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꽃처럼 돋아난 화려한 물질문명에 슴이 턱턱 막혔다.

지난26일 성균관로 정문규미술관에서 열린 김재홍 초대전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을 보면서다.

 

  2년 전 보여준 거인의 잠에서는 갈갈이 찢기고 망가진 땅 즉 병든 국토를 이야기 했다면,

이번에 보여 준 깨어나는 몸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정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물질문명, 즉 돈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케 하는 리얼리즘이라 듯이,

작가 김재홍이 전해주는 시어들은 절규에 가깝다.

 

   

김제홍은 정치적 모순이나 불안한 한반도 평화, 환경의 황폐화, 물질문명에 병든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 등

동시대인이 처한 삶의 문제점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화산이나 지구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핵폭탄 등을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한 작품에서는

보들레르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그대의 증오로 저주받은 이 씨앗은

나를 짓누르는 분노를 솟구치게 할지니

독기 품은 새싹이 돋아나지 못하도록

늦기 전에 이 나무를 아주 비틀어 놓으리라!“

-보들레르의 시 축복’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여행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죽음의 길에서 새로운 미지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목숨 걸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악의 꽃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다.

 

  김재홍이 추구해 온 일관된 작업은 우리민족이 겪어 온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민주화 과정을 겪는 지난한 시대적 사건에서 부터,

국토의 분단과 자연의 황폐화 그리고 핵 확산이 가져올 종말적 위기론까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가 배경으로 끌어들이는 인간의 몸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며 세상이다.

분단의 상처나 핵폭발로 일어 날 비극적 상황을 몸의 상처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반성케 한다.

 

  아래 글은 홍경한 미술평론가의 전시 서문에서 한 단락 옮겼다.

 

김재홍은 정치적·사회적 관계망 속에 거주하는 실존이 겪는 삶의 냉혹한 현실을 기록하고

시대의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을 품격 있게 다룬다.

또 다른 역사화로 <근정전>을 잇는 <안타까운 유산>에서처럼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강력한 논평이 된다.

 

  물론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바로 그의 작품은 형식상 사실주의적 경향을 따르지만 입체적 상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입체적 상상은 상징적인 요소에 의한다. 작가는 상징을 통한 직관성을 회피하는 대신 작품마다 시어(詩語)를 심으며 현실 인식과 성찰의 행간을 만든다. 예를 들어 폭탄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들어선 대지 혹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몸을 그린 <거인의 잠>, <야만의 흔적> 연작은 거칠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다룬 진혼곡이다. 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기록과 생채기들은 엄혹한 현실의 투영이면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익명의 상흔이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26일은 청승맞게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성균관대 부근에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문규씨 집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어렵사리 찾았지만 많은 분들이 뒤풀이 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일 이층에 나누어 내건 대형 작품에 압도되었지만 손님이 너무 많았다.

뒤늦게 작품 보랴 인사 나누랴 정신없었는데, 단양 사는 김언경씨 모습도 보였다.

 

주인공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박불똥, 조경연, 장경호, 박흥순, 안원규, 박상희, 이필두,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최운영, 류충렬, 나종희, 황준연, 이인철, 김진하, 류연복, 이재민, 양상용, 이현정,

칡뫼김구, 성기준, 두시영, 박은태, 곽대원, 손기환, 한상진씨 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화가들이 나왔다.

 

  임정희씨는 동행한 독일 문화비평가 안드레아스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뒷풀이 집인 한국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넓은 식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마침 장경호씨가 자리를 잡아 놔 끼어 앉을 수 있었는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은 갤러리측에서 낸다기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마신 것 까지는 좋았으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탈이었다.

옆에 앉은 손기환씨가 술잔만 비면 따라주는 바람에 정량을 한 참 초과했는데,

문제는 술이 취하면 오버 하는데 있다.

 

  평소엔 말을 잘 하지 않지만, 술이 취하면 검정되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까발리거나 고집하는 게 문제다.

그 날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며칠 후 끝나게 될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시에 꽂혀,

전시 끝나는 다음 날 인사동 거리 전을 하자고 고집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설치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이며 관리는 어떻게 한다는 등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이인철, 김진하, 최석태씨 등 가까이 있는 모든 분에게 반복했으니,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전시장은 텅텅 비고 거리에는 사람이 넘쳐나는 문제점의 대안을 찾고 싶은 궁여지책으로,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을 열면 행인들에게 오래된 추억을 소환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술자리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었다.

술 취한 자의 행복한 노래 쯤으로 여겼으면 좋으련만, 미운 살 박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술이 취해 최석태씨 도움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갔는데, 길거리에서 중국 통 이강군씨를 만나기도 했다.

 

  대학로에서 버스로 출발해 갈아 탄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보니 목적지에서 두 구역이나 지났는데, 술김에 걸었으나 너무 무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시장 찾느라 많이 걸었는데, 며칠은 고생하게 되었다.

부산 같다 온 휴유증도 이틀 만에 간신히 가라앉히고 나갔는데 말이다

사람도 아닌 송장이 사람 행세하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이 전시는 1126일까지 열리니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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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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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현실과 발언’ 창립 40주년을 맞아 노년의 민중 화가들이 다시 뭉쳐 세상에 말 걸고 있다.

 

암울한 유신시절이었던 80년도 창립된 ‘현실과 발언’은

81년 ‘도시와 시각’전으로 서울을 비롯한 광주와 대구에서 순회전을 가진바 있다.

이듬해에는 ‘덕수미술관’에서 ‘행복의 모습’전을 열었는데,

‘그림과 말’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 때인 82년이었다.

10년 동안 활동하다 90년 해체되었지만, 작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을 이어왔다.

 

‘현실과 발언’ 동인들은 '화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서로 토론하고 연대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미술(美術)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 케테 콜비츠의 말처럼,

미술에서 아름다움만 고집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다.

자유롭게 발언하는 소통의 기능을 통해 삶의 맥락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현실과 발언’ 동인들은 당대의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미술로 표현하며 시대와 소통했다.

 

당시 회지 제호였던 '그림과 말'을 그대로 내 건

'그림과 말 2020'展이 지난 1일부터 삼청로 ‘학고재’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회화, 판화, 설치, 사진 등 106점을 내건 전시에는

작가들의 청년기 작품과 최근작을 비교할 수도 있는데,

다들 젊은 시절의 열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용태, 최민씨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장인 윤범모씨가 빠진

강요배, 김건희,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박불똥, 박재동,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씨 등 열여섯 명이 참여했다.

 

‘코로나19’ 광풍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피하기에 개막식엔 참석 못하고,

지난 7일에야 전시장에 들릴 수 있었다.

 

본관 중앙에는 심정수씨의 조각 ‘사슬을 끊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억압받는 청년의 초상으로,

사슬과 장벽을 끊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다른 전시와는 달리 전시 공간 한 곳에 ‘진행형 프로젝트 룸’을 설치하여

작가들이 작업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더라.

 

그 날은 전시작가인 김건희, 노원희, 박불똥, 박재동씨가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취재 나온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와 사진가 양시영씨도 만날 수 있었다.

 

프로젝트 룸은 전시가 진행되는 한 달 내내 작가들이 오가며

작품 활동을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공간이다.

 

작가들이 동시다발로 프로젝트 룸에서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데,

나온 작가가 자기 작업을 할 수도 있고, 앞사람 작업을 이어갈 수도 있고,

재해석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임옥상씨는 전시 기간 동안 "내달려라, 그림!"이라는 주제의 관객 참여 형 작업을 펼친다.

즐겨 다루는 흙 위에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관람하는 것 외에도 참여 작가를 여럿 만날 수 있어 좋다.

작업을 지켜보거나 제작에 참여할 수도 있는데,

내가 간 날은 박재동화백이 관람객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원희 작가는 관람객에게 바느질 작업을 지도했다.

그 날은 먹을 복이 있는지, 한 쪽에서 김건희, 박불똥씨가 피자 파티를 준비했더라.

 

전시장을 둘러보니, 현실사회를 향한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민주화 영향인지 표현 방식은 다소 부드러워졌다.

진보 성향인 민중미술가들의 이념적, 정치적 색채가 잘 드러났다.

 

신경호씨의 '꽃불(화염병)-역천(逆天)‘과

5월18일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작품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빨갱이의 상징 깃발 같다'며 압류 당하여 20여년 만에 돌려받은 작품이었다.

 

1980년 군사정권의 공포를 그 당시 나온 ‘쭈쭈바’의 광고 문구로 풍자한

‘얼얼덜덜’을 선보인 김건희씨는 지난해 그린 촛대바위 연작을 내 걸었다.

 

김정헌씨는 폐공장을 배경으로 버티고 선 큰 나무를 그렸다.

'갈등을 넘어 녹색으로'란 제목을 붙였다.

1982년 작품은 미래를 위해 달리는 건강한 노인의 모습을 담은 '행복을 찾아서'가 걸렸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씨는 '바이러스' 연작으로 방송인 김어준씨를 그리기도 했는데,

검찰, 언론개혁 등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모든 그림은 말을 한다. 속삭임으로든 침묵으로든. 그러나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의 아픔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범죄였다.”

 

민정기씨의 ‘1939’에는 절정의 색채를 뽐내는 인왕산에

‘천황폐하 만세 조선총독부교무국’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캔버스에 음각으로 표현된 문자의 주변은 상처처럼 불그스름하게 표현했다.

일제 만행의 아픔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신관 입구에 들어서면 이름 없이 목숨을 잃는 근로자를 기리는

이태호씨의 '무명 사망 근로자를 위한 비'를 만날 수 있다.

작품 중에는 전두환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에게 수여한

반어적 의미를 담은 '상패' 연작과 짱돌도 전시되어 있다.

 

임옥상씨는 흙에 귀의 한 듯하다.

대지를 닮은 배경 위에 먹선을 힘차게 그은 ‘흙’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구작 '신문-땅굴'은 제3땅굴을 발견하여 보도한 신문을 재료로 만들었다.

신문 콜라주 위에 성에 낀 듯 뿌연 막을 씌워,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 군부독재의 만행을 비꼬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제주 4·3항쟁을 알리는 역사화 연작을 그려온 강요배씨는 

가을 제주 오름에 핀 물매화와 들꽃의 자줏빛을 표현한 ‘노야(老野)’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역사 이념논쟁을 비판한 박불똥씨, 신목(神木)과 자연 풍경을 추상화한 손장섭씨,

휴지와 폐비닐 등을 사진으로 담는 성완경씨, 빈 액자를 내 건 주재환씨 등 볼만한 작품이 많았다.

 

그리고 전시기간 동안 부대행사도 열린다.

오는 11일은 이태호씨 진행으로 '1980의 발언과 2020의 발언' 1차 토론회가 열린다.

25일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을 주제로 2차 토론회가 열린다.

 

이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재불화가 강명희씨 전시가 열리는 '인디프레스'에 프랑스 전 총리였던 도미니크 드 빌팽씨와 그의 일행들이 방문했다,

특별 손님을 위해 기존 전시외에도 보안여관 신관과 3갤러리 등 세 곳으로 전시를 확대했는데,

대작을 보여주기 위해 갑작스럽게 마련된 별도의 전시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준비했다고 한다.




정영신씨와 함께 인사동에서 열리는 류연복씨 전시 뒤풀이를 마다하고 '인디프레스'로 달려갔다.

전시장에는 김정대관장을 비롯하여 최석태, 김정헌, 신학철, 민정기씨 내외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뒤 이어 성완경씨와 담양의 박문종씨가 나타났고, 윤범모, 김정업, 오경환, 장경호, 박불똥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강명희씨는 1972년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로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코르틀리에 시립미술관', '갤러리 드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 액스포' 등지에서 자연을 주제로 한, 시적 작품 세계를 펼쳐 온 열혈작가다.


 

그는 80년대 서울미술관을 운영했던 화가 임세택씨 부인으로, 영화배우 신성일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지금은 파리와 제주에 화실을 두고 바람처럼 떠다니는 여류작가다.



전시된 강명희씨 작품은 세계 여행 중에 접한 사막이나 오지에서 만난 자연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재현했다.

이번에 방문한 도미니크 드 빌팽씨와는 자연과 인간현상에 대한 단상을 담은 시화전을 중국과 한국에서 같이 열기도 했




그의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눈 밭에서 사물들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것 같다.

아니, 안개 속에서 시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화폭 위에 번진 색들의 날숨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기도 했다.


 

북녘 정원이란 뜻의 대형 작품 북원앞에 서 있으니, 그 황홀함에 가슴이 벅찼다.

대자연을 노래한 시어들이 물안개처럼 아롱거리는 장관은, 감동 그 자체였다.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 민정기씨와 술 한 잔하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작가 강명희, 임세택 부부와 도미니크 드 발팽씨 일행들이 밀어 닥쳤다.



도미니크 드 빌팽씨는 주미 프랑스대사, 외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내무부장관을 거쳐

총리에 오른 인물로 문학평론과 정치수상록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주제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한데,

강명희 작가와는 절친한 친구이자 그림과 시로 소통하는 오랜 동료이기도 하다.


 

그날 도미니크 드 빌팽씨의 축하인사에 이어 강명희씨와 서울대 미대 동문이었던 화가 김정헌씨,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관장, 미술평론가 성완경씨가 차례대로 나와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며 전시를 축하했다.


 

노벨상 단골후보 시인 아도니스가 강명희씨 작품에 바친 시다. 

"이 신기한 색채 속을 여행하면서/ 두 눈은 파리의 가을에 취하고/ 두 손은 몽골의 얼굴을 만지는 듯하네/

본래 대자연을 읽어온 나지만/ 화가의 그림은 만물을 꿈속으로부터 불러내네."



강명희 작품전은 216일까지 통의동 인디프레스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8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2019년 ‘한국민예총’ 정기대의원 총회가 열렸다.
난, 대의원이 아니지만, 정영신씨로 부터 총회기록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기총회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갖다달라는 것이다.
내분에 휩싸인 ‘한국민예총“을 걱정하던 차에, 잘 되었다싶었다.
그 날 청계장장에서 골목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총회장에 눌러 앉았다.

 

전임 사무총장과 그를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대부분 나오지 않았다.
박불똥이사장을 비롯하여 유순웅, 이철수, 고승하, 장순향, 강정효, 안종복, 김영호, 박경렬, 이성호,

제정화, 손병휘, 하지숙, 황경하, 이대우, 양기환, 김윤기, 박세라. 장경호씨 등 50여명이 참석했는데,

인천, 광주, 강원지역 대의원들이 빠졌으나, 정족수는 충분히 채웠다.

 

양기환 사무총장의 사회로 박불똥 이사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록을 살펴보니 115쪽이나 되는 방대한 자료인데,

대부분이 전임 사무총장과의 내분에 따른 경과보고로 채워져 있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다 보니, 대의원의 반발도 따랐다.
대략은 알고 있는 사안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두 차례나 휴식시간을 가져가며 진행되었지만, 중요한 사업계획이 빠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의원의 항의도 따랐다.

 

강성원부이사장의 사의가 받아지며, 장순향씨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일부사안은 이사회에 위임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대의원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총회를 끝내고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다들 가고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잘잘못에 대한 과정보다 화합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인사동 ‘풍류사랑’으로 가자며 택시를 잡았지만, 빠져버렸다.

 

이제, 원로들이 나서서 좀 중재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라도 두 쪽, 정치도 두 쪽, 예술단체도 두 쪽, 민예총도 두 쪽,
이제 나누어지는, 두 쪽은 진절머리 난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위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 마련전이 인사동 ‘관훈갤러리’ 전관에서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이 전시에는 신학철화백을 비롯한 민중작가 4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19일에는 민예총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기 몇 일전부터 카메라가 고장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 날은 강민시인과 신학철화백,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못 찍어 안절부절 했다.






전시 디스플레이 등 준비 상황도 기록하지 못했다.

뒤늦게 카메라를 빌려 개막식과 다과회, 그리고 뒤풀이에서 많은 분들을 찍었다.

사진이 너무 많지만,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반가운 사람은 물론, 인사동 꼴통들도 많이 나오셨다.





그 날 만난 분들을 기억나는 대로 거명해 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빠진 분들께 죄송할 뿐이다.






백기환선생을 비롯하여 손장섭, 김정헌, 유홍준, 성완경, 이애주, 임옥상, 정복수, 김태서, 천호석, 이종구, 김천일, 박종관, 이수호, 이부영, 임진택, 유진규, 장순향, 정태춘, 임정희, 조경숙, 박불똥, 유순웅, 최석태, 정영신, 서인형, 이성호, 손병휘, 박세라, 조경연, 박홍순, 김영진, 김진열, 두시영, 심정수, 이명복, 이태호, 장경호, 최병수, 이광군, 최효준, 손기환, 양상용, 정세학, 나종희, 곽대훈, 김명지, 박 철, 김이하, 김도수, 최명철, 이양재, 손병주, 하태웅, 이재민, 정재안, 김 구, 신상철, 이미례, 이 반, 정영철, 김명성, 조준영, 김수길, 이명희. 공윤희, 민영기, 노광래, 임경일, 강선화, 박윤호, 권양수, 이희종, 박영애, 김보영, 최옥경, 김미진, 손영익, 안만욱, 김덕철, 김도수, 황의범, 이경란, 김다솜, 안광택, 이태환, 성기준, 고재열, 강영민, 유인택, 이승곤, 이성희, 양형규, 임영선, 정필주씨 등이다.






이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이어진다.
오전 10시 30분에 문을 열며, 매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한국민예총)의 창립이 어언 30주년을 맞았다.

한국민예총은 예술인들의 공동실천으로 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기여하고,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할 목적으로 19881223일 창립한 예술단체다.

현재는 지역별로 분권화한 형태지만, 가닥을 잡아 갈 본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민예총30년 동안 민주화와 문예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해 왔으나,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다,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오랜 부채를 해결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해 역대 이사장단을 비롯하여

신학철, 이철수, 유순웅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사재를 털어  재기하려 노력해왔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이었다.



   



창립 때부터 인간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 했는지 모르지만,

많은 회원을 대표하는 단체 운영에 그런 사심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무총장 뜻에 따라 이사장이 추대되는 모순이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다는데 있다,

그러니 자신을 내 세워 준 실세더러 누가 감히 메스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사무총장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올 2월부터 화가 박불똥씨가 이사장을 맡으며,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사무총장을 해임하여 새 집행부를 구성했으나 당사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일부 장부까지 움켜 지고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데,

더 웃기는 것은 일부 지역 민예총을 조종하여 내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발 그만하라.

회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뭉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적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

단체를 끌어 가는대는 절대 인간적인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선례를 들어 보겠다.

오래전 민예총산하단체인 민족사진가회’(민사협) 창립에 사진가 김영수씨를 도운 적이 있다.

그 단체가 주저앉게 된 원인이, 바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재에 의한 것이라는데 있다.

초대 이사장으로 작고하신 홍순태선생을 로봇 이사장으로 앉혔으나,

이사회나 회계절차도 형식일 뿐, 모든 게 한 개인의 뜻대로 움직여졌다.



 


창립시 내가 사무국장 직책을 맡았으나 그것도 이름 뿐이었다.

인사동에 사무실을 내려는데, 보증금이 없어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홍순태 이사장 명의의 차용서를 써 주고 빌려와 입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만 바보가 되었다.

뒤늦게 민예총본부 사무실로 이전했으면 보증금은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가까운 친구라고 덮어주고 변명해 주다보니, 결국 단체 자체가 문을 닫도록 만든 것이다.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독재로 좌지우지 했으니, 어느 회원이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유령 회원을 이끌고 가내수공업 식으로 끌어가다, 본인이 죽고 나니 결국 문을 닫더라.



 


문제는 박불똥이사장이 정영신씨를 조직국장으로 내 세워 조직을 다시 복원시키려 했으나,

그 불신의 골이 깊어 대개의 사진가들이 머리를 흔든다는데 있다.

이제 민족이란 자도 단체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조직에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두 화합하여 잘 못된 것을 과감히 개혁하여 우리나라 문화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개혁에 나선 박불똥 이사장을 믿는다.

원칙주의자인 그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사협에 진저리를 내어 오래 동안 방관하고 살았기에, 민예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차 몰랐다,

마침 사무국장을 맡은 서인형씨와 정영신씨가 쥐꼬리만큼의 보수로 일한다기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유순웅 부이사장 도움으로 사무실을 얻어 어렵사리 꾸려가지만 살얼음 판 같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렵기야 하지만, 그러나 희망이 보이더라.

이제 단합하여 협력하는 일만 남았다.



 


일반인들에게 받는 CMS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기금 마련전에도 많은 작가들이 발 벗고 나섰다.

기금마련전도 여지 것 해 왔던 것처럼 무조건 작품을 내 놓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국과 작가와의 계약서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품작가의 뜻에 따라 판매대금 분배와, 끝난 후의 작품반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출품 작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몰랐던, 그 전의 주먹구구식 기금마련전이 아니라

작가와 단체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획전이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마련전에는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김정헌, 민정기, 김진열씨 등 내 노라 하는 작가 4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미 작품이 팔려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지난 19일 오후5시 인사동 관훈갤러리전관에서 개막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

기금 마련전에는 200여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개막 행사는 유순웅 부이사장의 사회로 이성호 경기민예총이사장의 비나리 공연에서

장순향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의 북춤으로 신명을 일으켰다.

박불똥 이사장의 인사와 백기완선생의 축사, 그리고 유홍준씨의 격려사로 이어졌다.



 


이어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의 무언극은 마치 민예총의 아픔을 대변하듯 절절했다.

손병휘 서울민예총이사장의 노래에 이어

임진택 명창의 김구선생 탈출기를 담은 창작 판소리가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수 정태춘씨가 나왔는데,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늙어가는 모습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소리는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관훈갤러리가 생겨난 이후 최고의 관객이 몰렸다.

3층 공연장에 다 들어 올 수 없어, 입구에서 지켜보는 분들도 많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2층에 마련된 조촐한 다과로 환담을 나누었고,

낭만에 마련된 뒤풀이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판화가 김준권씨 100만원, 박종관 한국문예진흥위원장 100만원, 화가 김정헌씨 50만원 등,

독지가들이 줄을 이어 민예총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다음해 16일까지 열리는 민예총기금마련전은 꼭 볼만한 전시다.

유명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민중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신학철씨가 88년에 제작한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으로 민중미술을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구입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금액의 CMS 한 구좌라도 적어주길 바란다.

작은 물방울이 내를 이루듯, 작은 힘이 모여 민예총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참여 작가는 다음과 같다.

 

작고작가) 박생광 김영수 문영태 김구한

 

강연균 강요배 김영진 김재홍 김정헌 김진열 김천일 김현철 나규환 노원희 두시영 민정기

모노리 박불똥 박재동 박흥순 변승훈 손장섭 송 창 성낙중 신학철 심정수 안경진 안창홍

양형규 여태명 이영선 이명복 이원석 이종구 이종희 이철수 이태호 임옥상 장경호 정비파

조문호 주재환 최병수 황재형

 

사진, / 조문호





































































 





한국 진보미술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신 김윤수 초대 한국민예총 이사장께서 지난 29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업씨와 동생 김익수(영남대 명예교수), 김두해(재미음악가)씨가 있다.






지난 1일 오후5시에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갖고,

그 이틀 날 오전 9시30분 발인하여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위원장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맡았고,

집행위원장에 박불똥(민예총이사장), 이종헌, 강일우, 이영욱씨,
장례위원에 백낙청, 백기완, 신학철, 김정헌, 임옥상, 김상철, 윤범모, 채희완, 김민기, 심광현,

강성원, 강요배, 김봉준, 홍성담, 박진화, 고세현씨 등 많은 미술계 인사들로 구성했다.






고인은 경북 영일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영남대 교수를 역임했다.
1980년대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

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등을 거쳐 2003부터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오피시에)을 받았으며,

‘민족미술과 리얼리즘’,‘한국현대회화사’,‘한국미술 100년’ 등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냈다.





선생께서는 70년대부터 반 유신운동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진보적인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이론가로서,
특히 당시 국내 제도권 화단을 주도했던 추상주의 미술 사조에 맞서 현실 참여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국내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으로 정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선생의 부음을 전해들은 날은 통인가게에서 배일동명창의 판소리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심봉사 통곡 대목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는데, 배일동씨의 절절한 소리가 마음을 울렸기도 하지만,

어쩌면 김윤수선생 생각에 울었는지도 모른다.



 


뒤풀이에서 대취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민예총 식구들이 총 출동해 있었다.

빈소는 미망인 김정업 여사가 지켰고,

민예총박불똥 이사장, 서인형 사무국장, 정영신 조직국장, 박세라 총무팀장이 손님을 맞았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니 슬픔도 잠깐이었다.

주재환선생을 비롯하여 유홍준 장례위원장, 박종관 문화예술위원장, 박현수, 심정수, 임정희, 장순향,

박흥순, 곽대원, 김영중씨 등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추모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공교롭게도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와 겹쳤다.

이흥덕, 조신호, 이민종씨 전시 오프닝과 시간이 같아 어느 한 곳을 포기해야 했으나 양다리 걸친 것이다.

전시된 작품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류연복씨가 서둘러야 한단다.

많은 분들을 남겨두고 정복수, 류연복씨와 먼저 나왔는데, 추모식장에 도착하니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마산에서 온 고승하씨, 경주에서 온 정비파씨 내외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장지에 가는 그 다음날 아침엔 약속이 있어 나설 형편이 못되지만,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장에 갔다.

민미협회원들은 가까운 곳에서 잤는지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신학철선생도 계셨다.

선생께서는 집안에 우환이 있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타까웠는데,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더라.







시대의 스승이신 고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민예총' 페북에 올라 온 정영신씨 사진을 스크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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