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29 오전 열시에 출발하는 창원행 열차를 탔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학예연구사 이 랑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한 자리였다.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근현대사 백 년을 서예와 그림에 녹여낸

'자화상II 나를 보다' 전시 보러 경남도립미술관에 들리기 위해서다.

 

이 전시에 김명성씨가 소장한 항일우국지사 작품이 다수 걸리기도 했지만,

은평역사한옥박물관독립자료전 준비를 염두에 둔 관람인 것 같았다.

 

코로나19로 열차 좌석 배정이 띄엄띄엄 배치된 격리신세라 좀 그랬지만,

오랜만의 기차여행인데다 마산은 청춘 시절을 보낸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라 감회가 남달랐다.

그 곳은 그리운 벗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39사에서 신병훈련도 받았고, 아들 햇님이가 태어난 곳이었다.

 

결핵성복막염 수술을 잘못받아 죽을 뻔 했던 일,

교사들이 대마초 피웠다는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아닌 사건에 엮여 잡혀가는 등 수난의 일도 많았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부산에서 운영하던 음악실을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 바람개비를 돌렸는데, 문을 열자말자 손님이 미어터졌다.

취미로 시작된 음악실도 돈이 될 수 있었는데, 돈 버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를 마다하고 싸움판이 벌어 지는가하면,

깡패들이 난입해 음악실 통유리를 깨는 등, 폭력이 난무했다.

지방 텃새인지, 시샘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산과 마산의 수준 차이였다.

아마 내 얼굴을 장식한 수많은 주름살도 다 그 때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제목과는 달리 쓴 고배를 마시게 한 감격시대

마산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사진에 전념하게 만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차창으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 시간 남짓 달려서야 창원역에 도착했는데, 창원의 김의권씨가 나와 주었다.

낙지비빔밥으로 식사를 해결한 후 경남도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작년 3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릴 때 보지 못한 전시를 창원까지 와서 보게 될 줄이야...

경남도립미술관은 코로나에 지친 도민을 위해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자화상II-나를 보다전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글씨와 그림, 사진 등 독립운동을 위해 남긴 각계 기록을 예술적, 역사적 관점으로 풀며,

100년의 우리 역사를 서화로 돌아보는 전시였다.

 

예술로서의 독립 문제를 화두로 근현대 변혁기의 예술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예술의전당 전시와는 달리 영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문 신, 하인두씨 등 지역 작가도 다수 포함시켰는데,

독립운동의 흐름과 맥을 끊는 잘 못된 시도라는 평가도 따랐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 치열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살아 낸 인간의 의지가 작품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전시작품 중에 시선을 끄는 것은 구한말 초상화거장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였다.

 

고종 어진을 비롯하여 의병장 최치원 등 항일우국지사들의 초상이

동일 규격의 극세필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초상화 제작 자체가 독립운동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시를 관람한 후, 김종원 관장실에 안내되어서는 물고문을 받아야 했다.

녹차만 따라주었는데, 자판기커피 맛에 길든 나로서는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어디를 가나 지방 미술관장의 어려움은 지역작가와의 마찰이었다.

대개 지역 작가들 전시를 원하거나 지역화단의 단체전을 요구한단다.

기획 의도나 작품수준이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들인가?

 

관장실에서 나오니, 화가 전인경씨와 동생 전인미씨가 뒤늦게 도착했다.

다들 마산 창동으로 자리를 옮겨 화가 이강용씨 작업실에 들렸다.

 

화가가 그림 그릴 일 밖에 없겠지만, 오랜만에 가보니 많은 작품을 그려 놓았더라.

고인돌 형상의 오래된 작품들은 보았지만, 새로 그려진 작품도 많았다.

 

무채색의 산 능선 같은 미완의 작품도 눈에 띄었지만,

결정적인 작품은 84년도에 그린 오래된 작품이었다.

유령이 코로나로 환생했다면, 눈 어두운 자의 착각으로 여길까?

 

 나를 친형처럼 보살펴주는 이종호씨가 준비해 둔 선창가 어느 횟집에 갔더니,

이종호, 이종재, 이성배씨 등 이씨 문중의 세 사람이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 정신 없었는데, 준비된 음식도 여간 아니었다.

아이구야! 이걸 어찌 다 먹는단 말인가?

자연산 밖에 없다는 줄 돔이 줄줄이 자빠졌고, 갖가지 해산물은 맛보기였다.

 

특히 잊을 수 없는 맛은 마산 특산물 미더덕이었다.

다른 미더덕과 달리 조그마한데, 된장국의 미더덕을 터트려 먹던 어린 시절이 떠 올랐다.

 

그 날 처음 먹어 본 고추장양념에 무쳐놓은 미더덕 맛도 일품이었지만,

줄돔 구이는 둘이 먹다 한 놈 죽어도 모르겠더라.

 

딱딱하게 굽힌 줄돔 껍질이 얼마나 맛있는지, 혓바닥이 생 지랄을 떨었.

천한 입맛 수준을 한껏 높여놓아,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그 뿐 아니라 여인숙이나 찾는 촌놈을 호텔에 집어넣어, 날 샐까 두려웠다.

이튿날 복국으로 해장까지 했으니, 원도 한도 없이 먹은 셈이다

 

 종호씨! 고마워요.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마산의 이종호씨 자당 안복희씨가 지난 6월24일 노환으로 소천 하셨다.
효성이 지극한 이종호씨가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님 보살피느라 외출도 못하며 애 태웠는데,
애석하게도 운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순을 훌쩍 넘긴 연세라 호상인 듯 여겨진다.

 

 

 



 

지난 25일 뜻밖의 부고를 받았는데, 먼 거리지만 마산으로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종호씨가 누구던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던가.
생전에 자당을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왔다.

 

 

 



 

정영신씨와 함께 오후 여섯시경 마산의료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장대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장례식장을 들어서니 문상객이 너무 많았다.

 

 

 

 

 
문상객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고, 식당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조문객들이 보낸 조화는 입구에서 승강기까지 물결을 이루었다.
이종호씨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가족관계를 잘 몰랐으나 아들은 이종호씨 뿐이고 누님과 여동생이 다섯 분이나 계셨다.
많은 사위와 손주들이 문상객을 받고 있었는데, 문상객 중에 아는 사람은 김의권씨 뿐이었다. 

 

 

 

 



 

김의권씨는 삼년 만에 만났는데, 없는 살마저 빠져 마치 해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다 얼마 전 관절 수술을 받고 나 다닌다는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친구다.

 

 

 



 

장례식장이 너무 붐비는데다,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성동 ‘이프’로 자리를 옮겨, 진토닉으로 피로를 풀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상주-
아들 : 이종호
딸 : 이정희, 이은숙, 이은정, 이진주, 이미선
사위 : 하판갑, 노태권, 한판열, 강기철, 김덕훈
손자 : 하진환, 노영한, 노규한, 강정한, 강정훈, 김 건, 김 범
손녀 : 하성림, 한정연, 노민주, 이지언, 강승현, 이정언

 

 

 

 

 

 

 

 

 

 

 

 

 

 

 

 

 

 

 

 

 

 

 

 

 

 

 

 

 

 

 

 

 

 

 

 

 

 

 

 

 

 

 

 





갤러리카페 '숨'에 걸려 있는 고 현재호화백이 그린 이선관 시인의 초상



지난 27일, '아라아트'김명성씨와 마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시를 앞두고 걱정이 많아, 김명성씨 출장길에 따라 붙은 것이다.

9월초순 창원서 사진전을 열기로 했으나, 무엇을 보여 주어야할지 마음을 굳히지 못한 것이다.

전시장이 확정되어야 그 규모에 맞추어 사진을 제작할 수 있는데,

문제는 사진을 원하는 분들의 취향과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이 전혀 다른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아무리 작품을 팔기 위한 전시라지만, 새로운 메시지를 전 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쪽 팔리면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는 중에, 열차는 어느새 창원역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였는데, 마중 나온 아종호씨의 모습에 여러 번뇌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것은 시원시원하고 유쾌하게 사는 그의 삶이 가져다 준 천복이었다.

그 이후부터 마산에서의 일정은 종호씨가 이끄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집에서 맛있는 볼락회로 배를 채우고, 고급 위스키에 취했으며, 호텔에 몸을 맡기는 칙사대접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는 이종호, 김명성씨 외에도 김의권, 이종재, 김보현씨 등 마창 지역의 지인들까지 함께 했으니

어이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외동횟집에서 남성동으로 옮기다 오동동 거리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오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젊은 시절 그 곳에서 ‘바람개비’라는 학사주점을 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님이 밀려들어 주체할 수 없었던 나날 들, 의자를 던져 음악실 유리창을 박살내며 행패를 부렸던 오동동 건달들,

아구찜 집에서 밤참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장면 장면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또 대마초 단속요원에게 고려호텔로 끌려가 물고문 받던 지긋지긋한 일까지 다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난 여지 것 마산을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해 왔다.
그건 고향인 창영 영산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청춘의 대부분을 마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잠재적 욕정을 일으키게 했던 곳이 마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구마산 역 뒷골목의 사창가였다.

이름을 잊어버린 그 녀의 애절한 노랫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차라리이~ 만나지나 않았더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몰 라앗 을 것을”으로 나오는 “왼손잡이사나이”란 유행가 가사 말이다,

가사도 가사지만, 노래를 불렀던 그 녀의 눈빛을 영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녀는 언제나 애틋한 사랑을 실어 온 몸을 불 태워줬다.

어쩌면 나를 원시의 성을 쫓는 잡놈으로 만들어 놓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오랜 세월 동안, 내 기억 속의 마산은 뜨거운 욕정의 도시로 각인된 것이다.
남성동의 ‘베니베니’커피집에서 자판기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했더니,

커피마저 사랑의 하트문양으로 덮인 달콤한 커피를 갖다 줬다.

커피 잔을 놓기가 무섭게, 그 옆의 갤러리카페 ‘숨’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술집 벽에는 고인이 된 현제호선생을 비롯하여, 곳곳에 알 만한 분들의 작품들이 걸려있고,

주인마담 민정씨가 치는 피아노 음률이 귀족적 분위기로 끌었지만,

나혼자 저질스러운 밑바닥 인생의 원초적 본능에서 헤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끄는 여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김성훈씨가 그린 누드화의 음모에 꼴렸다고 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겠다.

평소에도 많이 취하면 잠재적 본능이 꿈틀대긴 했으나,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술이 취해 다들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은 없었으나, 호텔에 들어서도 뜨거운 욕정은 식지 않았다.

정말 인간도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건, 김명성씨는 걱정거리가 있어 혼자 바다 가를 거닐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없단 말인가?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길 뿐이었다.

그 때부터 신들린 무당처럼 대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신이시여! 이 악업을 어찌 하리오.
아무런 이유도, 대상도 없이, 욕정에 시달려야 합니까?“
단 하나 있다면 ‘욕정의 도시’라는 기억에 대한 답 입니다.


힘없이 벌컥거리는 눈물 닦으며, 개같이 쓰러져 잤다.

사진, 글 / 조문호











































































마산서 이종호씨가 올라왔다.

그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이 시대 몇 남지 않은 마지막 협객이다.

 

아내와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16풍석원에 이종호씨가 있었다.

 

~ 형님! 와이래 애빗노?”

특유의 정겨운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몬 무서 그러타 아이가~”

 

야! 이 얼마만의 회우냐. 반가워 얼싸 안았다.

 

그 자리에는 이종호 외에도 김명성, 박인식, 김상현,

공윤희,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니미~ 할 말도 많은데, 밥 먹으랴, 술 마시랴 정신없었다.

 

정선 전시 때, 못가 미안하다지만, 씰대없는 소리다.

그는 정말 바쁜 사람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만, 일은 칼같이 한다.

 

그날도 밤 열시 기차표 사 두고 있었다.

대충 마시고, 디귿자로 돌아 유목민에 갔다.

그곳에는 김기덕 감독 일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종호씨는 여기 저기 이야기하느라

앉을 시간도 없었다. 술도 서서 마셨다.

그 와중에 춘천전시 끝나면, 마산서 전시하란다.

 

열다섯 점은 확실하게 팔아 줄테니 내려오란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김상현씨로 부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염치없지만, 나이 칠순에 인생 정리하는 전시 한번 하련다.

마을에서 생일잔치해준다지만, 전시장에서 놀기로 했다.

사진으로 조졌으니, 끝까지 사진으로 조질란다.

 

아쉽게 떠나고 나니, 김명성씨가 제안한다.

8월 한 달 동안 아라아트를 통째로 빌려 줄 테니, 전시하란다.

선약된 전시는 9월로 옮기겠단다.

그래! 인사동에서 진정한 사진 축제 한 판 벌이자.

오랫동안 마음 먹었던, “우리사진과 민족의 정체성전을 열기로 했다.

 

갑과 을이 없는 사진축제,

나라 돈 넘보지 않고, 사진인들 힘으로 만드는 진정한 축제 한 번 하련다.

모두들 고맙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마음뿐이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예술인들을 후원하는 의리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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