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전북 완주로 보름 대목장 찍으러 가는 정영신씨를 따라 나섰다.
그 날은 인사동 ‘통인갤러리’에서 김용문씨 막사발 전이 개막되는 날이지만,
그 보다 문 닫는 삼례 ‘세계막사발미술관’이 더 궁금해서다.






삼례 역사를 개조하여 개관한 ‘세계막사발미술관’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문전에 흩어져 있는 우편물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있고,
건물 입구에 세워진 막사발 조형물과 도공을 기다리는 장작가마만 반겼다.






주변에 있는 주민에게 '세계막사발미술관'이 문 닫게 된 이유를 물어 보았다.
“지역 텃세에 쫓겨 난거지요. 단체장이 바뀌면 이전 업적을 뒤집는 것도 문제고요.”
그렇다면, 맞은편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은 문제가 없냐고 물었더니,
‘막사발은 미운털이 박혔던지, 아니면 그 자리를 탐내는 모함이 있었던 게 아니겠냐“는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우리문화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막사발박물관'을 유치한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문제는 관청의 담당부서에 전문가가 없다는 점과 좀 알만하면 다른 부서로 옮기는 조직의 현실이었다. 

다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나선 김에 '삼례문화예술촌'도 둘러보았다.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더러 있었는데, 특히 농협창고를 개조한 미술관이 인상적이었다.
삼례양곡창고는 일본 놈들이 양곡을 수탈해 간 대표적 저장고가 아니던가.
삼레역 철도를 이용하여 군산으로 양곡을 실어 나르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래된 건물을 허물어 무조건 토목공사부터 벌여 뒷돈이나 챙기는 현실에,
역사적인 장소를 보존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모미술관’을 비롯하여 ‘김상림목공소’, ‘책공방’ 등 여러 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며 삼례장에도 한 번 들려 보았더니, 몇 년 전에 본 장터의 모습은 오 간데 없었다.
오일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는데, 신축된 상가 건물들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난, 오일장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지만, 낙심한 정영신씨의 표정이 안 서러웠다.






지난 토요일엔 김용문씨 막사발 전시가 열리는 인사동 ‘통인갤러리’에 들렸는데,
마침 전시 작가인 김용문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터키에서 만든 막사발을 서울로 옮겨 왔다는데, 한 점 밖에 파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문 막사발 특유의 투박한 질감이나 다채로운 빛깔이 매혹적이었다.





한 점에 15만원에서 최고 30만원까지 구분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면 싼 편이다.
한 평생 막사발에 바친 도공의 작품을 어디에서 그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겠는가?






틈틈이 그려 온 묵화도 걸렸는데. 도공의 그림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긴 세월 익혀 온 옹기의 지두문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도공에서 화가로 전업하지 않을가 걱정되더라.

돈 안 되는 막사발보다는 그림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폐관 직전에 있는 삼례 ‘세계막사발미술관’을 둘러 본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했는데,
어느 지역에서 옮겨가겠다는 제안이 들어 와 협의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들었다.



정영신사진



부디 곡마단처럼 떠도는 막사발박물관이 아니라,
영구히 못 박을 수 있는 막사발 박물관으로 자리 잡길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세계 막사발 미출관' 관장인 도예가 김용문씨



세계막사발 미술관터키로 옮겨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완주군의 폐관 통보로 오갈 때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지 한 참인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측에서 옮겨 가겠다고 한단다.

 

세계막사발미술관은 폐역이 된 삼례역사를 보수하여 2011년 개관되었다.

괴산에 있던 세계막사발미술관을 어렵사리 옮겨 운영해 왔는데,

완주군에서 느닷없는 폐관을 결정한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밷는 정형적인 관료의 횡포다.

 

지자체에서 예술가들을 이용해 먹고, 내 팽개치는 짓이 한 두번이 아니다.

청도군에서 세운 철가방극장과 화천군의 감성테마문학공원이 대표적이다.

성공적으로 자리 잡도록 한 전유성씨는 쫓겨났고, 이외수씨는 쫓겨날 처지에 있다.

이건 해도 너무하다. 예술가들이 무슨 공무원들의 밥인가?

 

도예가 김용문씨는 오로지 막사발을 고집해 온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반 평생을 막사발에 전념해 왔기에,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상투를 튼 김용문이 연상될 정도다.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전통 옹기에 빠져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고, 막사발에 승부를 건지는 30여년이 되었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세계 막사발 미술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36년 동안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 국내외의 개인전도 45회나 개최했다.

지금은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터키와 삼례를 오간지 9년째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에 한정되지 않고, 퍼포먼스와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했다.

그동안 막사발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중국 산동성과 터키 앙카라를 떠돌며 막사발 세계화에 온 힘을 쏟아왔다.

그런 노력의 성과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막사발이 일본에서 최고의 찻 사발로 떠받들어 진지가 400여년이 넘었다.

옛날 한국적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달항아리가 관요에서 만들어진 반면

막사발은 지방의 민간가마에서 구워졌기에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대개 막사발을 천한 그릇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아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는데,

국어사전조차 막사발을 품질이 나쁜 그릇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그러한 서러움을 무릅쓰며 투박한 질감의 우리 막사발에 목을 매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폐관 통보에 어찌할 바 몰라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측에서 세계막사발박물관을 건립하여 옮겨 가겠다지만,

김용문씨의 생각은 달랐다. 막사발 본가는  우리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사발이 우리민족의 유산이지 터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 역시, ‘세계막사발미술관을 어떻게 해서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지자체에서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맥을 이을 해결 방안은 없는지, 많은 분들의 관심과 조언을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산과 나무의 단상‘展 오는 13일까지 ‘나무화랑’에서 열려... 
2018년 02월 05일 (월) 14:54:18 조문호 사진가 press@sctoday.co.kr  


인사동에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주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 도예가 김용문씨, (사진=조문호)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한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33x33cm 도판2 2017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온 작가로,

지금은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67x67cm 화선지3 2017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88x58,5cm 화선지7 2017

67x67cm 화선지1  2017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이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도록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88x58,5cm 화선지4 2017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 전시는 2월 13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도예가 김용문씨의 도판화 전이 오는 13일까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 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가진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왔는데,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최근에는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으로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게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었다.

작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조명환, 김진홍, 안창홍, 조신호, 김억, 장경호, 손기환, 김구, 채현국, 이인섭,

조해인, 이명희. 공윤희, 전인경, 편근희, 이회종, 김수길, 유진오, 임경일씨등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유목민’에서 가진 뒤풀이에서는 다들 얼마나 퍼 마셨는지, 술집에 술이 부족할 정도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모자를 벗어주며 술값 걷어 라는 명령에 자존심하나로 버티는 장경호씨가 졸지에 모자 돌리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걷었으나 고작 20만원 남짓이라는데, 모자라는 50만원은 어쩌지?

여지 것 술값이 정산 되지 않고 있다는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 막사발로 통하는 도예가 김용문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거다.
그 날은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는데,
술 한 잔 하려면 차를 돌려주어야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박도선생의 ‘미군정3년사’작가와의 만남‘ 뒤풀이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술은 미시지 못하더라도 얼굴만 볼 작정으로
종로경찰서 옆에 있는 관훈주차장에 밀어넣고 ‘유목민’에 들렸다.






‘유목민’에는 사기꾼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분청하는 변승훈씨와 이형석씨도 있었다.
안쪽에는 화가 정영철씨와 성애씨도 자리를 잡았더라.


인사동에서 김용문씨를 처음 만난 지가 30년도 더 되었으나,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나며 보기 힘들어졌는데,
페북에서 근황을 지켜보았던 터라, 겉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트레이드마크처럼 말아 올린 상투가 막사발 같은, 그런 친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변승훈씨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일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차 때문에 술 먹지 않는 일이다. 
한 잔만 한 잔만 하다 발동이 걸려 '에라~ 모르겠다. 퍼 마신 것이다.
김용문씨에게 터키에서 전시한 수묵드로잉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인사동에서도 그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이달 31일부터 보름동안 ‘나무화랑’에서 한다는 데, 술 마실 건수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은바로, 삼례역의 막사발미술관을 비우라는
통보가 왔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외국에 체류하는 날이 많아 자주 비워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 아쉬웠다, 
그동안 세계막사발 축제로 쌓아놓은 탑을
어떻게 그리 쉽게 무너트릴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최소한 작가와 협의하여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부터 협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변승훈씨가 자기 후배한테 찾아가 이빨하라며 성화다. 
그동안 대신 부담할테니 이빨 하라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싫었다.
남에게 부담 주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오가는 게 번거로워 싫었다,
이번에도 변승훈씨가 해주겠다며 망가진 이빨을 핸드폰으로 찍어
후배에게 견적을 내보라며 부산을 떨어댔다.
나이 들면 하나 둘 망가지는 게 이치고,
그렇게 사라지는 게 인생인데, 더 이상 무슨 소용이랴!






강행복, 손기환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등장해 술집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취하면 취할수록 차 걱정에 술 맛이 없었다.
어차피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으나, 점차 올라가는 주차비가 걱정되어서다.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 뿐이라,
대리운전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나 또래의 늙은이가 왔다.






그런데,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니 차단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주차관리인은 물론 현금 넣는 기계도 없었다.
비켜달라는 뒷차의 경적에 빼고 박기를 반복하였으나, 나갈 방법이 없었다.
30여분을 씨름하다 뒤늦게 알았는데, 카드만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란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차도 끌고 다닐 수 없는 요상한 세상에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인사동이 아니라 외국에 온 냥 낯설었다.






하는 수 없어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불러 해결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목적지인 녹번동으로 가자고 했더니, 수동에 익숙하지 않은지 시동 꺼트리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 차가 탱크 달리는 소리를 냈다.
기사가 본래부터 소리가 심하냐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속으로 마후라가 터졌나 걱정되기도 했으나, 뭔가 조작을 잘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간신히 도착해 차를 점검해 보았더니, 여지 것 사륜구동으로 달린 것이다.





“에라이! 이 아저씨야~”
그 실력으로 대리운전 하다니, 참 사는 게, 다 힘든 것 같았다.

족쇄 같은 차 때문에 시달리는 일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공도사 형편에, 주제 파악 하라는 야유가 뒤통수를 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도예가 김용문씨의 토템과 막사발전이 지난 7월15일 오후5시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세계막사발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는 현재 터키의 앙카라하제테페대학교의 도예과 초빙교수로 있다.

맛사발은 조선도공의 오랜 숙련 끝에 이루어 낸  밥그릇, 찻잔, 막걸리 잔으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릇이다.

작가는 작품이 진열대에서 장식화 되는 것보다 실 생활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작품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한다.

이번 전시작들은 한국의 토착신앙을 보여주는 토템 조형물적 특징과 카파도키아의 자연과 함께 조화되는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는 7월21일까지 계속된다.

개막식에는 작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이계선 통인관장, 철학자 채현국선생, 서양화가 정순겸씨, 연출가 고상준씨,

소설가 구중관씨, 유카리 노광래관장, 오덕훈씨 등이 참석하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김용문씨 막사발전을 다시 찾았다.
첫 날은 사진 찍느라 작품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던 탓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임헌갑, 고 헌, 노광래, 편근희씨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었고,
김용문씨는 ‘통인가게’의 이계선 대표와 작품을 고르고 있었다.
엄선한 작품들을 도자전문갤러리인 '통인가게'에서 재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약 100여점을 골라 놓고 이대표가 말했다.

“김용문씨 작품이 예전에는 날아갈 듯 거칠었는데, 지금은 새색시처럼 얌전하네요.”

새겨들을 만한 의미 있는 말이었다.

작품성보다는 결국 구입하는 주부들의 취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같았다.

전시 뒤풀이에서 했던 김용문씨의 말이 생각났다.
"막사발이라니까 사람들이 천한 그릇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고 투덜댔다.
국어사전에도 막사발을 “품질이 나쁜 그릇”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것 부터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막사발이 일본에서 최고의 찻사발로 떠받들어 진지가 400여년이 넘었다.
옛날 한국적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달항아리가 관요에서 만들어졌다면

막사발은 지방의 민간가마에서 구웠다는 점이 다른데, 오히려 서민적이라 더 좋지 않은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막말하는지 모르겠으나, 막사발은 소박함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지금 한 말처럼 막자에 대한 의미도 한 번 새겨보자. 막말은 규제없이 자유롭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귀하게 모셔지는 그릇보다 편하게 막 쓸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
요즘 뜨는 막춤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순서에 따른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추니 더 창의적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울이었다.
그 날 술김에 막SS까지 진전되었으나 생략하자.

막사발 전시장에서 나와 모두들 ‘부산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늦게 장경호씨와 전활철씨도 등장했으나, 그 자리에서의 스타는 단연 고 헌씨였다.

"유~ 엔 나씽 모로 하운 독"
그 특유의 한 구절 노래와 엉덩이를 돌려대는 디스코 춤이 끊이질 않았다.
쌍팔년도 시절의 누나들과 놀았던 이야기에 배꼽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명언이었다.
“비밀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김용문 막사발전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지난 개막식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나 꼭 보여야 할 분들이 여럿 빠져 아쉬웠다.

그러나 봄바람 살랑거리는 이 꽃 시절에, 한꺼번에 만나 뵙기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민 영선생은 김명성씨를 위한 성금을 내놓으며 "큰 보탬이 되지 못해 어쩌냐"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셨고,

무세중선생은 모두가 쉽게 동참하도록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며, 스스로 만원을 내기도 하셨다.

만나는 분마다 김명성씨 걱정뿐이었는데, 하기야 김명성씨만 있었더라면 막사발 잔치도 더 풍성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물 만나듯, 반가운 분만 만나면 인사도 하기 전에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릇이 있어 

내심 싸가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좀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그래도 파파라치는 아니잖아...

 

오프닝에 차린 음식들은 맛깔스럽기는 한데 전시된 사발 개수에 비해 푸짐하지 않았다.

'노마드'에 50인분의 음식을 예약해 두었으나, 미처 알지 못한 분들은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대신 전시장에서 보지 못한 분들을 만나 늦은 시간까지 부어라 마시어라 즐길 수 있었는데,

결국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끙끙대야 했다. 

 

좌우지간 막사발 김두령 덕에 즐거웠수다.

 



 

 

 

 

 

 

 

 

 

 

 

 

 

 

 

 

 

 

 

 

 

 

 

 

 

 

 

 

 

 

 

 

 

 

 

 

+ Recent posts