 지목되면서 강제해직을 당했고 4년 반이 지난 후에야 복직이 됐죠. 그러니까 ‘반독재 민주교수’로 탄압을 받아 8년을 넘게 힘겨운 세월을 살게 된 겁니다. 제가 민주화운동에 참가해 쫓겨 다니고, 탄압을 받으면서도 다시 전열에 서는 것을 반복했던 것은 오로지 이 시대의 깨어있는 지식인이 취해야 할 행동이라는 양심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어요. 그러는 동안 개인적인 희생은 많았지만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에 참여했다는 것이 지금도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외국에서 받아들인 전후 추상미술이 주류였던 한국 미술에 60년대 이후부터 사회현실에 주목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된다. 일종의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을 추구하는 성향의 미술인데 이를 ‘민중미술’이라고 부르게 된다. 사진은 민중미술가 신학철의 작품. 노동자 뒤에 김 선생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60년대까지는 우리 미술의 주류는 국외에서 받아들인 전후 추상미술이었습니다. 사회 문제와는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그린 개인적인 작품들이었죠. 그런데 60년대 이후부터 시대의 흐름에 맞서 사회현실에 주목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고자 하는 자각이 미술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이른바 민중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전람회를 열게 된 거죠. 우리 미술사에서 보면 방향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전체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서구의 현대 미술에 맞서는 민중미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새로운 성향의 미술을 사회적 리얼리즘이라 하지 않고 ‘민중미술’이라고 통칭했어요.

당시 대학 출신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힘 전’이라는 큰 전시회를 열었는데 사회비판적인 내용이나 노동현실을 담아낸 것을 보고 정부에서 깜짝 놀라더군요. 그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했어요. 문화부 장관이 그걸 보더니 북한에서 쓰는 ‘인민’이라는 말 대신 ‘민중’이라는 단어를 붙여 ‘민중미술’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못하게 만들려고 막았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붙여지게 된 겁니다. 그런 계기들을 통해 우리 미술은 전에 없던 특유의 미술로 일대 반란을 일으켰고 전환의 한 축을 이룩한 것이죠.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미국 뉴욕의 Alternative Space 화랑에서 한국 민중미술 초청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그곳 평론가들이 우리나라의 특이한 미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을 하더라고요. 결국은 기존의 미술용어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며 ‘민중’이란 말을 그대로 사용해 ‘Minjung Art'라고 부르더군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연행되어 감옥살이도 하고 강제해직 당했다가 복직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민중미술에 관한 공부도 하고 글도 쓰면서 민중미술 문화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고통스런 시간 속에서 민중미술의 이론적 틀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죠.

1970년대 들어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주역인 노동대중으로 인해 농촌이 붕괴되는 등 큰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엄청난 갈등과 변화를 보였다고 저는 생각해요. 당시 미술가들은 미술학계에 들어오면 서양 미술이나 배우고 그쳤는데 솔직히 그건 아니잖아요. 예술가는 현재 살고 있는 현장을 그림으로 그릴 줄도 알아야 하고, 시대적 정신을 밑바탕으로 미술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민중미술의 이론적 틀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노동대중은 물론 민중들이 사는 방식들도 굉장히 달라졌잖아요. 삶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나 형식은 현재의 추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주제나 내용, 흐르는 정신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거죠. 우리나라의 근대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이신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일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적인 줏대를 가지고 미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라, 서민들의 생활과 종교와 예술이 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거죠. 저는 그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 답이 있거든요.

그러나 민중미술의 진화는 필요해요. 우선 주제나 내용 면에서 앞 시대와 달라진 민중들의 삶과 사회현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하겠죠. 또한 표현 형식과 방법은 새로 개발된 각종 매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보는 이들에게 동시대의 현실감과 문제의식, 페이소스를 실감나게 느끼도록 하는 미술이 되어야 할 테고요. 물론 중심을 잃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김선생은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의 나쁜 위치적인 한계와 예산문제를 극복하고 국제 교류 확대를 위해 애를 썼지만 해결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다만 중국과 일본에서 교류전을 연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사진은 2006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미술관장 포럼 창립식에 참석했을 때 찍은 것으로, 앞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김윤수 선생이다.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나오게 되어서 아쉬움도 많고 미진한 부분도 많았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얘기하자면 끝도 없고요. 그래도 몇 가지 말하자면 첫째로, 한국 미술은 미술관의 대중적 접근성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청계산 자락에 있는데 위치적인 한계가 있었죠. 산골짜기에 있으니 접근성이 나빠서 관람객들이 오는 게 힘들었어요. 교통도 불편하고, 공휴일에는 근처 공원에 오는 인파에 밀리고, 좁은 차도에 막혀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 문제를 해소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제 힘으론 무엇 하나 바꿀 수가 없었어요.

둘째는 예산을 충당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늘 예산이 부족해서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죠.

셋째는 국제 교류인데, 우리 미술을 어떻게든지 외국에 알리고 전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어요. 서구의 유명 미술관과 교류하고 상호교환 전시를 위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쪽 관장을 만나 교섭을 하면 자기들 작품을 가져와서 전시하는 건 동의하면서도 우리 미술관과 교환 전을 하자는 제안에는 난색을 표하더군요. 미술관 설립 이래 우리 현대미술작품전을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제대로 전시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것은 우리 현대미술관이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겁니다. 성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할 때는 정말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도 중국 미술관과는 교환전을 했었고, 일본의 중요한 다섯 도시에 있는 미술관을 순회하며 ‘한국의 고동’이라는 이름으로 민중미술을 전시했는데 상당한 호평을 받았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보람 있었다고 말할 수 있죠.



우선 미술관이 시내로 나와야겠죠. 현재 경복궁 옆에 있는 구 기무사 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시내 분관이 건립되고 있으니까 완공되면 접근성은 현저히 좋아지겠죠. 그리고 거시서 전시기획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과천보다는 관람객이 많아지고 미술관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미술관은 작품만 감상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약속의 장소이기도 하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미술관에 대한 평가의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미술관의 소장품입니다. 국내외적으로, 특히 외국의 유명화가의 명품을 얼마나 소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미술관은 국내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들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지만, 국제적인 평가를 받으려면 외국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의 외국소장품은 아직 많이 빈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의 젊은 미술인들이 외국에 나가 전시도 하고 작품 활동도 하면서 좋은 평가를 많이 받는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대개 미국이나 유럽의 미술관이나 화랑 혹은 프로모터들의 눈에 들어 기회를 얻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과 활동 여하에만 그치는 거예요. 이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서서 해외는 물론 국내의 유능한 작가를 발굴해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발굴한 작가들이 외국에 나가서 전시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한국 미술의 위상을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김 선생은 미술이 민중들의 삶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나 형식은 추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주제나 내용, 흐르는 정신은 변함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이 사람들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프랑스 미술평론가 알렝 주프라와 함께 찍었다. 


 


그 훈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미술관에서 해임되고 난 다음 해 3월에 받았어요. 주한프랑스대사관을 통해 프랑스 정부가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서신이 왔고, 한참 후 대사관에서 훈장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와는 작품의 인적 교류가 좀 있었거든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하면서 프랑스와 다양한 문화예술교류에 공헌한 점을 인정해준 것 같아요. 보통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받는 훈장은 슈발리에(chevalier) 장(章)이라고 하는 기사장(騎士章)인데, 저는 그것보다 한 급 위였던 오피시에(officier) 장을 받았습니다.


1974년 창비 발행인 백낙청 교수와의 인연으로 창작과 비평의 편집위원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창비와 김 선생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왼쪽부터 [창작과 비평] 창간호, 폐간호, 그리고 1988년의 복간호. [창작과 비평]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복간되었다. 


 


‘창작과 비평(창비)’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71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봄 호에 글을 발표하면서부터죠. 그때 주간이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에게서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알게 되었고, 이듬해 창비의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죠. 그 후 백교수와 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함께 참가했는데 백교수는 공무원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공무원법을 어겼다며 교수직에서 파면됐고 저는 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는 사립학교 교원이라 간신히 파면은 면했지만 이듬해 11월 중순 경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를 거쳐 다시 검찰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죠. 실직자인 저를 창비가 편집위원으로 받아주었고, 그렇게 창비 일원이 될 수 있었어요.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창비를 폐간시키고 이어 단행본마저 판매금지를 시키는 등 혹독한 탄압을 가했는데 그 무렵에 저는 발행인이자 사장을 맡게 되어 창비를 되살리려고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신군부는 창비를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라며 폭파시켜버려야 한다고도 했어요. 창비라는 이름도 못 쓰게 해서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목숨만 부지하기도 했죠. 정부에서 회사를 아주 문 닫게 하지 않고 명맥만 유지하도록 한 것은 여론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죠. 1987년 6월 혁명으로 창비가 다시 살아난 것을 두고 창비는 죽었다 살아났으니 수명이 길 것이라는 덕담을 들을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아득한 옛 일 같습니다.


 이미지 2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저는 예술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고 봅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것을 만들어낼지 생각하기에 앞서 사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거예요. 특히 요즘처럼 갈등이 심할 때는 서로 간의 공화적 관계를 위해 힘써야 하고요. 어떻게 하면 관계를 아름답게 잘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양극화되고 살벌한 생존전쟁에서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는 설 자리가 없을 거예요.

말하자면 공화주의(Republicanism)라고 할까요? 개인의 자유와 존엄보다 전체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전체주의로 가자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그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휴머니즘적 공화주의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해요. 공화적 인간관계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며 작품화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와 글 쓰는 작가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가 예술가와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인 삶의 문제나 영혼구원에 앞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깊이 천착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봐요. 또 분단된 남과 북, 남쪽 내부의 이념적인 대립과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지 가능한 길을 모색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좌우명은 한문으로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으로,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즐거워한다’는 뜻이에요. 대학 시절 동양사 관련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서 좌우명으로 삼았어요.

이 글을 쓴 사람은 중국 송나라의 학자이자 개혁가인 범중엄(范仲俺)이라는 사람인데 그가 쓴 ‘동정호의 악양루기’ 중 한 구절이라고 해요. 언젠가 북경대학 총장이 내한했을 때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대담하면서 중국 혁명기의 지식인들은 범중엄의 이 구절을 항시 읊조렸다는 말을 했던 게 생각나네요.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누구든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까요?



유혹을 받을만한 자리에 있었던 적이 별로 없지만, 한 가지 생각나는 건 있어요. 제가 미술관에서 퇴임 압박을 받을 때 계속 버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화부 예술국장이 점심을 같이 먹자는 연락을 해왔어요. 같이 식사를 하는데 계속 퇴임을 권유하면서 자진퇴임을 하신다면 좋은 대접을 해주고 장관님 참석 하에 멋있는 퇴임식을 해주겠고 하더군요. 퇴임한 후에는 문화부의 연구 프로젝트를 배정해주고 문화훈장을 상신하겠다는 유혹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았죠. 현대미술관을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곳으로 만들어서 정권이 바뀌어도 임기를 다 채우고 퇴임하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거든요. 제가 끝까지 소송을 제기했던 이유도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법규를 어겨가며 임기가 남은 기관장을 함부로 쫓아내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판례라도 남겨놓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미지 목록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그린 김윤수 선생 캐리커처.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 sur Oise)의 고흐 작업실을 방문한 김윤수 선생.



바른 생각이라면 한 번도 굽히지 않고 어떻게든 꿋꿋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제가 살아온 시대는 변화가 많고 어려웠음에도 소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거든요. 식민지 시대를 겪었고, 해방 후에는 남북이 분열되어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모습을 봤고, 정부의 독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쭉 되돌아보면 그 험악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저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언제나 바르게 살려고 애써왔어요. 그걸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게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하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몸과 정신의 균형을 이루라는 말도 해주고 싶습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바르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은 균형을 잘 갖출 때에만 가능하거든요. 또한 젊은이들답게 두려움 없이 도전하며 불의에 맞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앞으로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윤수 선생. 특히 그간 소홀히 해왔던 미학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글을 쓰고 싶어요. 특히 전공이었던 미학에 관한 논문을 쓰려고요. 그 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정작 문필활동에는 소홀했어요. 물론 평론이나 논문 등은 간간히 써왔지만요.

제가 조금 편하게 살려고만 했다면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 열심히 가르치고 조용히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세파에 몸을 내던지고 살다 보니까 사실 잃어버린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도 있고요.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시간 나는 대로 글도 쓰고 생각도 정리하면서 살아가려고 해요.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를 다 겪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왔더군요. 고비고비마다 선택의 기로가 있었고 편하게 살려고 하면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바르고 정의로운 쪽을 선택하려고 노력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벌어놓은 것도 없고 명예도 없지만 마음만큼은 아주 편안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로 바르게 살아왔고 큰 흐트러짐 없이 살아왔으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이것은 누군가의 평가를 떠나 저 스스로 떳떳하고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한평생을 참된 지식인으로서 꼿꼿하고 흐트러짐 없이, 자신보다는 공동체와 나라를 위해 바르게 살아간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윤수
1936년생. 고등학교 시절 세계미술사를 접하면서 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무렵 대통령 3선 개헌 저지투쟁으로 학내에 시위가 벌어지자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만들며 문예 운동과 사회비평에 힘썼고, 서양에서 들어온 추상미술 일색이었던 한국 미술계에서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했다.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부임하고 정권이 바뀌면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지만, 한국 미술의 세계화와 미술관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예술가는 현재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을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해야 한다는 소신과 예술가가 진정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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