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은 공공-민간개발 갈등에 지구지정도 못해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과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의 모습. 좁은 골목 안에 낡은 건물이 밀집돼 있다. [이가람 기자]

 

"너무 답답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개발이 잘 된다면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어 좋겠지만 또 쫓겨나면 이만큼 저렴한 가격에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 없거든. 이런 어려움을 나라에서 잘 살펴 줬으면 좋겠어."

여름에는 실내보다 실외 생활이 더 나을 정도로 극심한 폭염에 시달리고, 겨울에는 난방은 커녕 수도가 동파돼 씻지도 못하는 1평 남짓한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쪽방촌. 노후 건물을 촘촘하게 쪼개 한 달에 15~30만원 수준의 월세를 받는 쪽방촌은 지옥고로 불리는 반지하·옥탑방·고시원보다 더 열악한 주거시설이다.

현재 서울에는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다섯 개의 쪽방촌이 존재한다. ▲영등포 쪽방촌 ▲동자동 쪽방촌 ▲양동구역 쪽방촌 ▲창신동 쪽방촌 ▲돈의동 쪽방촌 등이다. 과거 1960년대 급격한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빈곤층이 모여들면서 조성됐다.

지난 16일 오후에 찾은 서울 쪽방촌들은 벌써 몇 년째 지역개발 이슈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최근 영등포 쪽방촌 정비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나머지 쪽방촌들에 대한 개발논의 활성화 기대감이 나오고 있지만, 거주민들과 소상공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아직 개발사업이 진척되거나 구체적인 보상 및 이주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20년 넘게 쪽방촌을 전전하고 있다는 A씨는 "어디나 비슷할 것"이라며 "공용이 아닌 개인 화장실을 써 보고 싶었는데 죽기 전에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오르막길 안쪽에 걸터앉아 연신 부채질을 하던 B씨는 "창문이 고장 나서 열 수 없고 곰팡내도 좀 나서 밖으로 나와 쉬고 있다"며 "재개발이 될 거라고 하니 주인이 돈을 들여 집을 고쳐 주지도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스케줄대로라면 국토교통부가 진작 개발 플랜을 제시했어야 했지만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며 "선진국에서는 공청회나 이벤트 등을 통해 주민들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오래 가지는데 우리나라는 커뮤니케이션적인 부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쪽방촌. 최근 공공주택지구 사업시행을 위한 지구계획이 승인·고시됐다. [사진 제공 = LH]


특히 쪽방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동자동 쪽방촌은 공공개발과 민간개발로 소유주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아직 지구지정도 되지 못했다. 쪽방촌 입구에는 '사유재산 빼앗아서 공공주택 만드는 게 공익이냐'는 문구가 적힌 검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쪽방촌 주민들을 도와주는 센터에서 일하는 C씨는 "공공개발을 하면 우리가 입주할 수 있는데 민간개발이 되면 쫓겨날 게 분명하다는 사람들과 빠르게 착수할 수 있는 민간개발을 선택하되 서울시의 조율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있다"며 주민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종교시설에서 식사를 받아가던 D씨는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어서 버티고 있다"며 "한 달에 20만원 주면서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폭이 50㎝가 될까 싶은 좁은 입구와 깨진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전기 설비가 오래되고 전선이 뒤엉켜 안전사고에 그대로 노출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화재 발생 시 소방차 진입도 불가능해 보였다.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 중인 E씨는 "그래도 정부에서 신경 쓰겠다고 말했으니 변화가 있을 것 같다"면서도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또 희망 고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어떤 방향이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보내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7월 취임식을 마친 뒤 곧장 쪽방촌을 찾은 바 있다. 동행식당 지정 및 운영, 노숙인 공공급식 확대 및 급식단가 인상, 에어컨 설치 등 지원을 약속했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쪽방촌 곳곳을 돌며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서울시 쪽방촌 상담소 관계자는 "최대한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라며 "공동이용시설 리모델링이나 상담을 통한 보호시설 입소 등도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는 2026년 말까지 공동주택 782채를 건설해 쪽방민과 신혼부부, 청년층에게 양질의 역세권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목표다. 동시에 공공사업자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쪽방촌 개발사업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영등포 쪽방촌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양동구역 쪽방촌이 서울시가 지난해 10월 민간주도로 재정비를 추진한다고 발표하면서 공공임대주택·사회복지시설·업무용오피스시설 등을 짓는 내용으로 정비계획을 확정한 상태다. 임대주택 건설이 시작되면 주민들은 임시 이주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매일경제 / 이가람 기자]

1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설치된 야외무더위쉼터에 주민들이 모여있다. /사진=정세진 기자

"너무 덥잖아. 낮이고 밤이고 방에 있으면 돈 없고 임도 없으니 여기 앉아서 놀아."

서울 중구 남대문경찰서 오른편에 시작하는 후암로60길은 남대문5가 경로당까지 130여 미터(m) 이어진 오르막길이다. 경로당 맞은편에는 낡은 건물이 10여채 모여있다. 이곳은 동자동쪽방촌 또는 서울역쪽방촌이라 불린다.

기상청이 서울에 폭염경보를 내린 4일 오후 동자동쪽방촌 주민들은 대다수가 방 밖에 나와 있었다. 오후 1시 서울의 기온은 섭씨 31도를 웃돌았지만 방안에는 습도가 높아 견디기 어려운 탓이다.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이날 서울의 최고기온은 35도에 이른다.

30년 이상 서커스배우로 활동하다 이곳에서 10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A씨 역시 남대문5가 경로당 인근 옹벽 아래 앉아있다. 옹벽 아래에는 쿨링포그가 설치돼 있어 불과 한두 걸음 바깥쪽 길가보다 시원했다. 쿨링포그는 물안개를 분사해 주변 온도를 낮추는 장치다. 기온이 26도가 넘으면 자동으로 물안개를 뿜는다. 이날은 오전부터 물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A씨는 서울시립 남대문쪽방상담소(쪽방상담소)에서 나눠준 여름이불과 간편식을 받으러 나온 길이었다. 물품은 챙겼지만 다시 방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방이 너무 더워 낮이고 밤이고 밖에 나와 있다"고 했다.

 

서울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쪽방촌에 설치된 쿨링포그가 물안개를 뿜어내고 있다. /사진=정세진 기자

경로당 앞 야외무더위쉼터에도 주민 6~7명이 모여있었다. 쪽방상담소에서 자원봉사 중인 양동일씨(47)는 야외무더위쉼터천막 아래 테이블을 펴놓고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씨는 더위에 지친 동네 주민들이 오면 아이스박스에서 얼린 생수병을 꺼내 준다. 쪽방상담소는 야외무더위쉼터를 찾는 동네주민이라면 누구나 장부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얼음물을 받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B씨는 "두 세 시간 이상 선풍기를 틀면 선풍기가 열을 받아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며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1시에 야외무더위쉼터에 나와 앉아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동자동쪽방촌 건물은 보통 한 층에 0.5~2평 크기 방 8~15개와 화장실 1개가 있다. 건물이 4~5층 규모여서 살고 있는 주민은 20~50명에 이른다. 선풍기가 과열되면 주민들은 층마다 한 개씩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한다. 샤워 후에는 선풍기가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야외무더위쉼터나 쿨링포그 아래로 모인다.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쪽방촌의 모습. 남대문5가 경로당 맞은편에 10 여채의 낡은 건물에 180~250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무더위가 계속될수록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최근의 물가상승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라면을 사 먹거나 커피를 사서 나눠 마신다. 낮부터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기도 한다. 동자동쪽방촌에 2개 남은 '구멍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품목 역시 소주, 막걸리, 라면 등이다.

10년째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박규언씨는 "밀가루값이 오르면서 과자, 라면 등 안 오른 게 없다"며 "과자는 이제 너무 비싸서 잘 안 가져다 놓는다"고 했다. 박씨 가게의 하루 매출은 3만~5만원 수준이다. 그나마 기초생계비가 지급되는 매달 20일부터 2~3일간은 하루 매출이 10만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쪽방상담소 관계자는 "이곳 주민의 3분의 2가량은 기초생활수급자"라며 "매달 82만원 남짓의 지원금을 받는다"고 했다.

쪽방촌의 월세는 25~35만원 수준이다. 전기세와 수도요금 등 공과금은 월세에 포함된다. 한때 동자동쪽방촌에는 450여명이 살았지만 재개발을 앞둔 현재 180~200여명의 주민만 남았다.

기상청은 폭염과 열대야가 6일까지 이어지다 전국에 장맛비가 예고된 7일부터 한풀 꺾일 것으로 전망했다.

 

머니투데이 / 정세진 기자 (sejin@mt.co.kr)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서울역 주변의 쪽방에서 절망스런 삶을 사는 사람이 천 백명이나 됩니다.

그들의 곤궁한 삶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 벽이 생각 외로 두터웠습니다.

오랜 세월 단절된 습성 때문인지,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더구나 외부의 노출을 꺼리는 그들로서는 사진 찍기를 단연코 거부합니다.

그 벽을 허물려면 많은 노력과 정을 쏟아 부어야 할 것 같네요.

 

지난 19, 동자동에 사는 장애인 윤용주(54)씨를 만났습니다.

그가 동자동 쪽방에 살게 된 것은 올해로 12년째라는데, 나이에 비해 많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천식과 고혈압, 당뇨로 고생해왔는데, 몇 년 전부터 합병증에 의해 혈관이 막혀 다리가 썩기 시작했답니다.

지난해는 왼쪽다리를 잘라냈으나, 이젠 오른쪽 다리까지 옮겨갔답니다.

 

그는 IMF사태가 만들어 낸 희생자입니다.

그 이전엔 전주에서 건설회사의 하청업체를 운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가장이었습니다.

IMF 직격탄을 맞은 건설회사 도산으로 빚더미를 안게 되었고,

술로 한탄의 세월을 보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여기까지 밀려왔답니다.

두 자녀를 키우는 전 처도 생활이 어렵다는 소문은 들어, 가족에게 전화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합니다.

그냥 자식이나 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이랍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 그는 한 달에 50여만 원을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으나, 병원비를 부담하기엔 어림없습니다.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니, 다리는 자꾸 썩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혹시 자선의 뜻이 계신 분은 아래로 연락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윤용주 : 010-2191-3477

서울시 용산구 후암로 57, 동자동 17-7 (16)

농협 302-0603-4335-41 (윤용주)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건너편은 우리나라 대기업 빌딩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굴지의 기업 GS건설빌딩과 전 대우빌딩인 금호빌딩도 있고, 남대문경찰서 뒤로 서울시티타워인 그린화재빌딩과

힐튼호텔, CJ홈쇼핑 건물도 보인다.

그러나 그 거대한 빌딩 틈으로 쪽방들이 코딱지처럼 다닥 다닥 붙어있다.
옛날 사창가였던, 양동을 비롯해 동자동, 도동 등지에 전세 100만원에 월20만원 정도하는 한 평 남짓의 쪽방들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보기로 작정했다.

그 실상을 전해 들어 마음 굳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공식적인 길을 따르기 앞 서, 그들의 실상부터 파악할 겸, 추석 이튿날 동자동을 찾았다.

명절이라 그런지, 동자동 놀이터에 많은 분들이 모였더라.

일단, 그분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갔으나, 나도 모르게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갔다,

개성이 독특한 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마치 공원자체가 연극 무대 같았다.






몸이 불편한 분들이야 나오지 못하지만, 웬만하면 답답한 방안보다 공원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날 공원 곳곳에 낮술을 즐기는 분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 인심이나 담배인심은 좋았다.

처음에는 인사로 권하는 줄 알았는데, 담배가 없으면 아무에게나 담배를 달라 했다.

예전에야 담배 인심 하나는 좋았으나, 담배 값이 비싸진 이후론 보기 드문 미덕이다.






그러나 원색적인 욕설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겉으로는 거칠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진 않겠지만, “야이 씨발놈아”란 말이 일상적인 언어였다.

듣는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걸보니, 그냥 친근함을 나타내는 악의 없는 욕설이더라.


그런데, 그 곳에도 남자들이 여자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성태엄마란 분은 아무 남자에게나 시비를 걸고 쫒아 다니며 진득이를 붙어 결국 도망가게 했다,

가겟집 할머니가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쳐가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날, 세상살이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술에 가두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오죽하면 공원 주변에 술중독자 상담을 위한 현수막이나, 공원에서 술 담배를 즐기는 것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성 플래카드도 걸렸으나. 공염불인 것 같았다.

놀이터에 가뭄에 콩 나듯 한 어린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노인들의 해방구라 그냥 묵인하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런데 놀이터의 분위기를 확 바꾼 것은 하투놀이였다.
한 남자분이 신문지를 깔고 화투판을 벌였는데,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 여섯 사람이 돌아서서 섰다판을 벌였는데, 투전이라기보다 하나의 나누는 놀이였다.

돈을 딴 사람이 구경하는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 뿐 이었다.

가진 자보다 없는 자들이 더 인정이 많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잠시, 환자들이 누워계신 쪽방 몇 곳을 찾아보았다.
어떤 분은 귀가 어두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어떤 분은 내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있지만, 찾지 않는다는 분도 계셨고, 죽는 날만 기다린다며 체념한 분도 계셨다.

다들, 복에 없는 돈보다는 사람 사는 정에 목말라 했다.

그렇지만 한 푼이라도 생기면 가난한 자식에게 주고 싶다는 말씀도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게다. 다시 찾아 올 날을 적어드리고, 물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서울역 주변에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사는 쪽방촌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다들 가난을 물려 받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 뿐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으로 사는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라도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초생활 수급비 60만원에서 집세 20만원을 제하면 남는 게 뭐있겠나?

임대료를 도와주거나, 추위나 더위, 화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절실했다.

내일은 양동과 도동 방향을 돌아보고, 월요일부터 작업에 들어 갈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