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풍류가 사라진 지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건만, 새삼 인사동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풍류란 인사동에 시냇물이 흐르던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민 시인 등의 문객들이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넘어오며 풍미했던 낭만 말이다.

 

인사동에 돈 바람이 분 것은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집에 숨겨 둔 골동이나 고미술품을 팔려고 가져 나오며 비롯되었다.

오래된 집안 가보를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 있던 막 뮐러는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이나 되는 골동을 사 모으기도 했단다.

보관 창고에 임금의 옥쇄가 발에 차였다는 때로, 인사동의 골동상들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배에 가득 실은 골동품을 일본으로 내다 판 매국노 같은 장사꾼도 있었다.

 

골동상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물렀으면, ‘금당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도 생겨났다.

79에 벌어진 금당 살인사건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며 금당주인을 유인한 후,

안주인과 기사에게 현금 오백만원을 갖고 나오도록 만들어, 세 사람 모두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사동 고미술상이나 중계상 삼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6명은 그 사건과 관계없는 일로 구속되는 등 인사동 고미술상에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고미술품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사동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야바위 같은 뒷거래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하고 도굴품까지 늘렸으니,

장사꾼에서 장사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희한한 일이 많았다.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진품명품이란 프로도 일조했다.

 

고미술품 전성시대는 안으로 곪았지만, 관광 시대로 접어든 88년부터는 밖으로 곪기 시작했다.

인사동 자체가 잡동사니 거리로 변한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인사동을 누가 잡겠냐마는, ‘구하산방’, ‘통문관’, ‘명신당필방’, ‘수도약국’,

통인화랑’, 이문설농탕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가 곳곳에 살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뭐니 뭐니해도 예술 중심지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로 빌어먹는 가객들이 콩깍지 속 콩알처럼 주막에 틀어박혀 개똥철학으로 목청 높인 적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사동 골목 문화를 만들어 온 예술가들의 풍류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오 가며 들렸던 벽치기 골목에 참새방앗간 하나 있었으나, 얼마 전 젊은 매니저가 들어 오며 제동이 걸려버렸다.

늙은이들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데다, 안주 하나에 술 한 병 시켜 놓고 세월을 죽이니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인사동이야 노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 여태 살아남았지, 다른 지역은 노인들 출입이 통제된 지 오래다.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술 마실 곳이야 없겠냐마는, 사람을 만날 장소 즉 이산가족 상봉소가 사라져 걱정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전시를 여는 화랑이 밀집해 있는 이상, 등 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리는데, 이젠 지인들의 전시 뒤풀이에서 만나는 방법뿐이다.

 

 

비싼 점포세 내가며 늙은 예술가들을 반길 곳은 없으므로

참새 방앗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과 예술이 살아 넘치는 곳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십시일반 역할을 분담하여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작품을 싸게 거래하거나

시 낭송회나 여러가지 토론회를 갖는 등 하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둥지를 만들자.

 

인사동을 방황하다 외롭게 떠나가신 강민시인과 심우성선생이 그리워진다.

 

사진, / 조문호

 

 

 

 

 

늙은 화가가 떠돈다.

갈 곳이 없다.

참새 방앗간도 막혔다. 

그 사람이 그립다.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다.

 

사진, / 조문호

 

[짬] 갤러리 씨네 노광래 대표

노광래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인사동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의 서예 작품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천상병 시인 좋아 ‘귀천 껌딱지’ 인연

1985년부터 38년째 ‘인사동 연락책’

 

노광래(66) 갤러리 씨네 대표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거리인 인사동 사람들 사이에 연락책으로 통한다. 1985년 지금은 고인이 된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씨가 카페 귀천을 연 이래 ‘귀천 껌딱지’로 살았으니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 37년이다. 앞서 1983년 시인 천상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천상문학회’ 초대 총무를 지낸 그는 1988년 시인이 춘천의료원에 입원하자 8개월 동안 병실에서 숙식하며 간병을 했단다. ‘인사동 풍류객’이었던 고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 말년에도 1년6개월 동안 ‘비서 겸 운전사’ 노릇을 하며 함께 인사동을 누볐다.

 

15년째 화랑 주인으로 사는 그에게 그림을 맡기는 화가와 고객들도 대부분 인사동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한 달에 그림 200~300만원어치 팔아 세내고 남은 돈으로 라면 먹고 즐겁게 산다”는 노 대표는 지난해부터 인사동과 인사동 사람들을 알리는 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 9월 ‘인사동 산타클로스’로 불렸던 고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는 글을 모은 책 <건달할배 채현국과 친구들>을 기획 출간했고, 지난해는 절판된 지 오래인 조문호 사진작가의 인사동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개정판 발행에도 앞장서 성사시켰다. 최근엔 유홍준 미술평론가와 윤후명 작가, 황주리 화가, 안선재 번역가, 장광팔 만담가, 가수 남궁옥분 등 35명의 ‘인사동 애정담’을 모아 <인사동에서 만나자>(덕주)라는 책도 냈다.지난 9일 서울 경운동 갤러리 씨네에서 노 대표를 만났다.

 

인사동에서 만나자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2008년부터 인사동 수운회관에서 유카리 화랑을 했던 노 대표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고 2년 전 폐업한 뒤 지난해 지금의 자리에 다시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이번에 수십명 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원고 청탁을 해 인사동 책을 낸 것도 코로나로 인사동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란다.1968년 대학 2학년 때부터 우현 고유섭 선생의 책을 사러 인사동을 찾았다는 유홍준 평론가는 1990년대 들어 인사동이 관광거리로 크게 변했지만 지금도 “마음의 고향”인 인사동을 일주일에 두어번 들른다고 책에서 털어놓았다. 가수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림을 인사동에 처음 올리던 날이 “티브이 프로그램 <가요 톱텐>에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1위 트로피를 받았을 때보다 몇 배의 기쁨이었다”고 적었다. 고교생 때부터 인사동을 드나들었다는 시인 이만주는 ‘인사동 성골은 목순옥씨의 카페 귀천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다 고인이 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채현국 선생을 알고, 지금도 가끔 인사동을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뒤 이런 “인사동의 문화 게릴라”는 50~1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노 대표는 천상병 시인과 의형제를 맺기도 한 소설가 고 이외수 선생 부부가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인의 부인에게 거금(3천만원)을 건넸다는 일화도 전했다.

인사동이야기 / 250페이지 / 25,000원 / 눈빛출판사

“코로나로 망해 인사동을 뜬 자영업자들이 많아요. 인사동을 다시 살려 예전처럼 즐겁게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마음으로 책을 기획했어요. 인사동에서 우리를 가르쳐준 훌륭한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지만 지금도 구중서 신경림 구중관 염무웅 선생님 등이 계시죠.”이날도 인권운동가 서승 선생과 함께하는 모임 약속이 있다는 노 대표는 인사동을 두고 대학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한테 인사동은 대학이었어요. 1985년 귀천에서 채현국 선생님을 만난 이후 마지막까지 따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요. 끝까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분이죠.” 인사동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뭐냐고 하자 그는 “남과 함께 즐겁게 살자,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실천하며 살자”라고 답했다.

 

 

건달할배채현국과 친구들/ 15x22cm 288면 14,400원 출판피플파워

인사동 사진집·채현국 추모집 이어최근 ‘인사동에서 만나자’ 기획출간

작가·만담가·가수 등 35명 글 모아“선생님들처럼 후배들 밥술 사야죠”

 

그의 공식 학력은 초등 3년 중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10대 중반 때 학생잡지 <학원>에 실린 최인호 청춘 소설을 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 만 21살에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사상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고 그 뒤로 월간 <객석> 영업사원과 출판사 영업부장, 잡지사 광고부장 등을 거쳤다. “삼성출판사 전집 월부값을 갚으려고 그 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죠.”그는 지금도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단다. “귀천에 붙어 있을 때 천상병 선생께서 저에게 ‘놀지 말고 시 몇 편 써 오면 <현대문학>에 실어주겠다는 말씀도 하셨죠. 하지만 그때 저는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었죠. 죽기 전에 서정인·윤후명 작가처럼 깊이가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 생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죠.”그는 천상병 시인 생전 10년 동안 제자로 살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분의 시처럼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인간적인 모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천 시인은 날카로운 통찰력도 있었어요. 제가 춘천에서 병간호를 하며 일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보니까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네가 우치무라를 아느냐고 하시더군요.”노 대표에게 인사동은 “자연스럽게 놀고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이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에서 80년대에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하신 말씀이 ‘인사동은 생산적이야’였죠. 여기는 전시 예술이 번성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재미나게 즐기고 배울 게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공부도 억지로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요즘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애정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하자 그는 카페 ‘귀촌’과 막걸리 주점 ‘유목민’, 한정식집 ‘여자만’과 만두 전문점 ‘사동면옥’, 강된장 전문점 ‘툇마루집된장예술’ 그리고 카페 겸 식당 ‘시가연’ 등을 꼽았다.‘인사동 터줏대감의 세대 교체’를 화제에 올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우리 60대가 죽은 뒤에는 이어질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40, 50대라도 많이 오면 좋겠어요. 전에는 선생님들이 공부 가르쳐주고 밥도 사고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해야죠. 돈이 많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이젠 우리가 해야죠.”

 

한겨레 /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 이게 얼마 만이더냐?

그놈의 코로나에 발목 잡혀 못 만난 지가 2년을 훌쩍 넘었다.

조준영 시인의 사발통문으로 모처럼 인사동 골통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인사동 풍류를 사랑하는 예술가 패거리가 생겨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7-80년대 목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귀천을 아지트 삼아,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 민,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민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 풍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소식 끊긴 구중관, 배평모를 비롯하여 김종구, 강용대, 최정자, 이청운,

강찬모, 조해인, 최울가, 박광호, 전강호, 김신용, 석파, 적음, 김용문씨 등 많은 풍류객이

만들어 낸 사연들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것이다.

그중에는 김명성씨가 있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화가도 더러 있으나, 예전엔 다들 개털이라 술값 낼 물주가 필요했다.

김명성씨가 창예헌이란 모임을 만들어 인사동은 물론,

지방까지 예술축제를 개최하여 지역 예술가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인사동에 세운 아라아트건물이 빚더미에 올라

중국 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조준영 시인이 주선하여 유목민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인원은 십여 명 밖애 모이지 않았지만, 터줏대감들의 유지는 이어 온 셈이다.

그것도 형식상으로 일 인당 만 원을 거두지만,

주태백이 술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항상 제 주머니를 털어 온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랜만에 모임을 규합하기 위해 봉화 사는 신동여화백을 불러 온 것이다.

신화백은 인사동에서 전시했던 4년 전에 보고 처음이니, 다들 얼마나 반갑겠나?

, 신동여씨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우익선생이 생각난다.

 

신경림시인의 간고등어시에도 소개되었지만,

봉화에서 인사동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안동 간고등어를 들고 오셨다.

신화백도 같은 봉화 살지만, 삶의 철학이 비슷하다.

신화백 역시 예전에는 간고등어 대신 약초를 갖다주었다.

 

전우익선생 말씀대로 재미있게 사는게 최고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럴려면 저어기 무인도에나 가서 살어.

별로 재미없는 세상 재미나게 살아가야제. 안 그려?

비잉신처럼 굴지말고 학실히 살다 가. 알았냐?”

 

인사동 모임은 지난 금요일 오후 여섯 시로  잡혔는데,

전시 리뷰 하나 전송하고 나가려다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인사동에 도착하니 삼십 분쯤 늦었는데, 이미 유목민벽치기 골목은 대목장이었다.

 

봉화에서 올라온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임태종, 조해인, 이명희, 김상현,

장경호, 전강호, 정복수, 노광래, 유근오, 김수길, 김 구, 임경일, 정영신, 노박사,

이인섭, 최유진, 김민경, 전활철씨 등 이 십여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도 와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대신 카메라부터 들이댔는데, 찍고 빠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걸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슬슬 취했다.

술맛 좀 날 만 하자, 일찍 마신 술꾼들은 도망갈 준비부터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니, 바톤 받듯이 임헌갑, 서인형, 류연복, 최석태, 안원규,

발렌티노 김이 뒤를 이었는데, 한때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 이두엽까지 나타났다.

아직 인사동 밤안개가 나올 시간은 아닌데...

 

기분이 좋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갔다.

요새 한꺼번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자주 생긴다.

그제는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이 인사동에서 열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까지 올라 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는 정동지 눈치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신 화백하고 빨다 잘 테니, 먼저 들어가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에 나온다는 말이 딱 맞다.

모셔드려야 할 밤늦은 시간에, 어찌 동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늦게 온 술꾼들마저 사라지는 걸 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평소 문 닫을 때 까지 마신다는 장경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신화백까지 사라져 활철씨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여관에 갔단다.

활철씨 안내로 '한흥장'을 찾아가니, 이미 신화백은 뻗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화백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인사동 거리는 사람 청소를 했는지,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나 인사동에 해장할 곳이 마땅찮다.

아침 식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뿐이라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반주도 없이 급하게 설렁탕을 퍼 넣는데, 전활철씨가 해장국 끓어 놓았다는 기별을 했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국물이라 소주가 술술 넘어가 단숨에 한라산 세 병을 까고서야 일어섰다.

활철씨는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가는 동안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간 크게 택시를 잡아탔다.

 

모처럼 시골 영감이 상경했는데, '대마불사주'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해장술에  제정신이 아니라, 활철씨가 찔러 준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외상이 아니라는 투로 주모에게 대마불사주와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대마 나물과 대마불사주가 나왔는데, 시골 영감이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았다.

불광동 사는 장춘씨까지 불러냈으나, 이미 정신이 풀려버렸다.

많지도 않은 대마불사주 씨를 말리고서야 일어섰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신화백을 부축하여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는데,

장춘씨가 술 취한 신화백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듣는 내가 짜증 났다.

처녀로 늙었기에 망정이지, 시집이라도 갔더라면 서방 잡을 것 같았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입구에서 내려 유목민으로 돌아오니,

활철씨도 장을 보아 영업준비를 마무리했더라.

 

장춘씨의 잔소리를 안주로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노박사가 안주하라며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갖다주네.

입가심으로 마신 막걸리 두 병에 신화백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활철씨가 여관방을 잡아두었다기에, 그를 부축하느라 술이 깰 지경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리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2층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니, 장춘씨도 가버렸다.

그만 막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인사동에 방 잡아 놓고 술 마신 지가 얼마 만이더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래된 일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접어 넣었다.

신화백이 자리에 눕자, 긴장이 풀어져 다시 취기가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한 밤중에 깨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야 정신을 차렸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각났다.

뉴스 아트에 보내준 전시리뷰를 페북에 걸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 교정을 못 본 것이다.

 

컴퓨터를 열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마치 취중에 올린 글 같은 상스러운 표현인데, 이미 볼 사람은 다 봐 버렸다.

 댓글까지 달린 전시리뷰를 내리고, 수정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글을 다시 페북에 링크한 것이다.

 

카메라에 든 이미지를 꺼내 정리하며, 불 꺼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으니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닭죽을 끓여 놓았는데, 신화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화백은 일찍 봉화로 내려 간 것 같았다.

만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그래! 잘 내려가시게나.

당신이 또 하나의 인사동 추억을 남겨주었구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인사동 풍류, 불 꺼진 창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삭막한 인사동,

뒷골목 정마저 사라진다면 전우익 선생 말처럼 무슨 재민겨?”

다들 조준영 시인이 부여잡은 인사동 끈을 모두 놓지 맙시다.

 

이상으로 ‘신동여 선생 상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진, / 조문호

 

 

은행잎이 인사동을 금칠 한다

또 한 해의 끝자락이 몰려온다.

 

세월따라 가겠지만 모두 바뀐다.

인사동 거리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복면의 시대라 사람도 잘 몰라본다,

사람이 사람 만나기를 겁낸다.

 

더 큰 건물 지으려고 ‘지리산’을 철거한다.

인사동의 기억을 지운다.

 

풍류객 잔당들의 마지막 저지선 '벽치기골목' 

 

‘유목민’에 모여 앉아 음모 꾸민다.

이름하여 ‘풍류 쿠테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술타령 세월에 몸도 마음도 늙어갔다.

 

먼저 떠난 분도 여럿 눈에 밟힌다.

 

이계익선생 아코디언 연주에 민영시인이 분위기잡네.

 

어린애처럼 퍼 먹이는 장춘이 모습도 정겹다

 

류연복이 가려는데 장경호는 왜 놀래나?

 

고헌이는 쌍팔년도 춤으로 똥 폼 잡고

 

성질 급한 황석영은 술 컵을 날리네

 

누군 뒷동산 아지랑이 부르며 넘어가고

 

누군 따라 불러 동네 시끄럽다.

 

장기도 가지가지 악기도 가지가지

 

인사동 밤무대는 걸판지다.

 

 낭만, 로마네꽁띠, 무다헌, 부산식당, 사동집,  

아리랑, 여자만, 유목민, 푸른별, 풍류사랑,

가는 곳마다 풍류가 넘쳤다.

 

세월 따라 모두가 변해간다.

 

떠도는 사진만 야속타 원망하네.

 

그 때가 그립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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