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이틀 앞두고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에 계신 김덕순 여사를 뵈러 갔다.

명절과 기일만 되면 정동지 따라 소풍 가듯 들리던 용인 성당묘지도

이젠 몸이 편치 않아 정동지의 조카 심지윤씨 차에 편승해 갔다.

그러나 운전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남의 차에 실려 가는 것은 더 힘들었다.

운전할 때는 운전만 신경을 써서 졸리는 것은 물론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만,

뒷자리에 앉아가니 잠만 쏟아졌다. 졸다 깨기를 반복하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묘원에는 아직 성묘객이 많지 않아 한적했다.

운해가 자욱한 주변 풍경 속에 소나무 한 그루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한때 장모였던 김덕순 여사는 낙락장송처럼 지조가 곧고 너그러운 인품을 갖고 계셨기에,

마치 고인이 지켜 서서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묘원에는 정영신씨의 어머니 김덕순씨와 언니며 심지윤씨 어머니인 정정숙씨 유골함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를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에는 정동지 자매 따라 용인 천주교 성당 묘역을 찾아갔다.

그곳은 정영신씨 어머니 김덕순씨와 언니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 위로 모셔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만 되면 평소 좋아하시던 복숭아와 옥수수, 고구마 등을 삶아 가는데, 

성묘 가는 길은 항상 소풍 가는 것 처럼 즐겁다.

성묘객이 없어 한적한 이번 성묘 길에는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도 함께 했다.

 

 국화를 영전에 놓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두 자매의 모습이 정겨웠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로 추억을 떠올리던 정주영씨 말끝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엄만 맨 날 언니만 챙겼잖아

자식 중에 유별나게 언니를 편애한 지난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정주영씨가 저녁을 사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일인분에 삼만원이나 하는 섬진강 민물 장어를...

돌아가신 현대 정주영 회장님 이름값을 했다.

 

하기야! 불광동 역세권에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가졌으니, 회장보다 배짱은 더 편할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장어 안주 덕에 소주 한 병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하루 걸러서는 정동지의 돌아가신 언니 정정숙씨 기일이었다.

오후 늦게 정동지 자매와 함께 김포 조카 지윤씨 댁을 찾아간 것이다.

 

오랜만에 갔더니, 조카사위 김중오씨는 다리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빨리 완쾌되길 빌 뿐이다.

그리고 꼬맹이 시절 보았던 유원이는 키가 엄마보다 더 큰 소녀가 되어있었다.

애들 자라는 모습에서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상다리가 부르지도록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에,

생전에 한 번도 뵌적은 없으나, 술 한잔 올린 후 고인을 기리며 절을 올렸다.

 

제사상을 물린 후 먹는 제삿밥 또한 자주 맛볼 수 없는 추억의 음식이다.

운전 때문에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제삿밥을 비벼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돌아가신 분들 덕에 연이어 몸보신을 했는데,

이 넘치는 정력은 어찌할까나...

 

사진,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두 차례나 술자리가 생겼지만, 운전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다.
술 마시다 혼 쭐난 후 부터, 한 동안 밀밭에도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고팠겠나.

일요일엔 녹번동의 동지 정영신씨 집에서 죽치는 날인데,
느닷없이 인사동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들이 닥친 것이다.
일요일엔 녹번동서 논다는 정보는 알았겠지만, 전화도 없이 찾아와 놀랐다.
하기야, 엊그제 전화번호를 바꾸었으니, 연락 될 리가 만무했다.






평소 핸드폰을 가까이 두지 않아 전화를 잘 받지도 않았지만,
여지 것 다른 사람 명의의 핸드폰을 사용해 내 전화가 아니었다.
거지에게는 통화료를 받지 않는 전화기가 있다기에 바꾸었더니,
바뀐 번호를 안내도 해주지 않았다.

전활철씨는 배낭에 술과 안주까지 잔뜩 사왔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운전하여 김포까지 가야 하는데, 어찌 술을 마실 수가 있겠나. 
일어 설 때까지 전활철씨 혼자 술을 마셨는데,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었다.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인사동 ‘유목민’ 손님이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나이 많은 자신마저 손님들이 꺼려해, 현장에서 은퇴해야겠다는 것이다.
“아이구야!” 늙은 것도 서러운데 마지막 아지트까지 뺏기면 어디로 가지?
이제 낙원동 ‘다리밑집’ 아니면 ‘풍류사랑’ 뿐이었다.





술은 남았지만, 시간되어 자리에서 일어 날 수밖에 없었다.
김포 가는 일은 정영신씨 조카 심지윤씨의 저녁초대를 받아서다.
김포로 이사 간지가 제법 되었지만, 시어머니 눈치 보느라 초대하지 못했는데,
마침 시어머니가 지방에 외유 중이라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걸렸는데,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지 주차장이 종합운동장 몇 개나 되는 크기였다.
촌놈이 서울 딸 내 집에 찾아 온 격인데, 주차장에서 한 참을 헤매었다.
난, 아파트 살 형편도 되지 않지만, 그냥 준다고 해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왠지 감옥 같은 느낌이 드는데다, 그 넓은 곳을 청소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다.






조카사위 김중호씨가 저녁상을 마련해 두었는데, 백숙에다 소주가 나왔다.
차 때문에 한 잔 받아 입술만 축이려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식사하며 나눈 주된 대화는 어머니 험담이었다.
정치적 이념에서 부터 생활습관 등 모든 것이 달라, 같이 살기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골통 태극기부대 스타일이고, 아들과 며느리는 촛불의 주역이니 보나마나다.






돌아가신 김중호씨 부친은 박정희시절에서 전두환 정권 초반까지
중수부장과 검사장을 지냈으니, 어머니 자부심은 대단했던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굽신굽신하던 옛날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검사장 시절의 명패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그런 행적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것이다.
가끔 김포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행사에 아들을 따라나서고 싶어 했으나,
김중호씨는 기겁한다는 것이다. “돈 프레이 뎃 송‘이란다.

태극기부대와 촛불시민의 갈등이 집안까지 번진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사진, 글 / 조문호









20여 년 전 폐암에 의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바 있는 처형(고 정정숙씨) 이장식이
지난 8일 용인 천주교성당묘지에서 있었다.

묘지 사용기간 만료로 화장하게 되었는데, 망자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었다.
돈이 없으면 죽어서도 서러움을 당하는 세상이다.

이제 매장의 시대는 끝내야 한다.
좁은 땅덩어리가 온통 묘지로 뒤덮일 판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단지 살아남은 자의 몸부림일진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묘를 관리하는 일 또한 만만찮다.

차라리 화장하여 자연으로 돌려주고, 사진으로 추억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늦가을 비가 촉촉이 내린 이장 날은 붉게 물든 가을 단풍마저 처연해 보였다.
유족으로는 남편이었던 심시권씨를 비롯하여, 딸 심지윤과 그의 남편 김중호, 외손자 김유원,
여동생 정영신, 정주영씨, 그리고 이기남, 심정금, 심재춘, 심용주, 심혜영, 최현석씨 등 일가 친척들이 함께했다.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된 처형(고 정정숙씨)의 영면을 기원한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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