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도예의 거목 한봉림씨가 요즘은 그림 삼매경에 푹 빠졌다. 
작년에 완주 작업실에 가보았더니, 완성된 대작들과 진행 중인 작품도 있었다.

아마 원광대에서 정년퇴임하며, 그림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이미 그만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어, 보는 이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일에는 그가 상경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끼는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인사동에서 전시를 한다는 거다.
그동안 인사동에서 술 한 잔하자는 말은 여러 차례 오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는데,
모처럼 친구와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6층으로 올라가니 최범홍씨의 도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봉림씨와 안문선씨가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연을 먹인 器”란 제목이 붙은 최범홍씨의 도예작품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연 먹인 빛깔도 이채롭지만, 도자에 번진 무늬가 신비로웠다.





뒤틀린 도자 작품들도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난, 마음이 뒤틀려 그런지, 뒤틀린 작품이 좋았다.
좌우지간, 한봉림씨가 아낄만한 제자였다.






식당으로 옮기는 길에 시장 봐 오던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툇마루’ 된장비빔밥으로 간만에 입맛을 돋구었는데,
한봉림씨는 밥은 거들떠보지 않고 술만 마셨다. 점심은 본래부터 안 먹는다나...
그냥두기 아까워,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더니, 술 들어 갈 자리가 없었다.
낮술에 쥐약인 내가 그 날 살아남았던 이유다.






한봉림씨는 인사동 옛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학창시절엔 연적을 만들어 인사동 필방에 납품한 적도 있단다.
그가 디자인한 독특한 맵시의 연적을 필방주인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만난 친구가 인사동의 양두 거목인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와

공화랑’의 공창호 대표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학교 다니는 것 보다 전통 문화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공창호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표구점에 들어갔지만, 김완규씨는 달랐다.
학교를 안 가고 가게를 기웃거리니, 부친께서 가게 점원으로 일시키고,
대신 밤에 가정교사를 불러 공부시켰다고 한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장인이란 정규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는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작업이 풀리지 않아 “내가 왜 이 짓을 하냐?”며 붓을 놓은 적도 있단다.
그렇지만 한봉림이가 누구인가? 그 장인정신은 기어이 뿌리를 뽑는다.






요즘은 밤 그림자에 끌려 다닌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동안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다닌다고 한다.
아내는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를 떠돌아 다니냐?“고 타박한다지만,
대붕의 뜻을 누가 알리오.
그가 구상하는 작품이 어떤 울림으로 닥아올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빈 술병이 몇 개나 나왔다.
안문선씨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한봉림씨가 세병은 마신 것 같았다.
이미 고속버스 표를 예매해 둔 터라, 더 마실 수는 없었다.






안국역으로 지하철 타러 갔다.
난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이다.
화가 장흥래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부리나케 지하철로 내려갔는데, 이산가족 찾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빨리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안문선씨를 배웅해 주고, 지하철로 내려와서는 나를 잠시 보잖다.
똘똘 뭉친 파랑새 뭉치를 내손에 쥐어주며, 술 사먹지 말고, 밥 사먹어란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추위를 녹였다.


"고맙다 친구야! 술 안주로 밥 사먹을께..."



 사진. 글 / 조문호










































시인 김명성씨가 ‘아라아트’를 개관한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6년이 되었다.
재벌도 그 정도 건물을 짖게 되면 이리저리 재느라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는데,
그는 초지일관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인사동 메카로 만든다며 건평 100평이 넘는 지상5층, 지하4층에
다른 매장 하나 들이지 않고 갤러리만 고집한 것이다.
결국 못 버텨 중국 업자한테 넘어갈 때는, 인사동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 했다.





그동안 삼십여 년 동안 그에게 신세 진 예술가들이 너무 많다.
더 이상 도움 못 받아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인사동 예술가들의 꿈이 좌절되었기에 더 슬프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던 그를 믿기 때문이다.





지난 9일은 김명성씨 생일이었다.
둘도 없는 사람의 생일과 하루 차이라 잊을 수가 없다.
여지 것 생일 때마다 잔치를 같이 했는데, 이번엔 동지가 일이 생겨 갈수 없단다.





하필이면 잘 모르는 ‘송추 가마골’이라, 식당 찾느라 좀 헤맸다.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서길헌, 전인미, 박성식씨가 와 있었다.





김명성씨로 부터 오랫동안 신세졌지만, 그동안 밥 한번 산 적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손님이 많아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밥 값이라도 내고 싶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더구나, 그때처럼 잘 나가지 않을 때라 기회다 싶었다.






그런데, 그 집 음식 값을 살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꼬불쳐둔 신사임당 두 장으론 어림없었다.






마침, 박성식씨가 산다기에 단번에 꼬리 내렸지만, 거지가 밥 산다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좌우지간 원님 덕에 나팔 불며 잘 먹었으나, 양쪽으로 한 알뿐인 이빨로 고기 먹느라 바빴다.
부디 생일 복으로 소원성취하길 빈다.


김명성씨가 살아야, 인사동도 살고, 작가들도 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반가운 손님 오셨다는 연락을 정영신씨로 부터 받았다.
문경의 문화활동가 이선행씨가 인사동 왔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하필 ‘헌법제판소’ 부근이라는데, 요즘은 헌법 이야기만 들어도 열 받는다.
부지런히 내려가니, 이선행씨와 함께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문경장에서 뵙고 처음인데, 그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여자 분들은 살이 빠지는 것이 좋은지 모르지만, 난 든든한 미인이 좋더라.






그 곳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는데, 자주 들락거리는 나보다 시골 사람이 더 잘 알았다.
가보니 '깡통만두'집인데,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자동에서 줄 세우는 게 지겨워, 줄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두라 먹기도 편하지만, 기다리다 먹으면 더 맛있잖아.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지, 빈대떡 도시락까지 싸 왔다.
두 분이 인사동에서 차 한 잔 한다지만,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빠졌다.






나온 김에 볼 전시가 있어 인사동 거리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안면 있는 분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야! 이럴 때, 정말 입장곤란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 머뭇거렸더니, 봉화 도예가 신동여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야 오랜 기억이 떠올랐는데, 영주의 권오진씨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문씨와 적음까지 그리워졌다.






잘 아는 분 전시가 있어 왔다기에 따라갔더니,
‘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김흥배씨의 ‘달항아리’전이었다.
달 항아리가 정말 달덩이처럼 훤하게 잘 생겼더라.  
녹차는 얻어 마셨지만, 그 곳도 자판기 커피는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씨 삼인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 관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우“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전은 ’나무화랑‘ 기획전이다.
김재홍, 김영진, 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 전시다.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말하는 김진열씨,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는 정복수씨,
한 때 ‘한강미술관’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에 기름을 부었던 장경호씨 등
다들 한 가닥 하는 배트랑 작가전이라 볼만하다.






그러나 방명록에 흔적만 남기고, 얼른 줄행랑쳤다.
사실 장경호 만나지 않으려고, 개막식을 피해 일부러 일찍 간 것이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친구지만, 요즘은 일체 상종을 않는다.
한 달 전에 부린 주정이 내게 부린 술주정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건 정영신에 대한 모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집이 아니지만, 십 몇 년 살아보니 참 착한 년이더라.
여지 것 그 여자 힘들게 하면 누구든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화는 시간만 지나면 풀리지만, 이 참에 버르장머리를 고칠 작정이다.
그만큼 서럽고 외로웠으면 작업으로 토해낼 때도 되었는데, 허구한 날 술로 세월 보낸다.
그것도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쌓인 분노를
술 친구에게 다 풀어 주변에 술친구가 없다.






사실 좋은 신작이라도 내놓았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하려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니지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존경하는 선생이던 친구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입 바른 소리를 해 사람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에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필요 없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바쁜데, 덜 된 사람 만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커피생각은 간절한데 인사동에는 커피자판기가 없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계동 ‘민예총’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정영신씨는 없고 서인형 국장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있었다.
다들 ‘민예총’ 기금 마련전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니, 그때야 정영신씨와 이선행씨가 올라왔다.






마침 탁자 위에 2003년도 ‘문예진흥원’에서 만든 신학철선생 전시도록이 있었다.
신학철화백의 걸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한 작품 한 점이 눈에 밟혔다.






난, 세상만사 미리 정해져 일어난다는 운명론보다 인간이 짓는 업보를 믿는 편이다.
저 그림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누가 알겠냐마는, 좋은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지금 선생께서 처한 슬픔이, 한낱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간절히...



사진, 글 / 조문호

































      

배일동 명창, 판소리 강의도 고수


2018년 12월 03일 (월) 17:17:47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ss@sctofay.co.kr


우리 것이 밀려나는 요즘 인사동에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불씨 같은 역할을 해 준다.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판소리 감상회는 봄 가을 두 차례 열린다.


지난 30일 오후5시부터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자리가 비좁아 누구나 들을 수 없어 아쉬웠다. 이 날도 120여명이 가득 메워, 우리 소리의 진 맛에 흠뻑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배일동 명창


지난 봄에 이어 세 번째 소리판을 연 배일동 명창은 이 시대가 낳은 걸출한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들을수록 심금을 울리는데, 소리꾼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득음의 경지야 말할 것도 없고, 청중의 감정을 끌어내는 흡인력에 혀를 두를 지경이다. 이 메마른 세상에 어디서 이처럼 울고 웃을 수 있겠는가?

단가 “이산 저산”을 비롯하여 춘향가 중의 ‘사랑가’, 쑥대머리,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 ’심청가 중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차례대로 불렀는데, 춘향의 ‘사랑가’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어허둥둥 내 사랑아~



▲배일동 명창이 절절한 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저리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느라 오는 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얼마나 좋았으면 저리 간 들어지게 놀았겠는가? 사또 수청 들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신세 한탄하는 ‘쑥대머리’에서는 눈물이 절로 났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애끓는 절절함에 가슴이 아렸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여태껏 판소리를 듣고 웃은 적은 많지만, 눈물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게 바로 소리 속으로 끌어당겨 일심동체가 되도록 만드는 배일동 명창의 매력이다. 입으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라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다.



▲통인 판소리 한마당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에서는 춘향 모친의 해학이 절정이다.

거지행색을 보고 모른다고 푸대접하던 장모가 사위 다그침에 급변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았나. 하운이 다기봉터니 구름 속에 쌓여왔나, 풍설이 쇄란터니 바람결에 날려왔나. 이 사람아 뉘 집이라고 아니 들어오고 문밖에서 주저 하는가"


또 한 가지 귀가 번쩍 뜨이는 대목은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다. 바로 기쁨의 눈물을 맛보게 한 것이다.

“죽고 없는 내 딸 심청이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답답하여라 이놈의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심봉사 감은 눈을 끔적끔적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님이 딸을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딸을 알아볼까 걱정되었다.


“이렇듯 천지조화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니, 만좌 맹인이 모다 개평으로 눈을 뜨는디”

심봉사의 절절한 회한에 눈물 흘리게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뜨는 대목에서 기쁨으로 몰아치다 마지막 대목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판소리 맛이다.


구절구절마다 온갖 내용이 다 들어있지만, 소리꾼이 그 감정에 흠뻑 빠지지 못한다면 어찌 청중에게 전해지겠는가?



▲고수 김동원씨


이 날 고수로는 배일동 명창의 삼십년 친구인 김동원 교수가 북채를 잡았는데, 너무 조가 잘 맞았다, 옛날부터 ‘1고수, 2명창, 3청중’이란 말이 있듯이, 고수가 소리꾼의 온갖 감정을 다 끌어내는 지휘자고 바람잡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배일동 명창이 들려 준 판소리의 이해에 다들 귀가 솔깃했다.

한 박자나 두박자로 되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삼박자로 진행되는 우리소리의 독창성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소리로 이해도를 높였다. 뭐든지 알아야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인다. 우리가 배일동 명창의 소리에 빠져 웃고 울었던 비결로, 소리뿐 아니라 교수법도 탁월했다.



▲배일동명창과 고수 김동원씨.


여태껏 선호도에서 국악이 서양음악에 밀리는 것은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판소리의 독창성이나 음악성을 높이 사지만, 아직 대중성은 한 참 멀었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판소리의 제 맛을 깨우치게 해 주는 배일동씨 같은 분이 필요한 것이다. 악보가 필요 없는 판소리가 외국의 오페라 보다 한 수 위지만, 교육이 따르지 못해 밀린 것이다.


나 역시 어릴 때, 잔칫날 소리꾼 불러 벌이는 소리판에 별 흥미 없었다.

판소리 가사야 조금 알았지만, 시조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영감들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 할까?' 생각했다. 가사를 모른다면 잘 모르는 외국노래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배일동씨가 판소리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다 뒤늦게 음악을 좋아하며 LP판을 사 모아 음악실을 차린 것이 판소리 가치를 알아 본 계기다. 락이던 재즈든 가리지 않을 때였으나, 점차 우리 음악의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결국 부산 남포동에 ‘한마당’이란 국악전문 주막까지 차렸는데, 생각 외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동아대 학생들이 손님이었지만, 자글거리는 레코드에서 나오는 임방울선생 ‘쑥대머리’ 맛을 제대로 아는 손님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단지 우리 소리고 우리의 정서라는 매력이 손님에 손님을 끌어 들인 것일 게다.

그런데, 뽕짝 가수를 모시는 밤무대는 지천에 늘렸는데, 명창들 모시는 밤무대는 왜 없을까? 다 우리 것을 우습 게 보고 외국 문명에 놀아난 결과다.



▲통인가게 김완규선생이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끝난 후, 통인 관우 김완규 선생이 계신 ‘상광루’에서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그 많은 술이 바닥나 낙원동 아구찜 식당에서 포장마차로 전전했는데, 그 날 관우선생께서 술이 취해 ‘이산 저산’을 쉼 없이 불렀다. 그 단가에 나오는 내용이 마음에 박혔을까?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배일동 명창의 판소리 강의도 고수-





우리 것이 밀려나는 요즘의 인사동에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불씨 같은 역할을 해 준다.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판소리 감상회는 봄 가을 두 차례 열린다.

지난 30일 오후5시부터 통인가게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자리가 좁아 누구나 들을 수 없어 아쉽다.

이 날도 120여명이 가득 메워, 우리 소리의 진맛에 흠뻑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봄에 이어 세 번째 소리판을 연 배일동 명창은 이 시대가 낳은 걸출한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들을수록 심금을 울리는데, 소리꾼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득음의 경지야 말할 것도 없고, 청중의 감정을 끌어내는 흡인력에 혀를 두를 지경이다.

이 메마른 세상에 어디서 이처럼 울고 웃을 수 있겠는가?

 

단가 이산 저산을 비롯하여 춘향가 중의 사랑가’, 쑥대머리,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

심청가 중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차례대로 불렀는데, 춘향의 사랑가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어허둥둥 내 사랑아~

저리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느라 오는 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얼마나 좋았으면 저리 간 들어지게 놀았겠는가?

수청 들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신세 한탄하는 쑥대머리에서는 눈물이 절로 났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애끓는 절절함에 가슴이 아렸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여지 것 판소리 듣고 웃은 적은 많지만, 눈물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게 바로 소리 속으로 끌어당겨 일심동체가 되도록 만드는 배일동 명창의 매력이다.

입으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라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다.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에서는 춘향 모친의 해학이 절정이다.

거지행색을 보고 모른다고 푸대접하던 장모가 사위 다그침에 급변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았나. 하운이 다기봉터니 구름 속에 쌓여왔나, 풍설이 쇄란터니 바람결에 날려왔나.

이 사람아 뉘 집이라고 아니 들어오고 문밖에서 주저 하는가"



 


또 한 가지 귀가 번쩍 뜨이는 대목은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다. 바로 기쁨의 눈물을 맛보게 한 것이다.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답답하여라 이놈의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심봉사 감은 눈을 끔적끔적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님이 딸을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딸을 알아볼까 걱정되었다.


이렇듯 천지조화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니, 만좌 맹인이 모다 개평으로 눈을 뜨는디

 

심봉사의 절절한 회한에 눈물 흘리게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뜨는 대목에서 기쁨으로 몰아치다

마지막 대목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판소리 맛이다.

구절구절마다 온갖 내용이 다 들어있지만, 소리꾼이 그 감정에 흠뻑 빠지지 못한다면 어찌 청중에게 전해지겠는가?

 

이 날 고수로는 배일동 명창의 삼십년 친구인 김동원 교수가 북채를 잡았는데, 너무 조가 잘 맞았다,

옛날부터 ‘1고수, 2명창, 3청중이란 말이 있듯이, 고수가 소리꾼의 온갖 감정을 다 끌어내는 지휘자고 바람잡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배일동 명창이 들려 준 판소리의 이해에 다들 귀가 솔깃했다.

한 박자나 두박자로 되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삼박자로 진행되는 우리소리의 독창성을 이야기하며

직접 소리로 이해도를 높였다. 뭐든지 알아야 귀에 듣기고 눈에 보인다.

우리가 배일동 명창의 소리에 빠져 웃고 울었던 비결로, 소리뿐 아니라 교수법도 탁월했다.



 


여지 것 선호도에서 국악이 서양음악에 밀리는 것은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판소리의 독창성이나 음악성을 높이 사지만, 아직 대중성은 한 참 멀었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판소리의 제 맛을 깨우치게 해 주는 배일동씨 같은 분이 필요한 것이다.



 


악보가 필요 없는 판소리가 외국의 오페라 보다 한 수 위지만, 교육이 따르지 못해 밀린 것이다.

나 역시 어릴 때, 잔칫날 소리꾼 불러 벌이는 소라판에 별 흥미 없었다.

판소리 가사야 조금 알았지만, 시조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영감들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 할까?' 생각했다.

가사를 모른다면 잘 모르는 외국노래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다 뒤늦게 음악을 좋아하며 LP판을 사 모아 음악실을 차린 것이 판소리 가치를 알아 본 계기다.

락이던 재즈든 가리지 않을 때였으나, 점차 우리 음악의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결국 부산 남포동에 한마당이란 국악전문 주막까지 차렸는데, 생각 외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동아대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사실 자글거리는 레코드에서 나오는 임방울선생 쑥대머리맛을

제대로 아는 손님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단지 우리 소리고 우리의 정서라는 매력이 손님에 손님을 끌어 들인 것일 게다.



 


그런데, 뽕짝 가수를 모시는 밤무대는 지천에 늘렸는데, 명창들 모시는 밤무대는 왜 없을까?

다 우리 것을 우습 게 보고 외국 문명에 놀아난 결과다.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끝난 후, 통인 관우선생 계신 상광루에서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그 많은 술이 바닥나 낙원동 아구찜 식당에서 포장마차로 전전했는데,

그 날 관우선생께서 술이 취해 이산 저산을 쉼 없이 불렀다.

그 단가에 나오는 내용이 마음에 박혔을까?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사진, / 조문호


























































지난 수요일은 강민선생을 비롯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자는 기별을 장봉숙선생께서 보내왔다.
페북에서야 강 민선생을 간간히 뵙지만,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정영신씨가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강 민선생을 기다렸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와 계셨다.

제일 멀리 계시는 분이 언제나 먼저 오신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장봉숙선생께서도 오셨다.

매번 내가 꼴지로 나왔지만, 모처럼 꼴지 신세를 면한 것이다.



  정영신사진


강민선생은 귀가 어두운데다, 내가 하는 말까지 어눌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방동규선생께서 보이지 않아 근황을 여쭈었는데, 구중서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연락하니, 일이 있어 못 나온다"고 했다며,배추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선물 하나를 내놓으셨다.

얼마 전 중국여행 때 사왔다는 이과두주였는데, 병을 보니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강 민선생 드리려 사온 술이겠지만,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눈치 봐 가며 슬슬 포장을 풀었더니, 식당주인이 말했다.

오늘만 강민선생님 때문에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 안 됩니다.”



 


52도나 되는 독주를 낮술에 쥐약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어찌 귀한 술을 마다하겠는가?

맛만 본다며 조금 받아 마셨으나, 술 맛이 슬슬 당기기 시작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나중엔 장선생과 정영신씨가 남긴 술까지 다 마셔버렸다.



 


방동규선생이 안 계시니, 구중서선생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김두환씨가 시라소니 앞에 무릎 꿇었던 옛 이야기를 꺼내시며,

사실은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가 맨주먹으로 열일곱 명이나 때려 눞혔다지만,

선생께 고백하기를 자기도 당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지만, 오래 전에는 다툰 적도 있다고 했다.

백기완과 구중서가 책 보라고 부추긴 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꼴로 살게 됐다"며,

술값은 늘 구중서선생께서 내게 하셨단다.





어느 날 인사동 실내악에서 구선생의 핀잔에 방선생께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일어난 것이다.

가다보니 술 값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술값을 돌려 달라고 하셨다는데,

실내악 주인 김희주가 누구인가? 절대 못 돌려준다며 타박만 주었다는 것이다.





방선생께서 다방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계신 신동문시인께  "구중서와 의절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단.

그 소리를 들은 신동문선생께서 갑자기 꿇어 앉어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먹이 손가락만 슬쩍 밀어도 쓰러질 비쩍 마른 시인의 말에 그냥 무릎 꿇고 앉았다는 것이다.

한참 있다 이제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더 있어라 했단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모습이냐?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구중서선생께서 자주 가신다는 관훈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지러웠다.

술 깨려고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다시 도졌다.

길에서 까딱이를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술 취해 빌빌거리는게 불쌍한지 손도 벌리지 않았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목판대학 전시 때문에 그냥 갈 수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강민선생 따라 기어 오르듯 전시장에 올라갔다.

김진하 관장과 정복수씨가 있었고 뒤 늦게는 김준권씨도 왔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초빙작가인 김진열, 정복수, 김진하, 문승영씨 작품은 물론, 학생들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현숙씨 판화에 눈이 꽂혔다.



   

    

 

전시가 124일까지라 다음에 볼 작정으로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 강민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유목민 들어가 전활철씨께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집에 왔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컴퓨터는 왜 켰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음주 포스팅을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꼴을 보았다. 갑자기 집채가 쓰러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 기둥 사이로 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까지 지붕에 올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소가 기와장을 튕기며 지붕 위를 뛰어 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더니 날 뛰던 소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었다며 일어났더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당겨 보니, 음주 포스팅한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았다.

속은 쓰린데다 망신살까지 뻗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 왜 이리 낮술에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낮술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 들어간 뱃속이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이 뜻 하는 건 뭘까?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는 아닌지, 해몽가라도 한번 찾아 볼일이다.


다시는 낮술과 음주 포스팅을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그 버릇 개줄까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 사람들 만나 대포 한 잔하는 셋째 수요일이다.

정영신씨 더러 인사동에서 밥 한 그릇 사달라는 전화를 했다.
어디서 만날 것이냐기에 대뜸 ‘인덱스갤러리’라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무슨 전시인지도 모르지만, 밥값에 버금가는 찻집에서 만날 수는 없잖아.






낙엽이 뒹구는 인사동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또 겨울이 찾아오고 실없이 한 해가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황량해 졌다. 사치스럽게도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이군열 사진전이 열리는 ‘나우갤러리’부터 들렸는데, 오프닝 준비로 바빴다.
‘자연의 성’이라 이름붙인 흑백 풍경이지만,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쓸쓸한 늦가을 분위기와 어울릴 것 같은 임춘희씨 '나무그림자'를 보러 ‘통인’으로 갔다.
변화무쌍한 감정을 마치 자서전처럼 화폭에 풀어놓았는데,
혼란스럽기도 하고 황량한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연상되었고, 아련한 향수도 밀려왔다.






정영신씨와의 약속 시간이 되어 ‘갤러리 인덱스’로 자리를 옮겼다.
김종성씨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거리는 한산해도 전시장은 북적였다.
아는 분이라고는 최건수관장을 비롯한 한 두사람 뿐이었다.






사람 틈을 비집고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사진이 왔다 갔다 했다.
정영신씨를 데리고 나와 버렸다.






정영신씨와 저녁식사를 한 후 ‘유목민’으로 갔다.
그 곳에는 유진오씨와 김완기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완기씨가 너무 오랜만이라 근황을 물어보았는데,

피맛골 가게를 처분하고, 삼개월 동안 러시아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좀 있으니, 이인섭선생이 나타났고 김재홍씨는 박기자라는 친구 분을 데리고 왔더라.
김명성, 서길헌, 김각환씨 등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고, 옆집 커피숍으로 옮겼다.
연신내 연서시장으로 가자는 김명성씨 따라 지하철을 탔지만, 더 이상 술 생각은 없었다.
그날따라 혼자 있고 싶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계절을 타는 건지, 갈 때가 된 건지, 마음이 찹찹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그래피티 시사만평가인 닌볼트가 이달 21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마루갤러리 1·2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 제목은 ‘Don’t run away’로 작가 닌볼트의 다양한 상상력을 캔버스에 옮겼다.

전시회가 시작하는 21일 오후 6시에는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정세훈의 축하오프닝공연이 펼쳐진다.

23일에는 인사아트프라자 지하 2층 공연장에서 드로잉쇼를 비롯해 작가들과 함께하는 토크쇼와 만원 경매 등이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글로벌엔터가 주최하고 아트그룹 ‘동거동락’이 주관하며 미술잡지 ‘미술세계’, CEO강연연구소, 아트스팟 등이 후원한다.
주최 측은 “척박한 국내 미술시장에서의 치열한 삶을 살아온 작가 닌볼트의 끝없는 상상력으로 다양한 삶의 현장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라고 말했다.

초대된 닌볼트 작가는 국내 그래피티 분야의 대표적인 1세대 작가로

최근에는 주간 UPI뉴스+(UPInewsplus)에 ‘닌볼트의 그래피티 시사만평’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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